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루프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루프요?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뜻이지. 1 마지막 날에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서재호도, 양시백도 침묵한 채 내리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고 있었다. 백석 빌딩 앞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듣고 만 소리에 못 박힌 것처럼 허망한 눈으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찔러드는 빗방울에 때때로 시야가 가려지고 바로 옆이
원래도 업무 메모는 잘 해두는 편이었지만 (존경하던 상관이었던 형님이 세월의 흐름을 삼킨 수첩을 늘 지니고 다니며 자주 메모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서재호가 본격적으로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 건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경찰을 그만두고 기자로 이직했을 때였다. 어느 것이 옥석인지 가릴 수 있는 눈썰미가 길러지지 않은 상태이기도 해서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사람의 감정은 언제라고 100으로 유지될 순 없다. 사소한 계기로 10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100을 훌쩍 뛰어넘어 흘러넘칠 수도 있었다. 이 세상, 마음대로 되는 일 하나 없지만! 감정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서재호는 괜히 굴러다니는 깡통을 발로 찼다. 깡! 하는 소리가 골목길에 울렸다. 깡, 깡, 깡... 몇 번을 굴러가던 것은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복도. 오래된 등에서 나오는 잔잔한 불빛만이 긴 복도를 비춰주고 있었다. 재호는 잠시 숨을 고르다 이내 그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한 발자국씩, 천천히,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걸어갔다. 뚜벅이는 구두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외롭게 울려퍼졌다. 한 줌의 무게 W.T. HA_RUT_ 언제였을까. 우리가 술잔을 부딪히며
아이는 침대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젠 집보다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곳은 아이를 돌봐주는 한 남자의 집이었다. 은은하게 맡아지는 담배냄새와 오래된 책들의 냄새가 섞인 방을 아이는 꽤 좋아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아버지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남자는 아이를 위한 음료수를 사러 집 앞 마트에 갔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아이는 무료함
경찰을 그만 두고 기자가 된 뒤로 이토록 완연한 봄을 느낀 적이 또 있었을까. 나 생일이요, 하고 자랑하는 일은 없지만 한 번 알려주고 난 뒤 달력에 적어두기라도 하는지 12시 땡하자마자 예약이라도 해놓은 듯 문자로 생일 축하한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생일날 시간 비어있으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너무 늦게 자지 말라며 답장을 보내
서재호는 삼복을 잘 챙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올해는 달랐다. 초복에는 옛 친구 오미정과 함께 들깨삼계탕을 먹었는데, 엊그제 같았던 초복이 지나더니 중복이란다. 양시백이나 권혜연, 홍설희와 함께 몸보신 음식이라도 먹으러 갈까 했는데 다들 시간이 되지 않았다. 삼계탕을 또 먹긴 뭐하고 감자탕 같은 거라도 먹으러 가볼까. 할 참이었다. 집앞에서 가까운 감자탕집에
"오랜만." 서재호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인사했다. 당연하지만 오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 같이 일하던 시절에도 오미정에겐 기가 죽곤 하는 서재호였는데, 지금의 오미정의 모습은 서슬이 푸르다 못 해 서늘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다고 해서 웃는 얼굴로 무마하거나, 져 주는 듯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오미정은 유상일에게 동조해 죄 없는 아이를 죽
성인이 되고, 일자리를 찾고, 거기에 익숙해져 비로소 정착하고, 또 다시 바뀌고. 스물 남짓, 사회로의 첫 걸음과 함께 철이 들었을 즈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평소에 더 잘해드리지 못 한 것이 슬펐지만 산 목숨, 마냥 울기만 할 순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을 수습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더없이 생각나는 날이면 종종 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