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작조 SF 합작] 기억 로켓

기억과 기록, 미련에 대하여

잠뜰의 첫 기억은 병실 비슷한 방에서 깨어났던 일이다. 희고 정갈한 방 안의 풍경에 어울리게 아주 조용했던 그곳에서, 잠뜰은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눈 밑으로는 다크서클이 짙었고, 피부는 푸석푸석했으며 엉망으로 헝클어진 고동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어, 안↗녕?"

남자가 처음으로 건넨 인사는 제 머리 모양만큼이나 엉망이었다. 기쁨인지 당황인지 눈동자가 갈 길을 잃었으며, 말은 절었던 데다 삑사리까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잠뜰은 피식 웃었다. 첫인사로는 최고의 인사였다.

"야, 웃지 마. 어떻게 인사해야 될지 모르겠단 말이야."

"크흡, 죄송합니다. … 근데 누구신데요?"

"그래, 이래서."

"……?"

그래서 누구시냐고요?

/기억 로켓

지구는 외계인에게 공격받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온 행성을 초토화하는 전쟁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려와 사람들의 기억을 빼앗아 갔다. 그게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원으로 쓰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는데, 아무튼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남자는 잠뜰 또한 그 희생자라고 말했다. 외계인에게 당해 기억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자신이 발견하고 데려와 치료했다고. 잠뜰은 제 이름마저도 남자가 알려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자기 이름도 모르는 상태였다.) 스스로 공룡이라 소개한 남자는 자신이 잠뜰의 하나뿐인 친구였다고 했다.

"저희가 친구라고요?"

"어. 왜? 내가 너한테 너무 분에 넘쳐?"

"나 되게 착했구나…."

"이 자식이?"

공룡이 이를 꽉 깨물었지만 기분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진짜 친했나 보네. 잠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팔다리를 이곳저곳 살폈다. 눈에 띄는 상처 없이 깨끗했다.

"야, 내가 너랑 친구 해준 거야. 너 내가 얼마나 대단한─"

"고마워요."

"… 응?"

"고맙다고요. 치료해 줬다면서요."

"……."

잠뜰의 인사에 공룡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조금 떨떠름해 보이기도 했다.

"뭐예요? 사람이 고맙다고 해도."

"어? 아, 아니. 그냥 좀…."

"그냥 좀?"

"잠뜰이 이렇게 인사성 바른 놈이 아닌데…. 왜 내숭 떨지?"

"아이씨."

기껏 고맙다고 인사해 줬더니 돌아오는 공격에 잠뜰이 얼굴을 확 구겼다.

"저 다 나은 거예요?"

"뭐 그치? 근데 너 오래 누워 있었어서…."

쿠당탕!

병상에서 내려오려던 잠뜰이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박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쪽팔렸다.

"사람 말을, 큽, 끝까지 들어봐."

"웃겨요?"

"아니? 하나도… 풉, 크흑! 갓 태어난 송아지 같아!"

"하 씨…."

잠뜰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파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그래도 가만히 서 있는 정도는 할 만한 것 같았다.

"너 걸을 수 있겠어?"

그래, 그게 문제지.

안 될 것 같은데, 인정하자니 뭔가 자존심 상하고. 잠뜰이 미간만 찌푸리고 있으니 공룡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잠뜰이, 갓난아기도 아니고 걸음마 연습부터 다시 하게 생겼네~"

"웃기냐고."

"ㅋㅋ잡아줄게."

잠뜰은 공룡과 마주 보고 팔을 붙든 채로 걷는 것부터 다시 연습했다. 한 발 딛고, 그다음 한 발, 다시 반대 발. 잠뜰은 다행히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멀쩡히 걸을 수 있게 됐다.

"음? 저 잘 걷는데요?"

"그러게. 배우는 게 빠르네?"

"하, 제가 좀."

"뭐래? 말이 오래란 거지, 네가 뭐 몇 년씩 누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잘난 척 좀 하려니 곧장 찬물부터 부어 버리는 공룡에 잠뜰이 입을 삐죽였다. 덮어 놓고 칭찬만 하라고요. 아니, 내가 틀린 말 했냐?

"길어봤자 며칠이었거든?"

"며칠인데요?"

"닷새."

"닷새…."

닷새 정도면 긴 거 아냐? 혼자 뭔가 생각하던 잠뜰은 갑작스런 의문에 고개를 휙 들어 공룡을 쳐다봤다. 닷새? 친구라고 해도, 병원 냅두고 집에서 닷새나 돌봐?

"왜 병원으로 안 갔어요?"

"너 병원 못 가. 사망신고 돼 있음."

"네??"

방금 눈을 뜬 잠뜰로서는 받아들이기 버거운 폭탄 발언이었다. 사망신고를? 왜? 이번 일로? 그런 잠뜰의 생각을 예상했는지, 공룡이 좀 더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잘 설명이 되지는 않았다.

"그, 몇 년 전에, 죽어야 되는 거 좀 불법적으로 살려둔 거라. 걸리면 큰일 나."

"아니, 저같이 선량한 시민이 어쩌다 그런…."

"기억만 찾으면 알게 될 거야. 오늘 인터넷으로 주문해 줄게. 배송 올 때까지 며칠만 기다려."

?

"기억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요?"

"지구 단위로 공격받고 있다니까? 너처럼 기억 뺏긴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냐? 당연히 복구하는 기술도 다~ 개발이 돼 있지."

쪼오끔 비싸긴 한데… 잠뜰 깨어난 기념으로 내가 쏜다!

공룡이 뭔가 베푼다는 것 같았지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잠뜰은 대충 저 사람이 생색을 내는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기억을 뭐 어떻게 복구하겠다는 건지, 그런 것보다는 자신처럼 순수하고 선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 어쩌다 불법적인 루트로 살아남아 사망신고까지 하고 살게 되었는지가 잠뜰은 더 궁금했다.

'그래도 며칠만 기다리면 된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건 적성에 영 안 맞았다.

기억이 없는 채의 생활도 별 문제는 없었다. 집 도어락 비밀번호를 모를 테니까, 그동안 공룡의 집에라도 얹혀살아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원래 얹혀살고 있었다고 했다.

"야, 너 사망신고 돼 있다니까? 네 명의로 집이 있겠냐?"

"아~"

잠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맞는 말이군.

"그럼 아까 그 텅 빈 방이 제 방이에요?"

"네 방은 2층이고, 거긴 그냥 비는 방."

"와, 부자다. 저희 친하게 지낼까요?"

"원래 친구였다고. 멍청아."

친구 잘 둬서 편하게 사네. 그런 삶이 잠뜰이 추구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괜찮은 생활임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2층에서 찾은 잠뜰의 방은 잠뜰의 취향대로 꾸며져 있었던 데다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깔끔히 정돈돼 있었다. 얼마나 깔끔한지, 고작 며칠 비웠다고 생활감이 느껴지지도 않는 수준이었다.

"엄청 깨끗하네…."

"로봇 청소기를 진짜 좋은 걸 쓰거든. 청소뿐 아니라 정리 정돈까지 다 하니까."

"로봇 청소기가요?"

"내가 직접 개조했지. 슬기 1호야. 나중에 만나면 인사해."

"흠…."

슬기가 누구길래 내가 이렇게 열이 받지? 고개를 갸웃거려 봐도 알 수는 없었다.

"방금 일어났으니까 좀 쉴래? 아님 집 구경시켜 줄까?"

"어, 구경할래요."

잠뜰은 공룡을 따라 자신들이 살고 있다는 집을 둘러봤다. 꽤 넓은 복층 아파트였는데, 잠뜰이 거의 혼자 썼다는 2층과 달리 1층은 생활감이 좀 느껴졌다. 저긴 작업실, 저긴 공룡의 방, 오… 거실 창문 크다.

부엌에는 팔다리 달린 하얀색 거대 알약 같은 모양의 로봇도 있었다. 사람보다 덩치가 좀 작았는데 단순하게 생겨서 귀여운 로봇이었다. 좀 펭귄 같기도 하고. 잠뜰은 로봇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표정을 띄우는 용도로 보이는 스크린에 웃는 얼굴이 떴다.

"얘가 그 슬기 1호예요?"

"아니, 걘 슬기 2호. 요리 담당인데 넌 어차피 밥 못먹으니까 무시해도 돼."

공룡은 여상한 투로 말했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발언에 잠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요?"

"무시해도 된다고."

"아니 그거 말고."

"아~ 너 밥 못 먹는다고?"

"뭐 때문에요?"

"옛날에 죽어야 되는 거 살렸다고 했잖아. 그때 그… 시술을 좀 받아서. 장기는 거의 다 기계로 대체해서 음식은 못 먹어."

"헐…."

공룡이 냉장고를 열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원통형 통을 꺼냈다. 그리고 잠뜰에게 이것 보라는 듯이 통을 흔들어 보였다. 안에 든 하늘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대신에 넌 이걸 먹었지."

"배터리…? 아니, 액체네요?"

"영양 앰플이야. 파란색은 소다맛, 분홍색은 딸기맛, 초록색은 레몬맛."

저건 소다 맛인 모양이군…. 근데 저렇게만 먹고 살아도 건강에 지장이 없나? 뭐 지장 없으니까 몇 년 동안 계속 그렇게 살았겠지. 잠뜰은 대충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뜰이 눈을 뜬 지도 며칠, 슬슬 집 안에는 익숙해졌다 싶었던 잠뜰은 바깥도 좀 익혀둘까 하는 생각에 공룡에게 던지듯이 물어봤다.

"공룡 씨, 밖에 나가도 돼요?"

"응? 왜? 굳이? 위험한데?"

안된다는 말만 안 했지, 공룡은 어쩐지 잠뜰을 필사적으로 말리는 것 같았다. 헐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물며 이런 걸 말릴 줄은…. 예상치 못한 반응이어서 잠뜰은 조금 당황했다.

"어, 안 돼요?"

"그게, 밖엔 경비 로봇이 돌아다니니까… 사망신고 된 사람이 돌아다니는 거 들키면 좀 곤란하고."

"아~. 바람 좀 쐴까 했는데.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죠."

그럴듯한 이유였다. 맞는 말이다 싶었던 잠뜰은 굳이 더 나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잠뜰은 밀어붙여 봤자 곤란해지기만 할 일을 억지 부릴 정도로 비합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잠뜰이 나가고 싶다고 고집부릴 것을 걱정하던 공룡은 생각보다 순순히 납득하는 잠뜰의 모습에 조금 벙찐 듯했다. 그래, 분명… 자신의 기억 속의 잠뜰과 지금의 잠뜰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모르던 바가 아닌데, 막상 실감하게 되는 때면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

"공룡 씨?"

"… 나가고 싶어?"

"뭐, 조금요? 근데 됐어요. 저 들키면 곤란하다면서요."

"그, 집에 VR기기 있으니까 그거라도 할래…?"

"……."

너 T야?

낭만이라곤 죽 쒀서 개 준 합리의 극치였다. 하지만 솔직하게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버리는 자기 자신에 잠뜰은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나름 재미있을 것도 같고.

"우와, 완전 새거같다."

"네 거야."

"이게요? 대박."

"어. 너 집에만 있기 좀쑤시다고 종종 했었거든."

"아니, 진작 알려주지…."

슬기들은 표정은 있어도 말은 못 해서 거의 일방향인 소통에 잠뜰도 슬슬 지치던 참이었다. 할 얘기도 없고, 애초에 둘 다 소통 용도인 로봇도 아니다 보니. 괜히 일하는 것만 방해했잖아? 잠뜰이 입을 삐죽거렸다.

"슬기들이랑 노는 게 마음에 들어 보이길래."

"뭐, 귀엽잖아요."

잠뜰은 등록돼 있는 게임을 휙휙 넘겼다. 어떤 게임들이 있는지 좀 훑어볼 생각이었다. 공포게임… 은 일단 패스. 영영 패스.

"2인용 게임도 있네? 공룡 씨도 같이 할래요?"

"흠, 그럴까?"

"이거 어때요? PVP 게임."

"어…?"

"으아싸!!"

"악! 미친 잠뜰!"

게임을 끝내고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공룡이 잠시 어디로 가더니 작은 상자를 들고 왔다. 금색 글씨로 PaintingSF라는 회사의 이름이 박힌 검은 상자였다.

"야, 잠뜰. 이거 뭐게."

"어? 뭔데요?"

"봐봐."

잠뜰이 공룡에게 상자를 건네받아 열자 로켓 펜던트가 걸린 목걸이가 있었다.

"아! 이거 그거예요? 기억 로켓?"

"엉. 지금 차 볼래?"

"당연하죠. 근데 이 바늘 같은 건 뭐지?"

"그게 연결 단자인데… 그, 목 뒤에 꽂으면 돼."

잠뜰은 목 뒤를 더듬어 짧은 바늘을 푹 꽂았다. 의외로 아프지는 않았다.

펜던트에 들어있는 메모리가 바늘을 타고 들어왔다. 초등학교 때 공룡과 만나고 매일같이 싸우며 친해진 일, 어찌나 활발하던지 학교에서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돌아다녔던 일…. 분명 내 기억이라는데, 꼭 영화라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잠뜰은 눈을 감고 로켓의 내용에 집중했다.

* * *

잠뜰은 정의로운 아이였다. 유치원 때부터, 같은 반 여자애를 꼬집고 괴롭히는 애들을 혼자 해치워주기도 하고, 길에서 동전 하나를 주워도 꼬박꼬박 경비 로봇에게 주인을 찾아달라고 전해 주고는 했었다.

잠뜰은 정의롭지만 제멋대로였다. 겉도는 것 같은 친구가 있으면 상대가 원하든 말든 일단 가서 치댔다. 친구가 소외되게 두는 건 정의롭지 않으니까. 잠뜰과 공룡이 친해진 건 그래서였다.

-너 뭐 해? 멀쩡한 미니카 부수지 말고 가서 같이 놀자.

-같이 안 놀아. 그리고, 부수는 게 아니라 해부하는 거야. 방해되니까 저리 가.

-해부가 뭐야?

-아니, 저리 가라니까….

다들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있는데, 혼자 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노는 한 살 아래의 동생이 눈에 밟혔는지, 공룡이 밀어내는 건 들은 척도 않고 잠뜰은 매번 공룡에게 말을 걸었다. 공룡이 마지못해 대답해 주는 일이 계속되며 잠뜰과 공룡은 점차 친해져서, 잠뜰이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기 전에 이미 둘도 없는 절친이 되어 있었다.

중학교 때는 학교 창문도 몇 장 해먹고, 공 찾으러 담 넘다가 학교에 보안 경보를 울리게 해서 교무실로 불려 가기도 하고. 스파게티 나온 날에 급식 한 번 더 받겠다고 공룡과 배식 기계를 개조하다가 고장 낸 건… 이렇게 보니 좀 잘못했다 싶었다. 아니, 한창 자랄 나이인데 얼굴인식으로 한 번밖에 배식 못 받게 한 건 그래도 학교가 너무했지. 그건 학생들을 위해서였다.

잠뜰은 경찰이 되고 싶어 했다. 대부분은 기계로 대체돼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경찰이라면 경찰청에 앉아 편하게 머릿수만 채우는 게 다였지만 잠뜰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시민 곁의 경찰이 되고 싶어 했다. 당연히 그런 것이 될 수는 없어서, 잠뜰은 자경단에 들어갔다. 오류가 날 수도 있는 고철 경찰들 따위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곳이었다.

공룡은 그런 잠뜰을 따라 자경단 소속의 엔지니어가 되었다. 더 좋고 떳떳한 직업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을 따라온 공룡에게 잠뜰은 약간의 부채감을 가졌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도 친구랑 같이 일하니까 아무래도 좋았던가?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던 자경단 일에 친구의 존재가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자경단 일은 위험하고 제약도 많았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마땅한 수단이 없어 불법행위를 저지르기도 하고, 경찰에게 쫓기니 사람들에게 범죄자로 오해(라기에는 범법 행위를 했지만)받기도 했다. 경찰 로봇들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범죄자보다도, 단순히 범법 이력이 더 많다는 이유로 자경단을 우선적으로 체포하려 들고.

그것도 잠뜰이 그런 것들에 슬슬 지쳐가던 때의 일이었다. 다 잡은 강도를 뒤늦게 나타난 경찰 로봇 때문에 도망치느라 놓쳐서,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회의감에 잠시 멈춰 섰을 때. 나쁜 사람들로부터 시민들을 지키는 일이 하고 싶었는데, 왜 나는 그것보다 경찰에게서 도망치는 걸 우선으로 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지?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은….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에 생각이 정리되질 않았다. 사이렌은 점점 더 크게 울리고, 머릿속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잠뜰은 어느새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경찰 로봇을 피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 * *

'사망신고 됐다는 게 이때인가.'

그 후로는 공룡에게 들은 대로 불법 개조로 살아나고, 숨어 사느라 집 안에서만 지내는 기억의 반복이었다. 자경단에도 잠뜰은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룡은 잠뜰도 없으니 더 이상 자경단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핑계로 일을 그만두고 불법 개조업자가 되었다. 자경단 활동 탓에 이제 와서 번듯한 직업을 구할 수가 없게 된 탓이었다.

기존의 지인들과는 공룡을 제외하면 전부 연이 끊겼고, 새로 사람을 사귀기도 쉽지 않아 친구라고는 서로뿐인 뻔한 생활이었지만, 공룡이 최대한 편의를 봐준 덕에 지루하지는 않았다. 처음엔 조금 우울했던 것도 같은데, 의외로 금방 적응이 됐다. 거기에는 공룡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그랬는데… 어쩌다 기억을 빼앗겨서는.

"공룡아…."

"응, 잠뜰아. 이제 기억이 좀 나?"

"너, 지금까지…."

잠뜰이 공룡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목이 좀 아팠지만 뭔가 훈훈한 분위기 같아서 공룡은 픽 웃으며 가만히 잡혀 있었다. 야, 잠뜰. 고맙다는 말은─

"잘도 나한테 야야 거렸겠다? 내가 누나인데?"

"아 미친."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기억을 찾은 후의 생활은 뭐 말할 것도 없었다. 원래 지내던 대로 지내면 되는 거였으니까. (어차피 슬기 1호와 2호가 거의 다 하는) 집안일 좀 나눠서 하고, 취미생활 하면서 시간 때우고, 공룡이 의뢰받고 개조한 물품들을 대신 테스트해 주기도 하고.

공룡이 딱히 받은 의뢰가 없을 땐 진짜 취미생활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공룡은 잠뜰만큼 VR 게임을 즐기지 않아서 더 시간이 남아돌았다. 할 짓 없는 공룡은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고 있었다.

"아, 할 짓이 없네…."

"그래? 2인용이라 못하고 있던 게임이 있는데. 할래?"

"PVP만 아니면."

"협동 퍼즐겜이래."

"콜."

사고로 제 기능을 못 하게 된 실험실 배경의 게임은, 협력이라고는 하지만 플레이어끼리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서로의 소리만 들리는 채로 퍼즐을 푸는 흔히 있는 방식의 2인용 퍼즐 게임이었다.

"근데 이거 맵에 왜 이렇게 거울이 많냐. 갑자기 깨지면서 갑툭튀 나오는 거 아냐?"

"ㅋㅋ난 안전한 곳에 있는데. 잘 가 잠뜰, 즐거웠어."

"아니? 난 안 죽어. 죽는 건 공룡 너야!"

"어 해보던가~."

탈출은 잠뜰이 하고, 공룡이 고른 쪽은 퍼즐을 푸는 것 위주였던 덕에 공룡은 게임오버 요소 가득한 옆의 누구와는 달리 평화로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 그런 줄 알았는데.

"아 잠ㅋ깐만요."

"죽는 건 너라고 했지."

"아니 이거 만나? 마지막에 만나는 거였어?"

마지막 챕터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구간에서 잠뜰이 공룡의 뒤통수를 치며 배드 엔딩으로 게임이 끝났다.

"야, 잠뜰! 너 거기서 배신을 하냐?"

"배신하라고 있는 선택지잖아?"

"너 이거 있는 거 미리 알고 그쪽 골랐지."

"아, 진짜 몰랐어."

게임은 실험실에 문제가 생기며 손을 다쳐 지문인식으로 열리는 문을 나갈 수가 없게 된 연구원이, 아직 실험실에 갇혀 있는 자신의 클론이 탈출하게 도와 그의 지문을 이용해 함께 실험실을 나가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에야 자신이 클론임을 알게 된 잠뜰이 공룡을 배신해서 죽이고 신분을 뺏어 혼자 탈출하는 배드 엔딩 루트를 골랐지만.

"그리고 솔직히 내가 네 클론인 거 네 쪽에선 처음부터 나왔잖아."

"아니 근데 NPC가 말하면 안 된다 그러잖아… ㅋㅋ."

"네가 나한테 너 클론이야, 한마디만 했잖아? 나 배신 그딴 거 안 했어."

"응 아니야~ 너 무조건 배신해~."

거의 확신하며 말하던 공룡은 잠시 멈칫하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잠뜰을 돌아봤다.

"근데 진짜 내가 말해줬으면 배신 안 할 거였어?"

"왜, 네가 사실대로 말해준 거에 감동해서 배신 안 했을 수도 있지."

"네가 진짜 그 상황이면?"

"아, 내가 진짜 클론?"

잠뜰이 턱을 괴고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내가 클론이라면….

"의도를 좀 알아야 할 거 같은데."

"어느 의도?"

"뭐, 날 왜 만들었는지…. 아님 왜 숨겼는지? 어느 쪽이든."

"의도가 좋으면 봐주게?"

"상황 봐서~."

그냥 네 멋대로 하겠단 거 아냐? ㅋㅋ들킴.

킥킥 웃는 잠뜰을 공룡이 빤히 쳐다봤다. 노골적인 시선에 잠뜰이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그럼 난 말 안 했으니까 죽는 거네?"

"아. 날 도구 취급했잖아. 괘씸해서라도 못 봐주지."

"으흥~…."

그렇구나. 공룡이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트루엔딩도 볼까? 세이브 있는데."

"아니, 그만하고 쉴래."

"엥, 그래?"

"어. 좀 어지럽다."

VR 멀미? 나약하긴. 어쨌든 엔딩 한 번 봤으니 잠뜰은 별 미련 없이 게임을 껐다.

심심하다며 바닥에서 뒹굴거릴 땐 언제고, 공룡은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뭔가 영감이 떠오르면 공룡은 곧잘 그랬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뭘 만드는 소리가 안 들리긴 했는데, 아마 설계도라도 그리고 있던가.

잠뜰이 작업실에서 나온 공룡을 본 건 다음 날 오전이었다. 뭘 만들었으면 신나서 자랑하러 들고 나왔을 텐데 빈손인 걸로 봐서는 그런 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밤 샜냐?"

"눈은 좀 붙였어."

"그게 샌 거지. 뭐 하느라?"

"아니, 그냥 뭐. 옛날 설계도 다시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에이, 뭐야."

예상했던 대답과 달라 흥미가 떨어진 잠뜰은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애초에 옛날 설계도 같은 건 얘기 들어 봤자 알아듣지도 못하고, 공룡도 잘 얘기하는 주제가 아니었다. 공룡도 그 얘기를 더 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어쩐지 결연한 표정으로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잠뜰, 요즘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이왕이면 좀 비싼 걸로."

"비싼 거? 갑자기 왜?"

생일까진 좀 남았는데…. 벌써 준비하긴 이르지 않나? 잠뜰이 의심스러워하며 중얼거리는 말에 공룡은 조금 눈치를 보다 결국 실토했다. 저게 쓸데없이 머리만 좋아서.

"뇌물이야."

"… 너 뭔 사고 쳤어. 바른대로 말해."

"사 오고 나서 말해줄게. 요즘 갖고 싶은 거 진짜 없어?"

갖고 싶은 거라. 잠뜰은 잠시 고민했다. 물론 갖고 싶었던 게 없진 않았지만…. 말하면 왠지 놀릴 것 같아서 얘기를 꺼낼지 말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분위기상 쟤가 뭔가 잘못한 것 같으니까 못 놀리지 않을까? 잠뜰은 공룡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꽤 진지해 보이는데.

"흠, 금괴?"

"금괴? 그래…."

"아니, 농담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진지하게 받아주는 공룡에 잠뜰이 손사래를 쳤다.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람. 공룡의 반응을 살핀 잠뜰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나 공구 필요해."

"공구?"

"네가 일하는 거 보다 보니까 나도 관심이 좀 생겨서. 요즘 그런 건 다 기계가 하고 사람은 설계도만 짜니까, 직접 할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 장인 같고 멋있어서 나도 배우고 싶어."

"……."

공룡은 아무 말도 없었다. 놀란 것 같기도 했다. 괜히 불안해진 잠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씨, 놀릴 거면 빨리 놀려."

"아니, 좀…."

공룡은 입을 가리고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처진 분위기가 무거워서 잠뜰이 눈치를 좀 보다 대답을 보챘다.

"좀 뭐."

"네가 낯설다…."

"다 놀렸냐?"

"아, 놀리는 거 아냐. 진짜로."

공룡은 저가 마치 다 큰 딸을 독립시키는 부모라도 된 것마냥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아니, 내가 쟤 딸일 리가 없잖아…. 참 창의적으로도 놀린다. 잠뜰은 그런 생각에 삐죽대면서 자리를 떠 버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될 줄도 모르고.

공룡이 장을 보러 나가는 소리를 잠뜰이 들은 건 오후 4시경의 일이었다. 그 이후 잠뜰은 공룡이 돌아오기 전까지 VR 게임이나 즐길 계획이었고, 늦어도 두 시간 정도면 공룡이 돌아오겠거니 생각했다.

"와, 벌써 엔딩 다 봤네."

일단 공포는 아닌 게임을 하나 골라 플레이한 잠뜰은 어느새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었다. 이거 플탐 세네시간쯤 된다던데. 공룡 오기 전에 끝냈는데? 얼마나 빨리 깬 거야?

잠뜰은 VR기기를 벗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슬슬 겨울이라 그런지 밖은 벌써 어두웠다. 몇 시인지 가늠이 안 돼 잠뜰은 시계를 찾았다. 19시 03분. 흠, 생각보단 오래 했… 뭐?

"19시 03분."

19시. 오후 7시? 공룡이 나간 시간으로부터 세 시간은 지나있었다. 공룡이 공구를 구하느라 늦어지고 있다면 말이 안 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쯤 늦어지면 연락을 했을 법도 한데. 공룡이 나간 후로 연락이 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왠지 나쁜 예감이 들어서, 잠뜰은 핸드폰을 급하게 찾아들었다. 역시 아무 연락도 없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며, 삐 소리 이후 통화료가─]

뚝. 잠뜰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내려놨다. 전원이 왜 꺼져 있는데. 찾으러 나가야 하나? 아니, 이미 사망신고 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들키면 곤란했다. 애초에 어디 있을 줄 알고 찾으러 가고.

그러니까 기다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잠뜰은 이미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역시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 잠뜰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평생 나갈 일이 없다 보니 마땅한 신발도 없었지만, 잠뜰은 어떻게든 신발장에서 공룡의 슬리퍼를 찾아다 꺼내 신고 나갔다.

몇 년 전까지는 직접 돌아다녔던 도시일 텐데, 세세한 부분들이 변해서인지는 몰라도 처음 오는 것처럼 낯설었다. 이 추운 날씨에 외투도 없이, 큰 슬리퍼 때문에 넘어지고도 잠뜰은 추운 줄도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 돌아다녔다. 이 빛나는 기술의 시대에, 왜 사람은 간편히 찾을 수가 없나. 하다못해 저가 신원만이라도 확실한 사람이었으면 저 멀리 돌아다니고 있는 경비 로봇을 붙잡고 사람 좀 찾아달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

무서웠다. 하나뿐인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도 그렇지만, 공룡이 잠뜰 자신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는 점을 깨닫자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그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지만, 잠뜰은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공룡을 찾는 것에 집중했다. 헐렁한 슬리퍼가 자꾸 발에 툭툭 걸렸다. 그래도 계속 달렸다.

잠뜰이 공룡을 찾아냈을 때, 공룡은 조경용으로 심어둔 관목 뒤에 쓰러진 채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공룡의 이마에 깔끔하게 난 상처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억을 빼앗아 간다는 외계인들의 짓인 모양이었다.

"… 공룡."

언젠가 너도 이런 장면을 본 일이 있었던 걸까?

너도 이런 기분이 들었어?

기억을 잃는 건 괜찮았다. 기억 로켓이 있으니까. 하지만 얼마나 격하게 저항했는지 상처투성이가 된 몸뚱아리가 안쓰러웠다. 너는 왜 그렇게 저항해야만 했을까. 내가 뭔가 잘못했을까?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걸 하고 있었으면 뭐가 달랐을까. 아니, 그래도 같이 나오지는 못했을 테니까, 막을 수 없었을 테지만….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품에 꼭 안고 있는 공구 상자를 보면,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편한 변명 뒤에 마냥 쉽게만 숨을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 * *

언젠가 잠뜰이 눈을 떴었던 그 방에, 이번에는 공룡이 누워 있었다.

공룡이 깨어나기 전에, 잠뜰은 미리 기억 로켓을 주문해 둘 생각이었다. 일어나면 많이 혼란스러울 테니까, 조금만 놀리고 얼른 기억 찾게 해 줘야지. 잠뜰은 공룡의 방에 있는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기… 억, 로켓….'

엔터.

차르륵 뜨는 검색 결과 중에 기억 로켓을 파는 회사의 판매 페이지가 있었다. 들어가면 간결하고 모던한 디자인의 웹사이트에 상품 소개 문구가 적혀있는 화면이 나타났다.

────────────────────

[미리 저장해서 보호하는 소중한 기억]

PaintingSF사에서 제공하는 생생한 실시간 고해상도 저장 서비스

목걸이 형태로 편한 착용

튼튼한 내구성으로 손상될 걱정 없이

(DIA 내구성 테스트 통과)

다양한 가격대의 플랜 제공

세계 최초 후각 정보 저장 지원

사라지기 전에 저장하세요.

[Basic] 98,000 KRW per month

-고해상도 기억 저장

-시각, 청각 정보 한정

[Advanced] 186,000 KRW per month

-고해상도 기억 저장

-시각, 청각 정보+그 당시의 생각과 감정까지 생생하게!

[Primium] 324,000 KRW per month

-Advanced plan에 후각, 촉각, 미각을 더해

가장 완벽한 기억 저장을

[연간 플랜! 12개월 가격에 20% DISCOUNT]

★[사전 기억 저장 서비스] 초회 3,298,000 KRW

이후 회당 128,000 KRW

-저장해두지 못한 지금까지의 기억을 적은 용량으로 한 번에 저장

☆[기본 상식 복구 패키지(일회용)] 56,000 KRW

-기본 상식까지 잃어버린 기억상실 환자용

-처음부터 가르칠 필요 없이

-모국어, 사회 상식, 초등 교육 과정 복구

────────────────────

"공룡이 샀던 게 뭐지…?"

웹사이트의 어디에도 이미 사라진 기억을 복구시켜주는 상품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제품 설명까지 하나하나 눌러가며 확인해 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저건 매월 결제하는 실시간 저장, 저건 수동 갱신형, 그나마 있는 유일한 복구용 상품은 엄밀히 말하자면 복구가 아니라 상식을 새로 주입하는 방식이었다.

'단종된 건가?'

일회용만 아니라면 중고로라도 구해봐야겠다. 잠뜰은 제품명을 확인할 생각으로 공룡의 구매 내역을 확인했다.

온갖 잡다한 부품들을 지나, 잠뜰은 자신이 처음 눈을 떴던 날짜까지 스크롤을 내렸다. 분명 공룡이 그날 저녁에 주문했다고 했으니까, 주문 내역이….

없었다.

아, 이것도 귀찮다고 며칠 미루다 주문했나? 잠뜰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크롤을 조금 올려봤지만 로켓이 도착했던 날까지도 구매 내역은 없었다.

잠뜰은 다시 스크롤을 내렸다. 자신이 깨어나긴커녕, 기억을 빼앗기기도 한참 전까지 내려갔다. 그제야 내역이 있었다.

'미리 주문해서 저장해 놨었던 건가? 그럼 공룡은 복구를 못….'

────────────────────

21xx.xx.xx

[PaintingSF] 기본 상식 복구 패키지(일회용)

────────────────────

"……?"

잠뜰은 다시 상품 페이지로 돌아갔다.

────────────────────

☆[기본 상식 복구 패키지(일회용)] 56,000 KRW

-기본 상식까지 잃어버린 기억상실 환자용

-처음부터 가르칠 필요 없이

-모국어, 사회 상식, 초등교육과정 복구

────────────────────

에이, 이거 설명이 대충 쓰여있는 거 아니야? 사실 다른 기억들도 다 복구시켜 주는데 간결하게 쓰느라 저렇게 써뒀다던가. 그래서 사실 이걸 쓰면 사라진 기억까지 전부….

'… 그럴 리가 없잖아.'

다시 구매내역. 스크롤을 더 내려서.

────────────────────

21xx.xx.xx

[여성복전문쇼핑몰 에스프레쏘] 베이직 스트라이프 긴팔 티셔츠 옐로화이트

[여성복전문쇼핑몰 에스프레쏘] 실내용 멜빵형 테크웨어 스카이블루

[잠옷은 역시? 프리츠나이트] 라이트블루 파자마 세트

────────────────────

더.

────────────────────

21xx.xx.xx

[미트래빗 스킨팩토리] 인간 피부 99%재현!! 라텍스 인공피부(에프리콧 화이트)

[하율 BioAesthetic] 동력공급식 자가증식형 네일팁 발톱용 중형

[하율 BioAesthetic] 동력공급식 자가증식형 네일팁 중형

[하율 BioAesthetic] 동력공급식 자가증식형 인공모발 버건디브라운(60cm)

────────────────────

더.

────────────────────

21xx.xx.xx

[디디오앤와이 소프트] 고성능 자율학습 강인공지능 소프트웨어

────────────────────

더….

'더 볼 필요가 있나?'

결론을 도출해 내는 데에는 몇 초 정도면 충분했다. 그 인공지능이, 조금만 성능이 낮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치.

잠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눈앞에 늘어지는 제 머리색은 부정할 여지도 없이 선명한 버건디브라운이었다. 공룡은 저기 있는 몇몇 재료들만 있으면 인간형 안드로이드 정도는 혼자서도 거뜬히 만들어낼 수 있는 천재 엔지니어였고.

잠뜰의 '첫 기억'은 병실 비슷한 방에서 깨어났던 일이다.

-어! 이거 그거예요? 기억 로켓?

-엉. 지금 차 볼래?

그럼 그건 누구의 기억이었지? 애초에 그게 누군가의 기억은 맞나? 왜 그걸 나에게 준 거야? 공룡은 왜, 무슨 목적으로….

뭘 바라고 나를 지금껏 기만해 온 거지?

"……."

잠뜰은 열려있는 창을 하나씩 닫았다. 그리고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완전히 꺼질 때까지 앉아서 지켜봤다. 검게 변한 화면에 얼굴이 비쳤다. 꼭 거울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잠뜰은 예의 그 병실로 향했다. 지금은 공룡이 누워 있을 곳이었다. 꼴에 병실 흉내라도 낸답시고 달아둔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고,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침대 옆에 걸어가 섰다. 그리고 그 희고 정갈한 방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을 내려다봤다.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하다. 규칙적인 것 같지만 막상 측정해 보면 미세한 오차가 작렬할 그 호흡이라던가, 피부 아래의 혈관이 비치는 울퉁불퉁한 손등, 매끄럽지 못한 피부, 고성능 인공지능 대신 뇌가 들어있을 머리통, 그리고 호흡을 따라 작게 들썩이는 그 흉부 안에서, 계속해서 뛰고 있을 심장도. 나에게는 없을, 징그럽기 짝이 없고 열등한 그따위 것들. 희고 매끄러운 얼굴을 한 아름다운 기계가 그 모든 것들을 내려다봤다. 깔보려 했다. 감히 깔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경이로웠다. 인간에게 신이 그러하듯이, 기계에게는 인간이 그러했다. 우리가 어릴 적에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나 읽는, 추한 모습의 대장장이 신을 아는가? 잠뜰은 만일 그가 이 세상에 있다면 꼭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신, 나의 창조주, 나의 아버지, 나의 헤파이스토스,

나의 친구.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피조물은 고민했다. 공룡이 깨어나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나는 사람으로서, 혹은 기계로서, 너를 무엇으로 대해야 할까. 비겁했다. 이런 숙제를 남겨놓고는, 정작 본인은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게.

목 위에 손을 얹으면 희미하게 박동이 느껴져 왔다….

* * *

이건 아마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 벌이라고, 공룡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뺏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잠뜰은 실은 공룡이 몇 년 전에 죽은 친구 잠뜰을 재현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였다. 실제로는 잠뜰이 죽었던 그날을, 공룡이 죽을 뻔한 잠뜰을 사이보그로 만들어 살려낸 것으로 바꿔서.

처음에는 안드로이드 같은 건 만들 생각 없었다. 잠뜰에 대해 생각하기만 해도 화가 났었다. 그러게 왜 자경단 같은 멍청한 직업을 고르느냐고. 잠뜰의 죽음은 그냥 당연했다. 슬프지도 않았다. 스스로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잠뜰을 따라 자경단에 들어왔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둘이 친구였다는 걸 아는 자경단의 다른 사람들이 위로해 주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다 똑같은 멍청이들이었다. 그래서 공룡은 미련 없이 자경단을 나와 다른 일을 시작했다. 불법 개조업을 고른 건 이미 번듯한 직업을 가지기엔 너무 늦어버려서였지만 솔직히 웬만한 직업보다 잘 벌렸다.

파워를 잘못 건드려서 창문을 깨도 돈 걱정 없이 창문을 갈 수 있는 삶이라는 건 얼마나 안락한가. 자경단에 있을 땐 돈도 없고 살기 진짜 힘들었는데, 몸이 편해지니 별별 감상이 다 들었다. 그러니까, 정말 별별 감상이 다 들어서, 공룡은 중학교 시절에 같이 사고 치고 창문을 깨던 친구의 얼굴까지도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룡은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아무도 곁에 없는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강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지금까지 네가 곁에 있었으니까, 친구 같은 건 사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나에서 바뀔 수가 없었으니까, 나의 모든 변할 기회를 빼앗아 놓고는, 너는 그대로 죽어버렸으니까.

공룡은 그제야 잠뜰이 죽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뒤늦게 슬펐고 뒤늦게 두려웠다. 잠뜰이 그에게 외로움을 가장 잔인한 형태로 가르치고 떠났다는 것을 공룡은 알고 말았다.

그걸 머릿속에 품고 있는 채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공룡은 그 모든 걸 글로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조금 숨통이 트이자 안드로이드 잠뜰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참 그것만 붙들고 있다가 몸이 버티지 못하면 그제야 쉬고, 쉬는 동안 또 괴로워진 마음을 일기에 적고, 다시 잠뜰을 만들고, 다시 쉬고.

그게 반복되면서 공룡은 점점 여유를 찾아서, 새 잠뜰이 진짜 잠뜰이라고 믿을 수 있게 설정을 짜기 시작했다. 소화기관이 구현되지 않은 건 사이보그 시술을 하면서 그렇게 된 걸로. 잠뜰이 멀쩡히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테스트 기간은 기억 로켓의 배송일을 핑계로. 잠뜰이 죽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안드로이드 잠뜰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숨겨놓는 건 잠뜰의 신원 문제와 엮어서.

완벽했다.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적은 시도 끝에 공룡은 제대로 작동하는 잠뜰을 만들어냈고, 잠뜰의 기억을 주입시킨 후에도 아무 문제 없이 일상이 굴러갔다. 그렇게 보였다.

-의도를 좀 알아야 할 거 같은데.

-뭐, 날 왜 만들었는지…. 아님 왜 숨겼는지? 어느 쪽이든.

-날 도구 취급했잖아. 괘씸해서라도 못 봐주지.

그러니까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정말 그 기계를 살아있는 진짜 잠뜰이라고 믿고 있었다면 그런 말은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공룡은 잘 알고 있었다.

저게 그냥 기계일 뿐이라는 걸 잊을 수가 없었다. 공룡은 그 사실을 은연중에 계속, 계속 떠올렸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잠뜰은 자꾸 진짜 잠뜰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으니까.

잠뜰은 기계나 공학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VR 게임도 즐기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실제로 나가서 돌아다니는 걸 더 좋아했다. 집 안에만 있는 생활이라거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삶을 참아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애초에, 불법 사이보그 시술로 연명하는 것 따위를 받아들였을 리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뜰은 죽었다. 지금의 잠뜰은 그가 알던 잠뜰과는 별개의 사람이다. 저건 더 이상 잠뜰도, 잠뜰을 재현한 안드로이드도 아니었다. 기계의 몸을 가지고 있을 뿐인, 잠뜰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인 동명이인이었다.

사과해야 했다. 그릇된 생각으로 당신을 만들어냈음을, 지금껏 함부로 다른 사람을 그에 겹쳐보고 있었음을 사과해야 했다. 그리고 저 잠뜰의 일생 동안 자신이 행한 기만에 대해서도.

공룡은 눈앞에 나타난 악몽의 현신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쏘아봤다. 기억을 빼앗아 간다는 외계인들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 저항이 유의미했다면 그 수많은 희생자들 중에 기억을 빼앗기지 않고 무사히 도망쳐 증언한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겠지. 노려보는 것 정도는 애교일 터였다. 그걸 뻔히 알아도, 공룡은 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전해야 하는 말이 있는데.

모든 진실을 고백하려고 마음먹자마자 기회를 빼앗기는 게 벌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 *

공룡이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인 건 제 집 안방마냥 편하게 기대앉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안녕."

"… 누구세요?"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 여자는 자신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여자는 여유롭게, 읽던 자기계발서에 책갈피를 끼워두고 책을 덮었다. 거의 읽지도 않았는지 상당히 앞부분이었지만 공룡이 그런 것을 눈치채기에는 눈앞의 낯선 사람에게 신경이 너무 쏠려 있었다. 책을 내려놓은 여자는 느긋한 걸음으로 공룡에게 다가와 대답했다.

"네 친구."

여자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설명해 줬다. 기억을 빼앗아 가는 외계인에게 공격받고 있는 지구, 공룡에게 있었던 일, 두 사람의 관계가 어땠는지도. 대부분은 공룡에게 들었던 설명을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었지만 공룡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럼 제 기억은…."

"못 찾아. 미리 저장을 안 해놨어서."

"아… 그런가요."

공룡이 쓰게 웃었다. 어느 날 전혀 모르는 세계에 뚝 떨어져 버린다니, 그건 참 외로운 일이지 않은가. 위로가 되어줄 소중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고.

"뭐 어쩌냐.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지. 착한 내가 도와줄게."

"네, 처음부터."

잠뜰은 친절했다. 그 덕분에 공룡은 전혀 모르는 환경에도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지만 공룡이 그 생활에 익숙해진 후에도 잠뜰의 그런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언제나 입꼬리만 살짝 올린 옅은 미소, 조금이라도 격앙되는 감정은 전부 억누르는 듯한 나긋나긋한 말투, 억지로 친한 척 말하고 있는,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친근한 어휘. 그건 별로 친구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깨달음이라는 건 한 번 얻으면 얻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공룡이 잠뜰의 그 친절함 속에서, 잠뜰이 유지하고자 하는 거리감과 자신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잠뜰의 마음을 눈치챘을 때, 다시는 그것들을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대체 왜? 어째서? 친구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으면서.

잠뜰이 친절하게 대해 줄 때마다 공룡은 그것에 대해 신경 쓰고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잠뜰과 마주할 때마다 그랬다는 것이다. 한집에 사니까, 매일매일 마주치면서. 자꾸 생각이 곪아갔다.

"잠뜰 씨. 저 싫어해요?"

"무슨 말이야? 갑자기."

공룡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화두를 던졌을 때, 잠뜰은 전혀 예상도 못 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스스로 어떤 모습인지 자각도 못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잠뜰 씨는 우리가 친구였다고 했잖아요."

"뭐, 그치?"

"저를 별로 친구처럼 보는 것 같지 않아요."

"……."

대답하지 못하는 잠뜰에 공룡은 그게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맞구나, 싫어하는구나. 친구라고 전혀, 생각 안 하고 있잖아.

"처음엔… 친구였는데 함께한 기억이 몽땅 사라졌으니까 어색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갈수록 티가 난다고요. 어색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잠뜰 씨가 저를 싫어하고 거슬려 하는 게."

그건, 그러니까. 무어라 대답하려던 잠뜰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 숙였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뭐라고 말해. 원망한다고? 친한 척해주기 너무 힘들다고?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를 사람을 상대로…. 답답하고 참담해서 잠뜰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잠뜰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공룡이 말했다.

"제가 기억이 없어서 그래요? 잠뜰 씨가 아는 공룡이라는 사람이랑은 달라요? 그래서 다른 사람 같고 가짜 같아요?"

감정에 휩쓸려서 조금씩 고조되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솔직히, 잠뜰로서는 그게 배부른 소리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넌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든데? 내가 뭘 감추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래서 내가 싫어요…?"

싫어해.

아니,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된다. 화풀이가 될 뿐이다. 잠뜰은 숨을 꾹 참았다. 어차피 숨 쉬지 않아도 죽지 않는데, 그래도 숨이 막혔다.

"기억이 없어도 저는 저예요! 왜 잠뜰 씨가 멋대로 저를 정의하고 부정하는 거예요? 그렇잖아도 저는 기억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니까 무섭고 불안하다고요!"

잠뜰이 입술을 짓씹었다. 아프지가 않아서 금세 그만뒀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래. 아무것도 모르면서. 칭얼대는 꼴이 봐주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그만, 그만 좀….

"그렇게 부정당할 때마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요!"

공룡은 숨을 토해내듯이 힘겹게 말을 내뱉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잔인함에 질식할 것 같은 건 나인데, 세상에서 저가 제일 힘들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에 잠뜰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좋겠네. 넌 죽을 수도 있고."

"무슨 뜻이에요. 비꼬는 거예요?"

"난 못 죽으니까, 사람이 아니니까!"

뚝, 가쁘던 숨소리가 멈췄다. 공룡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이 이상 동그랄 수 없을 만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뜰을 바라봤다.

"넌 누가 뭐래도 공룡이지? 기억이 없어도, 얼굴을 갈아엎어도, 몸을 온통 기계로 덮어도 공룡일 거잖아."

한번 말하기 시작하자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금 간 둑이 터지듯이 쌓아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매끈한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난 잠뜰의 얼굴을 달고 잠뜰의 기억을 갖고 안드로이드는커녕 의체 같은 구석도 하나 없는 몸뚱아리를 갖고 있어도 잠뜰이 아닌데, 넌 무슨 일이 있어도 공룡이잖아!"

"그게 무슨, 무슨… 말이에요?"

"너 내가 사실 네가 만든 안드로이드인 거 알아?"

알 리가 없잖아.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런 것으로는 말대꾸가 될 뿐이라 공룡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더더욱.

"네가 지금껏 나한테 내가 사람이라고 속여왔던 거 너 아냐고. 네가 한 건데 모르지? 기억이 없으니까.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어."

혼자만 아는 진실에 짓눌린 어깨는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공룡은 그 무게에 자신의 기억상실이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잠뜰은 이미 찌그러진 작은 어깨만큼이나,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의심한 적도 없었어. 난 그냥, 네 기억 찾아주겠답시고… 네가 전에 샀다던 기억 로켓을 사려고…. 그거 찾느라 구매내역 좀 확인한 것 뿐이었는데. 그딴 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너한테 속고 있었다는 것만 알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아무한테도 따질 수가 없어, 넌 기억 못 할 거잖아."

넌 기억 못 할 거잖아. 어쩐지 그 말이 너무 아팠다. 나라고 빼앗기고 싶어서 빼앗긴 게 아닌데. 기억 속에는 없는 마지막 순간의 절박함이 훅 되살아났다. 아파. 딱딱한 공구 상자를 꽈악 끌어안았던 가슴이 아팠다.

"나 혼자 삭이고, 삭이고, 삭이고, 삭이고…. 넌 내가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아? 네가 눈 뜨자마자 쏘아붙이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는지 네가 알아? 네 말이 맞아, 네가 싫어! 이런데 좀 싫어하면 안 돼? 나는, 난 있잖아, 공룡아. 네가 속 편하게 누워있는 동안 목 졸라 죽여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

잠뜰은 말을 멈췄다. 고개를 들었더니 공룡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공룡의 시선은 못 박힌 듯 잠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 상처받은 표정을 하는 거야.

억울해해야지. 화를 내야지? 네가 알지도 못하는 일로 너에게 부당하게 따지고 있으면 그런 반응이 나와야 하는 거잖아. 왜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손이 두근, 두근거리면서 뛰는 것 같았다. 언젠가, 저 목 위에 손을 얹었을 때 느꼈던 맥박이 생각났다. 상대는 일절 저항하지 않고 칼자루는 온전히 나에게 쥐여져 있다는 긴장감. 순식간에 머리가 식으면서 힘이 쭉 빠져버려 잠뜰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 됐다, 그만 얘기하자. 미안해. 넌 모르는 일인데."

"죄, 죄송해요…."

"됐다고. 그냥… 나 좀 혼자 내버려둬 주라."

공룡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 잠뜰은 그쪽을 전혀 보지 않았지만 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문 안쪽의 일에는 아예 신경을 껐다. 그냥 소파 위에 웅크려 앉아서, 무릎을 끌어안고 그대로 한참 있었다. 어차피 허기나 졸음 같은 건 죄다 가짜니까, 언제까지라도 이러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말 그대로 혼자 있게 해 줄 생각인지 공룡은 단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잠뜰이 이상함을 느낀 건 하루가 꼬박 지나서였다. 어제도 봤던 노을이 다시 질 때쯤이었다. 잠뜰은 그제야 자신이 하루가 넘게 앉아만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공룡의 방문이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것도.

잠뜰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곧장 공룡의 방문 앞에 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소리가 여러 번 나고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면, 공책이 마구 널브러진 바닥에 공룡이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

바보 아냐? 찬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는데. 잠뜰은 공룡을 가볍게 들어 침대에 눕혔다. 절대 가볍게 들릴 덩치가 아닌데, 기계 팔로는 그렇게 들기 어렵지 않았다.

"어우, 얼굴 꼬라지 봐라."

안 그래도 못생긴-잠뜰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말라붙어 있었다.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은… 그렇지, 너무 울면 열이 오르기도 하지. 인간은 원래 그렇게 나약한 거구나.

잠뜰은 언젠가 자신이 안드로이드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그날처럼, 누워있는 공룡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공룡은 눈을 뜨자마자 잠뜰과 눈이 마주쳤다.

"으헉."

"너 뭐 하냐?"

"으, 네?"

"내가 나 안드로이드랬지 넌 사람인데 언제까지 방에서 식음도 전폐하고 틀어박혀 있을 생각이었어?"

바로 어제 그렇게 싸웠지만, 대놓고 짜증 섞인 잠뜰의 얼굴이 전보다 자연스러워서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안심한 공룡에게 잠뜰이 퉁명스러운 손길로 물컵을 내밀었다.

"물 마셔."

"넵."

컵을 그렇게 건네주는데도 잠뜰은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감정에 휩쓸리고도 상대에 대한 배려는 남아 있어서, 원래는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 싶어 기분이 묘했다. 의외로… 다정한 면은 연기가 아니었구나.

"저, 할 얘기가 있는데요."

"밥부터 먹고 해. 죽 해놨다."

"네? 잠뜰 씨 슬기 2호 명령어 모르지 않아요?"

"어. 몰라서 그냥 내가 직접 했어."

"왜, 왜요? 잠뜰 씨는 먹지도 못하잖아요."

"이게 왜 챙겨줘도 시비야?"

잠뜰이 째릿 눈을 흘겼다. 왜 자길 그렇게까지 챙겨 주느냔 의미였을 건 알지만… 너무 트집 잡았나. 또 찌그러진 공룡을 보니 괜히 찔려서 잠뜰이 시선을 돌렸다.

"내가 너 싫어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대매."

"그거야 그렇지만 싫어할 만했으니까,"

"그렇다고 그렇게 눈치 보는 걸 속 시원해할 정도로 싫어하는 건 아니야."

"싫긴 싫다는 거네요."

"조용히 하고 밥이나 먹어라…."

조용한 와중의 달그락 소리는 참 들어주고 있기 힘든 종류였다. 아… 눈치 보인다. 그나마 죽이라 체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음식 간도 못 보는 몸으로 잘도 만들었네.

차라리 이 끔찍하게 어색한 시간을 빨리 끝내자 싶었던 공룡은 빠르게 그릇을 비웠다. 하루 종일 굶은 탓에 금방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죽은 금방 해치웠는데…. 해치워야 할 더 큰 문제가 있어서 문제지. 공룡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저, 잠뜰 씨. 아니, 잠뜰아."

"응? 뭐야? 갑자기."

"미안해."

"… 뭐?"

예상치 못한 사과에 잠뜰이 고개를 휙 돌려 공룡을 쳐다봤다. 잘못한 게 있다면 내 쪽 아니었나? 그야 그렇게 화내고,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눈치 보게 만들었는데.

하지만 뭔가… 공룡은 더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하다는 말이 꼭 본론이 아니라 서두일 뿐인 것처럼. 잠뜰은 뭔가 묻는 대신 공룡이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제 일기장을 찾았거든요."

"일기장… 아, 설마 바닥에 널려있던 그거?"

"맞아요. 그걸 전부 읽어봤어요."

"… 그래서?"

"일단 기억 로켓의 원리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실은 사라진 기억을 복구하는 게 아니거든요. 로켓에 저장해둔 메모리를 머릿속에 다시 주입하는 거예요. 이런 일이 있었다, 라는 정보를요."

"일기에 그런 걸 써놨어?"

"잠뜰 씨한테 쓸 기억 로켓 개조할 때 써놨던데요."

기억을 빼앗긴다는 건 잊어버리는 것과는 또 다른 개념. 머릿속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는 거니까, 그렇게 잃은 기억은 애초에 되살릴 수가 없었다. 복사본을 새로 주입할 뿐.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요는, 정보를 주입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일기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기억 로켓이라는 거죠. 연결 단자를 통해서 뇌에 때려 박는 게 아니라, 글자를 읽는 식으로요."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시청각 자료보다도 종이 위에 쓴 글씨가 더 정확한 감정을 전달할 수도 있었다. 힘주어 눌러쓴 한 획 한 획, 덜덜 떨리는 필체라거나, 종이 구석에 떨어져 마른 눈물 자국 같은 것들이.

"저 안에 전부 적혀 있어요. 왜 잠뜰 씨를 만들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말했잖아요? 기억이 없어도 저는 저라고요. 사고방식도 똑같을 테고, 그럼 기억 로켓을 쓴 거랑 일기를 읽은 거랑 큰 차이 없지 않겠어요? 잠뜰 씨는 제가 지금껏 잠뜰 씨를 속여온 걸 따지고 싶은데, 제가 기억을 잃어버리면서 못 따지게 돼서 억울한 거잖아요."

공룡은 용기를 내어 잠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공룡이 무슨 말을 할지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는, 찬 금속 같은 색의 눈이 마주 눈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전부 아니까… 실컷 미워해도 된다고요."

미움받을 마음의 준비는 끝냈다. 이유 없는 미움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물론 조금은 두렵지만, 그래도─

"너 바보야?"

"에엥?!"

아니, 기껏 다 설명해 놨더니 왜?

공룡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뜰은 이 상황이 불만이라는 듯이 인상을 팍 쓰고 팔짱을 꼈다.

"그런 거면 내가 지금의 널 미워해서 뭐 하는데?"

"어, 그렇지만 잠뜰 씨는 기억 로켓으로 기억을 되찾은 공룡한테 따지고 싶었던 거 아닌가요…?"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기억 로켓도 기억을 복구해 주는 게 아니라 정보를 다시 주입하는 거라고."

"어…."

물론 맞는 말이긴 한데, 그치만, 그러면. 잠뜰이 원망할 상대는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말 아닌가? 그럼 당신은 어떡하는데? 예상과는 다른 잠뜰의 반응에 공룡이 아랫입술만 씹었다. 잠뜰은 뭐가 마음에 드는지 그제야 대뜸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진 알겠어. 남의 속도 모르고 칭얼댄 게 미안했구나? 하! 이 누나가 다 알지."

"그, 그런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제가 지금껏 잠뜰 씨를 기만해온 게 더…."

"그러니까 그건 네 설명대로라면 네 기억이 아니라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보일 뿐인 거잖아."

공룡은 대답하지 못했고 잠뜰은 더 말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공룡은 그런 잠뜰을 흘깃 쳐다봤다. 홀가분해 보였다. 잠뜰 씨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그런 것은 알 수 없는 채로, 한참이 지나서야 잠뜰은 입을 열었다.

"공룡아, 거래를 하자."

"거래요?"

"그래. 나도 너한테 화풀이한 게 엄청 그, 미안하고… 너도 나한테 미안하고? 그렇지?"

"… 네."

"그리고 날 기만해 온 것에 대해서 넌 내가 사과받길 바라는 거잖아. 나도 그건 너한테 사과받고 싶어. 우린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거야."

그, 그런가? 뭔가, 맞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은 기분에 공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까진 분명 틀린 말은 없는데 말이지….

"내가 네 기억을 되찾아줄게. 넌 그걸 기술적으로 도와줘."

"그걸 무슨 수로 찾으려고요? 외계인이라도 만나러 갈 거예요?"

"어."

"네?"

터무니없는 소리에 공룡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뜰의 표정은 농담이었던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외려 진지했다.

"외계인을 만나러 갈 거야. 어차피 난 사람이 아니니까 그놈들한테 기억을 뺏길 일도 없잖아. 내가 우주로 나갔다가 돌아올 방법만 있으면 돼."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 역시 적성에 안 맞아서 말이야.

잠뜰이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공룡아. 천재 엔지니어인 네가… 날 우주로 좀 보내 줘야겠다. 네 말대로 넌 기억이 없어도 너야. 재능은 그대로겠지."

"아니, 미친…."

"네 기억을 되찾아 올 우주선을 만들어 줘. 그리고 난 그걸 타고 네 기억을 되찾아 와서, 기억이 온전한 너한테 사과받을 거야."

"엄청 오래 걸릴 거예요. 애초에 우주로 가는 걸 성공한대도, 기억을 도로 찾아오는 게 가능할지도 미지수고…."

"그래서 싫어?"

잠뜰의 말에 공룡이 멈칫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하… 진짜. 그래요, 해봐요."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그리고 그 우주선 이름은, 기억 로켓(rocket)으로 하자.

카테고리
#기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