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pe(2017)
2017 합작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코리아, 13p)
01
테란 자치령의 수도. 아우구스트그라드에서는 추가적인 식민지 건설을 위해 탐색대를 보냈다. 탐색대는 5년 가량을 워프하며 물과 유기물을 찾아 떠났고, 계속해서 실패했다. UNN에서 돈을 낭비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쯤 탐색대는 살기 좋은 땅을 찾아내었다. 녹음이 우거지고 풀이 돋은 땅. 행성은 지구보다 조금 컸고 중력이 과하지도 않았다. 맑은 공기에는 독성이 없어 호흡기가 필요없었고. 물이 풍부해 쉬이 가물지도 않았다. 살기 좋은 기후. 새로 발견된 식민지는 희망과 가능성의 땅이었다. 행성은 어떠한 건축물도 점막이 없어 순결했다. 전쟁도 없고, 땅주인도 없다. 빈민들은 이민을 자처했다. 대지는 기름져 농사짓기에 좋았다. 중립생명체들은 작고 순하여 사냥하기 좋았다. 정치분쟁도 차별도 없는 자연의 땅. 왕복선을 타고 이주민들이 도착했다.
자치령의 지원이 줄어들고 행성이주 열풍이 시들해질무렵, 식민지의 자연 광산에서는 풍부한 광물이 발견되었다. 테란들은 프로토스가 칼라를 향유했던 때가 무색해질 정도로 번영했다. 매일같이 부가 쏟아졌고 테란은 풍요로운 행성 하나를 위해 내분했다. 이주민들은 뒤늦게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배척했다. 노숙자와 어린아이들은 납치되어 광산에 노예로 끌려갔다. 자치령의 사령부도 다르지는 않았다. 시민들이 납부한 광물들은 병력이 되었고 서로를 겨누는 총칼이 되었다. 로비를 비롯해 수많은 암투가 있었고,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행정관 자리에서 밀려난 장군이 용병을 불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령관 드림은 한숨을 쉬었다. 총독에게 불려서 이 행성에 온 이후로 평온했던 날이 없다. 식물들은 불타고 황갈색의 토양으로는 피가 스며든다. 드림은 잠시 농사짓기에는 더 좋은 땅이 되었기를 바랬다. 그리고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맨땅을 일구며 사는 사람은 없다. 드림은 모니터를 켜서 함장이 제출한 보고서를 읽었다. 상대 멀티의 건설로봇들을 잡았으니 이제 유리해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드림은 다르게 해석했다. 상대가 이번에 밀고 들어올 것이니 위험하다. 화면을 넘기던 드림은 중앙부에서 정찰을 하던 해병이 쓰러진 것을 발견했다. 드림은 사령부에 명령을 보내 스캔을 뿌릴 것을 지시했다. 잠시 뒤 스크린 위로 적군의 모습이 나타났다. 스캔에 의하면 적의 해병들은 붉은 철을 쓰고 있었다. 드림은 승산을 가늠했다. 병력 구성은 비슷한데 업그레이드가 밀리고 있어. 그래도 우린 전차가 많다. 드림은 전차 배치를 정비할 것을 지시했다. 지정한 포인트로 이동하고 각 전차들은 공성모드로 전환할 것. 드림은 무전 채널을 돌렸다. 해병들은 자극제를 준비한다. 상대병력이 지근거리로 접근했을 때, 드림은 상대의 전차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림은 패배를 직감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그리고 마루는 퇴각했다.
02
"사령관님! 적 부대가 퇴각합니다!"
"알았다. 함장. 정비하고 다음 공격을 살피도록. 이상."
드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 사라 출신 용병. 그가 아는 마루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같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치기에 가까운 고집이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경험에 근거한 판단이었지 멍청해서가 아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더욱 아니다. 이제와 물러설 것이면 그렇게 악랄하게 하지도 않았겠지. 초장부터 병영을 앞세워 본진을 타격했던 자다. 급하게 벙커를 지어 수습했지만 상대는 마루의 특수부대. 응징자 유탄이 꽂히자 수리하던 건설로봇들이 죄다 터져서 날아갔다... 기억을 짚어보던 드림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마루는 퇴각했다. 이긴건가? 하지만 드림은 전쟁을 알았다. 스캔을 통해 해병과 불곰의 슈트가 붉은 철로 바뀐 것을 확인한 참이었다. 이제 와서 무슨 수작이지. 멀티를 펴서 병력을 더 모으는 것도 아닐 것이다. 몇주 전 의료선 드랍으로 건설로봇을 많이 죽였으니 훗날을 도모한다면 이쪽이 유리하다. 드림은 계속해서 복기했다. 스캔을 다시 뿌려서 상대를 확인하고 상태를 점검했다. 병력 수는 상대가 조금 더 많다. 구성도 비슷하고 업그레이드는 오히려 앞선다. 며칠 내 머리를 쥐어뜯는 드림에게 마루의 메시지가 날라왔다. 투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약속된 시각에 흰 깃발을 들고 나타난 마루는, 전혀 항복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싸우자고 온 거 아냐. 본론부터 하지."
함장은 못들은척 계속 몸수색을 지시했다. 마루는 못마땅하다는 듯 드림을 노려보았다. 드림도 마루를 보았다. 작다 못해 왜소한 몸집. 의심많은 함장은 무장이 나오지 않자 옷을 벗기려들었다. 마루는 사이오닉 에너지도 있는데 아예 EMP탄환을 쏘지 그랬냐며 빈정대었다. 드림은 마지 못해 그를 말렸다. 드림은 자신이 이를 중재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사관학교에서 개망나니쯤으로 취급받던 자신이다. 생도들이 개과천선했다며 박수치겠고 특히 사령관님이 보셨다면 놀랐겠지. 드림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다들 정신이 나갔어.
"본국은 우리를 버렸다." 마루가 말했다.
그쪽은 밴시 때문에 스캔을 뿌린 적이 없겠지. 우리쪽 뒷마당에서 점막이 발견되었다. 이어지는 마루의 설명에 드림은 함장을 보았다. 함장은 사령부에 스캔을 지시하고는 스크린을 내렸다. 스크린이 저글링과 바퀴와 뮤탈리스크 떼로 가득찼다. 드림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주민들이 일구었던 영역들이 사라졌다. 점막이 사방에 뿌리를 내렸다. 테란이 어리석은 역사를 번복하는 동안 저그는 천천히 아가리를 벌리고는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통째로.
"그리고 잘나신 행정관 나으리는 도망갔다.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그래도 순순히 굽힐 사람이 아니었는데. 상대도 어른이 되었겠거니 생각하던 드림은 이상함을 느꼈다.
"넌 프로토스 쪽에 동맹이 있을텐데."
"에스오에스는 나와 내 직속부대의 승선만을 허락했다."
확실히 스캔에는 각기 다른 문양이 잡혔었지. 드림은 구호목록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떠올렸다. 다른부대의 용병들. 광부들. 그리고 이주민들. 뮤탈이 저렇게 많은데 다 죽으라는 소리다. 마루는 명령하듯 말을 이었다.
"우리 전부를 받아준다면 저그와 싸우는 것을 돕겠다."
03
다음날이 되자 드림은 피가 터진 주머니를 볼 수 있었다. 붉은 빛이 도는 흐물흐물한 살점은 분명 저그의 시체였다. 해병은 밤에 보초를 서다 대군주를 보고 쏘았다며 보고를 마쳤다. 자극제를 써서 잡았겠지. 드림은 앳된 얼굴이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찬 것을 보았다. 그래그래. 드림은 그를 칭찬을 하고는 돌려보냈다.
"진짜였군요." 오싹하다는 듯 제 팔을 쓰는 함장을 보며 드림은 쓰게 웃었다. 어제 스캔으로 다 확인해놓고 유난은. 드림은 버튼을 눌러 지도를 켰다. 홀로그램들이 나타나며 지형이 되었다. 정신체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영역의 침공이었다. 점막종양이 부푼다. 팽창한 종양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늘에는 대군주들이 퍼졌다. 그것들이 멈춰선 자리에는 진득한 점액질이 쏟아졌다.
"이대로면 중앙지대가 전부 점막으로 덮힐 겁니다." 함장이 말했다.
"일단 병력을 돌려야 해. 하지만 수비가 될지 의문이군." 무기고가 부서져 당장 토르를 충원하기는 무리다. 시간과 자원을 낭비시켜야한다. 뭐라도 해야하는데.
"그래도 분열기가 있으니 가능할 겁니다."
드림은 사이오닉 분열기를 보았다. 저그 생명체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장치. 쓸만한 게 있을거라며 창고를 뒤지던 함장이 찾아낸 것이다. 부품들은 하나같이 낡고 녹슬어 작동이나 할지 의심스러웠지만 큰 고장은 없었다. 가스를 투입하자 내부의 장치가 회전하며 방사선이 나왔다. 드림은 그 주위로 일종의 장field이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 분열기에서 나오는 진동은 사령부 근처를 지날 때마다 전신의 털을 일어나게 만들었다. 효과는 뛰어났다. 기낭갑피가 두드러진 대군주의 이동가 느려졌다. 종양이 퍼지는 속도도 느려졌는지 점막은 본진 사령부를 우회하는 듯 자랐다. 포위되는 모양새였지만 드림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무작정 늘리는 점막은 쉽게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포자촉수들이 당장 전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정찰도 느려질테고.
"사령관님. 누가 보고 싶다는군요." "들어오게 해."
집무실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문양도 표식도 없는 검은 제복 차림. 상대는 느긋한 동작으로 걸어오다 씨익 웃었다.
"어제 회의에 있었던 사람이군." 드림이 말했다.
"오늘부터 전술지휘를 도울 부관입니다. 마루 사령관님의 보조를 맡았습니다."
"마루에게 들은 바가 없는데."
"워낙 바쁘시니까요. 의료선 드랍을 하시겠다더군요."
"울트라 굴을 부수겠다고 했습니다." 함장이 말했다.
"그런가. 자네는 아파보이는군."
"몸살입니다." 부관은 멋쩍은 듯 웃었다. 드림은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마루 쪽이 합류했으니 본대 병력배치를 바꾸어야지. 그전에 4시 쪽에는 의료선 두기를 보내 점막을 걷어낸다. 그리고 7시 쪽은 저지대에 점막이 너무 많아. 미리 밤까마귀 한대를 보낸다. 감염충도 많으니 밤까마귀는 더 생산해 두고."
"밤까마귀 하나…말입니까?" 부관이 물었다.
"물론 아니지. 화염차 6기도 보낸다. 지금 당장."
04
의료선은 거대한 나무 사이에 안착했다. 해병은 내리며 주위를 살폈다. 땅에는 알록달록한 꽃들과 오렌지를 닮은 과실이 주렁주렁 열렸다. 잎새들은 빛을 받아 금빛을 내었다. 나무줄기에 버섯이 켜켜이 들어앉았다. 뒈지기 딱 좋은 곳이군. 해병이 침을 뱉자 식물의 이파리가 오므라들었다. 마루는 해병들이 부드러운 잔디를 밟는 것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아직 높은 자리에는 점막이 없다. 마루는 달리면서 명령했다.
"울트라 동굴을 우선 타격한다. 의료선은 정찰. 해병은 자극제 쓰고 달려."
해병들은 달려가며 총을 난사했다. 마루는 왼손으로 에너지 그물을 찢었다. 섬광이 둥지를 타격하며 피를 내었다. 저건 무슨 일이 있어도 부순다. 여왕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마루는 손을 저어 여왕을 건너편 멀티까지 날렸다.
"사령관님. 맹독충입니다." 조종수가 말했다.
"산개해서 몸으로 막는다. 동굴을 타격해."
마루는 해병들이 죽는 소리를 무시하며 손목을 털었다. 생각보다 방어병력이 많아. 맹독충에 해병들이 꽤 죽었다. 박쥐같은 소리를 내며 뮤탈들이 몰려왔다. 이제 빼야 해. 마루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해병들은 의료선에 탑승한다." 말을 마친 마루는 다시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핏빛 덩어리가 갈라지며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공생충이 튀어나오는 것을 확인한 마루는 의료선 내부로 들어갔다.
-경고. 기체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출발한다. 부스터 가동해. 빨리 따돌린다." 마루가 말했다.
"엔진 일부가 파손되었습니다." 조종수의 걱정과 달리 애프터버너가 작동했다.
마루는 의료선 꼬리를 스쳐지나가는 쐐기벌레를 보았다. 기체는 상태가 좋지 않은지 삐걱거리는 소리와 털털거리는 소리를 냈다. 뮤탈리스크의 속도를 가늠하던 마루는 조종칸의 무전을 들었다.
"본부. 새 의료선을 요청한다. 현 위치에서 남쪽으로 30."
"씨팔. 아슬아슬했어." 해병들은 서로 떠들더니 되는대로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선내는 숨소리와 욕설로 가득찼다. 마루는 다리에 화학주사를 맞는 해병을 보며 잠시 유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하게 나가야 한다.
"이제 비행을 멈춘다. 조종수만 남고 내려. 다 내리면 의료선은 북서쪽으로 비행한다."
"미쳤어? 전부 죽일 셈이냐고!" 한 해병이 소리쳤고 마루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싸울 시간 없어. 곧 뮤탈리스크가 온다. 내려."
해병들이 하산하자 의료선은 항성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해병들은 멍청히 석양을 바라보았다. 마루는 곧 쏟아질 비난을 생각했다. 하지만 각오했던 일이다. 마루는 얼굴을 남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제부터 남쪽으로 30km를 걷는다."
의료선 두기를 보내서 점막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 옆 군수공장은 보급품 상태 확인할 것. 이상. 명령을 마친 드림은 무전기를 내린다. 병력 구성, 업그레이드, 예상 시간. 태핑을 하던 드림은 음성 표시등이 깜빡이는 것을 확인했다. 해병들이? 드림이 재생버튼을 누르자 앞뒤 없는 해병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드림은 뒤로 물러나며 녹음파일을 껐다. 욕설 외에 드림이 들을 수 있는 단어는 하나였다. 마루. 그런데 마루가 뭘 어쨌다는 건지. 드림은 마루가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는 본진 사령부로 내려갔다.
함선에서 내리자 병영 근처는 상소리로 한창 소란스러웠다. 드림이 목을 뻗었지만 해병들의 전투복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드림은 부관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부관, 무슨 소란이지?"
"그게……해병들이 사령관님과는 같이 못 다니겠답니다." 말을 끝낸 부관은 목소리를 높이며 드림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움찔거리며 해병들이 비켜서자 마루가 보였다.
"좆같은 새끼."
"니놈이랑 다니느니 난 그냥 뒈지겠다 씨팔!"
드림은 두통을 느꼈다. 해병들이 막말은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하지만 상관에게 대놓고 쌍말이라니. 그런데 마루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일단 해병들은 병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루 너는 나좀 봐."
드림은 마루를 앞세워 함선으로 들어갔다. 드림은 등뒤로 쏟아지는 적의를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집무실로 오자 드림이 말을 꺼냈다.
"맹독충을 맨몸으로 막게하고, 빈 의료선을 내주고, 30km를 행군하게 했지."
"무슨―."
"목적은 울트라 굴 분쇄. 그리고 뮤탈들은 테란 통신을 들어. 모두 죽었을 거야."
마루를 멍하니 보던 드림은 곧 생략된 말을 이해했다.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 사람을 미끼로 쓰고 자살명령을 지시했다. 해병들은 비인도적이고 이기적인 처사에 반발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효율적이었고 최선이었다. 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는 가능성 없는 동료를 버리며 해병들을 증오로 채웠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계속 그랬다간 해병들이 탈영하겠지. 드림은 홀로그램 지도를 보았다. 보라색 부분의 지형 중 군락그림 위에 영웅유닛 표식 하나가 있었다. 저그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 드림은 그 표식을 눌렀다.
"너는 본대병력에 합류하는 게 좋겠어."
"그래."
드림은 홀로그램 지도에서 손을 떼었다. 중앙의 공터로 마지막 남자The last man의 표식이 올랐다.
05
"부족한 게 있다면 보고 바란다. 이제 전투복이 붉은 철로 바뀔 거다."
-우린 이미 3업이다. 5멀티에 지게로봇 세개쯤 투하해 줘. 이상.
드림은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말도 참 짧지. 드림은 어딘가 언잖았지만 항목을 점검하기로 했다. 점막제거, 견제, 주요건물 파괴. 완벽해. 이제 유령만 있으면 된다. 사관학교가 지어진지는 오래되었지만 부관은 인원이 없다며 유령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령부에서는 주기적으로 의료선을 돌려야했다. 저그를 상대한 이후로 지긋지긋한 일 밖에 없군. 현황보고가 스크린을 가득채우고 기밀서류들은 바닥을 구른다. 무기고는 지었고. 군수공장 건설. 병영도 증설할 것. 너무 뻔해. 드림은 전쟁을 지겹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쳤지. 사람이 죽고 있는데. 드림은 사령관의 덕목을 떠올렸다. 고통은 외면하되 완전히 잊지는 말 것.
드림은 집무실을 나왔다. 복도는 보조등만 켜져있어 제법 어둑했다. 벌써 저녁이다. 벽 너머로 해병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또 빌어처먹을 의료선이군. 만능이잖아. 그래그래, 예쁜 아가씨들만큼 옳지. 해병들이 킬킬대었다. 좆비빌 줄도 모르는 것들이 지랄은. 염병할 새끼. 욕설이 거세지자 드림은 귀를 막았다. 역시 니새끼가 마루놈이랑 갔어야 했어. 자기만 살면 그만인 병신같은 새끼… 드림은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함선 로비로 내려가니 마루는 펍에서 부관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뒤의 유령들 좀 치워주시죠."
"하지만 엄호사격은 영웅 유닛 운용의 기초이고 전술교범에도 나온 기본―."
"걸리적거려." 마루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싸움나겠네. 드림은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러면 밤까마귀만 붙이자."
"드림."
"오셨습니까." 부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령관님 좀 말려주십시오."
드림은 마루를 보았다. 니까짓게 뭘 아냐는 듯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도 저랬던가. 드림은 너때문에 몸에 사리가 들겠다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먼저 간 선임병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관. 마루를 믿어보자고. 일단 유령들을 모을 수 있을지가 더 급하니까."
"……알겠습니다." 부관은 인사를 하더니 로비를 떠났다.
마루는 술을 따르더니 내밀었다. "한잔해."
"위스키는 안마셔서." 팔자 좋군. 중얼거리던 마루는 잔을 집더니 주욱 들이켰다.
"마루. 네 부관이랑은 적당히 하지."
"무능은 사치야."
"언제는 사람들을 위해 싸운댔잖아."
마루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술잔을 들이키더니 총을 닦았다. 돌격소총의 까만 표면이 윤을 내었다.
06
마루는 자신이 하는 일을 알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물건을 집고 건물을 밀어낸다. 나는 것도 같다. 힘을 빼면 몸이 하늘로 치솟았다. 누군가에게 배운 것은 아니다. 날아다니는 테란은 없고 프로토스들조차 염력으로 활공하지 않는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자연스레 터득한 것이다. 뮤탈리스크 3기가 날아오자 마루는 자신을 밀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근육이 구겨지며 반대편으로 처박혔다. 아프다. 그러나 자신에겐 대안이 없다. 광전사 하나도 아낄 수 있는 자들은 기사를 혹사시키지 않는다. 에너지폭발은 야마토포로 비효율적이다.
단지 한다. 할 수 있으니까.
마루는 발돋움을 했다. 발밑으로 쐐기벌레가 지나갔다. 다섯기. 마루는 복수라도 하듯 뮤탈리스크의 머리를 연달아 쏘았다. 이이익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뮤탈리스크가 추락했다. 주머니가 터지며 사향이 퍼진다. 익숙한 피냄새를 맡으며 마루는 맹세를 떠올렸라. 살게 된다면 온전히 전장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던 그 약속. 상대를 죽이기 위해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다. 이미 죽은 목숨이니.
마루는 자극제를 꽂았다. 쿵,쿵, 심박이 뛴다. 혈관으로 아드레날린이 돌면서 몸이 가벼워진다. 날자. 돌격 소총을 다잡자 부양이 수월해졌다. 방아쇠를 당기자 익숙한 반동이 몸을 때렸다. 목숨값은 한 발. 단 한번에 바퀴의 피질이 뚫리고 뇌가 부서졌다. 마루는 튕겨져나가며 그것조차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혼자 살아남은 비열한 남자는 모든 것을 죽여야한다. 저것이 침 한번 뱉으면 해병 하나가 녹는다. 견제하다 잠복이라도 한다면 스캔이 낭비된다. 바퀴 수는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데, 손목은 벌써 부서질 것 같다.
퍼어엉. 펑. 폭음에 고개를 드니 해방선들이 지원사격을 하고 있었다. 드림이 보낸 거겠지. 해방선에서 출발한 렉싱턴 유도탄은 폭발하며 뮤탈의 전신을 때리었다. 뮤탈의 시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마루는 궤멸충들로 타겟을 바꾸었다. 저것들만 잡으면 나머지는 전차와 해방선이 걷어줄 것이다. 바퀴의 갑옷이, 재생능력이 아무리 강해도 하늘에 침을 뱉을 수는 없다. 궤멸충의 머리를 쏘던 마루는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 쉬운데. 느릿느릿한 바퀴에 의료선보다 빠른 뮤탈이라니. 마루는 참 근본없는 조합이라 생각했다.
"사령관님. 앞마당과 4멀티에 땅굴입니다!"
미친. 막 잠에서 깬 드림은 신음했다. 하필 정비하고 쪽잠자는 사이 땅꿀이라니. 드림은 더듬더듬 책상을 짚어 서랍을 열었다. 어젯밤에 쓰던 자극제가 눈에 들어왔다. 자극제를 팔에 꽂자 잠이 달아났다. 땅굴이라면 일단,
"일단 땅굴을 점사해, 함장. 그리고 전차는?"
"공성모드로 이미 전투 중입니다."
"좋아. 해병 불곰은 자극제 신호 대기. 여왕부터 잡는다."
땅에서 연기가 나왔다. 땅이 점점 갈라지는 게 쉽게 진압될 것 같지가 않았다. 연기가 짙어지자 땅굴벌레가 포효하며 땅을 찢고 나왔다. 해병의 총탄과 불곰의 유탄이 여왕을 가격했지만 여왕들은 기어이 붉은 유체를 뱉었다. 펄떡이는 입구 틈으로 바퀴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불곰들은 벙커 안으로 들어간다. 해병들은 거리를 유지해!"
그리고 밴시. 밴시를 불러들여. 드림은 무전기를 끄며 무언가 미심쩍다고 생각했다. 잊은 것이 있나. 드림은 습관적인 태핑으로 상황점검을 했다. 보급, 점막제거, 견제. 드림이 마루의 서포트 인원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쯤, 스피커에서는 경고음이 출력되었다. 보조 모니터를 확인해보니 뒷마당에 붉은 점이 찍혔다. 양방향인가. 드림은 손으로 터치패드를 밀었다. 모니터의 화면이 뒷마당으로 전환되었다. 카메라에는 엄청난 수의 뮤탈들이 잡혔다. 네줄, 다섯줄. 진녹색의 쐐기 벌레들이 쏟아졌다. 고막을 쑤시는 듯한 절로 들렸다. 드림은 무전을 켰다. 포탑을 최대한 사수한다. 수리해. 드림은 입력 기판을 이용해 명령 포인트를 찍었다. 그리고 남는 병력 체크. 앞마당의 해방선 다섯기는 앞마당으로 온다. 토르는 뒷마당으로 내려가. 그리고 남는 병력 체크. 미리 보급고를 건설하고 건설로봇을 추가로 충원해야 해.
그런데 마루가 왜 안보이지? 영웅 호출버튼을 누르며 터치패드를 막 넘기던 드림은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마루가 은폐를 전개했다. 그래서였군. 드림은 고개를 좌우로 털며 무전을 켰다.
"해방선은 감시군주를 우선 타격한다."
지독한 놈. 엄호사격이 없어진 이후 마루는 부양을 통해 학살을 감행하고 있었다. 날면서 은폐하고, 거기에 조준까지. 전부 사이오닉 에너지와 사격솜씨가 받쳐주어 가능한 것이다. 기록보관소에서 기사 훈련을 받았어도 성공했을 거라는 타고난 재능. 자신을 노리는 저격수를 역으로 맞춰버리는 사격실력. 몇몇은 환호했고 몇몇은 역겨워했지만 드림은 그의 어두운 일면을 보았다. 차폐복의 생체감지센서와 종종 뿌리는 스캔을 통해 확인한 마루의 상태는 심각했다. 강제로 구사된 염력은 근육을 짓눌렀다 때로는 뼈를 꺾거나 내장을 으스러뜨렸다. 당연히 몸에 피해가 누적된다. 거기에 은폐까지. 돌아오면 검사부터 해야겠어.
드림은 다시 모니터 화면을 넘겼다. 서포트와 동시에 전투 감독이라니 힘들지만 인원이 모자라 별 수 없다. 드림은 무전을 켰다. 포탑근처의 감염충을 죽인다. 본 병력이 있는 곳에는 스캔을 뿌려. 무전이 꺼지자 드림은 화를 억눌렀다. 다들 놀고있는 것은 아니다. 함장은 물자 보급을 하느라 자리를 비웠고 부관은 나름대로 정비와 보건, 인프라를 조절하고 인력을 모으고 있다. 보건문제도 맡고 있지. 확실히 잔병치레하는 사람들은 줄었다. 그래놓고 본인은 계속 몸살이라니 웃기는 노릇이다. 드림은 무전을 켰다. 9시 멀티는 행성요새로 바꾼다. 남은 자원량을 보니 속이 뒤집히지만 어쩔 수 없다. 요즘들어 맹독충과 저글링에 드랍에 견제병력이 되돌아 오는 일이 잦아졌어. 감염충이 많아져서인가. 하지만 정면도 밀리지 않아야하는데.
"사령관님?" 부관이 말했다.
"스캔에 타락귀 떼가 잡혔습니다. 앞으로 대공병력을 충원할까요?" 어쩐지 뮤탈이 늘어나지 않더니. 드림은 욕설을 내뱉으며 답했다.
"아니. 지상에 집중한다. 그리고 유령이 필요한데."
"하지만 사관생도 수가 부족합니다."
"최대한 모아. 빨리 준비해야 해."
"……애쓰고 있습니다." 드림은 부관의 중얼거림에서 미안함을 느꼈다. 씁쓸하게 웃던 드림은 버튼을 눌러 마루의 무전채널을 열었다.
"앞으로 해방선이 지원하는 건 줄어들 거야. ...미안."
"버틸만 해."
말을 마친 마루는 차폐복 뒤에 붙어있던 밸브를 조금 돌렸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심한 태도였지만 드림은 심박이 빨라지는 것을 보았다. 괜찮냐고 물으려던 드림은 말을 삼켰다. 차폐복에 감돌던 빛이 약해져있었다.
07
드림은 책상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멀티 하나가 부서졌다. 타락귀는 단순히 대공 병력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헤엄치듯 날아온 꼬리들은 행성요새를 향해 부식액을 뿜었다. 자동포탑이 타락귀의 머리를 때렸지만 타락귀들은 조금 흩어질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건설로봇이 수리를 시도했지만 건물이 있던 자리는 삽시간에 녹아 녹물만이 남았다. 그새 견제갔다가 돌아오던 병력들은 진균에 묶여 죽었다.
본진으로는 계속해서 저글링들이 쏟아졌다.
"씨팔, 저글링 받아라!"
"막아! 있는 총알 다 때려박으라고!"
스크린은 밤까마귀의 블랙박스 화면을 보여주었다. 흙먼지가 이는가 싶으면 저글링들은 어느새 벙커앞까지 파고 들었다. 저글링들은 해병수트에 쾅쾅 머리를 들이받더니 이빨을 파묻었다. 맹독충이 굴러온다. 방금 산개명령이 내린 자리에 진균이 흩뿌려졌다.
-건설로봇은 보급고와 벙커를 우선 수리한다.
건설로봇들이 무전명령을 듣고 보급고에 다가갔다. 운전자들은 수리하며 보급고 틈을 본다. 저글링들은 서로를 밟고 뜀을 뛰었다. 두두두 총을 쏘자 보급고를 밟던 저글링이 고꾸라졌다.
"옘병. 뭐 이렇게 뭐가 많아."
넘어오려고 하던 저글링들이 물러났다. 해병이 한숨 돌리려고 하자 맹독충이 몰려왔다. "피해!" 맹독충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보급고에 아낌없이 몸체를 들이받았다. 진녹색의 산성액이 터지며 건물들이 무너졌다. 저글링들은 그를 기다렸다는 듯 날개를 푸덕이며 달려왔다. 부서진틈을 비집고 저글링들이 쏟아진다. 도망가던 건설로봇들은 저글링의 발톱에 걸려 넘어졌다. 벙커에 있던 해병들은 계속해서 사격을 했다. 탄피가 후두둑 쏟아지자 저글링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다음 저글링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쏟아지던 저글링들은 기어이 벙커를 가르고 해병들의 CMC 전투복에 발톱을 꽂아넣었다.
"사령관님. 저글링들이 너무 많습니다. 바이킹으로 대군주를 걷어내면...사령관님?"
부관은 어느새 비어버린 집무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병과 불곰들은 건물 근처로 붙어 사격한다. 불이나도 침착할 것. 이상. 무전으로 명령을 마친 드림은 함선 옥상을 향해 달렸다. 지금 본진에 고급병력은 없다. 그르릉 거리는 소리. 계단을 오르며 드림은 저글링들의 존재를 느꼈다. 물론 감염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감염이라는 오명을 받고 실험대에 그대로 끌려갈 뻔 했지만. 드림은 잠시 멈추었다. 자신을 뮤탈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드림은 숨을 들이 쉰 후 문을 열었다. 하늘을 본 드림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이 부시다. 함선 밖으로 나오는 게 얼마만인지. 드림은 손목을 돌리고 누르며 근육을 풀며 주변을 살피었다. 금빛 햇살 아래에 푸른색과 진홍색 점들이 바글바글했다. 좋아. 드림은 손을 튕겼다. 이게 아닌데. 몇번 더 튕기던 드림은 연결선이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 불장난 할 시간이다.
저글링 날개가 바르르 떨렸다. 불수의적으로 진동하던 막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좋아. 잠시 저글링을 살피던 드림은 해병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깨달았다. 침착하라니까. 하지만 드림은 해병이 날뛸만한 광경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통제를 벗어난 몇몇 저글링들은 보급고며 건물 위를 날다시피 뛰어다니고 있었다. 드림은 무전을 켰다.
"건물에는 소화로봇이 있다. 다들 침착하고 건물에 붙어서 사격한다." 드림은 보급고를 보았다. 동그란 소화로봇들이 공중을 돌며 불을 진화하고 있었다. 드림은 멍하니 무전을 듣는 해병들을 보고는 몇번 더 명령을 반복했다. 점점 정신을 차리는 해병이 늘어났고 하나둘 저글링들을 쏘기 시작했다. 어쩌다 불이 옮겨붙은 해병은 보급고 근처로 갔다. 건설로봇의 수리를 명령하던 드림은 저글링들이 거의 정리된 것을 보고는 선체로 내려갔다.
드림이 집무실로 돌아오자 부관은 피해상황을 보고했다.
"해병 16명이 죽고 건설로봇은 24기가 잡혔습니다. 사령관님. 일꾼을 충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 병력이 오겠지. 그리고 저그의 움직임이 더 빨라진 것 같은데."
"사이오닉 분열기가 망가졌습니다. 그리고 함장이 사라졌습니다……괜찮으십니까?"
"……함장은 아마 본사령부 지하실에 있을 거야." 거기에 있어야 해. 드림은 물을 들이키다 깜짝 놀랐다. 부관이 들어왔다. 드림은 검붉게 변한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감염이다.
"감염증세군요. 함장님, 혹시 감염충을 보셨습니까?" 부관이 물었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렇군요."
부관은 의무실로 데려가겠다며 함장을 부축하며 집무실을 나갔다. 감염충이라고? 드림은 기시감을 느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마루가 있던 곳에는 감염충이 오지 않았다. 기동성이 중요한 생체병력에게 진균은 하늘에서 쏟아진 재앙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유체는 갑옷을 부식시키고 근육의 이완을 막는다. 공중의 병력을 떨어뜨리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견제하는데에 감염충을 쓰면서 전장을 바꾸고 있는 인물에겐 쓰지 않는다? 말이 안 돼. 마루를 살려둔다면, 동기는 뭐지?
감염인가. 드림은 어떤 새끼인지 간땡이가 부었다고 생각했다. 인생을 날로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체 어느 정신체인지. 나이도 처먹은 놈이 욕심이 과해. 그러니까 행성 반짝을 처먹고도 사령부를 노리는 거겠지. 드림은 무전을 켰다. 이제 지뢰 생산을 중단하고 토르를 충원한다. 감시탑을 건설해. 몇번 태핑을 하던 드림은 의료선과 해방선의 수리 명령을 내린 후 만족스럽게 손을 비볐다. 마루를 피하려는 것인지도 몰라. 어쨌든 아껴쓰는 법을 배우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다시 태핑을 하며 모니터 화면을 넘기던 드림은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마루 위치를 어떻게 알았지?
08
부관이 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커피가 쏟아지며 카펫이 물들자 드림은 웃고 말았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그겁니다. 사령관님."
"뭐?" 쿵, 쿵. 드림은 스피커를 통해 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울트라리스크."
안 돼. 무리야. 드림은 모니터를 노려봤다. 그 넓은 땅을 다 처먹은 저그답게 병력이 너무 많았다. 울트라리스크만 스무기에 육박했다. 전차의 포격에 주춤하던 울트라리스크는 속도를 높이더니 전진되어있는 전차를 짓밟았다. 근처의 해병들이 터트린 빛무리들은 갑피에 닿자 난반사했고 총알들이 튕겨나갔다. 튕겨나간 총알에 몇몇 해병의 전투복이 찌그러졌다. 자극제를 꽂으며 흩어지던 해병들은 엄니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발짓 한 번에 3기의 불곰이 박살났다. 드림은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벌써 굴을 지었을리가 없는데. 드림은 남아있는 병력 목록을 훑었다.
"전차. 전차 어디있어."
-벙커 근처에 있습니다.
"그리고 옆멀티로 보냈던 해방선 불러들여."
드림은 숨을 멈추었다. 침착하자. 스캔에 잡힌 울트라의 외피는 키틴질로 뒤덮여있었다. 전차가 포탄을 쏘자 갑피 일부가 박살났다. 울트라리스크는 잠시 주춤했지만 곧 자세를 가다듬고 나아갔다. 부족해. 준비된 야마토 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부관, 함선에 야마토 포를 준비시켜. 그리고." 드림은 말을 멈추었다. 카메라가 달려나가는 마루의 모습을 비추었다.
-……사령관님은 좋은 분입니다.
웃기는 소리. 지면을 박차오르며 마루는 비웃었다. 자신이 죽음으로 내몰았던 의료선 조종수도, 그말을 담아두고 있는 자신도. 단순히 해야할 뿐이고 그래서 하고 있는 것 뿐이다. 뛰어나니까. 재능이 있으니까. 죽을 뻔 했다 살아난 이후로 마루는 어떤의미로든 경악에 찬 시선을 받았다. 마루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날자. 울트라리스크는 대공능력이 없다. 저공비행이라 타락귀가 견제하기도 어렵다. 총을 쏘자 마루는 손목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무식한 새끼. 젊은 놈이 손목을 마구 쓴다고 지적당한 것이 기억났다. 마루는 총을 어깨에 대었다. 손목 통증이 줄어든만큼 어깨가 더 아팠다. 이것도 빚진 목숨 값이겠지.
마루는 옆구리를 쳤다, 진통제와 동시에 자극제가 꽂혔다. 마루는 감각이 뜨이는 것을 느끼며 총끝으로 눈을 겨냥했다. 방아쇠를 당기자 울트라리스크의 안구가 부서졌다. 눈을 맞은 울트라리스크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사십정도만 쏘면 된다. 사격하던 마루는 전방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고 뒤로 물러났다. 마루의 눈에 배주머니가 잔뜩 부푼 대군주들이 들어왔다. 그것들이 다가오는 속도는 빨랐다. 정면 드랍? 비효율적이다. 마루는 대군주를 무시하고 울트라를 쏘았다. 울트라리스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저글링들이 달려들었다. 총구를 돌리려던 마루는 울트라리스크들이 다시 진군하는 것을 보았다. 저글링들이 정신체의 눈이 되었다. 마루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발화하나 못해서. 저글링들에 포격이 이어졌다. 드림인가. 이제 되었어. 안심하던 마루의 귀에 새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땅에는 맹독충 대신 여왕이 떨어졌다.
죽어. 마루는 비명 지르고 싶은 만큼 총알을 질렀다. 열 발 쯤 난사하자 푸쉬식 바람빠지는 소리가 나며 대군주 한 기가 떨어졌다. 너무 많아. 마루는 등으로 연결된 호스를 뽑았다. 억제제가 끊기자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어서 발로 종아리를 걷어차자 자극제가 추가로 투여되었다. 뭐든 할 수 있다. 한다. 마루는 힘에, 자극제에 취하지 않으려 애쓰며 총을 수트 뒤에 걸었다. 양손바닥을 맞대자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가 응집되었다. 손을 펴자 하얀 벼락이 쏟아졌다. 넷 그리고 다섯. 아홉 기의 대군주들이 떨어졌다. 아직 부족해. 하늘에는 새까만 점이 너무 많았다. 여왕이 얼마나 되는 거지? 이럴 순 없어.
멈춰선 대군주에서는 점막만이 떨어졌다. 빈 거야. 속았어. 마루는 고글의 적외선 장치를 켰다. 대군주 안은 보이지 않았다. 점막이 펼쳐쳐지자 버둥거리던 여왕들이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여왕들은 가지같은 팔을 흔들더니 울트라를 향해 단백질 유체를 쏘아댔다. 주춤거리던 울트라가 다시 달렸다. 수혈은 막아야 해. 마루는 대군주에서 떨어지는 여왕을 저격했다. 머리가 터지며 여왕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마루는 자기 밑까지 여왕이 온 것을 보았다. 은폐를 전개하는 순간 아래에서 가시뼈가 치솟았다.
09
마루는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하얀 천장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익숙한 소리. 서로 다른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들렸다. 왼팔을 보니 링거주사가 꽂혀 있었다. 의무실인가. 멍하니 주삿바늘을 보던 마루는 기억을 되짚었다. 타락귀. 뮤탈. 바퀴. 여왕과 울트라. 그다음은?
"드림―." 불현듯 들려온 폭음에 마루는 운을 떼던 것을 멈추었다. 디스플레이의 액정이 박살났다. 아직이군. 마루는 얼굴을 묻으며 대강 웃었다. 힐책하는 큐어의 목소리가 들린다. 급하다고 호스를 떼면 안됩니다. 제가 무리하지 말라고 몇번을 말씀드렸잖습니까. 어깨를 들썩이던 마루는 웃는 것을 멈추었다. 하지만 큐어는 여기에 없다. 없지. 죽었으니까. 마루는 눈을 뜨며 무의식 중에 입으로 엄지를 가져갔다. 그리고 여긴 적진 한가운데다.
"마루?" 드림과 부관이 의무실로 들어왔다. 마루는 급히 손을 내렸다.
"일어났구나. 다행―."
"하나둘도 아니고 이상은 무리야." 드림은 깨어나자마자 말을 자르는 마루를 멍하니 보았다. 마루는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유령을 더 충원해. 울트라에 딸리 여왕을 치워야겠어."
"그래. 하지만 너는 쉬는 게 좋겠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전장은 어떻게 되었어. 역시 유령이."
"……가스가 부족합니다. 당장 훈련생도 몇 없고요." 부관이 말했다.
"그러면 가스를 더 짓고. 제일 나은 애로 뽑아와."
"하지만."
"대충 EMP라도 쏘면 되니까 후보생들 모아."
"그렇지만."
"널 적진에 처박기 전에 준비해." 마루는 드림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때쓰는 애를 보는 시선과 같다고 생각했다. 몇살이나 차이난다고.
"적당히 해. 네 부관이잖아. 나랑 싸울 때도 널 도왔을 거고."
"누굴 도와?" "당연히 너를 돕지."
마루는 피곤함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왜 지금까지 몰랐지? 마루는 총을 당겨와 부관을 겨누었다. 부관이 조금 물러났다.
"너. 대체 뭐야."
"마루. 일단 진정해." 당황한 드림은 부관의 앞을 막아섰다. "총 치워. 지금 흥분했어."
"난 부관이 없어. 죽었다고!" 흰 벽에 섬광이 터지며 부관의 팔이 날아갔고,
부관은 당황하지 않았다. "안녕, 마루. 더 쏠 거야?"
"당연히―." "이 안에는 공생충이 있어. 드림을 아주아주 사랑하지."
드림은 목이 졸리는 것을 느꼈다. 감염되었어. 애초에 변신수 였는지도 모른다. 왜 확인하지 않았지?
"어차피 우릴 죽일 거야."
"죽인다고? 내가?"
정신체는 그것의 입을 빌어 웃었다. 미친 새끼. 마루는 침을 삼켰다. 정신체는 테란이 유쾌해하는 것처럼 굴었다.
"너희들은 너무 빨리 죽어. 그래. 항상 그랬어. 죽지 못해 안달이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원해. 어떤 저그도 박서와 플래시를 죽이지 못했어. 변은 누구를 구하려다 죽었지? 큐어는 왜 희생되었지?"
"닥쳐." 마루가 이를 물자 뒷편의 모니터들이 으스러졌다. 드림은 마루가 동요하는 것을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인간. 테란은 항상 같은 인간에게 죽었어. 누명, 암살 그리고 내전. 인정해. 내가 오지 않았다면 드림 너도 죽었겠지." 드림은 뺨이 어루만져지는 것을 느꼈다. 맞는 말이다.
"듣지 마."
"네 상관은 누가 죽였지?" 드림은 무의식 중에 몸이 움찔댄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영웅을 원하지 않아. 시기하고, 죽이고, 깎아내리기 바쁘지."
부관의 목소리가 변했다. "드림. 그들은 너를 배신할 거다." 사령관님. 드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죽은 상관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야. 넌." 드림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힘이 작용하는 것을 느꼈다. 뒤로 처박히며 총성이 퍼졌다. 드림은 사령관이 쓰러지며 웃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신체가.
마루는 시체를 향해 드르륵 총을 긁었다. 튀어나오던 덩어리가 축 늘어지며 의무실 바닥을 굴렀다. 사방이 진득한 살점으로 흥건했다. 드림은 이노베이션을 떠올렸다. 전임 사령관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드림 자신이 자리를 비운사이 행성 위로는 광활한 그림자가 펼쳐졌고, 대의회의 황금함대와 모선에 의해 정화당했다―같은 테란의 농간으로. 드림은 원하던 사령관이 되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난 몰랐어."
"불이나 질러."
퉁명스럽긴. 드림은 마루를 노려보다 손을 튕겼다. 살점 위로 아지랑이가 피더니 기름진 냄새와 함께 역겨운 탄내가 올라왔다. 곧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티가 튀었다. 연기가 심해지자 마루는 눈살을 찌푸렸다. 틱, 소리와 함께 환기장치의 스위치가 올라갔다. 드림은 마루를 보았다. 마루는 몇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손톱을 물어뜯었다. 물끄럼히 보던 드림은 타들어 가는 살점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마침내 마루가 말했다.
"살았으면 끝까지 살아남자. 멍청이들아."
저딴 쓰레기같은 정신체한테 지면 안 돼. 마루는 남은 잔해를 짓이기며 전의를 불태웠다. 드림은 묻고 싶었다. 앞으로 테란들은 달라질 것 같냐고.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마루는 분명 관심없다고 답할 것이었다. 당장 눈 앞의 적을 꺾고 이기는 것을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가니까. 드림은 창밖을 보았다. 낙원이다. 자연이 만든, 어떠한 정원보다도 생명이 만발한 풍요의 땅이다. 드림은 물었다. 테란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희망의 시절도, 황금의 시대도 아니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사람은 흘러넘치는 부에도 만족을 모른다. 탐욕이 전쟁을 부르고 살육을 낳는다. 어떤 이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배신하고, 자신을 지키는 자들에게 칼을 꽂는다. 하지만,
"⋯우린 변할 거야."
믿는다. 아니 믿을 것이다. 드림은 아직도 사람을 믿고 싶었다.
"그래. 이겨야지." 마루가 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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