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했을 때 망상

자르반스웨인

"-내가 네녀석과..."
"잤냐고 묻고싶은건가?"

이미 의문의 답은 명확했다. 단지 알고있는 사실을 남에게도 확인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스웨인은 인상을 확 구기며 확답을 내렸다.

"잤군."

"그렇지."

명쾌해서 오히려 화가 난다. 스웨인의 인상은 구겨지다 못해 지옥에서 막 올라온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낸 것도 오랜만일 것이다. 사실, 처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게 아무렇지도 않나?"

"그럴 리가. 내게 지워진 의무만 아니라면 당장 자결로 명예를 되찾고싶은 심정이다."

"그럼 당장 자결하도록."

"앞의 말은 전혀 안 들었군. 내게 화풀이 할 생각이라면 어젯밤을- ...젠장."

결국엔 자르반조차 침착을 유지하길 포기해 버렸다. 아마 끊긴 말은 '어젯밤을 잘 생각해보라' 라는 말이었겠지. 자르반은 억센 손아귀로 베갯잇을 쥐어뜯으며 짓씹듯이 말했다.

"내게도 책임이 있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 일로 국익을 논하려 든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녹서스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르반이 자신을 안았다는 사실로 데마시아를 공박하려면 스웨인도 본인이 적국의 왕자와 관계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테니까. 머리가 조금 식고 생각한다면 자르반은 제가 어리석은 이야기를 꺼냈음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그렇기에 스웨인은 그 사실을 친절히 지적해주는 대신, 기억이 흐릿한 지난 밤에 대해 묻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네놈 머리가 비어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있으니 굳이 내 앞에서 자랑하지는 말도록. 언제부터 적국의 수장에게조차 발정하는 몸이었는 지나 말해보시지."

묻기로 마음먹었다고 했지, 상냥하게 묻는다는 마음은 단 한번도 먹은 적이 없다. 자르반의 죽일듯한 시선이 쏠렸으나, 스웨인은 말없이 이를 드러내며 제 허벅지에 잔뜩 남은 울혈과 말라붙은 정액을 가리켜보였다.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소리이다.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물론 자르반의 기준으로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일이기에 남들이 볼 때에는 어떨지 알 수 없다.-짓으로 할 말이 곤궁했던 왕자는, 넓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일어나보니, 내가 네녀석을 안고 있더군. 맨 몸으로. 기억이 나질 않는 건 피차 마찬가지이지 않나."

"이 자리에서 널 죽이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의미로군?"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더러운 흑마법사!"

자르반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졸지에 왕자의 거근과 시선을 마주하게 된 스웨인은, 잠시 침을 삼키더니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저게 내 안에 들어가기나 하는건가? 아니 이미 들어갔었지, 망할 왕자놈.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로 스웨인이 명령했다.

"...앉아라. 그리고 옷을 입어라."

"맨 몸이라면 어젯 밤에도 보았을텐데."

"내 앞에 흉물을 들이대지 마라, 왕자. 네놈과의 대화가 필요하지, 네놈의 물건과는 할 대화가 없다."

"그놈의 대화라는 걸 시도할 때마다 네녀석이 훼방을 놓지 않았나?"

모든 말이 사실이다. 스웨인은  짧고 간결한 한마디로 자르반을 앉게 만들었다.

"물어뜯어 버리겠다."

건장한 남자가 다시 이불을 끌어당기는 부스럭거림. 스웨인은 그 쪽에서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며 기억을 정리해보았다. 이토록 눈부신 빛은 아침에나 볼 수 있는 광채이다. 원수와 관계를 가진 날 아침에 이런 빛을 보고싶진 않았는데.

시작은 정전협정을 기념하려 열린 연회였다. 연회, 대장군이 굳이 그런 것까지 나가야 하냐는 의문이 들었으나, 리그에서는 양국의 수장이 미소지으며 악수하는 상투적인 광경을 원하는 듯 했다. 리그의 비위를 맞춰두어 나쁠 건 없다. 언젠간 이 일을 언급하며 녹서스가 이권을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연회에 술은 빠질 수 없으니 몇 잔, 딱 몇 잔정도 마시기야 했었다. 겨우 그정도로 적국의 왕자랑 할 만큼 이성을 잃진 않는다고 스웨인은 자부했다. 무언가의 약물이 들어간 게 아니고서야. 의심가는 약물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주워섬겨 보다가, 스웨인은 깊게 한숨을 내쉰다. 이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왕자와 자버렸는데.

"자르반 라이트실드 4세."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무심히 불러보았다. 웬일로 저 놈이 이름을 통째로 부르지, 라는 의심과 함께 자르반은 삐딱하게 대답했다.

"무엇이냐."

"네놈과 잔 것은 기정사실인 듯 하니, 더 의심하지 않겠다. 외부에 사실을 은폐할테니 협조하도록."

"처음으로 옳은 말을 하는구나. 물론 협조하겠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앞으로는 이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 말을 들으니 언급하고 싶어지는데."

"진심인가?"

"진심으로."

"진심으로 네녀석이 어젯 밤 어떻게 울었는지 알고싶다는 말이겠지?"

"닥쳐."

스웨인은 입술을 뜯으며 자르반을 확 노려보았다. 몸을 갑자기 일으키자 아랫쪽에서 질척한 이물감이 느껴진다. 뒷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쳐 잠든 모양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몸을 더 일으키지도, 더 눕히지도 못한 채 스웨인은 그대로 제 아래를 손가락으로 살짝 훑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 받아내었을 욕망의 응어리가 묻어나온다.

"그건 내가 처리하겠다. 아무튼... 내가 한 일이니 말이지."

수치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자르반이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한참동안이나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던가."

라며 스웨인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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