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눈 소식은 놀라울 것 없는 일이었지만, 수도권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와 봤자 얼마나 쌓이겠냐고 대수롭잖게 생각했고, 서울에 말뚝 박고 산 지 오래된 양시백의 생각도 비슷했다. 몇 년 만에 전국적으로 엄청난 폭설이 예상된다고 말은 했지만 기껏해야 3cm에서 5cm 정도 쌓이겠거니 생각했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관장님, 그
"관장님, 여기 달력에 표시해둔 날짜 뭐예요? 수강료 입금날은 아닌데." 제자의 물음에 최재석은 뜨끔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어어, 별 거 아냐." "별 거 아닌데 표시까지 해두셨어요?" "볼일이 있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거든." "그래요?" "그래." 그럼..뭐. 제자, 양시백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도장 내 정리정돈
"야, 먹어먹어! 식을라! 어여 먹어!" "..넌..내가 교도소에서 쫄쫄이 굶었을 거라고 생각하냐?" "나 참, 뭐래? 너 그렇게 먹다간 근육 다 빠져서 허우대만 크고 비실비실거리게 될까봐 그렇지! 직업인의 말을 믿어." 직업인이라는 말에 걸맞게, 최재석은 태권도장의 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경찰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 작은 성공을 이룬 유상일의 친
...상일이가 죽은지도 어느덧 한달이 지났다. 매정한 노릇일지도 모르지만 어느덧 알게 된 사람들 모두 제자리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다. 재호 씨와는 앞으로도 백석을 쫓겠다고 했다. 나 역시 꼭꼭 감춰둔 것들을 풀어내야 할 때라고 생각해 서로들 몸이 나아지면 이야기를 해 보고자 약속을 잡았다. 양시 녀석은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낸 상태였고, 권혜연 씨
평평하게 서 있던 몸이 사선으로 턱 기울어졌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 짧은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 딱 멎었다가, 거짓말처럼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시커매졌다. 귓가를 매섭게 하는 소리도, 쿵 하는 소리도, 뜨뜻한 것이 콸콸 쏟겨지는 축축하고 기분 나쁜 소리도, 무어라 소리지르는 것도 모조리 휙휙 지나가 사라지고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