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ítĭum
시작,
Ich bin das A und das O, der Erste und der Letzte, der Anfang und das Ende.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 요한계시록 22장 13절
오래된 종이와 가죽의 냄새가 고즈넉이 쌓여 내린 곳, 도서관에는 고요가 적설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평온한 공기를 가르고 책장이 팔랑대며 넘어가는 소리, 깃펜이 사각대며 양피지를 긁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검은 머리칼의 아이 옆에는 책이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녹색으로 물든 망토보다 더 밝은 색의 눈동자는 양피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양 귓불에서 눈동자와 꼭 같은 빛의 보석이 반짝였다. 아이는 책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며 양피지에 깃펜으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 건너편에서 밀색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 늘어뜨린 아이가 그에게 이따금 시선을 두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몇 시간 전부터 저렇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 알아차리지 못하는 쪽이 더 이상할 테지. 그러나 아델린 포스포필라이트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눈앞의 과제에만 집중했다. 옆얼굴이 종종 따끔대는 듯했으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마침내 양피지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아델린은 창밖이 어둑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건너편의 아이는 어느덧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동그란 이마가 양피지에 닿을 듯 말 듯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저러다 잉크병을 엎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아델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도 저물었고 과제도 끝냈으니 슬슬 돌아갈 참이었다. 그가 일어서는 기척에 꾸벅대던 아이가 고개를 화들짝 들었다.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연녹빛 눈동자를 무심히 지나친 아델린은 책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참고했던 책을 모두 제자리에 놓아두고 양피지와 깃펜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닫히는 문 뒤로 작게 콩,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야, 하고 흘리는 목소리 또한 이어졌다. 아델린은 이미 문에서 멀어져 걸음을 옮기고 있었기에 그 소리를 들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단정한 발걸음 뒤로 종종대는 가벼운 발소리가 따라옴에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언제까지 따라올 셈이지. 내가 기숙사로 향한다고 해도 따라올 셈인가. 아델린은 그의 뒤에서 이어지는 발소리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물론 지금이야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기에 그럴 일은 없겠으나, 한 달 전부터 꾸준히 그의 주위에서 맴도는 이는 그와는 달리 노랗게 물든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델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을 읽던 자신에게 불쑥 내밀었던 노란 꽃다발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 뭐라고 했지? 그 이후로도 연녹색 눈동자의 아이는 그의 시야 언저리에서 알짱… 아니, 서성대곤 했다.
어차피 연회장으로 가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이변은 예기치 못한 때에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상상하지 못한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들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푸른빛에 아델린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곧이어 앗,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약한 충격이 그의 등으로 전해져 왔다. 그제야 아델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밀색 머리의 아이는 발갛게 물든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에도 시야에 서린 푸른빛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임에도 사라지지 않고 눈꺼풀에 아른한 상을 맺으면서. 그 빛은 한겨울의 눈처럼 시리게 스며드는 듯도, 초봄의 새싹처럼 부드럽게 피어나는 듯도 했다. 한 마디로는 형용할 수 없는 색채가 차츰 걷히면 그곳에 있는 것은 하나의 문이었다. 얼어붙은 듯, 혹은 피어난 듯한 눈꽃이 아로새겨진 문에서는 푸른빛이 은은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눈꺼풀에 맺혀 떨어지지 않는 그 빛이었다.
노란 교복을 입은 아이는 어느새 아델린의 옆으로 다가와 문을 기웃대고 있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호기심을 담고 반짝였다. 아델린은 자신의 옆을 흘끗 보다가 문을 올려다보았다. 크기는 성인 둘 정도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 손잡이는… 아델린은 눈을 깜빡였다. 정교하게 조각된 듯한 문에는 손잡이가 보이지 않았다. 암호를 대어야 열리는 형식인가? 그보다 이런 문이 호그와트에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찬찬히 살피고 있자면 아델린의 시야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새하얗게 피어난 눈꽃이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은은한 청색을 흩뿌리기도 하는 모양이 월장석을 세공해 만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묘한 빛의 눈꽃은 아델린의 눈높이에 자리해 있었다. 손을 뻗으면 그대로 닿을 듯한 위치. 푸른빛은 그곳에서 가장 짙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델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가 멈칫했다. 이 너머에 어떠한 것이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만일, 이것이 교칙을 어기는 행위라면? 위험한 곳, 혹은 금지된 구역으로 들어가는 통로라면?
그럼에도 그가 이윽고 손을 뻗어 눈꽃을 건드린 것은, 어쩌면 그 옆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쌍의 눈동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확한 이유는 아델린 자신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 돌연한 행동의 이유를 규명하지 못했다. 예비되지 않은 이변 앞에서 원칙은 무용했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처럼 갑작스레 다가와 ‘우리’를 이끌었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존재하여 우리의 세대에서 윤곽을 드러냈던 “예언”처럼.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우리라 생각했던 눈꽃은 은은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평균의 체온보다 약간 서늘한 정도, 꼭 아델린의 체온과 닮은 온도였다. 심장이 두 번 뛸 만큼의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특이한 장식이었나 하고 아델린이 손을 떼려는 순간. 눈꽃이 이지러지며 문 중앙에 실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옆에 서 있던 아이 또한 어느새 아델린과 같이 자신의 눈높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이지러지는 또 다른 눈꽃이 보였다. 두 사람이 같이 열어야 했던 것이었나. 아델린은 짤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심장이 두 번 뛰고 나면 문은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푸른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들어오라는 듯 서 있는 문을 응시하며 아델린은 고민에 잠겼다. 지금이라도 다시 닫아야 하나. 혹여나 이 안에서 감당하지 못할 위험이라도 튀어나온다면… 그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신 눈을 반짝이던 밀색 머리의 아이가 문 너머로 발을 딛고 있었으므로.
“잠깐.”
아델린은 무심코 아이를 불러 세웠다. 아니, 불러 세우려 했다. 그러나 노랗게 물든 교복 자락은 푸른빛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하…. 아델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1년 길지 않은 그의 일생 최대의 위기가 눈앞에 도래해 있었다. 주변에서 계속 알짱, 아니 맴돌던 동급생을 구하러 갈 것인가, 모르는 체 지나갈 것인가. 고민은 짧았다. 아델린은 얼굴을 한껏 구기며 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오묘한 푸른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깜빡. 눈을 감았다가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펄럭이는 교복 망토의 노란색 안감이었다. 멀리 가지는 않았군. 아델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가자고 말하려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앞에 서 있는 아이가 흐트러지는 머리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풍경을.
소설에나 나올 법한 정경이었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나무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가지각색으로 흐드러진 꽃잎에서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의심할 여지 없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꽃의 향기였다. 향수나 마법으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향이 아닌 자연스러운 향이 코끝에 스몄다. 아델린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신기루와 달리 눈꺼풀 너머로 흩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통해 들어온 문처럼. 딛고 서 있는 땅을 내려다보면 그곳은 푸르른 녹음이었다. 시선을 들어 올리면 저 멀리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곳이 보이기도 했다. 스치는 바람은 서늘한 듯 따스했다.
아델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시야에 담기는 것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이 섬세하면서도 꿈과도 같이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영혼 한 켠에 스며들어 있던 문장이 문득 아델린의 머릿속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없는, 그저 그가 태어남으로 인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앗아가는 것은 시작의 봄.’
‘꽃 필 수 없으니 만개할 여름 없을 것이며, 결실 볼 가을 없을 것이다.’
‘종내에는 얼어붙을 것이 없어 겨울마저 사라지리라.’
천천히 내쉰 숨에는 무엇이 담겨 있던가. 아델린은 알 수 있었다. 이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꿈도, 환각도, 마법도 아닌 실재. 이성이나 논리에 의해 수긍한 것이 아니었다. 형태 없이 모든 이의 영혼에 스며든 예언처럼 그저 순응하게 되는 것이었다. 문득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형태 없이 어렴풋하게 존재하던 예언은 서서히 뚜렷해지고 있었다. 또한 아델린은 알 수 있었다. 이 공간에는 멸망이 도래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저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태어나 첫 숨을 터뜨리며 호흡하는 법을 알게 되듯이.
겨울도, 봄도 아닌 계절. 얼어붙은 듯 피어나는 생명. 서늘한 듯 따스한 바람. 서리가 내려앉은 녹음. 사계가 사라져 12월이 끝나는 날에도 평화로울…
“13월 같아.”
옆에서 작게 들려온 목소리가 상념에 잠겨있던 의식을 일깨웠다. 아, 이곳은 열두 달과는 다른 시간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열두 달이 사라진다고 해도 남아있을 수 있겠지. 아델린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풍경이 눈꺼풀 너머로 뚜렷한 상을 남겼다.
“이만 돌아가지.”
아델린은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고서 흐트러진 밀색 머리칼에 시선을 두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두 사람이 들어왔던 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정확히는 푸른빛을 띠는 입구만이 보일 뿐이었으나. 아델린은 그곳을 향해 고갯짓하고서 먼저 등을 돌렸다. 녹색으로 물든, 이름 모를 들풀이 그의 발아래에서 사박대는 소리를 내었다. 그 뒤로 다소 급히 옮기는 듯한 작은 발소리가 뒤따랐다.
다시금 푸른빛에 감싸였다가 눈을 뜨면 그곳은 호그와트의 복도였다. 뒤를 돌아보면 아델린을 뒤따라 나오는 아이 뒤로 조금 흐릿해진 문이 보였다. 아델린은 문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연녹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너.”
동그란 눈동자가 응답하듯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지?”
아델린은 상대의 이름을 몰랐다.
“네?”
깜빡이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저기서 더 원형이 될 수도 있던가. 아델린은 무감정한 얼굴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저, 저는 아델린 이름을 아는데….”
“그래서? 그것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지?”
입학 초기부터 외모니, 가문이니 여러 이유로 화제가 되었던 당사자로서 아델린은 눈앞의 학생이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이 대수롭지 않았다. 호기심을 확인하고자 다가왔던 많은 이들은 아델린의 냉랭한 반응에 돌아서고는 했다. 그러니 계속해서 주변을 알짱, 아니 서성대는 아이가 그로서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별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아델린이 아이의 이름을 알아야 했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아델린을 흘끔, 올려다본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르네, 르네 레메디아….”
“그래, 레메디아. 잠시 대화가 필요한 듯하니 따라오도록.”
고개를 짤막하게 까딱인 아델린은 답도 듣지 않고서 먼저 등을 돌렸다. 그의 등 뒤로 서서히 옅어져 주변과 동화되는 문이 얼핏 보였다. 멀어지면 보이지 않게 되는 건가. 그리 생각하며 아델린은 걸음을 옮겼다. 저기, 잠깐만… 르네가 발걸음을 재게 놀려 그의 뒤를 쫓았다.
짙은 푸른빛이 내려앉은 바깥에는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나뭇잎이 떨어진 가지는 순백으로 뒤덮여 있었고, 얼어붙은 결정이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고 반짝였다. 서늘한 공기에 옆에서 걷고 있던 르네가 어깨를 움츠렸다. 사박, 두 사람의 발아래에서 희게 쌓인 눈이 작은 소리를 내었다.
아델린은 한동안 말없이 눈을 밟으며 걸어갔다. 최근에 찾은 산책로는 걸음 하는 사람이 적어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었다. 아무도 밟지 않아 깨끗한 눈밭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하나둘 찍히기 시작했다. 자국이 남지 않은 곳을 보며 걷고 있자면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부유하던 생각이 점차 가라앉아 겹겹이 쌓였다. 옆에서 작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올 때야 아델린은 입을 열었다.
“너도 보았겠지, 그 문.”
“…….”
곧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음에 아델린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추위에 뺨이 발갛게 물든 르네는 손가락을 꼼질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손을 들어 제 뺨을 꼬집는 그의 행동에 아델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의미지? 르네 레메디아라는 이름의 동급생은 이따금 아델린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물론 제대로 본 적은 얼마 없었지만.
“네…. 봤는데, 호그와트에는 원래 그런 게 있나요?”
머뭇대며 돌아온 목소리에 이번에는 아델린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 또한 호그와트의 신입생. 탐험 따위는 취향이 아니었기에 그가 알고 있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도서관에서 연회장으로 향하는 방향의 복도는 그가 자주 오갔던 곳이었다. 게다가 “호그와트의 역사” 책에도 그러한 방의 존재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아델린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호그와트의 마법적 장치나 공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럼 그 문은 뭐였을까요. 그… 공간도 그렇고.”
“…….”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눈처럼 내려앉아 쌓였다. 아델린은 주변에 서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 문 너머에서 보았던 나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에게는, ‘우리’에게는 이 모습이 자연스러웠고 당연했다. 자연의 이치를 벗어났음에도 생생히 존재하던 수목들.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그야말로 “순리”에 어긋나 있던 풍경. 아델린은 그곳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그곳에 들어서기 전 보았던 푸른빛과 같이.
“알아보아야겠지. 그 문이, 그 공간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본다고, 하면….”
“도서관에 그와 관련된 자료가 하나쯤은 있겠지. 그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처럼 어떠한 곳인지도 모르는 장소에 무턱대고 들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르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무언가 말하려 입을 우물대는 듯했으나 무심한 아델린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다만. 한 가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있더군. 그에 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아야겠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 그게 뭐였나요?”
아델린은 가만히 르네를 응시했다. 그 공간에는 멸망의 발길이 닿지 않으리라는 것. 그것은 직관에 가까운 깨달음이었기에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느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하므로. 그는 허황한 말을 내뱉는 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
르네는 눈을 깜빡이며 아델린을 응시했다. 연녹색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으나 아델린은 그 시선을 무심히 마주할 뿐이었다. 그때,
꼬르륵.
작지만 또렷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울렸다. 소리의 장본인 르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 보니 문을 발견한 바람에 연회장을 지나치고 바깥으로 곧장 나왔던가. 르네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아델린은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성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도록 하지.”
“앗, 잠깐….”
먼저 걸음을 옮기는 아델린의 뒤로 눈이 사박사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하게 내쉰 숨이 새하얀 김으로 화해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을 누군가와 같이 걸은 것은 입학한 이래 처음이었다. 아델린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두 사람이 함께 발견한 문. 두 사람이 함께 열어야 했던 문. 두 사람이 함께 들어섰던 문.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이 또한 어떠한 연유가 있는 것이리라. 두 사람이 함께해야 했던 이유가. 그로서는 아직 알지 못했으나.
“13월의 문이라고 부르도록 할까.”
“네?”
아델린의 중얼댐에 어느새 옆으로 온 르네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아델린은 옆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리 급하게 쫓아와야 했던 이유가 있었나.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였으나 두 사람은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있었다. 아델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와 내가 발견했던 문, 그것을 13월의 문이라고 명명하도록 하지.”
‘13월 같아.’
12월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공간. 그곳으로 통하는 문. ‘우리’가 그것을 발견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앞에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고, 무엇을 느끼게 될까. 나란히 걸음을 옮기는 아델린과 르네의 위로 새하얀 눈꽃이 달빛에 조용히 반짝였다.
첫 번째 학년, 예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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