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엘] 어른의 나라

잉슬님 cm

 그는 내 것이다.

 내 10살 생일에 처음 만난 그 아이는 내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부유한 귀족가의 장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대부분 가질 수 있었다. 어떤 선물을 받아도 나는 그저 시시했다. 화려한 옷도 최고급 장난감도 완벽하게 귀여운 인형도 나는 다 별로였다.

 인간은 마음이 있는 존재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호화로운 옷을 입고 편안한 침대에서 자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물론 그런 물질적인 안락함이 일시적인 만족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또다른 인간이다. 아니,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좋다.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무언가에게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에게 물질적 필요만큼 중요한 것이 마음이다. 물질적 풍요는 당장의 근심은 없앨 수 있어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지는 못한다. 마음이 있기에, 마음을 주고받기에, 그 주고받음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기에,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

 나는 내 손이 닿아야 움직이는 장난감이나 그저 푹신하기만 한 인형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사람을 원했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나를 쳐다보고,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을 잡아주고, 내가 사랑을 주면 나를 사랑해주는 그런 존재를 원했다. 부유한 귀족가의 도련님에게는 그를 위해 일하는 존재가 많았다. 그러나 그 아이와 마음을 주고받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아이의 주위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른들 뿐이었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바빴다. 선생은 아이의 공부에, 하녀들은 아이의 건강과 안전에, 하인들은 아이의 말썽과 수습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른에게 아이의 마음이란 어르고 달래야 하는 것이지 주고받고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창밖을 내다보면 지저분한 평민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곤 했다. 더럽고 지저분한 평민 아이들은 백작가의 도련님과 격이 맞지 않았다. 같은 귀족끼리도 서열이 있었다. 아이가 원한 것은 복종이 아니었다. 그저 눈을 맞추고 나란히 마주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 선물은 마음에 들 게다.’

 아버지는 내게 늘 다정했으니 나를 사랑했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는 아이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했으나, 정작 아이가 원하는 것만은 몰랐다. 내가 그 날 받았던 선물은 그에게 받은 것 중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저택 밖의 삶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사람도 고양이처럼 어디선가 가져오는 것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물이었으니까. 아이는 마침내 자기가 독점할 수 있는 인간을 가진 것이다. 나를 위해 살아가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오직 나만을 따르고, 내 사랑을 받고 나를 사랑해주는.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어른은 인간이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어른이 되면 아름다운 동화속에서 살지 못한다. 추악한 현실과 마주한 순간 아이는 동화의 세계에서 쫓겨나 어른이 되고 만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가장 몰랐던 건 열일곱 살의 어린아이, 철없는 노엘.

 어른은 더이상 주전자가 말하지 않고, 인형과 사랑을 나눌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마음이 있다.

 내 것에게도 마음이 있었다.

 아이는 어른이 된다.

 마음을 가진 물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필립은 언제나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7년을 나와 함께 살면서 필립은 내게 티끌만큼의 원망도 드러낸 일이 없었다. 크게 화를 내지도 않았다. 크게 웃거나, 기뻐한 일도 없다. 상심하거나 눈물 흘리는 것을 본 적도 없다. 필립은 언제나 어둠처럼 고요했다. 나는 그 속에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잠겨 있는지 몰랐다. 그저 그 고요함이 좋았고, 그 안정감이 좋았다. 필립은 바람 없는 호수처럼 잔잔했고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비명을 삼키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표면에 드리운 그림자만을 보며 나는 그 호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해왔다.

 “뭐 하러 간 게냐?”

 아버지는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물었다. 떠보는 말 한 마디 없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목소리에는 치부를 들켰다는 당혹감보다는 오히려 더러운 것을 묻히고 온 꼴을 본 것 같은 불쾌감이 묻어 있었다. 나는 잠시 감정이 치밀어올라 할 말을 잊었다. 천천히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크고 네모난 책상.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 서류. 깃털이 잘 보이게 세워진 깃털펜과 크리스탈 장식이 달린 잉크병. 그는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만년필 따위는 품위가 없다며 항상 깃털펜을 고수하는 남자였다. 책상 오른쪽의 선반장은 전부 꼬냑과 위스키였다. 어릴 때 내가 이 방에 와서 저 병에 대해 궁금해하면, 술은 절제를 아는 신사가 되어야 마실 수 있는 거라며 웃는 낯으로 말하곤 했다. 그는 책상 앞에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집주인의 자세로 앉아 조금 불쾌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에서 꼬냑 한 병을 꺼냈다.

 “너도 곧 성인이니 술을 배울 때가 됐지. 와인 같은 음료수 말고, 진짜 술을 말이다.”

 “생각 없어요.”

 “받아라. 너도 언제까지나 아이는 아니니까.”

 아버지는 내게 억지로 잔을 쥐어주고, 두 잔에 꼬냑을 따랐다. 피처럼 붉은 액체와 함께 짙은 알코올 냄새가 차올랐다. 나는 잔을 잠시 쳐다보다가, 그걸 따라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스스로 채운 잔을 단번에 비우고, 다시 한 잔을 채웠다.

 “왜 때렸어요?”

 “......응?”

 그런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아버지는 대답 대신 나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다스려야 했다. 어째서 이해를 못하는 거지? 내가 그에게 따질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

 “필립에게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

 “아아, 난 또 뭐라고. 버릇없는 하인 좀 교육시킨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태연한 목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거잖아요. 나에게 주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 그래서 그게 네 시중도 들어주고 응석도 받아주고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놀아줬잖느냐. 어린 자식이 타고 놀 망아지를 길들이는 건 부모의 몫이지.”

 “왜 내 거에 마음대로 손을 대냐고요!”

 “노엘. 지금 그거 때문에 화를 내는 거냐? 내가 누구 때문에 그걸 사왔는데? 내가 안 그랬으면 그게 너한테 그렇게 고분고분했을 것 같으냐?”

 술 선반 옆에 걸린 채찍이 눈에 들어왔다. 억눌렀던 구역감이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예전에 나는 그 자리에 그런 게 있는 이유를 신경쓴 적 없었다. 말이 있는 집에 채찍이 있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이 방은 4층이었고, 승마장은 별채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립이 버릇이 없었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필립은 언제나 나보다 의젓하고 태도도 반듯했다. 필립은 늘 어리광 부리는 나에게 규칙과 예법을 지키도록 엄하게 말해주었다. 버릇이 없었다니, 아이가 버릇이 좀 없으면 그렇게 큰일인가? 그게 그렇게 끔찍한 흉이 지도록 때릴 이유가 되는가?

 필립의 몸을 우연히 봤을 때, 나는 처음엔 필립이 나 모르는 사이에 사고라도 당한 줄 알았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필립을 만난 이래,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필립은 감정표현이 많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즐거움도 필립은 좀처럼 얼굴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필립이 내게 그토록 강한 감정을 내보이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아주 깊고, 무거운, 증오였다.

 정확한 생일은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필립은 나와 같은 나이였다. 나는 아버지 말도 안 듣고 가정교사 말도 안 듣고 하녀장 말도 안 듣고 언제나 떼쓰고 도망다니는 말썽쟁이였지만 지금껏 회초리 한 대 맞은 일이 없다. 대체 필립이 그렇게까지 맞을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부탁한 적 없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충격과 분노와 죄책감이 소용돌이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친구가 갖고 싶었을 뿐이다. 귀찮아하지 않고 놀아주고, 일부러 못하는 척 연기하거나 져주지 않고, 그냥 같이 즐거워하며, 비슷하게 놀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했다. 그걸 물건처럼 사달라거나, 어디서 잡아오라거나, 그런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걸 나를 위해 길들여 달라고, 나와 똑같은 나이의 친구를 그렇게 모질게 때려서 어떻게 만들어 달라고 바란 것이 아니었다. 필립의 몸을 보았을 때, 필립이 말한 암시장을 보았을 때, 나는 그보다 더 충격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시장에서 망아지 사듯 어린아이를 사다가,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수시로 매질하는 짓을 무려 7년 동안 해왔는데, 그걸 아무 꺼리낌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내가 17년 동안 봐온 아버지라는 건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노엘. 너 설마 그거 때문에 암시장까지 다녀온 거냐? 하… 노엘, 네가 아직 어려서 아직은 모르겠지만, 조금 더 크면 나를 이해할 게다. 그 때가 되면 이 아비가 자세히 알려주마.”

 “왜 아니라고 하지 않으세요…? 난 그런 적 없다, 부정도 안 하세요?”

 “쯧, 알았다. 이제 너도 컸으니 네 건 네가 알아서 해라. 하지만 명심해라, 노엘. 그런 천한 것들은 오냐오냐 하면…….”

 “아버지!”

 한 치의 반성도 없는 말에 나는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제발 더이상 날 자극하지 말아줬으면 했다. 괴물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말을 이어갈수록 17년간 날 애지중지 사랑해준 아버지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하인들은 천한 신분이었다. 가끔 매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용인들이었고, 대우가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고 떠날 수 있었다. 처음 필립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사용인들을 쫓아다니며 아버지가 하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묻고 다녔다. 필립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자상한 내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처음엔 좋은 말만 하며 말을 아끼던 사용인들은 내가 선물을 쥐어주며 집요하게 묻자 조심스레 보고 들은 것을 귀뜸해 주었다.

 아버지는 일처리가 마음에 안 들면 종종 하인들을 때리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필립에게는 유독 가차없다는 증언이 여러 명에게서 나왔다. 아무리 일을 잘 해놔도 말 한 마디 손짓 하나 꼬투리 잡아서 끌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그 때마다 어쩐지 지나치게 화가 나 있더라고 했다. 늙은 하녀들은 필립이 오갈 데 없는 아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하며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필립이 말한 ‘암시장’과 ‘인신매매’를 연결시키면, 필립은 노예였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갈 곳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물건.

 물건이라고 해도 그건 내 물건이다. 필립의 주인은 나였다. 나여야만 했다. 물론 필립은 물건도 아니다. 애초에 내가 물건으로 만족했다면 필립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실을 부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어서, 나는 더 깊은 어둠을 들여다봐야 했다.

 아버지가 소유했다는 암시장에는 더욱 흉측한 진실이 가득했다.

 내 주위에는 언제나 깨끗하고 예쁘고 좋은 것만 있었다. 아버지는 다정했고, 항상 내 주변을 깨끗하고 예쁘고 좋은 것들로만 꾸며주었다. 그러나 철모르는 어린이가 누렸던 그 모든 좋은 것들은 그 추악하고 더러운 곳에서 나왔다.

 귀족은 고귀한 신분이지만,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산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냥 덮어버리고, 안 본 것으로 하고,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공평하지가 않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더럽고 추악한 세상이 현실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있었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필립은 내가 사는 곳으로 올 수 없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환상이고 허상이었으니까. 그 곳은 아버지가 날 위해 예쁘게 꾸민 가짜였다.

 내가 필립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혐오스럽지만, 그 곳이 바로 현실이라는 세상이었다.

 “노엘. 괜찮으냐?”

 그 남자는, 아버지의 얼굴로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다. 사람이 아닌 게 사람으로 보였다. 아니, 사람이 사람 아닌 걸로 보이는 건가?

 내가 들고 있던 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나 있었다. 피처럼 붉은 액체가 바닥에 흥건했다. 달콤한 술냄새가 났다.

 “방에 가서 쉬는 게 어떠냐? 아직 안 봐도 될 것을 봐서 많이 피곤할 게다. 이건 하녀를 불러서 치우라고 하마.”

 나는 나를 지나쳐 문으로 향하려는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를 돌아보는 얼굴에는 걱정과, 연민과, 애정이 담겨있었다. 내가 잘 아는 얼굴인데, 낯설게 보였다.

 “아직… 이야기 중이잖아요, 아버지…….”

 해야 할 이야기가 더 많은데.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저 슬펐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손에 든 술병을 빼앗아 들고 술을 마셨다. 진한 꽃향기와 함께 입으로 흘러들어온 액체가 목구멍을 태우며 넘어갔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입술을 닦고, 나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노엘.”

 “암시장… 폐쇄하세요.”

 “노엘. 너도 어른이 되면…….”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게 어른이라면 안 될래요. 없애주세요. 제발.”

 “철없는 소리 하지 마라, 노엘. 넌 그만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다.”

 헛소리하지 마. 철이 없었던 건 그런 세상이 있는지도 모르고 꿈 속에서 살아온 도련님이지. 난 이제야 겨우 철든 인간이 되었어. 내 꽃밭이 얼마나 더러운 거름을 먹고 자랐는지 이제는 안단 말이야. 그래, 꽃밭이 예쁘면 거름까지 신경쓸 이유는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꽃이 내 것의 불행과 원한을 먹고 자란다면 내 손으로 뽑아버리겠어!

 눈 앞이 핑 돌았다.

 제발, 당신을 아직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동안에…….

 너 지금 필립 때문에 이러는 거냐? 고작 그따위 것 때문에?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술병을 쥔 손이 가벼웠다. 부웅, 무거운 것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조금 늦게 귀에 들렸다.

 

.

 필립은 언제나 감정표현이 적었다.

 어릴 때는 웃거나 당황하거나 한 일도 있었다. 이유는 주로 나였다. 난 내 과자를 남겨두었다가 아버지 몰래 필립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다른 건 받지 않는 필립도 과자는 받아먹었다. 그냥 주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부엌에 든 도둑고양이처럼 한껏 눈치를 살피며 과자를 오물거리다가 조금 쑥쓰러운 웃음을 짓는 게 보기 좋았던 이유도 있었다. - 아쉽게도 열세 살이 넘어가면서는 그런 걸로 웃지 않게 되었지만. - 당황하게 한 일은 따로 언급할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사용인들을 많이도 괴롭혔던 개구쟁이였으니까.

 처음엔 장난감이나 책도 나누어 주었지만, 필립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척만 했다. 나중에 내 방을 보면 항상 필립에게 준 장난감이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 발견되었다. 그 땐 서운했었다. 내가 필립을 얼마나 곤란하게 했는지도 모르고.

 나는 창밖의 어둠처럼 깊이 가라앉은 필립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필립은 분노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고요한 어둠 아래에는 많은 것이 감춰져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곁에 두었으면서, 나는 내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진실은 잔혹하고 아팠지만 동시에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흥분과 희열을 일으켰다.

 나도 몰랐던, 내 안의 깊고 어두운 곳에서.

 나는 이제야 내가 가진 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도련님.”

 “응.”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어쩌면 우리에게는 더 번듯하고 괜찮은 선택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마시지 못하는 술과 감정에 휘둘려 저지르는, 죄로 죄를 씻는 미숙한 선택이 아니라. 내 사랑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어쩌면 내게만은 진실했을 또다른 사랑을 제물로 바치는 짓이 아니라.

 하지만 그건 이미 과거가 되었고, 불가능한 선택이 되었다.

 “필립.”

 “네.”

 나는 나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속에 감춘 것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 검고 깊은 심연을.

 “노엘이라고 불러줄래?”

 “.......”

 필립은 조금 오래 침묵했다. 나는 필립의 시선이 내게서 떠나지 않는 것에 만족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필립의 눈매가 약간 가늘어졌다. 그것만으로는 어떤 표정도 되지 않았지만.

 “노엘.”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거면 됐어.

 7년만에 겨우, 우리는 시작점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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