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약

자르반스웨인

* 대대로 데마시아 왕가와 비밀스럽게 계약한 악마가 있다는 AU입니다. 악마 스웨인의 이번대 계약자는 왕자인 자르반 4세이고, 왕가를 돕는 대신 왕족이 죽을 때 영혼을 받아갑니다.

*시체 묘사 있음, 빻음 주의

* 자르반 결혼식날 밤이 배경

초야의 침실은 그야말로 화원이었다. 촛불이 은은하게 일렁이는 장미의 화원. 숨을 들이쉬면 온 방에 짙게 깔린 향내가 폐부를 애무하고 지나갔다. 꽃의 기억이 코끝을 맴돌다 취할 때 즈음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질투라도 하는걸까. 어질어질한 머릿속에서 깔끔히 잔향을 몰아내고는, 바람은 뚝 그쳐버린다.

왕자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괜스레 쓸어올렸다. 평소엔 왕관으로 고정시키는 터라 필요없는 동작이다. 그러나 이 자리엔  위엄의 황금관 역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에 뒤집어 쓴 것은 피묻은 왕관이 아닌 축성의 향유이기에.

촛불의 그림자가 아로새겨진 유리창엔, 왕자의 얼굴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불빛을 머금어 금빛으로 떠오른 환영은 궁궐의 부조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교함이다. 이따금 습기를 머금은 유리에 물이 맺혔으나, 그것마저 흑단나무같은 머리칼에 장식된 보석들로 보였다. 이 물방울은 촛불을 머금은 토파즈, 바깥의 암흑을 머금은 물방울은 흑수정, 그리고 작게 흩뿌려진 다이아몬드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주르륵 떨어지는 보석도 있었다. 제각각 흘러 떨어지는 물구슬은 합쳐져 굵직한 선을 이루기도, 어느 분기에선 갈래로 흩어져 창틀에 안착하기도 하였다. 왕자는 유리창에서 물구슬이 손가락마냥 흘러내린다는 착각이 들었다. 길다랗고 가느다란 , 그리고 마디 진 손가락이 창틀의 목을 죄기 위해 달려가는 모양을 떠올렸다. 경사스러운 날에 하기엔 불경한 상상이다. 신부가 오래도록 오지 않아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 왕자는 유리창으로 일렁이는 불빛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공기는 서늘하나 환영은 따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촛불이 훅 꺼졌다.

자리에 남은건 깊고 안락한 어둠 뿐이다. 벌어져있는 침실의 문가엔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들었으나 그것으로 넓은 방을 밝히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나,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왕자는 촛불을 확인하려 몸을 기울였다. 촛불이 내지른 마지막 단말마가 희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밀랍이 타는 단내를 숨에 머금으며 고개를 돌렸다. 향내 아래로 은은한 비린내가 깔려있었다. 기분 탓일까? 왕자는 그것이 죽음의 냄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자 비로소 문턱 너머에 사람이 있는게 보였다. 왕자는 신부를 환영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라며 신부가 곤란해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불을 올리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웃어주어야지. 문턱 너머의 사람은 머리를 가만히 숙이며 조심스레 한 손으로 면사포를 감싸쥐었다. 두 손이 아닌 이유는 다른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기 때문이겠지.

신부는 분명 굽이치는 흑발을 수줍게 흰 면사포로 가린 숙녀였다. 그 아름다운 자태는 죽는 순간까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부끄러워 신랑에게서 눈을 피해 면사포를 잡아내리던 아가씨. 머리카락이 망가지잖아요, 하고 시녀는 급히 신부의 등을 돌리게 시켰다. 왕족의 결혼에 사랑은 없다지만, 왕자는 그녀를 평생이고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그의 죽음엔 주인이 있었으나, 삶에는 주인이 없었기에 감히 그녀에게 제 삶을 맡아주겠느냐고 외칠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저의 주인이 될 사람의 모든 것들을.

문턱을 넘어온 실루엣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번뜩인다. 검은 면사포, 그 아래로 따라 흐른 창백한 백발. 왕자는 발작적으로 단검을 움켜쥐었다. 저것은 신부가 아니다. 결코 신부일 수 없다.

단검따위엔 개의치 않고 실루엣은 무언가를 질질 끌며 천천히, 꾸준히 한 발자국씩 왕자를 향해 다가온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검은 자국이 남았다. 카페트의 털이 밀린 자국이라고 치부하기엔 질척하고 역겨운 흔적이었다. 왕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루 포대가 엎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면사포를 쓴 남자는 제가 끌고 오던 짐덩어리를 놓은 것이다. 이상하기도 하지. 꼭 사람이 엎어져 있는 것 같네. 저 머리카락은 어디서 본 것 같아. 곱게 빗어져 윤기가 물결치던 머리카락은 어디로 가고 저렇게 헝클어뜨린 채 쓰러져 있는걸까? 화색이 완연하던 뺨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네. 신부는 내게 장난치고 있는 건가요? 손을 내밀면 짓궂은 장난을 쳐서 미안하다며 웃어주겠지?

그럴 리가 없지. 이렇게나 피냄새가 진동하는데.

왕자는 무릎을 꿇었다. 입에서는 사람의 소리 아닌 황망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신부의 목을 쥐고있던 손을, 악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벼린다. 후두둑, 하고 핏덩이가 튀었다. 그는 느긋한 동작으로 침대의 가장자리에 무릎을 걸쳤다. 허리를 숙이고, 왕자의 귓가를 가볍게 물며 속삭였다.  문가에 엎어진 시체만 아니었다면, 누군가는 그를 애교넘치는 신부로 보기도 했을 것이다.

'나를 기다렸구나.' 

쇠스랑같이 억센 손아귀가 턱을 감쌌다. 살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온기마저도 그 악마의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왕자는 감히 숨을 삼켜내지 못하였다. 내가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는 과연 공기가 맞는 것인가? 지독한 피비린내. 이는 분명 악마의 숨결일 것이다. 누가 악마의 숨결에선 지옥의 유황불 냄새가 난다고 했던가. 이토록 선명하고 현실적인 피비린내가 나는데.

악마가 손을 뗀 자리에 다섯개의 초승달이 남았다. 초승달은 이윽고 붉게 차올라 흰 거스러미와 울혈로 스러진다. 살이 찢어진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부어서 화끈거려야 하는 상처는 이미 죽은 살이 된 것 마냥 무감각한 이물감만이 맴돌았다. 왕자는 전장에 쓰러진 시체들을 떠올렸다. 채 눈을 감고 죽지 못한 병사들, 그들의 입술은 이질적인 회죽색을 띄우고 있었다. 흘러나온 피로는 파리들이 목을 축이고, 썩은내를 풍기는 내장으론 까마귀들이 배를 채웠지.

'그래야지. 네놈은 언제까지나 내 소유니까.'

그리고 악마는 영혼을 포식하고.

악마는 고개를 비뚜름히 돌리고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둘 사이를 가로막는건 오직 한장의 면사포 뿐이다. 이 한장의 천이라도 없었다면, 돌로 굳어버리고 말았겠지. 왕자는 체념하여 면사포 아래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까슬한 천의 감촉 아래론 어떠한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또 다시금. 자신이 정녕 누구의 소유였는지 뼛속 깊이 외워질 때 까지. 결코 악마에게선 도망칠 수 없음을 되새기면서. 여전히 진동하는 지독한 피비린내와 원망의 냄새를 잊으려 흐느끼며, 왕자는 눈을 감고 두 손으로 면사포를 걷어내었다. 서늘한 천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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