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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생일 축전, 판여가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다. 해가 뜨기 직전의 가느다란 빛이 새까만 어둠 자락 사이로 비추고 있었다. 식은 별 가루가 채 떠오르지 못하고 허공에 떠다녔다. 하여가가 눈을 뜬 시간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으며, 어젯밤 꽤 왁자지껄하게 오늘을 맞이한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그리 오래 잠든 편도 아니었다. 지난밤 자정이 되자마자 가족들은 준비해 둔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간소한 생일 축하파티를 해주었다. 샴페인에 어울리는 치즈케이크와 밤에 먹기 부담스럽지 않은 핑거푸드 등을 차리고, 가족들끼리만 모여 앉아 하여가의 생일을 축하하며 시간을 보냈다. 최장기 가왕집안이지만 음악대장네는 늘 이렇게 가족의 생일날은 가족끼리만 모여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미 어제저녁 이후부터 마시기 시작한 셈이니 자정 무렵에는 모두 꽤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이기도 했다. 토밤과 아연이 샴페인을 터트리고 젠카와 매일이 그 뒤에서 여러 병의 샴페인을 두 손에 쥐고 들고 오고 있었고 민장과 걱정, 돈크가 간단한 핑거푸드 등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장미가 식탁에 새로운 꽃을 꽂고 있었고, 봄비와 일상이 케이크를 준비했다. 하여가를 데려오는 건 판베였다.

여가는 반투명한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빛을 통해 옆에 누운 판베를 볼 수 있었다. 해가 뜨지 않긴 했지만,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의 어둠은 아니었다. 여가를 품에 가둔 채로 잠든 터라 여가의 몸 위에 판베의 팔이 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여가는 몸 위에 얹어진 팔이 떨어져 판베가 잠에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반쯤 일으켜 한 손을 얼굴에 괴고 판베를 바라보았다. 말간 얼굴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환하게 밝은 햇살 아래에서만이 가장 제빛을 발하는 투명한 하늘빛 머리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새벽빛 아래에서도 여전히 반짝이는 것만 같다. 여가는 손을 뻗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밤하늘 별빛이 손에 담아지기라도 하듯이.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안에 감긴다. 살짝 벌려진 채 색색 대던 입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잠결에도 부드러운 호선을 띄었다.

 

“바보 같아.”

 

잠결에도 누구 손길인지 알고 헤실거리는 모습이 제법 충족감을 일으켰다. 확 양 볼을 잡아당기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잘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 상황이 꽤 맘에 들어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옮겨 올라간 입꼬리가 있는 볼을 작게 콕 찔렀다. 말랑한 것이 하여가는 꽤 맘에 들었다. 하나같이 맘에 안 드는 구석이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웃고 있었더니 허리 부근에 얹어져 있던 판베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여가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는 여가의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고는 머리를 비볐다.

 

“깼어?”

“우응... 생일 축하해 여가야...”

 

잠도 덜 깬 상태로 다시 한번 생일을 축하해주는 모습에 그만 푸핫 하고 웃음이 나고 말았다. 끌어안겨진 상태로 웃음을 터트리니 가슴팍에 안겨있던 얼굴이 고개를 들어 여가를 쳐다보았다. 잠이 덜 깨 비몽사몽 한 상태로 쳐다보는 얼굴이 귀엽다고 느껴졌다. 부스스한 판베의 머리를 깔끔하게 쓸어 넘겼다. 다시 한번 머리칼을 만지는 손길에 거의 감고 있던 눈이 떠지고 아직 졸음이 남아있으나 사랑이 가득한 눈동자가 사랑이 가득한 다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말, 몇 시간 전에 했잖아.”

“그래도. 네가 태어난 날이 얼마나 소중한 날인데.”

 

몇 번이고 말해도 부족해.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에, 시선에 거짓 없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충만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여름날 창가에 내놓은 작은 화분의 흙에 한가득 물을 줄 때처럼. 마른 흙이 물을 가득 흡수하듯. 하여가는 늘 사랑을 갈구하는 흙이었으나, 판베는 항상 그 흙을 충분히 적셔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하여가는 자신을 갈증을 적셔주는 사랑을 향해 고개를 숙여 입맞춰 줄 수 밖에 없었다.

 

 

 


 

생일날의 오후는 맑은 날씨였다. 청명하고 맑은 하늘에, 적당한 구름. 여전히 활짝 핀 벚꽃의 끝자락이었다. 길 건너편에 벚꽃 나무가 울창한 카페의 야외테라스에 판베와 여가는 앉았다. 바람에 따라 사르르 흩날리는 벚꽃이 아름다웠다. 근처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돗자리를 들고 와 눕기도 하고, 아이들은 꽃잎을 따라 꺄르르 웃으며 쫓아다니고,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러 신이 나 주인을 끌고 뛰는 강아지들도 보였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판베는 그러한 풍경에 관해 얘기하며 블루레몬에이드를 휘적이며 여가에게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여가는 분홍빛 장미차를 마시며 판베가 말한 그러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고 평화롭지만 소중한 순간이었다. 판베는 여가와 관련한 모든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또한 기억될 것임을 알았다. 카페에서 이국적인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판베는 살아가며 느낄 모든 아름다운 순간에 여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본인을 빤히 쳐다보는 판베의 시선에 여가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냥...?”

 

의뭉스레 눈웃음을 치며 얼버무리며 말을 넘기려는 판베의 모습에 여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여가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 넘기려는 것은 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이 본인을 생각해서라는 의도라고 해도. 할 말이 있으면 해. 숨기지 말고. 하여가의 말에 판베는 잠시 말을 골랐다. 판베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편이었다. 은근한 본인의 통제적인 성격 또한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타인에게는 그런 성격이 발휘되는 것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으나, 여가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에 본인이 떠올린 생각에서 한 발만 삐끗해도 본인의 시선과 손길이 닿는 곳에만 여가를 두고 싶다는 생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았다. 어떻게 해야 이 복잡한 감정의 덩어리를 오해 없이 보여줄 수 있을까. 자신의 이 사랑과 집착이 섞인 감정의 덩어리를 잘 조각해서 예쁜 형태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저 그 덩어리 채로 보여져 버린다고 하더라도 하여가는 아마 찬찬히 살펴보고 본질을 꿰뚫어 보고 미소 지어 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연인의 마음이라.

 

“그냥 여행을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여행?”

“장미정원이 아름다운 곳이라던가, 온통 새하얀 건물들과 그림같이 투명한 바다가 있는 섬이라던가... 그런 풍경들만 생각했을 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거기에 네가 있으면 잊히지 않을 것 같아서.”

 

하여가의 시선이 판베를 여전히 쳐다보며 계속해보라는 듯했다. 판베는 마시고 있던 블루레몬에이드의 빨대를 손으로 돌리며 불완전한 생각의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이름답다는 것은 나에게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해. 그냥 그렇구나 싶은 감상? 그런데 거기에 네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나하나가 모두 잊지 못할 순간일 거 같아서...”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말이 꼬인다는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청산유수 같더니. 허공을 배회하며 여러 제스쳐를 취하던 손을 꽉 쥐었다. 이러니저러니 돌려 말해도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너를 너무 사랑해서 평생 모든 순간에 함께하고 싶나봐.”

 

그러니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저것 하나였다. 이 풍경을 보며 들었던 생각의 본질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들었던 생각의 본질도. 또한 오늘 새벽녘 잠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입을 맞추며 했던 생각의 본질도.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며 판베의 얘기를 듣던 여가의 손은 이미 얘기 중반에 멈춰있었다. 얘기를 다 들은 하여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을 뒤집었다. 손. 그 말에 홀린 듯 하여가의 손바닥 위에 판베는 자기 손바닥을 맞대어 올렸다. 판베의 손이 올려지자, 하여가는 올려진 손을 깍지 껴 꼭 잡았다.

 

“매년 가족이랑 보냈으니, 한 번은 둘만 보내도 괜찮겠지.”

 

내년엔 여행이라도 갈까. 오늘은 벌써 반 이상 지났고. 하여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꼭 마주 잡은 손깍지 위로 향해있었다. 마주 잡은 손의 온기에, 감촉에, 판베의 시선 또한 꼭 마주 잡은 손깍지로 향해있었다. 꽉 마주 잡은 형태에 귓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장미정원이 예쁜 곳부터 먼저 가자. 이 노래에 맞는. 카페의 잔잔한 노래를 배경으로 들리는 약속이었다. 모든 순간이 기억날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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