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샘플6

2차 / NCP / 약 6,000자 / 무협(화산귀환)

커미션 by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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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실제 커미션작입니다만, 예전에 개장했을 적 작업했던 것이라 지금 보면 다소 수정할 부분이 많습니다. 감안하여 참고용으로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삶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고, 희망이 바스라져 절망으로 변질되었으며,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처럼 흐르는.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또 어디가 지옥이랴.

한 줌 남은 숨마저 흩어진 후에 남은 것은 침묵뿐이니, 유이설은 천근같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장에서 한눈을 판다는 것은 곧 죽음을 초래하기 마련이라지만, 여기에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어디 있던가. 시선이 닿는 곳이 죄 푸르기만 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붉디 붉은 땅이라, 지옥도의 한 장면을 목도한 낯이 허옇게 질린다. 어쩌면 이곳이 제 무덤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덤덤한 생각과 달리 연명을 구걸하는 호흡이 거세졌다.

매화.

매화가 보고 싶다. 유이설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자신이 귀환할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다만 셈에는 능하지 않아 그런지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도통 답이 나오질 않아 야속하기만 하다. 가라앉은 시선이 지평선 너머를 응시한다. 지표를 울리는 야트막한 진동, 악의가 가득한 울림, 먹먹한 귀에 박히는 저주 같은 진언까지.

허면 다른 것을 셈하여 볼까.

가령, 제 목숨을 바쳐 저들의 목을 몇 개나 쳐낼 수 있을지 같은.

우습게도 이것은 셈하여 볼 필요도 없이 답이 나오는 문제라 유이설은 피로 범벅이 된 검을 고쳐 쥐었다. 설사 저울 반대편에 마교도의 목숨 천 개가 걸려 있다한들 화산이 낳아 화산이 기른 제 목숨 하나만큼의 값어치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답은 오직 하나만이 남는다. 그렇게 귀한 제 목숨을 바쳐내었으니, 저들은 필히 멸살의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노라고.

폐부가 찢어질 듯 가득 산소를 들이마신다. 멈추었던 셈을 이어서 하고자 하니, 전장 곳곳으로 흩어져 있을 가족과 친우들이 언제쯤 이곳의 문제를 알아챌까 하는 것이라. 위치를 보건대 못해도 한 시진은 걸린단 생각에 이를 악 문다. 그 말인 즉슨 한 시진은 붙들어놔야 한단 뜻이리라. 저 마교도들의 전진을, 동시에 제 명줄까지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기합으로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다고 그간의 수련이 알려주지 않던가. 더는 못하겠거든 저를 대신해 앞서 나가줄 친우들의 신뢰를 알지 않던가. 은근한 멸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텨온 당가가, 오랜 단절에도 기껍게 손을 맞잡아준 남만야수궁과 북해빙궁이, 쌓아온 것들을 무너뜨려서라도 살아남고자 하였던 녹림이 뒤에 있다. 지옥 같던 매화도에서 목이 베이기 직전까지도 검을 휘두르던 남궁의 긍지를 보았고, 스스로 사지를 걷는 한이 있더라도 미래를 남기려 했던 해남의 의지를 보았다. 유이설은 결코 그들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으므로, 해내야만 했다.

“…대, 화산파의.”

어느덧 시야 끄트머리에 적들의 군세가 들어왔다. 유이설은 넝마나 다름없는 옷을 떨리는 손으로 정돈하여 섰다. 고통에 굽혀 있던 허리를 바르게 펴고, 짓이겨진 발목에도 아랑곳 않고 하체를 단단히 하여 바닥에 발을 디디니.

“이대 제자, 유이설.”

천마재림 만마앙복! 소리치는 마교도들의 진언 사이로 한없이 굳건한 목소리가 흘렀다.

“잇습니다. 선인의 의지.”

머지않아 당도할 이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 이가 이윽고 섬전처럼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단전으로부터 끌어낸 선천진기가 기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자 우습게도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한 내력이 느껴져 몸이 가볍기만 하다. 휘두르는 일격마다 쇄도하는 검기가, 그 안에 피어나는 매화에 유이설은 제 어린 스승이 알면 족히 며칠은 욕을 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잠시 그쪽으로 시선을 주고 말았다. 검 끝에서 피어난 매화는 제 생명력이 담겨져 있어서인지 하나하나가 생생하여. 그래, 화산에 온 것만 같아서.

그 순간, 드넓은 전장은 이 순간만은 오롯이 유이설의 화산이다. 화산이 낳아 화산이 길러낸 매화검수에게 잘 어울릴 풍경이 목전까지 도래함에. 검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 얼마나 완벽한 끝인지.

“매화. 폈어요.”

아버지.

 

 

“사고!”

당소소의 절규가 사방을 울렸다. 시산혈해를 헤치고 나가다 기어이 시체에 발이 걸려 거하게 바닥을 나뒹구는 몸이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핏물에 젖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때는 사천을 호령하는, 당가주의 여식으로 곱게만 가꿨을 얼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초라할 뿐이다. 사고, 제발. 사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에 목이 죄이는 것만 같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직전의 전투에서 칼에 베인 다리가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운 탓에 당소소는 주먹으로 제 허벅지를 내리쳤다. 간신히 싸매놓은 붕대가 벌겋게 젖어 이윽고 핏물을 울컥 뱉어낸다.

“…제기랄.”

기어서라도 닿기 위해 질퍽해진 땅을 움켜쥔 당소소를 누군가 지나쳤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가 어지럽게 흩날리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항상 앞서 나가던 사내이지만, 그래도 저들을 완전히 뒤로 하고 홀로 떠나버리는 이는 아니었는데. 어떠한 질책도, 호통도 없는 그 뒷모습에서 처절함이 느껴진다. 아, 그래. 그때다. 청진진인의 유해를 발견했을 적의. 그때와 비슷한 자그마한 등에 당소소가 이를 악 물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가장 먼 곳에서 출발하였을 터인 백천이 다가와 등을 내밀었다.

“사숙, 부탁해요….”

저, 사고한테 가야 해요. 전 의원이에요. 자존심은 아무래도 좋다. 당소소는 백천의 등에 업히며 너른 어깨에 기대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삼켜냈다. 고작 눈물 하나에 체력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새 윤종과 조걸이 백천의 좌우를 호위하니, 각자의 전장을 정리하고 모여든 화산의 제자들이 오직 빈 자리 하나를 되찾기 위해 지옥의 중심을 내달렸다.

괜찮다. 아직 늦지 않았어.

누군가가 헐떡이는 숨에도 불고하고 계속해서 속삭인다. 시체를 차내고 숨이 끊어지지 않은 놈들의 목을 쳐내는 와중에도,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한참이나. 그 말은 담담할 때도 있고, 울분에 차 있을 때도 있으며,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제각각의 목소리로 이어지던 말은 백천의 앞에 작고 초라한 등 하나가 웅크려 있을 때 걸음과 함께 멈추었다.

“괜찮아. 아직… 아직 늦지 않았어.”

참으로 익숙한 문장이지 않은가. 청명은 누군가를 품에 안고서 그에게 내력을 쏟고 있었다. 시시각각 창백해지는 낯을 보건대 싸우느라 이미 동이 난 내력의 바닥까지 긁어 넣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물기 없이 건조한 얼굴 위로 예고된 절망이 물처럼 흐른다. 백천은 차마 그 어깨 너머의, 익숙한 도복의 주인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려, 내려주세요. 내가 살릴 수 있어요! 사고, 저예요! 제가 왔어요!”

악에 받쳐 소리친 당소소가 몸을 비틀었다. 백천이 어찌 하지 못하는 사이 기어이 무너지듯 떨어지고서 다리를 절뚝이면서까지 청명의 곁으로 다가갔다. 옅은 호흡이 들린다. 생자生者의 기운이 느껴진다. 부축하려 드는 윤종과 조걸을 지나치며 당소소는 미약한 가능성에 속절없이 기대고 말았다. 그게 얼마나 미련한 것인지, 의원으로서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소소.”

“네, 사고! 당소소, 여기 있습… 니, 다….”

아.

윤종이 손을 내밀어 당소소의 눈을 덮었다. 저 역시 마음 같아서는 저보다 어른인 막내에게 매달려 제발 살려달라고 빌고 싶지만, 이미 보았기에. 가장 먼저 도착한 백천이 청명의 등만 하염없이 내려다보는 동안 뛰쳐나가 쓰러진 이를 마주했으니.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명제 하나가 윤종의 숨을 틀어막았다. 이미 떠나야 할 혼이 강제로 이승에 붙들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윤종은 감히 그렇다 답할 수 있었다. 사람의 몸에는 본디 칠규七竅가 있는 법이라지만, 전장에 선 무인은 항시 그보다 많은 구멍을 지니기 마련이다. 칼에 찔려서든 권에 맞아서든, 그도 아니라면 독에 당해 살을 도려내서든.

그걸 감안해서라도 유이설의 몸에 난 구멍은 눈대중으로도 족히 곱절은 넘어보였다. 흐르는 핏물이 아래로 고여 메마른 땅을 축축하게 적신다. 가장 어린 사제는 제 몸을 영견 삼아 닦으려 했는지 전신이 붉었다. 빠르게 뛰쳐나가 어떻게든 지혈을 해보려 하는 조걸의 무릎 역시도 금세 젖었다. 윤종은 모든 감각이 아득하니 멀어지는 순간을 떨쳐내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머나먼 지평선 너머, 또 한 번 마교가 들이닥친다.

“…걸아, 나와라. 마교 놈들이다.”

“사, 사형. 하지만 지혈을….”

“나오라 하지 않았느냐!”

그제야 혼탁하던 조걸의 눈에 빛이 든다. 하염없이 가라앉다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가쁜 호흡을 헐떡이며 일어서는 움직임이 자못 위태로운 탓에 윤종은 그저 서 있었다. 단단히 서서 제 등을 보여주었다.

걸아, 울분이 터지더냐. 나도 그렇다. 이대로 스러지실까 두려우냐. 나도 그렇다. 윤종은 속으로 홀로 문답을 이어가다가 검을 움켜쥐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아 묵묵히 앞만을 바라보았다. 드리운 상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부정할 시간에 이별을 준비하고 싶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매화는 보고 가세요.

하여 윤종은 검을 휘둘렀다. 화산에서 가장 道를 담은 매화가 피어나니, 이는 백 년 전의 것과 비슷하다. 유이설의 아버지가 그토록 좇던 화산의 검이다. 이를 유이설이 보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윤종은 그저 휘두르기만 했다.

그 위로 조걸의 검이 쇄도한다. 살기보다 설움이 짙게 묻은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 전경을 가득 채웠다. 그는 의원은 아니었으나 상가의 자제라 셈에 능하여 유이설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서럽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멍청하게 희망을 찾기라도 했을 텐데.

방향을 잃은 분노를 해소할 길이 없어 마교도들을 길동무 삼아주기로 하였다. 분노의 주체는 참으로 많다. 처절하게 유이설을 이승에 붙들어 매는 청명이 결국에는 전부 잊은 양 전장을 활보하는 것이 꼴 보기 싫고, 항상 자신감 있던 저 당소소가 주저앉아 무너진 것도 짜증이 나며, 얼굴이 다 젖은 채로 나름의 방법으로 저를 다독인 윤종도 오늘만은 원망하고야 만다. 백천은, 그래. 그는 예외라지만.

눈앞이 하얀 것 같기도 하고, 붉은 것 같기도 하다.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보건대, 여기에도 안개가 끼던가. 조걸은 백천을 지나치며 검을 휘둘렀다. 기어이 천하를 매화로 채우고 나서야, 울음 조각을 조금 토해냈고.

“소소야, 그만하거라.”

“아뇨, 아뇨. 제가 할 수 있어요. 사숙,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소소야.”

“사숙….”

백천은 조걸이 펼쳐낸 매화의 향연 아래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한 번 더 당소소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떨어지는 이의 낯이 피와 눈물에 잔뜩 흐트러져 있어, 일부러 시선을 돌려내어 홀로 가다듬을 시간을 주었다. 원망 어린 눈빛을 달게 받아내며 청명의 맞은편에 앉은 이가 가장 먼저 허연 낯의 사질을 살핀다.

“청명아, 괜찮으냐.”

“…아니.”

“…그렇구나. 허면 네게 선택지를 주마. 여기서 주저앉아 있을지, 아니면 소소를 이끌고 유이설의 복수를 할지.”

시종일관 담담하다 못해 담백하기까지 한 목소리의 끝이 유이설의 이름을 담자마자 처음으로 무너졌다. 목이 멘 듯 겨우 쥐어짜낸 목소리에 청명이 눈앞의 이를 바라보았다. 떨어진 매화 하나를 두고 마주한 선인과 후인이 천천히 같은 상실을 공유한다.

“…사고, 부탁할게.”

“그래.…나도 부탁한다.”

이미 한 차례의 상실을 겪은 선인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울하게 가라앉아있던 눈이 한 차례 끔벅이는 것에 깨끗해진다. 전장에서는 슬픔도 사치임을 이미 백 년 전에 겪어보았으니, 이 뒤는 맡기는 것이 옳다. 청명은 검을 들고서 앞을 향해 내달렸다. 상실을 뒤로 하고 달려 나가는 이에게 당소소가 붙었으니, 백 년 전과는 달리 쓸쓸하진 않으리라.

그러하여 남은 것은 오롯이 백자 배의 두 사람이다.

“사매.”

“…….”

“유이설.”

“…….”

원래도 말이 적기는 하였지만, 아예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퍽 낯설어 잠시 헛웃음이 새었다. 기사멸조다, 이 녀석아. 괜히 타박을 늘어놓자 우습게도 잠시 주변이 화산과 겹쳐졌다. 기어이 저 또한 청명을 닮아 미쳤는가. 아득함에 무릎에 뉘인 유이설의 머리를 정리하며 눈을 감았다.

“슬퍼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거라.”

앞에 선 자는 쉬이 울 수 없다. 무너질 수도 없으며, 원망할 수도 없다. 오늘, 이 전장에 유이설을 보낸 것은 백천의 판단이었다. 그의 판단이 유이설의 고립을 만들었으며, 기어이 목숨마저 앗아갔다. 그러나 승리를 이끌어냈으니 이는 옳았되 멍청한 판단이라 부름이 맞다.

백천은 지금껏 어리고 서툰 사매의 머리를 제대로 쓰다듬어준 적이 없던 것을 떠올리고 한없이 느린 손길로 엉망이 된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호처럼 창백하고 시린 피부를 손끝으로 느끼니 그제야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상실의 무게가 어떤 건지 실감이 났다.

자신의 뒤로는 마교가 들이닥쳤지만 제 사질들이 제각기의 방식으로 상실을 받아들여 복수를 이뤄주고 있으니, 아주 잠시 동안은 몰락에 발을 들여도 되지 않을까.

백천은 아주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등 뒤의 사질들은 모르고, 천하도 모르게. 그러나 제 품의 유이설만은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백 년 전의 누군가가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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