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증명> 이하진
250105.
2024년의 우리에게 대한민국 소설가의 입을 빌려 던져진 거대한 질문이 있다.
죽은 것들이 산 자를, 과거가 현재를 바꿀 수 있는가?
이 짧고 가벼운 멜로 소설은 거대하게 굴러오는 역사와 물질의 파랑 앞에 서서 개개인이 어떻게 과거에 의하여, 죽은 것들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지, 또한 그렇게 지금이라는 시간 위에 가파르게 서서 구원받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달린 죽어가고 절멸한 것들에 대한 예의는 어떠한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시적이고 두려움 없는 해답을 제안한다.
밀물처럼 불어넘치는 이 시대에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을 것처럼도 보이는 복잡다단한 세계는 행동하지 않을 것을, 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을 것을, 눈앞에 있는 명약관화하고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것들 앞으로만 나아가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일견 겹겹이 겹쳐져 그 어느 곳이든 도피처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세계의 얇은 피막들은 모두 투명하게 젖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지금, 여기에 서서, 모든 미래가 다 불어닥친 것만 같은 이 세상에 서서 돌아서서 너희의 단계에서 우리의 단계로, 우리의 단계에서 나의 단계로 거듭 퇴보하는 이 사회에서.
길 위에 서서 노래하고 춤추며 분절과 모독에 맞서는 시민들의 등불이 밤마다 길을 밝히는 이 사회에서.
폐에 피어난 병을 다 잘라내지 못하고 있는 내가 아직 쓸 수 있는 글을, 아직 발음할 수 있는 언어들을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서는 여기, 지금, 이 현재에 있다.
p93.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오늘은 항상 내일보다 빨랐다.
p106.
이 모든 일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작은 오차로부터 발생했다는 걸, 본부장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본부장은 그날 백영을 탓하지 않았다. 탓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회피하는 일이라면서.
“더 나빠지지만 말자, 우리. 응?”
본부장은 백영과 달랐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나아질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더 나빠지기만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백영이 이미 떠난 양서아에게 집착했던 것처럼 다른 곳을 보지도 않았고, 봐야만 하는 것을 똑바로 직시하는 사람이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에 끝내 굴하지 않는 사람.
p135.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은 그 자체로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미숙하게 빚어진 우연의 순간이 너무나 빛나 보였다. 무언가를 굳이 덧붙이거나 빼지 않아도 그대로 완성된 것만 같았다.
아아, 왜 세상은 존재 자체로 찬란한지. 왜 그토록 자책하던 과거는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빛나는지.
p141.
포기하라고 백영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당신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그 결과가 예정된 결말의 증명이라면 내게 너무나 잔인한 처사가 아닐까.
아니, 그렇다면 나는 그 악의 없는 쓰디쓴 증명까지도 받아 내어 삼킬 것이다. 당신의 족적 하나하나까지도 두 눈에 담아 기억할 것이다.
p143.
과거는 과거로서 충분히 가치 있었고 그런 과거가 이루어 만든 현재는 최선이 될 수 없었던 선택들이 모여 만든 최선의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미래의 과거는 현재이니, 마찬가지로 최선일 수 없었던 지금이 모여 최선의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최악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여 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차선까지는 자아낼 수 있는 걸까?
p172.
마음이 현실의 인과에 개입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을 갖는 일이 무의미할 거라 생각하진 않게 되었어요.
무의미하다면 너무 잔인할 것 같아요. 되돌릴 수 없는 것에 한 줌 추모를 얹는 게 부질없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하릴없이 바스러지고 말겠죠.
그러니 우리는 이토록 차가운 물질세계에서 비물질적인 것들의 가치를 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p175.
그리고 불변할 것 같던 미래는 바뀌었죠.
과거는 그대로였지만요.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과거가 되어 불변하는 역사로써 세계에 안정성을 만들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겠죠.
역동하는 세상이 안정될 거라 생각하진 않아요. 굴곡은 당연한 거니까요.
중요한 건 그 굴곡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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