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백업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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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Till Death Do Us Part. 결혼식 축사의 정설. 정성찬과 오오사키 쇼타로는 이 축사의 문구가 자신들의 사랑이라고 자만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감히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그 자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의 사랑은 허무하게 갈라진다. 가장 특별할 것 같았던 연애가 가장 일반적인 보통의 연애로 추락
(일부 기간 공개) 전편 : https://glph.to/f392zf 그 애는 정말 알 수 없었다. 땡글땡글한 눈동자. 순수한 표정과 달리 새카만 눈동자. 부드러운 머리카락. 학교 보건실에서 속삭이던 목소리. 성찬의 머리에서 비상벨이 울린다. 삐용삐용. 혹시 스위치 있는 로봇이 아니라, 막 세이렌 같은 존재는 아닐까? 노래로 선원들을 꼬시는 인어 같은
그 애는 정말 이상했다. 일본인 이름을 가졌으나, 유달리 한국어를 잘하는 2-A반의 반장. 중학생 때 한국으로 넘어왔단다. 타고나게 좋은 성격, 귀엽게 생긴 얼굴, 모범생, 그리고 빼지 않고 모든 걸 다 좋아하는 미련함으로 그를 싫어하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성찬은 그 애가 기묘하게 싫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웃는 그 눈매가, 싫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은 유명해서 많은 이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쇼타로는 이 소설의 백미는 첫 문장이 아닌 마지막 문장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넘어지지 않으려 발끝에 힘을 주고 올려다본 순간, 하늘의 은하수가 솨아 소리를 내며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허무함이 키워드라고 할 수
타로, 당신이 울지 못할 때 내가 대신 울어줄게요. 성찬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꼬박꼬박 형이라고 붙이던 호칭은 어디로 갔는지, 쇼타로는 속으로 조용히 웃으며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준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어준 건 처음이라서. 그게 또 속도 없이
*소재 주의 누군가는 말했다. 삶은 공평하다고.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지만, 결국 끝인 죽음은 공평하니, 결국 공평한 것이라고. 오오사키 쇼타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삶은 불공평하다. 불공평하니까, 죽음이라도 공평해야 어느 정도의 수지타산에 부합하는 것 아니겠는가. 오오사키 가문, 일본 가부키 명문 가문. 자신이 태어났을 때 집안은 말 그대로
입술에 맺히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달리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숨결이 닿는 거리, 성찬은 고개를 다시 한번 숙여 시선을 마주하지만 쇼타로는 그마저도 피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성찬은 쇼타로의 생각이 궁금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그 순하고 다정한 얼굴 뒤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길래 모든
기차 안은 또 다른 세계 같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간과 공간이 흐트러진 세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거리. 지구 둘레의 4분의 1. 일곱 번 바뀌는 시차, 그리고 일곱 시간의 시차. 모스크바로 향하는 우리는 과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2024년 12월 31일. 새해를 기차 안에서 맞이하는 사람들. 고독하지만 고독하
스물아홉 정성찬은 팔자에도 없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 서 있었다. 나 러시아 가려고. 친구들에게 처음 말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조차 황당할 만큼 뜬금없는 소리였다. 네가 좋아하는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프로 축구 리그의 팀) 경기를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EPL(*영국 프로 축구 리그)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닌, 왜 갑자기 러시아냐고. 열아홉에서 스물
도쿄, 신주쿠. 성찬은 킷사텐 앞에서 간판을 바라봤다. 珈琲 運命, 커피, 운명. 겨우 읽을 줄 아는 건 여행 가기 전 빡세게 공부한 히라가나와 애니메이션, 드라마로 본 익숙한 가타카나 몇 자, 그리고 초등학교 때 나름 급수까지 쳤던 걸로 겨우 연명하는 한자가 전부였다. 카페 간판 하나는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마음에 괜스레 뿌듯한 마음으로 킷사텐을
영원한 평화는 없었다. 오오사키 쇼타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부정하기에 바빴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돌아가자.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무조건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 있도록.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그래. 누나가 몇 년을 꼬박 사귄 남자 친구를 자신에게 소개 시켜 주고 싶다고 연락이 온 순간부터일 것이다. 오오사키 쇼타로의 누나, 오오사키
분명 낭만주의가 많은 인간을 망쳤다고 했다. 그리고 정성찬은 자신이 이 빌어먹을 낭만주의에 망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빌어먹을 오오사키 쇼타로라는 낭만에 잠겨서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빠져나오지 않겠다고. 시간이라는 얇고 날카로운 쇠붙이가 세밀한 구멍을 내고 낭만이라는 감정이 서서히 빠져서, 그
낭만주의가 많은 인간들을 망쳤다. 적어도 모든 인간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정성찬은 자신이 이 빌어먹을 낭만주의에 망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삐딱하게 보는 것이 훨씬 편했다. 염세적으로 굴고, 아주 약간의 다정함으로만 굴러가도 세상은 제 몫을 톡톡히 해낼 것이라고. 낭만에 물드는 건 한순간이다. 정말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을 맛보면 낭만에
누구에게나 어떤 향수처럼 평생에 걸쳐 줄곧 떠올리게 하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십 년이 지난 현재. 정성찬은 여전히 누군가의 꿈을 아주 가끔씩 꾸곤,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 불시착으로 만났던 숲은 공사가 진행된 후, 화려한 이름을 가진 아파트 단지가 세워졌다. 이 사실을 쇼타로가 알면 어떤 반응일까.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거나, 아님 울창하던 숲에게
쇼타로에게 다정함이 본성이라면, 소유욕은 성찬의 본성이었다. 넓게 보면 무심하게 보였지만, 나의 것이라는 바운더리가 만들어지는 순간, 무조건적으로 손에 잡히는 거리에 존재해야만 했으니. 유년시절 가지고 놀던 로보트도, 애착 베개도, 탐험가를 꿈꾸며 오랜 시간 동안 함께했던 망원경과 미니 손전등, 모험가 키트까지. 로보트의 팔이 하나 빠지고, 망원경의
아, 드디어 지긋지긋한 지구에서의 삶도 끝이다. 이제 다시 광활한 우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새로운 행성에 방문을 할 수도, 새로운 문화를 즐길 수도,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손에 들어온 것이다. 5년이라는 시간을 꼬박,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분명 행운이었는데, 이런 행운은 또 없을 텐데. 사실 숨긴 게
지구만큼 소란스러운 행성도 없을 것이다. 뉴스에선 매일 속보로 새로운 소식이 뜨고 있었고, 전쟁이 지속되는 나라, 평화로운 나라, 그리고 휴전 중인 나라 모두 공존하는 행성이었다. 참고로 한국은 휴전 중이야.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원피스 77권을 읽다가 책을 슬금슬금 내려, 시선을 마주한다. 인간이란 생명은 너무 마음이 복잡해서 그래. 쇼타로는 남의
정성찬은 하늘이 빛나던 어느 날의 새벽을 잊지 못했다. 갑자기 번쩍, 불이 난 것처럼 밝아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둠이 훅 몰려오는 어떤 새벽.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망원경으로 새벽 내내 밤하늘을 구경하던 습관의 답례와도 같았다. 저 빛의 끝엔 뭐가 있을까? 순간적인 강렬한 빛에 비해 소음 하나 없었다. 가고 싶다. 갈까? 그래, 가자. 성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