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craft2 단편

다정이라는 이름의 죄악

익명에게,

스태츠는 가슴에 손을 얹고 쓰러졌다. 

천천히 호흡을 들이쉬자 사이오닉 에너지가 폐를 채웠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삼킨다. 말끔히 썰려 나간 살점이 붙고 조직으로 흘러나오던 피 또한 서서히 흐름을 찾았다. 스태츠는 비로소 안도했다. 공허 블레이드에 꿰뚫린 사람치고는 제법 멀쩡했다. 간신히나마 심장을 덧붙인 탓이다. 테란의 육체에 칼라를 받아들인 프로토스는 심장이 하나밖에 없었다. 만약 두 번째 칼질이 한 치 정도만 더 깊었다면, 그래서 심격막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면, 상대는 틀림없이 동족 살해로 척살될 것이다.

트랩은 급히 작동시킨 격리 장치 안에 갇혀 있었다. 허공에 묶인 팔다리는 제법 살이 붙었으나 여전히 가냘팠다. 이렇게 작고 가녀린 아이가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족 살해는 분명 천륜을 져버린 행위건만 스태츠는 되려 연민을 느꼈다. 안으로 파고든 칼날에서 망설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찔린 곳보다도 그 머뭇거림에 더 가슴이 아팠다. 절망으로 들어찬, 그때의 눈처럼—.

스태츠는 트랩과의 첫 만남을 기억했다. 프로토스 제국의 신관으로서 슬레인에 외교 차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라크쉬르의 여파로 별궁 응접실이 박살 났기에, 스태츠는 임시로 마련된 공간에서 탈다림 군주 에스오에스를 기다렸다. 홍차, 다과, 그리고 은은한 향을 내는 향초. 약간의 소음을 제외하면 흠잡을 곳 없는 접대였다. 서쪽 창문을 열자 기합과 함께 사특한 기운이 공기를 채웠다. 어린 프로토스 하나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스태츠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다가갔다. 주먹을 가볍게 쥐고 공허를 수련하는 트랩의 모습은 프로토스와 테란 양자의 관점에서 아름다웠다. 그 경지가 대단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년의 움직임은 중심이 어긋나 있었고 사이오닉 에너지도 충분히 검 끝에 응집되지 않아 아래로 흩날리고 있었다. 다만 스태츠는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원무에서 불온전함의 미학을 보았다. 고정되지 않은, 그러나 정형화되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될 가능성을.

에스오에스가 말했다. "아름답지 않나."

"내 부족한 식견에도 훌륭한 검무임이 틀림없소." 

에스오에스는 겸양의 말을 되돌려주는 대신, 여느 때처럼 소리 내 웃어 보였다. 분명 기분 상할만한 대답임에도 스태츠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발악일 뿐이지." "발악이라니. 당치도 않소."

그러자 에스오에스는 특유의 조소를 지어 보였다.

"운명이라는 물살을 헤쳐나가기 위해 우리 탈다림은 공허의 뒤틀림을 숭배하지. 그 힘은 갈등에서 나와. 자신과의 갈등, 타인과의 갈등, 이 만인과의 갈등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승천할 수 있지. 그러니 승천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등에 진다. 그 각오가, 살기 위해 죽음을 추구하는 부조리함의 극치가 원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단 말이다. 허나 저렇게 흐린 눈으로는 테이스틀로프 하나 죽일 수 없어. 분명 검은 대성할 재목이나 잔인함이 부족해. 그 한 끗 차이로 저 아이는 오늘 죽는다. 이를 알려줬음에도 칼을 뽑아 들고 구원을 탐하니 이를 발악이 아니라면 무어라 하겠나."

스태츠는 말을 잃었다. 죽음이라는 말을 쉬이 입에 올리는 탈다림 특유의 무심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스오에스를 조금은 알기 때문이었다. 여느 탈다림과는 달리 에스오에스는 칼라이 못지않게 정제된 낱말과 네라짐 부럽지 않게 세련된 어구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군주가 직설적이고 무례한 말을 하는 이유는 가장 불편한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진실들은 늘 예언과 맞닿아있었고, 어떠한 흐름 안에 존재했다. 스태츠는 다시 원무를 보았다. 비록 허공을 가르고 있었으나, 검붉은 사이오닉 검은 운명에, 세상에 맞서고 있다. 설령 죽음을 각오하지 못하였더라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구하기 위해서.

그대는 저 아이를 구할 수 있는가.

에스오에스는 단순히 신관에게 묻지 않았다. 제국에게 묻고 있었다. 이렇듯 고립된 행성에서도 제국의 영광이, 약자를 살피는 은혜가 닿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스태츠는 확신할 수 없었다. 탈다림에게는 댈람의 자비가 내려지지 않는 탓이다. 외교 분쟁 때문은 아니었다. 에스오에스가 아닌 어떤 사려 깊은 이들도 이 비슷하게조차 생각한 적이 없었다. 대개 탈다림은 본성으로 와 개종하거나 우주 외곽으로 망명할 바에야 차라리 공허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네들은 한 점의 불신도 없이 내핵으로 향하는 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허나 다른 교육을 받았어도 같은 핏줄이다. 결국, 같은 신을 믿는 젤나가의 첫 번째 자손이었다. 제 생각을 미처 피워내기도 전에 구덩이로 떠밀리는 이들도.

스태츠는 트랩을 보았다. 정교한 사이오닉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소년의 눈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초조함, 괴로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 소년은 오로지 고통이라는 색채로 들어차 있었다. 스태츠는 조심스레 말을 고르었다. 배려라는 명목으로 상대를 분노케 하거나, 파멸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종교를 바꾸라 권하지 않았고, 탈다림 특유의 패도적인 검법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신관으로서 트랩에게 일종의 망명 절차를 권했다. 그렇게 신관의 배려 하에 트랩은 성인식을 미루었고, 얼마간의 고민 끝에 스태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 생명을 살핀다는 기쁨 탓이었을까, 본성으로 돌아오는 스태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리고 잘 지내왔다. 적어도 스태츠 자신은 그렇게 믿었다. 

스태츠는 트랩을 응시했다. 서로가 이토록 가까이 있었지만, 트랩에게서는 홀로 공허를 수련하던 모습처럼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다. 스태츠는 자신을 책망했다. 좀 더 신경 써야 했다. 어쩌면 말을 남용한 제 잘못이리라. 업무가 많고 과중하다는 이유로 트랩을 돌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슬레인 행성에서 나고 자랐기에 트랩은 이렇다 할 기반도, 친우도 없었다. 더구나 야만적이다는 이유로 탈다림을 멀리하는 칼라이와는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스태츠가 건넨 말은 곧은 기도를 보아하니 칼라를 배워도 대성하리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트랩은 그 말을 믿는 법이 없었다.

"내가 부족하여 너를 이끌지 못하였구나."

트랩은 꽤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역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트랩. 미안하구나."

"역시 죽였어야 했는데."

트랩은 검지와 중지를 조금 덜 굽혀서 쥐었다. 얕은 주먹이라 불리는, 공허 중에서도 가장 혼란하고 사특한 부분을 붙드는 탈다림 특유의 파지법이었다. 하지만 한 탈다림의 염원은 허공에 불씨 하나 지펴내지 못했다. 비상 동력망을 따라 형성된 동력장은 시간까지 붙들 수는 없었지만 혼란한 기류를 정렬하여 공허의 흐름을 강제할 수 있었다. 채 공허에 닿지 못한 채 연신 방황하던 어린 손이 얼굴 위로 포개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트랩은 살해시도가 실패했기에 후회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악의. 하지만 스태츠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린 손이 거두어지고, 붉지는 않은, 그러나 프로토스처럼 마냥 푸르다 할 수도 없는 피로 덮인 얼굴을 응시했다. 스태츠는 소년을 안타까이 여길 수밖에 없었다. 피와 감정으로 물든, 엉망이 된 얼굴이었다. 광기보다는 결핍으로, 그리고 죄책감으로. 

별안간 트랩이 몸을 뒤틀었다.

"트랩. 진정하게. 자네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야."

"형편없구나. 죽이지 못할 바에는 칼을 뽑지 말라 가르쳤다." 

스태츠는 뒤를 보았다. 에스오에스였다. 탈다림 본성에 있어야 할 에스오에스가 어째서, 어떻게, 왜 여기에 있는지 스태츠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군주님."

"발악이라 했거늘."

"송구합니다.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실례하지." 에스오에스는 동력장을 끄고 염력으로 트랩을 집어 들었다. 

"내가 신관에게 칼을 겨누라 명했느냐?"

"아닙니다. 최대한 보필하라고 하셨습니다."

"송구합니다. 저는……."

트랩을 움켜쥔 갑주는 점점 모양을 잃으며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트랩은 저항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스태츠는 급히 군주를 막아섰다. 

"트랩은 댈람의 아이요."

"일단은 그렇지. 의회는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의회라니. 무슨 말인가?"

"슬레인 행성에서 나고 자란 아이를 거둬들였더니 신관을 죽이려 들었다. 의회가 탈다림이 위해를 가하려 했다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대들과 전쟁할 바에야 나는 군주로서 모범을 보여 트랩을 처분해야겠다. 아니면 자네에게 자비라도 바라란 말인가?"

에스오에스가 옳았다. 신관 살해는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중죄이다. 신관이 사면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의회의 동의를 얻어내 못한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정신가속정지장 틈에서 억겁의 시간을 반성하며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수적이며 명망 높은 가문의 프로토스일수록 분명 더 높은 처벌을 받아야겠다고 주장하리라. 그러나 동시에 에스오에스는 틀렸다. 트랩이라고 군주의 명을 받지는 않았음을, 그리고 신관을 살해하고 싶지는 않았음이 명백히 밝혀진 이상, 트랩을 쉽게 처분해서는 안 되었다. 

"자비라니 당치도 않소.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다 할 뿐이오. 무엇보다도, 변호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나."

에스오에스는 비로소 트랩을 천천히 땅으로 내리고, 손을 내밀어 트랩이 양팔에 찬 사이오닉 검집을 빼앗았다. 트랩은 여전히 저항하지도 몸을 돌보지도 않았다. 에스오에스가 말했다. "'승천'하는 대신 시간 틈에 갇히겠구나. 신관께서 운이 좋으면 화를 피할 수도 있겠지. 좋다. 그러면 증언을 부탁하지. 신관 살해시도도, 모두."

스태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탈다림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트랩을 내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태츠는 트랩을 마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피로 뒤덮인 트랩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자 언뜻 트랩의 생각이 들리는 듯했다. 당신의 이러한 다정함이 저를 괴롭게 하곤 합니다. 어렴풋이, 그러나 슬픔에 찬 미소를 짓는 트랩을 보며 스태츠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연신 쥐었다 펼쳐보는 얕은 주먹을 비로소 풀어내는 프로토스는, 누구보다도 마음이 깊었지만, 아직 댈람의 프로토스는 아니었다. 그 어린 탈다림의 손끝에서 피어나지 못한 검무만이 어둠을 가르며 아래로, 또 아래로만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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