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자 조각글

白蹀紛紛雪(백접분분설) 上

흰 나비는 날리고 날리는 눈과 같고

행복회로 by 물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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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뱉는 모든 숨이 하얗게 변하는 계절이었다. 한때 북반구의 가장 빛나는 도시 중 하나였던 곳은 차마 분간 못할 살덩어리와 체액에 뒤덮인지 오래였다. 새싹 돋는 시기가 머지 않았으므로 내버려두면 전염병이 창궐하게 될 위험이 컸지만, 아군의 시신도 겨우 수습하는 와중에 크리처의 잔여물을 치울 여력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이곳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달려드는 크리쳐의 절반 정도가 숨이 끊어지면 먼지처럼 변하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그 먼지같은 것이 유해물질인가 아닌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차피 일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장의 생존과 승리다. 상부의 명령에 따르며 오늘 살아남고 내일 살아남다 보면 무엇이든 자연히 잊히는 법이었다. 당장 누군가 정신이 나가 멀쩡한 보급식 말고 저걸 먹겠다고 소란을 피운대도 관심 가질 사람은 없었다.

대신 한 명 정도 예외가 있을 수는 있겠다.

갑각류처럼 생긴 크리쳐의 잔여물 위에 앉아 마지막 담배를 태우던 진 실버는 그 한 명, 이예현을 떠올렸다. 예현은 다양한 유형의 사람이 모인 부대 안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선한 인간이었다. 나서서 멍청한 짓을 하는 놈에게까지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여 걱정할 정도로. 사실 선한 성품보다 눈에 띄는 건 이곳의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는 그의 외모였으나 진이 생각하기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연명해 주는 건 얼굴이 아닌 전투 실력이니까. 전투 실력만 따지면 예현이야말로 이곳과 어울렸다.

진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뒤 뱉어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진. 예현은?"

"아직. 그림자도 안 보이네."

당연하지만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고 진과 같은 방향에 눈길을 주었다. 임시로 세운 바리케이드 너머 무너지고 갈라진 건물, 도로, 본래의 형체를 잃은 자동차 따위만 붙박인듯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사람의 모습 같은 건 없었다.

남자, 강주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한결 착잡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큰일이네. 곧 눈도 올 것 같은데."

대꾸하지 않았으나 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몇 시간 전 분대가 퇴각하던 때에 예현은 최후미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사마귀처럼 생긴 앞발에 낚여 크리쳐 무리로 끌려가는 군인 하나를 뒤쫓는 것이었다. 소란을 감지하자마자 후미로 향한 진과 주가 나머지 크리처를 다른 쪽으로 유인했고 이후로 크리쳐 떼는 더 이상 분대를 뒤쫓지 않았으나, 예현은 이미 보이지 않게 된 뒤였다.

전쟁터에서의 낙오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또 탈 것 없는 맨몸의 보병에게 기상 악화는 얼마나 치명적인 죽음의 패인가. 상황은 나쁘기만 해서, 예현이 사라진 방향으로 공습이 예정되어 있기까지 했다. 한참 전에 세웠던 작전을 일개 군인 때문에 중단할 리는 없으니 앞으로 두어 시간 안에 그 일대가 쑥대밭이 되리라는 건 자명했다. 상부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도시를 수복하길 원했으므로.

주는 폐허인 도시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낙오한 군인(의 시신)을 찾는 건 공습에 이어 다른 부대가 투입되는 지상공격이 끝난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예현의 실력은 그를 아는 모두가 인정할 정도이지만 폭격 앞에서 군인 한 명이 뭘 어쩔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 후속 부대들에는... 주는 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진이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는 어느새 더 태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는 꺼져가는 불빛을 미련없이 놓았다. 치이익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가운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공습 범위에서는 벗어났기를 빌자고."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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