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잭 블루스(2022)
내 인생을 이 모양 이 꼴로 조져놓았을 땐 반드시 그랬어야 할 이유가 있겠지.
내 인생을 이 모양 이 꼴로 조져놓았을 땐 반드시 그랬어야 할 이유가 있겠지.
정유정, 『종의 기원』, 은행나무 p. 234
누군가 그에게 사지 멀쩡한 인간이 기어코 불법 도박장으로 걸어간 이유를 묻노라면 형이란 새끼를 잘못 둬서, 라고 답할 것이다. 조중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분명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백금면 성이리에 위치한 성이 고등학교는 전국구에서 알아주는 똥통학교였다. 폭력은 기본이요 종종은 칼부림까지 있어서, 담임은 물론이고 선도 업무를 맞는 학생부 선생조차 지도를 포기할 정도였다. 그런 이유에서 삼학년 학생 이병렬은 제법 특이한 학생이었다. 보기 드물게 모범적인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적당히 할지언정 적어도 그의 가방에는 필통과 교과서와 책이 있었다.
병렬은 여느 또래처럼 자랑하는 걸 좋아했는데,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트럼프 한 벌이 그의 자랑이었다. 비록 한판에 백 원, 이백 원을 걸더라도 판치기부터 마작까지 노름깨나 한다 싶은 성이 학생치고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밑장빼기와 중장빼기, 기리무마를 비롯한 각종 트릭에 통달한 탓이다. 중혁도 병렬의 손에 시선을 뺏긴 사람 중 하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중혁의 생각은 한발 더 나아가 시장통 뒷골목 도박장까지 미쳤다는 점이 있겠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다 할 꿈도 없고 노력도 않으면서 번듯한 생활을 꿈꾸는 학생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간만에 흥미로운 놀잇감을 찾은 중혁은 여름 내내 병렬을 졸졸 쫓아다니며 그거 좀 알려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다른 학생 괴롭히는 일에는 이제 이골이 났기 때문이었다. 병렬이 엄연히 선배임에도 성이고교 학생치고는 어쩐지 만만해서이기도 했다.
"너 손 좋다. 잘 배울 것 같아."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 병렬이 먼저 꺼낸 이야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나 카드 알려줘요."
"어어? 에이, 안 돼."
그러나 병렬은 중혁의 생각보다 완강했다. "정 그러면 책 보던가." 기술 쓰는 법이 외국에는 서적으로는 있다지만 성이 고교 학생이 프랑스어나 독일어 같은 제2외국어는 물론이요 영어조차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중혁은 조금이지만 좌절했다. 그러나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도무지 알려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에라 모르겠다 싶어 툭 던진 한마디─별로 어렵지도 않은 거 가지고.─에 무언가 불이 확 붙은 모양이었다. 병렬은 어디 너도 한번 해보라며 중혁에게 긴 기술의 역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기술을 아무개가 전수했는데 얼마 전에 죽는다는 둥 다른 아무개는 손목이 날아갔다는 둥 하는 쓰잘떼기 없는 이야기였다. 하등 쓸모없는 지루한 내용을 중혁은 설교로 단련된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들으며 넘겼다. 장사 밑천이랍시고 조금씩 푸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답답했지만 중혁에게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너 잘 배운다."
그런 중혁에게도 여름은 다시 왔다. 제 기술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흘려대었던 카드가 제 자리를 찾아 꽃을 피울 계절이었다. 꼬박 일 년이 지나고, 병렬 입에서 더는 가르쳐 줄 기술이 없다고 할 때가 되자 중혁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 소문만 무성한 도박장에 가볼 참이었다.
"형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에요?"
"아……. 그러면 나랑 같이 가."
"왜요."
"작업치려면 혼자서는 힘들잖아. 바람 잡아줘야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중혁은 내심 보기보다 비범한 또라이구나 생각하면서도 아무렴 어떨까 싶었다. 병렬은 길을 뚫어줄 테니 꼭꼭 지켜야 한다면서 약속을 받아냈다. 하나, 겉멋 들어간 카드 기술은 하지 않을 것. 둘, 셔플은 어설프게 할 것. 셋, 자신이 뭐라고 떠들던 그런가 보다, 하고 적당히 넘길 것. 마지막으로 도박으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을 것. 중혁은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마지막 약속에 와서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기술도 손에 익었겠다, 이제 돈다발만 수확만 하면 될 참이었다. 그런데 도박장에 바람 잡으러 들어간다면서 정작 한다는 소리가 이런 맥빠지는 소리라니. 나약해가지곤 웃기지도 않았다. 하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외관과 잘 어울리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부풀어 오른 중혁의 꿈은 시작부터 성이고 출신 선배에게 무참하게 저지당했다. 고작 몇 살 더 먹었다고 위세를 부리길래 한 대 치고 싶었는데, 병렬은 되려 매달려서 빌기 시작했다. 뭐 대단한 빽이 있나 싶었던 중혁으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아이 형님, 이번 한번만요. 진짜로요. 저 기술 안 쓴다니까요?"
"다섯 살때부터 카드 잡은 놈이 지랄 염병을."
"아니, 진짜라니까요. 얘 구경시켜주러 온 거에요,"
"정씨. 그냥 들여보내."
"태수 형님. 아, 모르겠다. 들어가."
그렇게 어렵사리 안으로 들어온 둘은, 애새끼들이 도박은 무슨 도박이냐는 말과 함께 가장 팻돈이 낮은 테이블 쪽으로 쫓겨났다. 판돈은 머리 당 천 원짜리 칩 하나. 내다 버릴 생각으로 이십만 원을 가져온 중혁에게는 기분 나쁘게도 적절한 테이블이었다. 결과적으로 중혁은 칩을 쓸어 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밑장빼기에 탄치기까지 썼는데 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비록 천 원짜리 칩이긴 했지만, 성공적인 데뷔라 할 수 있어 신이 났다. 이윽고, 병렬은 재미있었다며 중혁의 앞에 놓인 칩을 뚝 떼어다가 다른 사람 앞으로 얹어주었다. 같이 카드를 섞던 아저씨들은 이 집 아들이 뭘 아네, 하면서 칩을 쓸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중혁은 전문용어로 야마가 돌았지만 가오가 있지 병렬을 메다꽂지는 않았다. 순전히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게임도 생각대로 되었고, 돈도 벌었고.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다. 뇌를 설탕에 절이기라도 한 듯 짜릿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한편으로는 아저씨들의 좀 치는구만? 하며 툭, 툭 던지는 소리도 내심 듣기 좋아 기분이 들뜬 탓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혁은 병렬의 종아리를 냅다 걷어차기만 했다.
"미쳤어?"
"아, 아야……. 왜 때려……."
그리고 누군가 중혁에게 말을 걸었다.
"야. 거기."
대뜸 중혁에게 반말을 갈긴 남자는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중혁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왔다. 아까 문간 앞에서 본 그 남자였다. 대충 풀어헤친 정장이며, 가볍게 쥔 야구 배트며, 자연스레 테이블에 앉는 모양새까지 건달이 따로 없었다. 태도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는 "학생이지?" 하면서 잔에 술을 따르고는, "여기 뭐 없다. 오지 마," 라며 훈계를 하였다. 술을 따라주다니. 훈화 말씀치곤 제법 신선하긴 하였으나, 꼴에 어른이랍시고 부리는 행패를 참아 넘긴다면 성이고 학생이라 할 수 없었다. 중혁은 일단 눈을 부라렸다. "뭐요." 초장부터 기가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눈 시뻘겋게 뜬 거 봐라. 너 같은 새낀 꼭 다시 오더라?"
남자가 히죽 웃는 모양새는 마치 네가 말을 해도 쳐 들어먹겠냐는 표정이어서, 중혁은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저쪽도 학생이잖아요."
"쟨 여기 집 아들이고." "아이. 태수 형. 비밀이라니까요."
병렬이 겸연쩍은 듯 뺨을 긁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중혁은 제가 챙긴 돈이 병렬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중혁이 도박장에 발을 끊었느냐고 하면 아니었다. 병렬에게야 앞으론 근처에 얼씬도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중혁은 도무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이십만 원, 정확히 종잣돈으로 쓴 오만 원을 제외한 십오만 이천 원은 중혁이 만족하기에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었다. 기술은 여전히 완벽했고, 맛도 없는 술과 담배에 꼴은 푼돈을 제하면 총알도 더 늘었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은 분위기가 달랐다. 분명 같은 기술, 같은 판돈인데 카드를 든 사람의 얼굴들이 점차 험악해졌다. 중혁은 어어 하는 사이에 얻어맞을 위기에 처했다. 꼭 주먹다짐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아우성 속에서 선연한 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구 배트였다. 그리고 태수였다.
"자, 자. 어린 시끼한테 당하고 단체로 쇠질하면 좀 좋냐?"
"넌 또 뭔데 씨발 지랄하냐?"
"증거 있어?"
태수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없잖아. 푼돈으로 애새끼 용돈한 셈치고 들어가라고. 아님 쪼달리냐?"
도박 상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나, 참 더러워서."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태수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운이 좋긴 개뿔이 좋아. 으휴, 저 새낀 좆돼봐야 알지."
도박판이라는 보물섬을 찾아 승승장구하던 중혁의 항해가 어딘가 잘못되기 시작한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커지던 종잣돈은 어느 순간부터 시나브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중혁만 몰랐는지도 모른다. 노름판에는 중혁의 주머니와는 상관없는 웃음이 만발했으니까. 아니, 어쩌면 중혁과 관련이 있는 줄도 몰랐다. 중혁과 카드를 섞던 이들이 언젠가부터는 보란 듯이 같이 내려갔으니까. 사기도박에는 응당 사기로 갚아주는, 시장통 뒷바닥 노름판에선 당연한 결말이었다. 중혁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중혁이 이를 깨달았을 때, 태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같이 사기 친 사람끼리 뭐. 이제 와서 어쩌자고."
그리고 중혁은 비로소 깨달았다. 돈을 잃은 것도, 사기를 당한 것도, 동생 학원비까지 꼴은 것도 모두 태수의 방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곧 중혁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암 그렇지. 그러시겠지. 내 인생을 이 모양 이 꼴로 조져놓았을 땐 반드시 그랬어야 할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분개한 조중혁이 달려들었지만, 억센 손에 턱 하고 맥없이 잡힐 뿐이었다.
"너 뭐하냐?"
수업도 운동도 설렁설렁하면서 삥뜯는 일에만 품을 들이던 중혁으로서는 전문적으로 단련된 태수를 이길 수가 없었다.
"졌으면 잃은 거지 뭐하냐고. 아님, 증거라도 있어?"
실실 웃는 태수의 낯짝을 보면서 중혁은 결심했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죽여버리겠다고.
성이 대학교에 다니는 고병재는 평범한 공대생이었다. 목이 조금 늘어난 티와 어머니께서 사주신 체크남방, 그리고 낡았지만 단정한 운동화. 성이 대학교는 서울에 있지도 않았고 입결이 딱히 높지도 않은 평범한 지방대학교에 불과했지만, 이 학교에 진학할 정도면 역대 성이 고교 학생 중에서도 손에 꼽는 모범생이라 할 수 있었다. 모범생답게, 병재는 뒷골목으로 처음 들어왔다. 어머니 생신 선물을 사러가는 데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병재는 그게 오판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게 왜 내 잘못이니?"
"너만, 너만 있었으면!"
"그 잘난 얼굴 안그일 것 같고? 너 말 이상하게 한다."
병재는 길거리에서 버젓이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작은 체구에 꼭 맞는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의 곱상한 얼굴에는 그를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있었다. 그냥 가던 길로 갈 걸, 하는 후회도 잠시, 언성이 점차 높아지며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기색에 병재는 그만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벽돌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담장과 콘크리트 담장. 안쪽으로 갈수록 조용했다. 그래. 차라리 사람이 없는 게 낫지, 하고 생각하려던 찰나, 앳된 얼굴의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 말은 퍽 간단했다. "돈 내놔." 어찌나 간단한 말인지 병재는 그 말을 이해한답시고 멍하니 서 있다 답했다.
"네? 제가 어떻게 돈을 드려요."
"아 내놓으라고."
이윽고 남자 품에서는 작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프 하나가 나왔다. 칼이라니. 학교와 독서실을 오가며 얌전히 공부만 하던 병재는 도무지 현실감이 없어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다가 무언가와 부딪혔다.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 조중혁이. 이젠 돈도 뜯냐? 양아치 다 됐구만?"
"시빨. 넌 뭔데 자꾸 따라오냐?"
병재는 자신과 부딪친 무언가를 돌아보았다. 대강 여민 셔츠와 풀어헤친 재킷, 가볍게 훑어봐도 단단해 보이는 체구와 생각보다 반듯한 자세. 남자는 절묘하게 예식장 알바와 깡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길거리를 채우던 담배 냄새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훅 내뱉은 남자는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적당히 하지? 진짜 빨간 줄 긋게?"
남자가 병재의 앞을 막아서자 조중혁이라고 불린 남자는 눈을 치켜떴다. 교복이 무색하도록 서늘한 눈빛이었다. 아니, 어쩌면 교복을 입고 있어서, 그리고 하필 그 옷이 성이 고등학교의 교복이라서 더 무서운 광경이었다. 미성년자라는 걸 믿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막장으로 유명한 성이고 후배님다운 불온한 눈빛에 병재는 몸서리를 쳤다.
"간도 크다. 일반인 건드리고."
"씨발 내가 만만하냐?"
"칼 잡을 줄도 모르면서 하나도. 컥."
시퍼런 칼날이 사람 몸으로 쑥 들어가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다시 나타난 칼은, 그리고 그 주위의 작은 세상은 시뻘건 색을 띠고 있었다. 사방으로 튀는 피에 병재는 넋을 잃었다. 중력을 거슬러 흩어지는 핏방울은 현실은커녕 꿈인 것 같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병재는 간신히 무너지는 남자를 받았다. 정장 재킷을 잡는 손이 붉게 물들었다. 피가 너무 많이 났다. 급히 체크남방을 벗어 지혈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잘은 몰라도 제대로 찔린 것 같았다. 앳된 남자는 저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병재는 머리가 하얘졌다.
"그, 그러니까. 신고부터 할게요."
"이렇게 아무도 없는 데서 거지같이 죽을 줄은."
"…...제가 있잖아요. 여보세요? 여기 사람이 칼에 찔렸는데요."
- 예, 119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전화 끊어."
"여기 사람이. 사람이 다쳤어요……."
"됐어. 유언 이미 했잖아. 다……. 끝났는데 뭐."
불현듯 남자는 울컥 피를 토해냈다. 병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119에서 알려준 대로, 남자가 정신을 잃을까 말을 붙이는 것밖에 없었다. 선생은, 지랄. 남자는 실성한 듯이 웃었다.
"정신차리세요 선생님. 선생님?"
씨발, 씨발!
중혁은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급히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겁만 주려고 했지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힘껏 찔러넣은 칼이 갈빗대를 빗겨 나간 일이 초심자의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그리고 칼을 뽑아낸 것이 가장 큰 불행이었다. 덕분에 가슴부터 배까지 전부 피로 젖어버렸으니까. 정신을 차리니 도박장 근처였다. 중혁은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흰 교복 셔츠와 티는 물론이요 얼굴까지 피에 젖은 지 오래였다. 그나마 셔츠를 걸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중혁은 의외로 셔츠를 반쯤이나마 잠그고 다니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위로는 두 개, 아래로는 하나를 풀고 다녔지만 그래도 상당 범위를 덮어주었다.
셔츠를 벗는 중혁의 눈에 말라 비틀어진 걸레가 들어왔다. 중혁은 걸레를 적신 뒤 재빨리 칼에 묻은 지문을 닦았다. 이제 어쩌지? 루미놀인지 뭐시기로 피를 검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중혁도 알고 있었다. 고민하다가 칼은 변기 뒤편 수조에 처넣었다. 뒷골목에서 카지노까지는 제법 거리가 되는데 설마 여기까지 오겠냐는 생각에서였다. 마주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좁은 길이라 차도 없고, CCTV도 없는 으슥한 곳이었다. 교복 셔츠도 크로스백을 꺼내 쑤셔 넣었다. 안에 받쳐입은 티는 검은색이라서 그다지 티가 나지도 않았다. 이제 다 좋은데 돈이 없었다. 어쩌지.
중혁은 문득 병렬에게 생각이 미쳤다. 대놓고 사치하지는 않았지만 몇십만 원 정도는 순순히 내줄 정도로 돈이 많았다. 하기야 도박장 아들인데 돈이야 널리고 널렸지 싶었다. 그리고 중혁은 곧 후회했다. 아, 칼 가져올걸. 기껏 병렬을 찾아갔더니 대꾸하는 폼새가 영 아니꼬웠다. 그래서 몇 대를 때렸다. 그러자 병렬은 얼굴을 세게 맞아 코피를 흘리면서도 묘하게 뭉그적거렸다. 칼에 제대로 그어진다면 저 멍청한 선배 새끼도 생각이 바뀔 터였다.
"……나 돈 없어."
"뭐?"
"돈, 없다고." "그걸 씨발 지금 말이라고."
"칩은 있는데."
병렬이 가리킨 것은 낡고 오래된 상자였다. 색이 바랜 유치한 야광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거로 봐서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씩 모은 듯했다. 중혁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여기다 담을게." 병렬은 주머니에서 별 볼 일 없는 천을 꺼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주섬주섬 칩을 담기 시작했다. 중혁은 한숨을 쉬며 창밖을 봤다. 이런 거지 같은 날에도 하늘은 제법 밝았다.
"비싼 것만 담았어."
"하. 내놔. 아니기만 해. 그땐."
돌아보려는 찰나, 얼굴이 멋대로 돌아갔다. 아찔한 충격과 함께 이가 몇 개 나가고, 둔탁한 소리가 이어지며 오른손 약지와 소지가 부러졌다. 다음 타격에는 왼 손목이 아작났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중혁은 머리가 비어 버렸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울렸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그 고통만은 선연해서, 중혁은 멋대로 감기는 눈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익숙한 노래가 들렸다.
"아빠. 나 사람 죽였는데. 아니, 죽일 것 같아요."
일렁이는 시야를 보며 중혁은 간만에 고통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팠다. 두개골 너머로 치밀어오는 통증이 지독하게도 아팠다. 반대로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손가락이 뚝 떼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죽는 걸까. 내 목숨이란 건 이토록 보잘것없는 것이었던가. 그 중에도 중혁은 몹시 카드가 보고 싶었다.
"싫어요."
에이스들과 왕들. 죽어버린 왕국의 여왕과 신하들.
"태수 형은 왜 죽었는데요, 그럼."
일렁이는 시야로 떨어진 것은 샛노란 오만원권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땡그르르하고 굴러들어온 것은 백만 원짜리 검정 칩이었다. 중혁은 손을 뻗었다. 이 돈이면, 한 달 정도는 넉넉하게 지낼 수 있다. 혹은 도박장에서 일주일을 지낼 수 있다. 아니, 운이 좋으면 두 배 정도는 어렵지 않게 불릴 수 있었다. 그러나 중혁이 뻗은 손은 맥없이 떨어졌다. 저편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손등을 툭툭 쳤다. "바꿔서 병원비 하던가 알아서 해."
어차피 도박하러 올 게 뻔한데.
옳았다. 중혁은 기대로 들뜨는 자신을 느꼈다. 이제 병렬이 돈이 없다고 구라를 친 건 관심도 없었다. 카드를 섞는 감각, 내지는 이번에야말로 돈을 따겠다는 환상이 어른거렸다. 몇 대 얻어맞아서 부러진 건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 행복한 기대에 젖은 채로 중혁은 밖으로 들려 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중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입안이 텁텁했고, 사방이 시끄러웠다. 익숙한 천장과 그다지 밝지는 않은 조명, 검붉은 거친 카펫. 큰 테이블 몇은 엎어졌고, 그 아래에는 깨진 술잔과 재떨이가 나뒹굴었다. 아수라장이었다.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담배 냄새와 섞여 어지러운 가운데, 한 명이 칼을 들고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저편에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사람들이 보였다. 짐작하건대 단속반 같았다. 분명 순순히 잡히고 협조를 해야 형량이 줄어든다고 들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 사람은 난리를 치고 있었다. 대치상태는 증원병력이 도착하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딱 봐도 한따까리하게 생긴 사람들이 삼단봉을 들고 도착하자 난동을 부리던 사람은 칼을 내려놓고 투항했다. 이윽고, 힘깨나 쓰게 생긴 어깨형님까지 줄줄이 잡혀갔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중혁은 대강 사과했다. "죄송함다."
"어린 애가 건방져?" 직급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말하자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어떻게 합니까?"
"해봐야 얼마나 했겠어. 훈방조치 되겠지."
대화를 들으며 중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단속이 지나가면 어차피 도박장은 다시 열린다. 당분간은 단속기간이랍시고 이리저리 헤집어놓겠지만, 어쩌다 윗대가리에게 뒷돈이 조금 들어가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단속이라는 말조차도 쏙 들어가고 말 것이었다.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이 죽였어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니 그 남자였다. 태수와 함께 있던 그 공대 촌놈. 그 남자의 통통한 손가락은 정확히 중혁을 가리키고 있었다. 중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씨발. 저걸 찔러 죽였어야 했는데…….
오랜 조사 끝에, 중혁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시체도 없고 흉기도 발견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서인지 공대 촌놈도 증언을 철회했다. 대신 도박 교육은 받아야 했다. 학생이 도박 같은 걸 하면 안 된다는 고리타분한 이유에서였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여름이었다. 커튼 없는 교육실에는 여름 햇볕이 늘어지고, 근처 가로수에 붙은 매미는 시끄럽게 매앰앰, 비융비융하고 울었다. 감긴 붕대에서는 냄새가 진동했다. 하수구를 닮은 지독한 냄새, 교육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울어대는 벌레 소리. 조사하면서 빼앗긴 검정 칩.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혁은 도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일 괴로웠다.
교육이 끝나면 중혁은 안절부절못하고 공연히 여기저기를 들락거렸다. 집에 가기 싫은 탓이었다.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텅 비어버린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탓이었다. 그 공허함이란 중혁으로 하여금 빨간불을 울리고 다리를 달달 떨도록 했다. 그러나 천장을 봐도, 구름을 봐도, 때로 얼룩진 벽을 보아도 다이아몬드나 스페이드 따위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애써 관심을 돌리려 피시방에서 롤과 피파를 하고, 푸닥거리한답시고 거슬리는 학생 놈을 두들겨 패도 이전과 같은 맛이 나질 않았다. 한번은 오토바이를 타다가 벽에 박을 뻔했다. 중혁은 모든 감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안방 서랍의 통장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그래도 사람 구실 하려면 대학은 가야 하지 않겠냐며 동생 등록금을 모아둔 통장이었다. 왜 바보같이 이 생각을 못 했던 걸까? 잃으면 어쩌나 밀려오는 불안도 잠시, 중혁은 불안을 털어내었다. 알 바인가. 자신이 그런 걸 언제 신경 썼던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따서 갚으면 될 일이었다. 이제는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분명 그랬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니미씨발 것이 구라를 쳐?"
"이것이 애미가 뒤즛나."
이런 상황은 중혁의 생각 속에 없었다.
중혁은 간신히 말을 외쳤다. "……증거 있어?"
"증거는 이 시벌롬이. 이게 증거지."
"애 잡는다. 적당히 해."
테이블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였다. 단정하게 입은 정장이 무색하게도, 삼백안에 묘한 사시까지 가진 눈 탓인지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남자는 자리에 앉아 팔짱을 꼈다.
"네가 태수 잡았다며? 별거 없네?"
"넌 또 뭔데─."
예고 없이 날아든 손바닥에 중혁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기껏 형님이 빼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하지 마. 그리고 넌, 상황 파악도 안 되니?"
중혁은 입술을 꾹 물었다. 남자가 말했다.
"사인 해."
휙 던져진 종이에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 을 조중혁은 상동파에 들어와 팔 하나와 빚 1억을 갚는다. 시키는 일은 다 할 것. 안된다면 몸을 팔아서라도 갚을 것. 그리고 그 아래에는 중혁과 가족의 신상정보가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중혁은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들어왔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실감이 났다. 남자는 싱긋 웃었다. "겁나니?"
"아뇨."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었다. 중혁은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어. 근데. 또 잘 안 죽거든."
"……."
"톱 가져와."
"예, 형님."
병재는 오랜만에 고향에 들르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출장차 방문한 거지만, 동원 선배가 발품을 팔아 인맥으로 일을 처리해둔 탓에 사실상 커피만 대접받고 나왔다.
동원 선배가 어디 좀 가자며 병재를 불렀을 때, 병재는 내심 당황하였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가로등이나 듬성듬성 있던 으슥한 거리에는 각종 간판이 번쩍였고, 불법 도박장이 있던 자리에는 번듯한 카지노가 들어섰다. 병재는 동원 선배와 함께 카지노 안으로 들어갔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닮은 조명 천장은 어울리지 않도록 밝았고, 경건한 인상마저 주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형형색색의 슬롯머신이, 널찍한 청록색의 테이블에는 정신없이 회전하는 룰렛이, 건너편 보라색 테이블에서는 크고 투명한 구형의 추첨기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십, 수백 개의 손이 바쁘게, 혹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딜러의 손끝을 따라 하나둘 몸을 내보이는 카드들, 가지런히 놓인 칩들, 검고 빨간 바탕에 올라탄 욕망들, 액체가 넘실거리는 유리잔과 부지런히 음료를 나르는 사람들…….
이 어지러운 광경 속에서, 오른손으로 딜러가 섞은 카드를 띄엄띄엄 나누는 남자가 있었다. 푹 패인 볼과 얼굴 위로 드리운 다크써클, 정리되지 않은 머리, 그리고 얼굴을 가로지르는 큰 상처. 그런데도 병재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단추를 꼭 두 개만 풀었던 앳된 얼굴의 그 남자. 이름 석 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다급히 달아나던 그 고등학생이었다. 병재가 증언하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한 이래로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줄곧 '교섭'을 시도했다.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 앞을 들락거렸다. 집을 오가는 중에는 슬쩍슬쩍 부모님을 쳐다보기도 했다. 경찰서 사람도 시체는 사라졌고 흉기도 찾을 수 없다며 제대로 본 게 맞냐고 캐물었다. 계속되는 압박에, 결국 병재는 칼을 맞은 것을 봤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발언을 철회했다.
병재만 상대를 알아본 건 아니었다. 남자는 주머니에 칼을 집어넣더니, 주저 없이 칼을 빼 들었다. 남자는 병재가 비명을 지를 틈도 주지 않았다. 빠르고 정확하게 몸을 날려 칼날을 병재의 목에 대었다. 남자는 속삭였다. "쥐새끼가 있네?"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동작에 병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친 사람이었다. 카지노에는 CCTV가 많다고 들었는데. 이대로 죽으면 우리 부모님은? 동원 선배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까. 정제되지 않은 사고가 머리를 떠다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름 모를 은인의 검은 정장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사람은 구경꾼도, 웨이터도, 보디가드도 아닌 동원 선배였다.
"거, 알만한 사람들끼리 왜 그러십니까. 말로―."
"넌 뭐야. 씨발 너도 내가 우습냐? 어디 시체 두 개 한 번 만들어 봐?"
동원 선배는 칼을 보더니 조금 당황한 듯했다. 보디가드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지만, 남자의 눈을 보고는 오히려 물러났다. 그제야 병재는 자신이 인질로 잡혔음을 깨달았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동원은 품 안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딱 봐도 현금이 두둑하게 들어간 지갑이었다. 동원은 지갑을 남자의 발치로 밀어 보냈다. 살짝 들어 올린 구둣발에 정확히 지갑이 들어갔다.
"아이고, 형님. 이놈이 뭘 모르고 돈을 안가지고 다녀서요."
"형님은 씨발롬이." 남자는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 근데. 카드만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알잖아요. 카드 발급받으러 가면 사람들이 디게 괴롭히는 거."
"야. 그냥 가라."
병재는 냅다 등짝을 얻어맞았다. 넘어질 듯 한참을 비틀거린 것을 동원이 겨우 받아주어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남자는 당당하게 인파를 가르며 사라졌다. 그 길에는 어떠한 제지도 없었다. 되려, 사람들은 그를 피했다. 정신없이 슬롯머신을 돌리던 사람마저도 흘끗 눈치를 보았다. 모두가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정말인지 이상했다. 이상한 세상이었다. 이름 모를 은인이 죽었던 날처럼, 그런데도 되려 병재를 추궁하던 경찰서장처럼 터무니없는 광경이었다.
소란이 끝나고 병재와 동원은 호텔로 올라갔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탐조등 불빛들. 저 멀리 송전탑을 밝히는 붉은 빛들. 고달픈 하루였지만 호텔에서 보는 야경은 아름다웠다.
"이런 꼴 보여주려고 온 건 아닌데."
"동원 선배. 전 괜찮아요."
"넌 뭐만 하면 괜찮아요, 괜찮아요……. 병재야. 인생 별거 없다. 그러니까 너무 열심히 살지 마. 너 쓰러진다. 그러다."
"동원이 형. 그 말 하려고 여기 온 거예요?"
동원은 뒤돌아 난간에 기대었다.
"네 몸은 네가 챙겨야 해. 아무도 안 챙겨준다."
그 말에 병재는 자꾸 검은 정장이 생각났다. 난생처음 보았던, 망설임 없이 자신을 뒤로 밀어내던 남자가. 난간에 얹어진 손끝에서 병재는 담배를 본 것만 같았다. 카지노의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 틈에서는, 희끄무레한 연기와 함께 불빛 하나가 타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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