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2024)
2024 합작
초록은 죽음의 색이다.
길가에 널린 찌라시 만큼이나 멍청하고도 사이비같은 생각이었지만 이석은 징크스라는 녀석을 쉬이 떨쳐낼 수 없었다. 해병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한계까지 녹색 자극제를 투여했고 살고 싶어 녹색 치료제를 받아내었으며, 전투복 하나에 의존하여 전장으로 내몰렸다. 죽어서 소각로로 들어간 그들은 싸구려 합성유와 함께 타들어가면서 녹색의 불꽃을 남기곤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미스트라를 침공한 죽음 또한 녹색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장마와도 같았다. 한 때 식민행성이었던 알제오는 유래없이 검열된 사건 이후로 저그의 온상이 되었고, 매년 이맘 때쯤이면 지면에 저그 무리를 떨어뜨리곤 했다. 장마철마다 맹독충은 폭우처럼 들이부었고 사방은 역병전파자가 뿜어내는 독연으로 자욱했다. 이번 장마는 예보―어디까지나 스캔을 돌려 간접적으로 정찰한 뒤 기도하는 걸 예보라고 할 수 있다면―했던 내용보다도 이른 시점에 미스트라에 왔다. 그 탓에 올해 겨울은 어딜가나 녹색이었다.
보급고로 틀어막힌 분지 밖에는 아직도 낙하주머니가 내리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처음에 떨어지는 낙하주머니는 살아남지 못한다. 단단한 표면은 대기와 몸을 비비며 마찰열에 불타올랐고, 고열에 흐물흐물해진 덩어리를 받아줄 정도로 대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그는 상관없다는 듯이 낙하주머니를 들이부었다. 그렇게 몇겹이고 쌓이고 쌓인 유기물 틈에서 드론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면 이어지는 포격이 드론을 산산조각 냈다. 상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공표하고 나섰지만 이석은 믿는 법이 없었다. 범람하는 녹색 사이에서 이석은 세상의 종말 한가운데에 있다는 감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에도 저그는 이땅에 뿌리를 내렸다. 언제 패퇴했는지도 모를 저그무리 또한 슬금슬금 기어와 그들 틈으로 합류했다. 그들은 녹색으로 짓무른 고름과 갑피로 어렵지 않게 공격을 받아내었다. 이석의 생각에 미스트라의 외곽 중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이곳 군사기지 데월러는, 그 저그가 겨울마다 침공하며 낮에는 잠을 잔다는 희한한 규칙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었다. 아마도 혹한에 적응한 탓이겠거니, 짐작하면서도 이석은 그 빌어먹을 얼음 행성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알제오는 어디까지나 이곳 미스트라에서 제법 떨어진 유형지였고, 이석은 그런 범죄자들과는 그럭저럭 거리를 두고 살았으니까.
들리는 말로 북부 수도국 근방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버렸다고들 했다. 하지만 촌구석 데월러에서, 이렇다 할 연이라고는 소각로에 쌓였다 날려버린 이석으로서는 다른 세상 이야기에 가까웠다. 더구나 이석의 주업무는 시체소각이었다. 관리 소홀로 소각로가 폭발하고 20명 정도가 죽은 이후 다소 재수없다는 이유로 지원자가 없었을 때 이석은 자원했다. 좀 재수가 없어도 사람 시체랑 노는 편이 저그를 마주하는 쪽 보다야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루종일 시체를 태우다보면 언젠가 있을 가장 치열한 전장에 직접 설일이 없으리라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언제부턴가 겨울 장마가 시작되자 해병들은 그를 미워했다. 시체매를 비롯한 온갖 오명이 붙은 시체수거반은 전장에 나가곤 했지만, 이석은 전장에 발을 붙일 이유조차 없었던 탓이다. 그 말할 수 없는 불합리함은 오롯이 증오로 화해서 이석에게 쏟아지곤 했다. 훈련소 동기의 적대적인 시선에도 이석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건 더 도망칠 곳도 없는 해병들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무언의 압박에 불과했고, 그에 비하면 안전한 일자리는 꽤나 달콤한 현실이었다.
기계적으로 소각로에 시체를 퍼 담던 이석은 문득 남자 하나를 발견했다. 찢어진 티셔츠와 낡다 못해 닳아버린 카고 바지. 자치령 군대가 다 그렇지만 썩 날티나는 복장이었고 퍽 꼬질꼬질했다. 노닥거릴만한 곳도 많이 알 텐데 굳이 담배 하나 태우겠다고 소각로까지 오다니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번듯하고 쾌활한 인상은 더욱 더. 하지만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므로 이석은 삽질을 마저했다.
“여기서 일해요?”
알아서 뭐할 거냐는 다소 퉁명스러운 답에도 그는 실실 웃으며 담배를 빨았다. 이석은 잠시 끊었던 담배 생각이 일었지만 곧 욕망을 털어냈다. 봉급이 뻔한 처지에 그런 사치는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전 지원 다니거든요. 기껏 유사나왔는데 자질이 없다나.”
“유사?”
“유령사관학교요. 전 규석이에요. 황규석.”
유사라는 정체불명의 말에 무심코 열었던 입을 이석은 도로 다물었다. 테라진은 물론이고 카르멘이나 우스카 따위의 합성마약이 보급되면서 개나소나 유령사관학교에 지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깟 담배 좀 폈다고 징집되었다가 해병들 사이에 처박힌 이석으로서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석은 삽으로 시체를 퍼다가 소각로에 넣기를 반복했다. 남자는 유령사관학교 시절을 시작으로 재미도 관심도 감흥도 없을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줄줄 늘어놓았다. 지금 넣는 시체도 아는 사람이었다는 둥, 매일 시체치우는 것도 고역이겠다는 둥 하나같이 무의미한 말이었다. 그러다 담배 하나가 이석의 앞에 떠오르자―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 유용함을 떠나 염력은 생각보다 흔한 능력이었다.―이석은 담배를 받아들고 말았다.
“힘들 때 써요.”
이석은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그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치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보통 이런 애는 오래 못 살았다. 싫은 소리 한 번 안하고 주변에게 퍼주다가 어느 순간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죽어버리곤 했다. 그러니 담배를 받아드는 것은 참 바보같은 짓이었다. 더구나 이석에게 있어 녹색의 담배는 꼴도보기 싫은, 어리석은 과거 그 자체였다. 그 생각대로 담배 좀 빤다고 팔자 좀 피어났으면 지금의 열배는 더 값이 뛰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었다. 문득 요즘들어 치솟은 담뱃값에 생각이 닿자 이석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남자가 이걸 빌미로 뭔가를 요구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나오면 다시 돌려주고 쫓아내야지. 소각로에 집어던지려던 담배는 끝내 이석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규석이라 소개한 남자가 이석의 삶에 침투하는 데에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규석은 수시로 소각장을 들락거리며 담배를 피워댔고, 이석은 다 태운 담배가 불을 내지 않도록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었던 탓이다. 붙임성이 좋은 규석이 종종은 술과 안주를 사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이석이 줄곧 사람을 그리고 있던 탓인지도 몰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렇다고는 하나 이석이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는 일은 없었다. 휴게실에서 대꾸없이 샌드위치만 씹고 있으면 규석은 며칠을 얼쩡거렸다. 무시했다. 의외로 규석은 순순히 무시당했다. 그러다가도 굳이 옆자리에 와서는, 아 이 형 먹을 줄 모르네, 하며 전자레인지를 발칵 열었다. 제가 먹을 보존식―볶음밥인지 뭔지 쉰 듯한 냄새가 나고 더럽게 매운―에 손을 대는 걸 본 이석이 눈에 불을 켜자(데월러는 먹을 것이 귀했다.), 규석은 치즈스틱 두 개를 얹어서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이렇게 먹으니까 훨씬 좋죠? 소주도 하나 해요. 짠, 하고. 짠.”
유려하다 해도 좋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권유에 이석은 제 손에 쥐어지는 것을 받았다. 이미 빨대도 야무지게 꽂혀있는 소주팩이었다. 거절하면 어디 뱃속으로 들어갈지 훤했기에 이석은 체념하고 같이 마시기로 했다.
팩 하나를 비우는 동안 복도로 해병 몇이 인사하며 지나갔는지 이석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분과도 다를 규석을 정말 잘 아는 듯이 대했다. 규석은 이들을 빈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었는데 이는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술이며 안주며 예쁜 여자가 헐벗은 잡지에 장비까지 무엇 하나 아끼는 법이 없었다. 하사 하나는 슬쩍 옆에 앉더니 소주팩을 집어들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규석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은퇴를 위해 저축해도 모자를 판에 이것저것 챙기다니 미래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이석의 눈에는 콩고물을 받아먹으려는 악어들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덧 공기가 빨대속을 울리고 소주팩의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었다. 규석은 흥이 올랐는지 노래를 한 곡 뽑기 시작했다. 해병 하나가 손을 마구 흔들고 지나갔다. 몇 년 살지도 않았을 동생에게서 어떻게 그런 아저씨같은 바이브가 나오는지 이석은 알 수 없었다. 곧 앵콜요청이 쏟아지고 규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라이트를 열창하자 지나가던 김 중사가 시끄럽다며 규석의 대가리를 후렸다. 엄살떠는 모습에 이석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오. 아……근데 형, 웃으니까 훨씬 낫다. 웃고 다녀요.”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멋대로 옆에 앉은 하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사귀냐? 나한테 반말도 찍찍하던 녀석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어째 낯이 익다 싶더니 간혹 소각로까지 쫓아오곤 했던 하사였다. 이유는 몰라도 이석은 그가 매우 거슬렸다. 어쩌면 본능적인 거부감같았다. 꼭 여자에게 미쳐서 한 번 해보려고 덤벼드는 신병처럼……. 문득 그쪽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뒤에서 들리던, 규석같은 타입이 제법 인기가 있다는 말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수작질같았다. 웃겨보겠다고 천박한 말을 던져대는 것 하며, 은근 슬쩍 만져대는 것하며……그런데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석은 점점 심사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규석의 얼굴에 걸린 가짜 미소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석은 타인의 표정을 잘 읽는 편이었고, 규석의 눈가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지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규석은 끝까지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불편한 심기가 점차 딱딱하게 굳어가는 눈가로 드러나는데도 애써 재미있다는 듯 호응했다. 이석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식어빠진 볶음밥은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규석은 먹을 것만 나누지 않았다. 심부름은 물론이고 종종은 수리비도 대주었고, 드물게는 신병에게 무기를 선물하곤 했다. 이석이 보기에 그건 자살행위였다. 미래를 버리는 것과 다름 없는 일들을 하며 명백히 규석은 자신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석은 규석에게 무언가를 사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낯설었다. 규석이 걸친 방어구는 어떻게 보아도 녹슬고 낡아빠진 1업 장비였다. 매번 볼 때마다 바꿔줘야지, 생각하면서도 선뜻 통장에 손이 가지 않았다. 새 1업 방어구를 사주자니 성능이 쓰레기였고 2업 방어구는 특히 비싼 축에 속했다. 사실 예금을 다 털어도 조금 부족했다.
“담배가 어딨더라…….”
“줄까?”
“어.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전 죽는 건 별로 안무서워요.”
잊혀지는 게 더 무섭지. 군홧발로 담배를 비벼끈 규석은 그래도 갈 때는 한 번에 가고 싶다며 중얼거렸다. 재수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이석의 말을 끝으로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석의 생각도 비슷했다. 이제와서 누군가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규석이 죽는다고 이석이 우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소각로로 실려온 훈련소 동기의 시체를 태울 때도 그랬듯 아무렇지 않을 것이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석은 충동적으로 색채론을 말했다.
“그래요? 내가 좋아하는 것도 다 녹색이던데. 사이오닉도, 이 담배랑 소주팩도. 아, 형도 녹색이잖아요. 맨날 그 작업복입고.”
“난 너 싫어해.”
“좋아하는 건 있어요?”
이석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입을 닫았다. 대신 제가 입은 작업복을 내려다보았다. 이석은 한 번도 작업복이 녹색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받을 적에 회색이었던 작업복은 언제나 그저 더러운 회색 작업복일 뿐이었다. 새삼스럽다는 듯 다시 들여다본 작업복은 연기에 물이들었는지 여전히 잿빛에 가까웠지만 녹색이었다. 규석이 입고 있는 300번대의 CMC 전투복도 새삼스럽지만 때묻은 녹색이었다. 그리고 규석은 이 기지에 사는 누구보다도 뜨거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이석은 규석이 제 품에 들려주는 옛날과자를 받아들었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봤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석은 문득 어지러움을 느꼈다. 바닥이 저를 향해 달음박질을 해댔다. 들끓는 듯한 고열에 배앓이는 덤이었다. 그렇게 이석은 앓아 누웠다. 아마 입이 심심하다며 소주팩을 한 입 두 입 나눠먹던 것이 본격적인 술판이 열리면서 먹으면 안될 것까지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잠을 잘못 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점점 심각해서 먹은 것도 없는데 게워내기를 반복했다. 저거 감염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석은 생활관에 격리되었다. 요근래 이렇게 아파본 적이 없었는데 정작 아픈 것보다도 규석이 보러오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형, 근데. 자고 갈게요, 라는 마지막 말만 귓가에 맴돌았다.
주저하던 이석은 모처럼 보존식을 배급하러 들어온 의무관에게 물어보았다.
“아, 걔. 네 몫까지 두 탕 뛰더라. 소각로도 보고 지원도 나가고. 보증이라도 서줬냐? 어디가? 누워있어. 그 꼬라지로 일 못한다.”
의무관의 손에 이석은 맥없이 주저앉았다. 혼자서 군사기지 각지에서 도착한 시체를 퍼올려 태우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개인시간이 없다시피한 일이었고, 장마철로 인해 시체량이 눈에 띄게 늘어난 지금 와서는 여러모로 지원까지 나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걸 네가 왜 하냐고. 다음에는 내가 간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대로 이석의 눈이 감겼다.
이석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른 오후로 시체 수거작업이 한창이었다. 이석은 군화만 신고 뛰쳐나가 규석을 찾았다. 패잔병들 사이에서 규석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이곳저곳 수소문을 해도 규석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시체라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방으로 나가자 복귀 시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려퍼졌다. 저그가 오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이석은 시체라도 건져야 했다. 아니, 규석이 죽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죽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무의미하고 허무하게는…….
규석은 더 깊은 곳, 아마도 가장 치열했을 최전방에서 발견되었다. 낡은 전투복은 날카로운 가시에 꿰뚫려있었고, 다리는 거대한 무언가에 짓잇겨서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이석은 늦게 발견했다는 죄책감도, 방어구를 끝까지 사주지 않았다는 후회도 애써 뒤로 밀어넣었다. 종종 산채로 뜯어먹히는 해병이 발견되는 만큼 혹시 멀쩡할지도 몰랐다. 두어번의 시도 끝에 이석은 혈관을 찾아 자극제를 투여했다. 혈색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피를 많이 흘린 듯했다. 자극제가 세 번 투여되고서야 약이 들었는지 규석은 눈을 떴다. 네가 이런다고 누가 알아주냐는 말에 규석은 망설임이 없었다.
알아주잖아요.
“떠나 보낸 다른 사람처럼 너도 잊을 거야.”
사실. 잊어도 괜찮아요. 죽는 거, 생각보다 별거 아니더라고요.
한대 피고 싶은데 그건 아쉽네. 규석은 여느 때처럼 웃어버렸다. 이석은 그 웃음 아래에 숨은 녹색을 읽어냈다. 규석은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 지그시 내려간 눈썹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죽음을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사람은 이석이었다. 누군가는 형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이석이 주머니를 뒤져 합성마약을 꺼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이석의 손에 닿은 규석의 뺨은 차가웠다. 현실감이랄 게 조금도 없어서 이석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뻔한 결말만큼이나 바보같은 죽음에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석은 손 끝에 사이오닉에너지를 모았다. 탁,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입에 대고 가쁜 숨을 들이쉬자 녹색의 연기가 피어났다. 손끝에 걸린 불빛은 떨렸고 잃어버린 방향감만이 그의 주위를 빙글 돌았다.
역시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규석의 시체에서 나는 연기는 유독 짙었다. 그가 애연가였음을 방증하듯 허공으로 뿜어내는 사자의 숨결은 선명한 녹색이었다. 누군가의 마음만큼이나 외떨어진 소각로에서 불길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이석은 믿지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오늘도 대답은 없었고, 지천에 깔린 초록은 여전히 죽음의 색이었다.
이석은 다시끔 녹색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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