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호박 실존 사건

대마팟 신년 합작 - 가을

자캐놀이 by Ming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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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상상해보자.

당신은 풍성한 가을 수확을 기대하며 아침 일찍 일어났다. 빠르게 채비를 마치고 수확용 바구니를 끌어안고 밭으로 왔다. 그 순간 밭을 전부 차지한 집 한 채 크기의 호박을 마주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집 한 채도 그냥 집이 아니라 2층에 다락방도 있고 침실 4개에 큰 거실까지 있는 대가족용 집 크기로.

이 일은, 25살, 귀농 2년 차 에이드리안 베일리 씨의 실화다.



가을은 에이드리안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날씨도 선선하니 밖에서 낮잠 자기 적합하고, 그처럼 화려하게 알록달록 색을 입은 단풍이 좋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호박 파이를 위한 싱싱한 호박이 무럭무럭 자라는 계절이지 않나. 그리하여 에이드리안은 올해에도 밭에 호박을 가득 심었다. 농사 실력이 좋아졌음을 인정받아 마을에서 땅도 조금 더 받았고 다른 이웃들도 에이드리안을 위해 호박을 여럿 심어주기도 했다.

사랑해 마지 않는-당연히도 애인인 라피스보다는 후순위다.- 호박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하면 자라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 세상의 그 어떤 농작물이 하루아침에 자라겠느냐만은, 가을의 다른 작물들 중에서 제일 늦게 자라니까. 그렇게 오랜 시간 애를 쓰니 맛있게 자라는 거겠지만서도…….

덕분에 밭에 물을 주고 그걸 도와준 이웃과 호박밭에 앉아 하릴없이 담소를 나누기가 가을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었고, 호박들에게 그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기에도 좋지 않나. 정확히는 호박에게 눈치를 준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으나.

그리하여 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애플 파이를 나눠먹는, 호박 눈치 주기 파티가 오늘도 열렸다. 참가한 이웃은 라피스와 스피넬이었다. 다른 이웃들도 들렸다가 자기 밭에 물 주고 애플 파이 한 조각을 챙겨 할 일을 하러 떠났고. 느긋하게 애플 파이를 한 입 베어 물고 달콤한 카라멜 헤이즐넛 라떼까지 쪼옵 빨아들인 에이드리안이 잔을 내려두고 호박밭에 시선을 두었다.

“하… . 호박 녀석들, 눈치도 없이. 빨리 자라지는 못할 망정.”

“내가 호박 요정들에게 얘기 잘 해뒀으니 그래도 맛있게 자랄 거란다~.”

“호박 요정이 있어?”

“그러엄. 스타프루트 요정도 있단다.”

“음, 그건 라피스일 거야.”

“그럼 호박 요정은 이디겠네.”

마주 본 채로 개구지게도 웃는 둘을 보며 스피넬마저 흐뭇하게 할배 미소를 띄우니, 그렇게 웃는 사람만 셋이 되었다. 벨루가 마을의 제일 가는 닭살 커플 사이에 껴서도 기분 좋을 사람은 단연 스피넬 밖에 없으니 아무래도 이 셋이 고정 멤버가 될 수밖에. 두 사람도 다른 이웃들 앞에서는 나름 자제했었으나 스피넬은 보기 좋다고 종종 부추기곤 했던 터라 이러지 않는 게 더 어색할 지경이라.

스피넬이 애플 파이를 노리고 날아드는 노랑 단풍잎을 손 휘적여 치워내고, 자신이 지켜 낸 애플 파이 한 조각 집어들며 입을 열었다.

“그래, 호박하면 생각나는 게 또 있지. 자연의 사랑을 받는 마을이라 그런지 종종 아주 신기한 일이 생기곤 한단다.”

“신기한 일?”

“에이드리안 집만한 커다란 호박이 자란다거나~?”

내 집 만한? 에이드리안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생각해보았다. 현관에 서 있으면 고개를 치켜들어도 지붕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큼지막한 2층 집. 그리고 그만한 크기의 먹음직스러운 호박이라.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이야기다. 신데렐라가 그걸로 호박마차를 만들어서 타고 가면 딱이겠다 싶을 정도로. 아니지, 마차로는 너무 크겠다. 호박 집… 을 만들어야 하나.

“진짜로 자란다면 좋겠네에~. 그걸로 다같이 호박 파이도 50개는 만들어 먹게. 아니면 호박마차를 만들고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는 거야. 그럼 이번 할로윈 분장은 요정과 신데렐라, 왕자님이겠네.”

“우하항! 그거 재미있겠구나! 나도 꼭 불러주렴.”

말투로 미루어보건대, 에이드리안은 스피넬이 당연히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선연했다. 물론 스피넬이 정말 마법사라고 믿긴 하지. 그러나 마법이나 동화 같은 이야기와 거리를 두고 산 현대인이라 어쩔 수 없었다. 정령이니 요정이니 하는 건 실제로 만날 일 없으니 마법사인 스피넬은 만날 수 있나보다 하겠으나, 거대 호박이 자라는 건 마법사에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 아닌가.

“호박 파이도 50개나? 썩기 전에 먹으려면 매일 호박 파이만 먹어야겠네.”

“으음, 이웃들이 다같이 힘낸다면 될 수도….”

“만약 정말 거대 호박이 자란다면 이번 가을에는 영령의 전야제 겸 호박 파티를 열어야겠구나~.”

정말 환상 같은 일이겠다. 벌어진다면 참 재미있겠지만. 에이드리안은 딱 그정도의 감상만 가진 채 거대 호박에 대한 이야기를 머리통 한 구석에 조용히 밀어두었다.

바보 같은 에이드리안. 미래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구.


“이게 뭐……야?”

에이드리안은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수확용 바구니를 툭, 떨어뜨렸다. 이어 풀썩 무릎이 꺾여 비련의 주인공 포즈로 밭에 주저앉기까지. 그도 그럴 것이, 뚱쭝하게 자란… 호?박?이 그에게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하늘을 다 가리고 있었다. 그 기세에 눌려 그대로 뇌가 멈추고 몸에 힘이 풀리는 건 허약하고 가녀린 185cm의 청년에게 있어 불가피한 일이었다.

생긴 건 분명 호박이 맞았다. 가을의 햇살을 받아 쨍하게 빛나는 선명한 주황색. 잘 보이지는 않지만 꼭다리도 초록빛으로 싱그러우니 아주 건강하고 튼실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매끄러운 표면을 슥슥 문지르다보면 틈틈이 주욱 그어진 유기농의 상흔도 만져졌다. 다만 그 크기가 에이드리안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거대할 뿐. 에이드리안이 분신술을 해서 안에 스무 명은 족히 들어갈 부피에….

이런 게 왜 내 밭에? 그러니까 내가 심은 호박 25개가 지금 이 거대한 호박 하나로 뭉쳐서 자랐단 말인가?

이게 무슨 합체 진화 거대 호박 레인저도 아니고…….

의젓하게 혼자 해결하는 법을 모르는 흐느적 해파리는 우선 들러붙을 이웃을 먼저 선정하기로 했다. 머릿 속에서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이웃들이 스쳐지나갔다. 데이지에게 부탁하면 이 커다란 것도 들어서 당장 집 앞에 옮겨주겠지? 그러면 빈 자리에 다시 호박 25개를 심자…. 아니지, 일단 일종의 자연 재해니까 제이드에게 말해서 마을의 지원을 받아 해결해야하나? 그런데 이건 자연 재해인가? 아니, 이게 뭐지.

거대 호박을 마주하고 10분이 지나서야 가장 먼저 할 일을 결정할 수 있었다.

우선 라피스에게 가자.

정서적 안정을 찾은 뒤에 해결해야겠어.

물론 지금 당장은 어려웠다. 다리에 아직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호박에 쫄아서 주저앉은 게 창피한 일이라고 누군가 생각한다면, 실제로 이 거대 호박을 못 봐서 그런 거다.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일을 마주하면 놀라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그리하여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호박 겉면만 슥슥 쓸어내리며 충전 시간을 이어갔다. 감촉은 정말로 호박과 똑같으니까. 그래, 크기만 이렇지 정말 호박이 맞아.

… 호박. 그것도 아주 큰. 그러니까, 이걸로 정말 호박 파이 50개를 만들고 호박 성을 만들어서 할로윈의 스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놀란 마음에 두근거리는 심장은 둘째치고, 점점 들뜸과 설렘이 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주저 앉은 처량한 꼴은 여전해도, 호박을 올려다보는 시선만큼은 초롱초롱 생기가 넘친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이 거대 호박으로 할 일을 떠올리며 허송세월을 보내던 차,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다정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멀리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밭을 차지한 꼴을 보고 경비원의 본분을 다하고자 온 라피스였다.

“오, 라피. 안 그래도 곧 너 보러 가려던 참인데.”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요. 이건…… 뭐고.”

당혹스러움이 어린 시선으로 거대한 호박의 끄트머리를 한 번 올려다본 라피스의 시선이 다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에이드리안에게로 돌아왔다. 드디어 호박을 수확할 날이라며 신나서 팔랑팔랑 집을 나서던 에이드리안의 뒷통수가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은 이렇게나 허망한 자태라니. 에이드리안은 자기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며 어깨나 한 번 으쓱해보일 뿐이었지. 아침에 와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는 말에 라피스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이게 그 거대 호박…?”

“응. 스피넬이 말해줬던 그거. 얘기를 들었어도 이렇게 놀랐는데, 안 들었으면 별안간 기절한 채로 발견되었을지도~?”

가까이에서 보고 있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고 황당했다. 잘못 보고 있는 건지, 꿈인지 싶어 라피스가 괜히 본인의 눈을 비벼보았으나 거대한 호박의 그림자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다 가린 채 그 위용을 자랑하는 게 가히 거대 ‘왕’호박이라고 불러드려야 어울리겠다.

우선 에이드리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에 라피스가 손을 뻗자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은 에이드리안이 비척비척 일어난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힘들다는 투정과 더불어 익숙하게 엉겨붙듯 안기길래,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역시 정서적 안정은 중요해….’ 의미 모를 중얼거림에 라피스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으나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철썩 붙은 에이드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 호박 25개가 거대한 호박 하나가 되었으니… , 이게 이득일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왕 크니까 왕 좋은 거 잖아?”

“음.”

답이 정해져 있음이 뻔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기분이 나쁠 리 있나. 오히려 기대감과 들뜸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하고 있어, 라피스 눈에는 참 귀엽게만 보였다. 에이드리안 본인도 이런 제 얼굴이 잘 먹힌다는 걸 알고 짓는 표정이니 아무래도.

호박 25개와 이 거대 호박 중 무엇이 호박 파이를 더 많이 만들어낼까, 라고 체계적으로 계산하는 건 불가능하니 제쳐두자. 일단 할로윈 기념으로 호박 집을 만들 수 있다는 건 거대 호박의 압승이었다. 남들은 겪어보기 힘들 일을 호박을 향한 사랑 하나로-아무래도 호박만 25개를 심는 주민은 에이드리안이 유일했으므로- 이루어냈으니 경험적인 측면에서도 좋은 일이긴 하지. 가장 큰 문제는 이걸 어떻게 수확하느냐, 겠지만. 어쨌든 에이드리안의 사고 방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자 하니 라피스 또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도 긍정해주니 에이드리안이 더욱 신나서는 라피스에게 몸을 기대던 것을 그치고 제 발로 선다. 너무 오래 기댔나 싶어 힘들까 걱정한 까닭도 있었고. 다시 고개를 양껏 꺾어 하늘을 다 가린 호박집을 보다가, 라피스가 바닥을 굴러다니던 수확 바구니를 주워 건네기에 우선 받아들었다.

“으응, 이렇게 작은 바구니로는 턱도 없겠지~?”

에이드리안의 손에 들린 바구니와 거대 호박을 번갈아서 서너 번쯤 비교하던 라피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안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에이드리안이 물어보니 그래도 고심하는 척이라도 해줬다.

“데이지에게 부탁해서 길에 올려달라고만 부탁할까? 집까지는 굴려서 가고.”

데이지라면 집까지도 쑥 들어서 간단히 옮겨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굴려서… . 그래. 이렇게 크고 호박은 껍질도 두꺼운 편이니까, 굴려서 가도 어디 깨지진 않겠네.”

“좋아. 가는 길에 다른 이웃들도 불러서 도와달라고 하자. 스피넬이 마법으로 뿅 옮겨줄 수 있다면 더 좋고. …그리고 어쨌든 이상한 게 자랐으니 제이드에게 얘기하긴 해야겠지. 가는 길에 들리자.”

같이 굴려달라고 하면 누구든 즐겁게 도와주겠지. 에이드리안은 혹시 본인도 도움이 될 방법이 없을까 싶어 우선 거대 호박을 몸으로 있는 힘껏 밀어보았다. 놀랄만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심지어 0.01mm도 밀리지 않았다.- 가자며 다시 바르게 섰다.

“마당에 두고 속을 파내서 멋진 호박 궁전을 만들자고. 할로윈 전에 다 하려면 바쁘겠다!”

드물게도 의욕이 가득한 모습을 보곤 라피스가 잠시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그것도 모르고 속을 파낸 걸로는 호박 파이를 정말 50개는 만들 수 있을거라느니, 기대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새 주제를 바꿔 쫑알거린다. 찌지 않은 호박이어서 안을 파는 일이 무척 고통스러울 거라는 생각을 못하는 모양이다. 하다못해 반으로 갈라서 안의 씨를 빼내야 뭐라도 시작할텐데, 이렇게 거대해서야….

어쨌든 신나고 행복해보이니 그만이지 않을까. 굳이 말해서 분위기를 망치기는 싫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팔짱끼고 붙어 선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주었다. 주저앉느라 머리카락 끝에 묻은 흙을 발견하고 털어주기도 하고.

텅 빈 바구니를 달랑달랑 흔들며 낙엽이 길 가장자리에 수북히 쌓인 길을 걸어가는데도 기분이 퍽 좋았다. 바구니에 담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호박이 자랐기 때문이겠지.

어떻게든 옮긴 거대 호박을 조각하겠다고 톱으로 문을 만들어 안을 열어보니, 먹음직스러운 호박이 족히 50개 넘게 굴러나왔다는 건 머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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