<실종자> 프란츠 카프카
250105.
오늘날 영혼이라는 것들은 너무나 간단명료한 과정에 의하여 입체성을 잃고 탁본되고 있다.
p25.
모두가 화부에게 얼른, 분명하게, 자세히 말해보라고 재촉했지만 화부는 뭐 하고 있는지? 화부는 진땀을 흘려가며 말했고, 손이 떨려 창틀 위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지도 못했다. 슈발에 대한 불만 사항이 화부의 머릿속 사방에서 밀려들었고 자신이 보기에는 그중 한 가지만으로도 슈발이란 작자를 완전히 매장하기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선장에게 제시할 수 있는 건 모든 게 뒤죽박죽 섞인 서글픈 혼란의 소용돌이뿐.
p26.
더 간단하게 말씀드려야 해요. 더 명확하게 설명해보세요. 지금처럼 말해선 선장님이 당신 말을 인정하기 힘들어요. 당신이 이름만 대면 선장님이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알 만큼 기관사와 사환의 이름이나 세례명까지 전부 아실까요? 불만 사항을 머릿속에 정해보고 난 뒤, 제일 중요한 것을 먼저 말하고, 나머지는 중요한 순서대로 얘기하세요. 그러면 대부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저한테 말씀하실 땐 계속 똑 부러지게 설명하셨잖아요.
(중략)
그래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지? 화부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곧바로 말을 멈추긴 했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카를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모욕적으로 명예가 실추되었고 눈앞에 닥친 위기 상황에 가려진 끔찍한 기억 때문에 쏟아진 눈물이었다. 이제 화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이 없는 화부 앞에서 카를도 침묵을 지키면서 상황 판단을 해봤다. 갑자기 화부의 말투를 어떻게 바꾸겠는가. 카를이 보기에 화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모두 쏟아냈지만 조금도 인정받지 못했고, 달리 표현하면 화부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건데, 그렇다고 이제 와 사람들에게 남은 얘기를 전부 경청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때 화부 편을 들어주는 유일한 지지자인 카를이 와서 화부에게 득이 되는 조언이라도 주려나 했더니 오히려 다 끝났다는 걸 보여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p31.
청중들은 이 멋진 발언에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슈발이 처음으로 떠올린 사건 관련 단어가 왜 ‘부정한’이었을까? 국적이 다른 사람을 차별해서가 아니라 정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문제가 여기서 제기되었다고? 주방 직원이 사무실로 가는 화부를 만났다고 했는데, 슈발이 바로 눈치챘다고? 그렇게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건 죄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서둘러 증인들까지 데려와 그 사람들을 편견 없고 어디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 건가? 이건 사기다. 틀림없는 사기다. 그런데도 여기 있는 신사들은 묵묵히 들어주고 올바른 행동이라 인정해준다고? 주방 직원이 알려준 시간부터 여기 도착할 때까지 꽤 긴 시간이 흘렀는데 그건 왜지? 화부가 사람들을 지치게 해서 그들이 점차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것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었을 것이다. 슈발이 가장 두려워한 게 바로 그들의 확실한 판단력일 테니. 슈발은 오래전부터 문밖에 서서 기다리다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던져 화부는 이제 끝장이라고 판단이 되는 그 순간 노크를 한 건 아닐까?
p42.
“선장님 판단대로 될 테지. 화부 얘기는 이제 지겹고 진절머리가 난다. 여기 계신 분들은 누구나 내 말에 동의할 거야.”
“정의에 관한 일이라면 그런 건 중요치 않아요.”
p43.
“이 사태를 오해하지 마.”
상원의원이 카를에게 말했다.
“정의에 관한 문제같이 보이지만 동시에 규율의 문제이기도 하단다. 둘 다, 특히 후자는 선장님의 재량에 달려 있는 거야.”
“그렇겠지요.”
(중략)
‘모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를 겨우 찾은 외삼촌을 인제 와서 버릴 수도 없지. 선장은 정중하긴 하지만 그게 다야. 규율 문제에선 지금의 정중한 태도는 사라질걸. 외삼촌은 선장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꿰뚫고 말씀하셨던 거야. 슈발과는 말하기도 싫어. 그 사람한테 악수를 건넨 것도 후회막심이야. 다른 사람들도 다 쭉정이 같은 인간들이고.’
p44.
“자신을 지켜야 해요. ‘예, 아니오’를 확실하게 말해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진실이 어떤 건지 전혀 몰라요. 제 말을 따르겠다고 약속하세요.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젠 제가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카를은 화부의 손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렸다.
p47.
창문 세 군데 모두 슈발의 증인들로 꽉 차 반갑게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외삼촌까지도 감사 인사를 했고 선원 한 명은 계속 일정한 속도로 노를 저으면서 손 키스를 보내는 재주를 보여줬다. 화부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외삼촌과 무릎이 닿을 뻔하자 카를은 외삼촌을 자세히 바라봤다. 과연 이 사람이 화부를 대신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외삼촌도 카를의 시선을 피해 멀리 파도를 바라봤다.
p53.
열린 창문 앞에서 소음으로 가득한 대기를 향해 고국의 군가를 피아노로 연주할 때면 그 소리가 묘하게 들렸다. 병사들이 저녁때 막사 창가에 누워 어둑한 연병장을 보며 창문에서 창문으로 돌아가며 부르던 노래였다. 그런데 군가를 연주한 후 거리를 내다보면 거리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회로에 작용하는 전체적인 힘을 알지 못하면 그 자체로 멈출 수도 없는 거대한 순환의 작은 조각일 뿐.
p157.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씩 근무하는 게 저렇게 어린 소년에겐 좀 무리죠.”
승강기가 올라가는 동안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미국에선 대체로 이렇게 해요. 아까 그 소년도 겨우 반년 전에 부모와 이리로 왔어요. 이탈리아인이에요. 이제 이 일을 더는 해내지 못할 것 같아요. 벌써 얼굴이 해쓱해지고, 근무 중에도 꾸벅꾸벅 졸아요. 원래는 일에 의욕이 넘쳤던 아이였거든요. 그래도 앞으로 여기서나 미국의 다른 곳 어디서라도 반년 정도 일하고 나면 어떤 일이라도 손쉽게 견뎌낼 수 있게 되고 5년 뒤엔 골격이 튼튼하고 강인한 남자가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런 예는 몇 시간이라도 얘기해줄 수 있어요. 당신이 그렇다는 생각은 안 해요. 당신은 강건한 젊은이니까요. 열일곱 살이죠?”
p180.
테레제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는 시간이 꽤 지났다. 평소 습관과 달리 그날은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비계기둥 하나하나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을 묘사할 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대목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테레제는 그때 일들을 사소한 것까지 모두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고 반쯤 완성된 1층 그 위에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고 그 이야기를 카를에게 명확하게 전달할 수 없어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 이야기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말을 멈추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p181.
스무 살이 넘으면 엘리베이터 보이로 일하지 못하는데, 동료들은 현재 상황에 만족해 지금 자리가 임시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장래에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카를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랄 때가 많았다. 카를처럼 공부하는 방법도 하나의 예가 될 텐데 그들은 너덜너덜해진 탐정소설을 침대에서 침대로 돌려가며 읽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었다.
p232.
“물론 이 일은 호텔에서 가장 멍청한 일이야. 한 시간만 잘 들으면 흔히 받는 질문을 거의 다 파악할 수 있으니까. 나머지 문의에는 대답할 필요도 없고. 네가 건방지고 무례하지만 않았어도, 거짓말하거나 방탕하고 폭음하고 훔치는 짓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너를 저런 창구에 배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저런 자리에는 머리가 둔한 놈만 채용할 수 있거든.”
자신을 향한 모욕은 다 흘려들었지만 말단 포터들의 충실하고 고된 노동이 인정받기는커녕 조롱당하자 카를은 격분했다. 더욱이 수석 포터는 감히 그럴 엄두도 못 내겠지만 혹여 그런 창구에 앉으면 모든 질문자의 웃음거리가 되어 몇 분도 안 돼 물러나야 했을 그런 인물에게 조롱을 당하다니 말이다.
(중략)
수석 포터가 말하고 나서 카를의 두 팔을 얼마나 꽉 쥐었는지 카를은 팔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포터는 그 상태로 포터 사무실 반대쪽 끝으로 카를을 끌고 갔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수석 포터의 폭력을 못 봤단 말인가? 아니 봤다면 이런 폭력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저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유리창 두드리는 사람조차 한 명도 없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다 보고 있으며 수석 포터가 카를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p282.
“얼마 전에 옆집에 그릇을 돌려주러 갔어. 그 집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한테 요리를 해주거든. 그 집 대학생이 나한테 그러더라. ‘로빈슨, 아프지 않아요?’라고 말이야. 난 사람들과 말하는 게 금지돼 있어서 그냥 그릇만 놓고 오려 했어. 그런데 그 대학생이 다가와서 ‘잘 들어봐요, 절대 당신 몸을 혹사하지 말아요. 당신은 환자예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럼 부탁인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어. 그러니까 대학생이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라고 말하곤 가버리더라고. 거기 식탁에 있던 사람들이 다 웃더군. 여긴 온통 적들 천지야. 난 그냥 와버렸어.”
“넌 그러니까 너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 말은 믿고, 너한테 좋은 의도로 대하는 사람들 말은 믿지 않잖아.”
“그래도 내 상태가 어떤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로빈슨이 벌컥 화를 내더니 곧 다시 울었다.
“넌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네가 필요한 게 뭔지 몰라. 여기서 들라마르슈의 하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제대로 된 일을 찾아야 해. 네 이야기도 듣고 내가 직접 본 걸로 판단해보면, 이건 노예지 고용된 일자리가 아니야. 그런 건 누구라도 견뎌내기 힘들어. 난 네 말을 믿어. 그런데 너는 들라마르슈의 친구라고 생각해서 그를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건 틀렸어. 네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 들라마르슈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도 그 친구에 대해 어떤 의무도 질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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