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t(2023)
KK-mist를 들으며
행성 델타가 멸망을 선고받은 지 6일이 지났다.
평생을 나고 자란 행성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웃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도. 허벅지에 남은 얕은 흉터만 아니면 모두 꿈이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았다. 때는 13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치지직…강우 발생. 강우 발생. 신속히 점검 바람."
오전 6시, 난데없는 알림에 잠을 깨었다. 집채만 한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시대에도 날씨예보는 하등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날도 갑자기 비가 내렸다. 흔히 말하는 지랄맞은 비였다. 행성 델타에는 그런 비가 자주 내렸다. 해가 뜨기 전인데도 날은 후덥지근했고, 비는 쏟아붓듯이 내렸다. 나뭇가지와 이파리는 죄다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낭창거렸고, 강철 합금으로 지어진 숙소 천장은 갑자기 찾아온 빗소리로 붐볐다. 나는 이런 날씨에는 별 소용없는 우비를 두르고 급히 보급고 지대로 달려갔다. 나는 보급 담당이었고, 행성 델타는 여러모로 보급관에게 가혹한 환경이었다. 땅은 산화되었고, 더운 날씨와 잦은 강우로 인해 보급품이 침수되거나 벌레 먹기가 좋았다.
달려가던 중 어렴풋이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병렬이었다. 한적한 도로 위, 비를 맞는 오전 6시의 병렬이는 이질적으로만 보였다. 추울 텐데. 하지만 다시 보급고 지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감기 걸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보급품 걱정이 더 앞섰다.
병렬이는 사실 이름 없는 저그였다.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엉뚱한 구석이 있지만, 그 모습마저도 기묘하게 사람 같았다. 굳이 사람의 형태로 잠입하려는 저그치고는 눈에 띈다고 했던가. 겉모습은 기운이 없어 보이고, 때로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여러모로 살육 기계로 길러진 저그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그를 쭉 봐왔던 나조차도 그 사실을 종종은 잊어버리곤 했다.
보급고 안으로 들어서자 과연 안은 침수되기 직전이었다. 종아리쯤까지 물이 들어찬 걸 보니 배수관부터 막힌 듯했다. 배수관을 들쑤시니 과연 담배꽁초 따위가 빠져나왔다. 쓰레기를 건져 올려 한곳에 묶어두고, 부분 부분 풀린 방수천을 싸매기 시작했다. 벌레 먹는다고 쓰고 나면 가벼운 건 위로 올리고 무거운 건 천으로 다시 감싸라고도 몇 번을 말했는데 해병들은 도무지 들어먹지를 않았다. 말 안 듣기로는 아침에 근무하는 해병이나 저녁에 근무하는 해병이나 꼭 같았다.
한창 보급고를 정돈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병렬이었다. 병렬은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다음 주에 행성 정리하려고."
"그래." 나는 젖은 방수천을 탁탁 털어내며 답했다. 병렬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농담 아냐."
병렬의 표정은 건조했다. 경험상 무감정한 표정은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였다.
"…뭘 어떻게 정리할 건데?"
"테란들 다 지우려고. 너 빼고."
"……."
"우린 친구잖아." 말을 마친 병렬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일주일 후에 행성이 멸망한다는 식의 말을 사방으로 전했다. 상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테란은 나를 미친 사람 보듯이 봤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잘 지내던 행성이 멸망한다니. 그리고 본성의 높으신 분들도 모르는 고급정보를 한낱 보급관 겸 의무관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내가 들은 비아냥은 셀 수 없이도 많았다.―차라리 황금함대가 온다고 하지 그래?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두 부류밖에 없었다. 전자는 신중하고 또 다른 행성으로 떠날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휴가 겸 여러 핑계를 대며 다른 행성으로 떠났다. 후자는 사이비였다. 교주는 나의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는 신도들 앞에서 나의 손을 붙들고는, 저희를 구하러 온 사도라며 울었다. 솔직히 섬뜩했다.
한편으로는 병렬이에게 왜 하필 멸망일이 4월 3일인지,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는지 따위를 물었다. 그러자 병렬은 4월 3일이 아닌 1월 9일이며, 그날은 우리형이 태어난 날이라고 답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행성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를 물었다. 병렬은 세상에 멍청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넘쳐나서 행성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나는 똑똑한 사람보다 미친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병렬은, "너는 정상인 것 같은데, "라며 내 걱정을 일축했다. 나는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행성은 정리되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병렬이는 예전부터, 아니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음먹은 것은 기어코 하고 마는 아이였다. 어떤 수를 쓰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가 보아온 것이라곤 하루아침에 미라가 된 시체 몇 구, 갑자기 나타난 감염된 바이로파지 덩어리들, 하루아침에 인격이 뒤바뀌어버린 상관 등인지라, 매번 침착하려 애써왔을 뿐이다. 병렬은 말없이 일을 시작했지만 일을 진행하는 도중에는 꼭 내 의견을 물어보곤 했다. 이럴 때 테란은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테란은 그런 거 안 해."
"그런 뻔한 이야기 말고."
"그만두면 안 돼?"
"어차피 쓸 만한 사람은 다 대피시켰잖아."
"……."
"어설프게 죄책감 같은 거 가지지 마. 기쁘잖아."
그런지도 몰랐다. 나는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단순히 혼자 살겠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거나 하여 죽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은 최대한 행성 밖으로 내보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유는 아직도 흐릿했다. 말릴 수 있는데 말리지 않아서?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깊은 사이였던가? 나는 항상 자신이 없었다. 병렬은 재미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재미와 거리가 멀었다. 병렬의 시선은 항상 내 너머에 있었다.
어느덧 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오늘이네."
"응. 너는 안가?"
나는 말 없이 병렬이를 보았다. 병렬이는 내가 아닌 하늘을 보았다. 날이 맑은지 별이 많았다. 우리는 침묵했다. 행성을 정리하지 말아달라던가, 너한테는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이니 먼저 들어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같은 곳을 보곤 했다. 그날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그리고 떨어지는 빛무리들. 정리는 유성우 무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곧 타는 냄새가 났다. 낙하주머니였다. 공습이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살점을 가르고 바퀴가 나왔다. 바퀴는 포악하게 울어 젖혔다. 그런데 병력이 좀 적은 것 같은데. 이쪽에 보이는 바퀴는 기껏해야 오십 마리 정도 되어 보였다. 전차 라인을 뚫어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수였다. 저글링이 좀 더 있다고는 하지만 의미 없는 정도였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유심히 보면 저그는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다. 머리를 내밀고 발톱을 휘두르거나 그륵, 그르륵 하는 소리를 낼뿐 담즙을 뱉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를 깨달을 정도로 여유를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체온과 시간 감각을 앗아갔다.
포격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달려왔다. 군복 위로 은색 막대 하나가 보였다. 아마도 토머스 중위였다.
"중위."
"너지? 니가 그랬지?"
"……."
총구를 마주하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아군에게 총구를 겨누면 안 되는데, 하는 멍청한 생각이나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그런 유용한 생각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중위는 내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개년이 저그랑 붙어먹어서!"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러나 어떤 말도 쉬이 나오지 않았다. 서로 이름도 잘 모른다거나 내가 위험을 경고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어째서인지 내가 먼저 알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쏟아지는 험한 말에 입 밖으로 낸 말이라고는 하지 마요, 정도가 전부였다.
중위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섬광. 총성과 함께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허벅지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다리가 풀리고 눈이 멋대로 굴렀다. 간신히 품 안을 더듬어 자극제 패치를 찾았다. 손목을 걷고 패치를 붙이자 아찔한 감각이 강제로 정신을 일깨웠다. 흔들리는 시야가 바로잡히고,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는 중위가 누워있었다. 심장과 폐가 있어야 할 부분이 뻥 뚫려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못 보던 다리도 있었다. 병렬이였다. 병렬은 등허리에서 나온 날개로 중위를 감아올리고는 던졌다. 짐짝을 옮기듯 건조하고 기계적인 동작이었다. 그러자 저글링 몇이 다가오더니 시체를 뜯어먹었다.
"여기있어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했잖아."
말과 함께 날아오는 소독약과 붕대를 받았다. 맞는 말이었다. 병렬은 쉬이 고집을 꺾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어쩌면 하나쯤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병렬이가 마음을 바꿔먹는다면―
"다 정리했어." "뭐?"
주변에는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테란들이 많았다. 대체로 민간인이었다. 내가 사람을 손으로 가리키자, 사람이 터져나갔다. 끔찍한 비명이 들리고, 몇몇은 울기 시작했다. 터져나간 사람에게는 심장과 폐가 없었다. 중위의 시체와 같은 형태를 보고서야 비로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력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병렬은 충동적으로 정리를 결심한 게 아니었다. 일어나서 사격하는 해병이 적은 것도, 공성전차의 포격이 울려 퍼지지 않는 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모두를 감염시킨 게 틀림없었다. 도망간 사람들도, 그리고 어쩌면……나도.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말 없이 짐을 꾸렸다. 병렬이 물었다. "가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는 이 행성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잠긴 사람들과 그를 터트리는 저그 하나가 있어 더더욱 그랬다. 이 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챙길 것은 많았다. 의료기기에 다리를 올려 총알을 빼내었고, 절뚝거리며 보급고로 가서 군용 식량과 의약품 따위를 남김없이 털었다. 매일 관리하던 비품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내가 좀먹은 것들을 버리며 짐을 싸는 동안 병렬은 전자지갑에 남은 돈을 옮겨주었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있었지만 모두 정리되었고, 또 다른 지갑이 되었다.
짐을 전부 실은 트럭이 전함 안으로 들어가자 병렬은 날개를 떼어냈다. 떨어져 나간 날개는 곧 물기를 잃고 말라 비틀어졌다. 나뭇가지 같은 날개가 없어진 병렬이는 평범한 테란처럼 보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안녕."
"…안녕."
간신히 인사를 건네고 항해실로 갔다. 조종석에 올라 지상을 보자 병렬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며 버튼 몇 개를 누르고 조종간을 밀자 전함은 조금씩 이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비치던 그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더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병렬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1srPatcDBA&ab_channel=KENKAMIK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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