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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Till Death Do Us Part. 결혼식 축사의 정설. 정성찬과 오오사키 쇼타로는 이 축사의 문구가 자신들의 사랑이라고 자만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감히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그 자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의 사랑은 허무하게 갈라진다. 가장 특별할 것 같았던 연애가 가장 일반적인 보통의 연애로 추락하는 순간이다. 사랑, 정말 별거 없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Till Death Do Us Part


정성찬과 오오사키 쇼타로. 대학교에서 처음 눈이 맞고, 깨가 쏟아지던 그 커플. 크게 다툰 적은 물론, 눈만 맞으면 사르르 녹던 그 염병첨병의 연애 스토리의 주인공. 쟤네 같은 애들이 결혼을 하는구나, 의 쟤네를 맡고 있던 그 커플. 그토록 사랑에 죽고 못 살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에 죽고 못 살던 그 등신 순애 같던 커플의 이별은 어떻게 보면 참 허무했다. 성찬아, 나 사랑해? 시작의 발단은 쇼타로의 질문이었다. 사랑하지, 이보다 더 사랑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 사랑한다는 말이 대뜸 나오지 않는 날이 있었다. 연애 5년 차, 정성찬의 권태기의 가장 먼저 눈치를 챈 건 정성찬 자신이 아닌 오오사키 쇼타로였다.

연애를 시작할 때 했던 유일한 약속이 있었다. 취기가 오른 상태로 형, 좋아해요. 사랑 고백을 작게 속삭일 때, 쇼타로는 킥킥 웃으며 몸을 숙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랑 약속 하나만 해. 성찬은 이 약속 하나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손가락을 걸었다. 나한테 절대 거짓말하지 마.  어차피 성찬은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한 편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것도 서툴렀고. 오히려 거짓말에 능숙한 건 쇼타로였을 것이다. 괜찮지 않은 일이 생겨도 태연한 얼굴로 괜찮다고 말하거나, 지독한 감기에 걸려도 멀쩡하다고 하거나. 그럴 때마다 성찬은 참 치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 거짓말을 못 본 척 넘어가곤 했다. 이번에도 정성찬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성찬아, 나 사랑해? 정말 평범하고도 평범한 연애의 질문이면서도.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춘다. 

“나는 네가 거짓말을 못해서 좋더라.”

마음이 서로 맞고 사귀는 건 참 어려웠는데, 이별은 쉽다. 쇼타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미련 따위 없는 그 말갛고도 다정한 표정. 고마웠어. 구질구질한 이별도 아닌, 반듯하게 접고 접는 그런 연애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이별을 논하면서, 쇼타로는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서 성찬의 목에 둘러준다. 감기 걸리지 말구. 성찬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에 돌덩이가 걸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우리 진짜 헤어져? 이렇게 쉽게? 사랑한다는 말 하나 하지 못했다고? 아무리 권태기라고 해도 여전히 가장 애틋하고,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인데. 결국 이 연애의 끝에서 눈물을 쏟는 것도, 권태기를 느껴버린 것도 모두 정성찬이었다.

이별 후 정성찬은 밥은 무슨, 독한 소주만 주야장천 마셨다. 아, 쓰다. 존나 쓰다. 그리고 까무룩 기절. 그래, 처음엔 이 이별을 믿고 싶지 않아서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다. 숙취와 함께 일어났을 땐 도대체 뭐가 꿈이고 현실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멍하게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고, 어떤 날은 슬픈 영화를 보고 엉엉 울며 또 술을 망나니처럼 퍼마셨다.

아, 지금쯤이면 연락이 와야 하는데. 보고 싶다고 귀여운 수달 이모티콘을 보내거나, 점심 메뉴에 관한 일상적인 메시지가 와야 하는데. sns에 들어가서 팔로잉 목록을 확인하자 쇼타로의 프로필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차단을 한 건 아니구나. 전 남자친구가 하는 행동 1순위, 저런 걸 구질구질하게 왜 하냐며 이해하지 못했던 행동을 정성찬은 본능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피드에 우리에 관한 사진을 지웠는지, 혹은 접속을 언제 했는지. 지워진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헤어지고 며칠이 지났더라. 성찬은 시간 개념까지 제대로 잃어버린 것 같았다.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몸이 아주 만신창이였다. 

[ 타로 형, 나 아파. ]

[ 밥 먹을 힘도 없어. ]

[ 죽 사서 갈까? ]

[ 응. ]


한 번 헤어지면 다신 안 보는 타입이야. 쇼타로의 이별론이었다. 무조건 좋은 추억으로만 남기고 싶어. 구질구질하고 우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아. 그 논리라면 구질구질한 성찬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아프다는 메시지 한 통에 곧 수신음이 띠롱 울린다. 어라, 이거 꿈인가 싶어 성찬은 팔을 세게 꼬집는다. 아, 겁나 아파. 그 와중에 죽 사서 갈까? 라는 메시지는 또 얼마나 다정한지. 성찬은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다. 사랑이 담긴 호의가 아닌, 그냥 오오사키 쇼타로의 천성인 다정과 관심이라고 해도.

오오사키 쇼타로는 다정하다. 다정으로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성찬은 자신의 인생을 다 걸고, 쇼타로의 다정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없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성찬은 그 다정을 사랑했다. 모든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고, 따뜻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굳이 따지면 염세적인 자신과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 금발 머리를 하면 태양같이 눈부셨고, 어두운 색 머리를 하면 차분하고도 다정한 입꼬리가 유독 잘 보이던 그런 사람. 누가 이런 이유를 들으면 무슨 구원이라도 받았냐고 혀를 차겠지만, 성찬은 오히려 반대로 그 다정이 아주 가끔은 싫어지기도 했다. 분명 그 넓은 다정을 사랑한 건데, 연애를 시작하고 나선 그 다정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오길 바랐으니까. 타로 형, 나 얼마나 사랑해? 아마 연애 기간 중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일 것이다. 이별 전, 그 질문이 쇼타로의 입술에 맺힌 것이 기묘할 만큼.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삐, 삐, 삐......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비밀번호를 누르던 손이 멈춘다. 그리고 초인종이 울린다. 하여튼,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초인종을 누르지. 괜히, 괜히.

“몸은 괜찮어?”

“아파.”

“죽 사 왔어. 먹자.”

실례합니다아.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쇼타로의 손을 성찬은 찰나의 순간에 훑는다. 여전히 약지엔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반지 안 뺐네. 성찬의 말에 죽을 꺼내던 쇼타로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하하, 웃고 넘긴다. 나쁘게 헤어진 건 아니니까. 정성찬은 아주 가끔 오오사키 쇼타로의 머릿속을 마음껏 뒤집고 싶었다.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구는 건지. 거짓말하지 말라고 손가락까지 걸었으면서, 왜 다정과 더불어 타고난 천성처럼 하는 건지. 숟가락 들 힘도 없어. 성찬의 투명한 투정에 쇼타로는 아, 반칙이잖어. 여전히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말투로 화답한다. 성찬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쇼타로는 어미 새처럼 죽을 뜨곤 후후 불어준다. 우리 헤어진 거 맞나? 성찬은 아주 잠시 혼란스러웠다. 달라진 게 없었다. 혹시 이별이 꿈이었나 싶을 만큼.

오오사키 쇼타로는 분명히 다정한 인간이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칼같은 인간이었다. 헤어진 전 연인과의 끝이 좋든 나쁘든 좋은 기억만 들고 가는 편이었고, 재회라는 단어 따윈 없는 것처럼 굴었다. 연인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그랬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타입. 그 다정함 안엔 도대체 뭐가 있을까. 어느 순간 멀어진 인연을 회상하며 쇼타로는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어야 하니까. 담담하게 답을 하곤 했다. 형, 우리도 헤어지는 날이 올까? 성찬의 질문에 쇼타로는 골똘하게 생각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헤어지겠지? 성찬은 이상하게 그 대답조차 치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오오사키 쇼타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텐데. 성찬은 닌텐도를 하던 쇼타로를 품에 안고 목덜미에 여러 번 입을 맞춘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끝없는 사랑 고백에 쇼타로는 꺄르르 웃는다. 헤어진다고 해도 좋은 추억만 들고 가기야.


“우리 헤어졌지?”

“응.”

“...형은 헤어지면 다신 안 보잖아.”

성찬의 말에 정곡이 찔린 듯 쇼타로는 한참 동안 두 눈을 깜박이더니, 곧 멋쩍게 웃는다. 그래. 5년을 만났으면 대충 어떠한 성격으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는지,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을 모두 손바닥 안에 가지런히 펼칠 수 있는 기간 아니겠는가. 쇼타로는 가장 올바른 정답을 찾기 위해 말을 천천히 고른다.

 “..... 너는 예외로 두고 싶어.”

예외? 성찬은 예외라는 단어에 집착한다. 우린 친구로도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또다시 시작되는 쇼타로의 이기심이 영 싫지 않다. 약지엔 아직 반지가 있으면서, 친구라는 호칭을 논하는 것도. 그냥 우리 다시 만날까. 성찬은 다시 한번 고백을 하고 싶었다. 우리의 관계에 권태기가 무슨 말이냐고. 그냥 그땐, 권태기가 아니라 빌어먹을 계절을 타고 있던 거라고. 그리고 이 변명은 절대 쇼타로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처럼 지내는 건 어떤 걸까. 이제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하고, 스킨십도 못 하겠지. 그냥 종종 술을 마시면서 서로의 연애 이야기나 하고,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건 없었지만, 딱 하나. 오오사키 쇼타로의 유일한 예외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마음에 들었다. 좋아, 친구. 죽을 먹어도 목이 더 잠기는 건 기분 탓일 것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쇼타로가 여전히 사랑스럽다. 연인이 아닌 관계. 죽음이 갈라놓을 수 있는 허술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정성찬은 왜 그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가, 매일 밤 고뇌했다. 그 답을 쇼타로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사실 사랑이 식은 게 아니라고.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하고 있는 거라고. 사랑에 관한 영화나 소설,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었지만 영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쇼타로는 성찬의 집에 놀러 올 때 초인종을 눌렀고, 성찬은 문을 열어주며 비밀번호 안 바꿨어. 꼬박꼬박 현실을 알려줬지만 돌아오는 건 우리 이제 친구잖아. 쇼타로의 단호하게 그어진 선이었다.

친구라는 관계로 내려갔을 뿐, 사실 바뀐 건 크게 없었다. 여전히 하루에 한 번씩 만났고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거나, 편의점에서 캔맥을 하거나. 비슷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성찬은 매일 쇼타로를 만날 때마다 손가락을 확인했다. 여전히 약지에 잘 자리 잡고 있는 반지가, 꼭 관계의 회복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우리 공포영화 보자아.”

“형, 연애할 땐 그런 거 보자고 안 하더니.”

“그땐 네가 너무 무서워했으니까.”

“지금도 무섭거든?”

“으응? 딱 한 번만. ”

그래, 변한 건 오오사키 쇼타로의 태도였다. 조금 더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것. 평소 부탁도 잘 하지 않고, 성찬이 싫어하는 걸 절대 하지 않았는데, 헤어지고 나선 애교스럽게 응? 응? 딱 한 번마안. 고개를 기울이며 요구하는 것. 연애할 때 공포영화가 종종 보고 싶었을까? 내가 무서워한다는 이유로 혼자 보거나 아님 굳이 같이 보자고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사실 쇼타로가 같이 보자고 하면 까짓것 눈 질끈 감고 봐줄 수 있었는데. 성찬은 괜히 입 안이 텁텁해지는 것 같았다. 오오사키 쇼타로는 자신과 헤어지고 더 행복하고 솔직해 보였다.

매일 같이 쇼타로와의 만남이 이어지자 주위에선 헤어진 사실도 모르고 여전히 깨가 쏟아지는구나, 감탄사나 뱉고 있었다. 성찬은 굳이, 정말 굳이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깨가 쏟아지고 죽고 못 살더니 결국엔 헤어졌구나. 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오오사키 쇼타로의 얼굴이 폈다는 소리는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삼 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 형, 언제 와? ]

[ 닌텐도 충전했어. ]

[ 으악 ]

[ 당분간 못 갈 거 같아. ]

[ 프로젝트가 크게 잡혀서 ㅠㅠ ]


일주일 뒤, 쇼타로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른다. 여전히 비밀번호는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간만에 보는 쇼타로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실례합니다아. 가지런하게 신발을 벗는 것도, 외투를 정리하는 모습까지. 성찬은 익숙하게 쇼타로의 손을 눈으로 좇는다. 약지엔 더 이상 반지가 없었다. 등신같이 자신의 약지엔 반지가 있었는데. 또 한 번 거하게 차인 느낌에 성찬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쇼타로의 손을 붙잡는다. 반지 어디 갔어? 그리고 그 빌어먹게 다정한 인간은, 다정하게 웃으면서 잡힌 손을 빼낸다. 계속 낄 순 없잖아.......  오오사키 쇼타로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음 정리도 혼자 하는 사람. 성찬은 그 예외라는 단어가 어떻게 보면 가장 끔찍할 수도 있겠다는 비참한 결과 도출에 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찬은 반지를 빼지 않았다. 계속 낄 수 없다는 말에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오오사키 쇼타로는 유독 정성찬에게 약했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정부터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그 눈빛이 아마 원인일 것이다. 헤어지면 가장 좋은 추억만 가지고 영원히 가슴 깊게 묻는 것. 그리고 다신 만나지 않고 그 추억으로만 영원히 회로를 돌리는 게 쇼타로의 사랑 방식이었다. 형, 우리도 헤어지는 날이 올까? 성찬의 질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헤어지겠지? 쇼타로는 골똘히 생각하며 답을 한다. 쇼타로는 사랑 하나엔 자신 있었다. 그냥 두루뭉술한 사랑이 아닌, 정성찬에 대한 사랑 말이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절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 뻔뻔하겠지만 모두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감정을 숨기는 데 타고났으니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감정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싫은 일을 함께 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랑은 힘들 때 어깨를 내어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어깨를 내어주는 건 쉬웠지만 기대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자주 기대다가 나쁜 버릇이라도 들면 어떡하지? 그러다가 정성찬이 나한테 질리면? 그런 곪은 생각을 할 때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며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성찬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표정 하나 숨기지 못하고 대형견처럼 모든 진실성을 고백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다정은 쉬웠다. 투명함이 어려웠지. 결국 정성찬은 이 부분에서 지친 것이다. 자신이 감정을 숨길 때마다, 괜찮지 않은 일에서 괜찮다고 할 때마다 모르는 척 넘어가는 그 뒷모습을 봤을 때. 나한테 거짓말만 하지 마. 라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던 그 과거가 궁색해졌다.

그러니 더 깔끔한 이별이었다. 다시 정성찬을 못 봐도 괜찮을까? 쇼타로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목도리를 둘러주면서도,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말을 할 때도.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침대 위에 누웠을 때도. 이런 이별로 세상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 눈을 뜨면 세계는 그대로 돌아갈 것이다. 이 사실이 쇼타로에겐 또 하나의 위로였다. 

[ 타로 형, 나 아파. ]

[ 밥 먹을 힘도 없어. ]

정성찬은 분명 알고 있었다. 연애가 끝나면 다신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을. 그러면서도 며칠 뒤에 도착한 메시지에 쇼타로는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다. 왜 아프지. 어디가 아픈 걸까. 또 술만 마신 건 아닐까. 쇼타로의 연인들 중에선 이별 후에 자살을 암시하는 폭력적인 메시지를 남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쇼타로는 굳이 답장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메시지는 자신을 떠보는 계략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죽 사서 갈까? ]


쇼타로는 기꺼이 계략에 넘어가기로 한다. 정성찬은 다르니까. 그 애는 예외니까. 우리의 사랑은 조금, 더 특별하고 애틋하니까.

도어락 비밀번호가 아닌 초인종을 누를 때, 쇼타로는 성찬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비밀번호가 그대로라는 말이 어떠한 미련을 나타내는 것 같다. 상처 받은 눈빛, 굳이 그걸 숨기고 싶지 않은 표정. 역시 자신과 너무 달랐다. 그런 모습을 사랑한 것이다.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고. 

이상하게 친구라는 관계가 된 순간, 쇼타로는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껏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었다. 이제 이별도 없을 테니까. 정성찬이 나한테 질리면 어떡하지? 의 순간은 절대 오지 않을 테니까. 아, 우리 공포영화 보자아. 딱 한 번만. 응? 애교스럽게 팔을 붙잡고 굴면, 이 착하고 착한 정성찬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다. 너랑 결혼할 사람은 복 받았다. 쇼타로는 차마 이 말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꾸역꾸역 삼킨다. 아니, 복 받았다가 아니다. 부럽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라는 문장은 우리를 위한 건 줄 알았는데. 정성찬은 자신보다 조금 더 투명하고 솔직한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쇼타로는 최근 누군가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썸이라고 하자. 처음엔 그 썸을 거절하려고 애를 썼다. 최근에 이별했는데 아직도 그 애가 좋아요. 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상처만 받을 거예요. 쇼타로의 말에 그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답한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으로 굴어요. 그게 본능이고. 

“형, 그 사람이랑 만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반지 뺀 거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쇼타로의 휴대폰 화면엔 그 사람의 이름이 반짝 뜬다. 실없는 통화 소리. 그냥 친한 동생 집에 있어요. ... 아, 이젠 친한 동생이란다. 친구에서 뭔가 더 강등된 것 같은 기분에 성찬은 손톱을 씹는다.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표정을 하면서,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받는 전화. 통화가 짧게 끝나자, 성찬은 쇼타로에게 몸을 기울인다. 형, 그래서 반지 뺀 거냐고. 성찬의 낮은 목소리에 쇼타로는 고개를 젓는다. 겨우 최근에 만난 사람 하나로 반지를 빼는 건 말도 안 되지 않는가. 그냥, 자신이 반지를 빼면 성찬도 조만간 반지를 빼지 않을까, 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쇼타로의 말에도 성찬은 더 이상 믿지 않는 눈빛이다. 그래, 이 눈빛. 이 눈빛이 계속되면 다시 사귄다고 해도 헤어질 것이다. 나중엔 성찬아, 나 사랑해? 가 아닌, 성찬아, 나 믿어? 라는 질문으로 분명히 바뀔 테니까.

성찬아, 나 봐. 쇼타로는 작게 속삭이며 성찬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쥔다. 나 이제 너한테 거짓말 안 해. 이 말을 연애할 때 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 헤어지고 나서 솔직하면 뭐가 달라지냐고. 성찬은 또 한 번 울고 싶어졌다.

“반지 빼지 마.”

“성찬아.”

“저 사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하려고 노력하지 마.”

형, 이제 다 티 나. 무슨 생각하는지도 보이고, 예전에 연애할 땐 하나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나도 잘 보여. 너무 짜증나.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한참의 침묵 뒤에 미안해. 라고 짧게 대꾸할 뿐이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성찬은 완전한 이별을 직감한다.


[ 말 못 한 게 있어요. ]

[ 친한 동생이라고 한 사람 전 애인이에요. ]

[ 나는 쇼타로 씨랑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요. ]

[ 정리할 수 있어요? ]

[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쇼타로의 인생에 정리보다 쉬운 게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정리의 대상이 정성찬이면 달랐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원래 인간은 이기적으로 굴어요. 라고 그 사람이 답했을 때, 쇼타로는 묘한 위로를 받았다. 어떻게 보면 결이 비슷한 사람. 이 사람과 만나면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서로가 가진 안정적인 다정으로 어찌저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 이보다 쉬운 보기는 없었다. 결이 비슷한 사람과 만날래, 아님 정성찬의 친구로 남을래?

[ 미안해요. ]

오오사키 쇼타로는 결국,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정성찬을 선택한다. 





야, 문 열어. 삐, 삐, 삐, 삐, 삐, 삐..... 쇼타로는 아무리 비밀번호를 눌러도 오류가 뜨는 도어락이 원망스러웠다. 비밀번호 안 바꾼다며. 정성찬 나쁜 놈아. 술을 진탕 마신 상태로 도착한 곳은 결국 성찬의 집이었다. 딸꾹질을 세 번 정도 했을 때 문이 열린다. 타로 형? 성찬의 목소리에 쇼타로는 알 수 없는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개자식아, 야, 이 나쁜 놈아. 욕설은 커녕 나쁜 말을 하는 것도 본 적 없는데. 술에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꿍얼거리는 모습이 영 익숙하지 않다.

썸 타는 사람이 안 데려다줬어? 성찬의 눈치 없는 말에 쇼타로는 하!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몸을 웅크린 상태로 눕는다. 술에 취한 쇼타로가 가장 좋아하는 것, 초코우유. 성찬은 냉장고에서 초코우유를 들고 빨대를 꽂아 쇼타로의 손에 쥐여준다.

“걔가 나랑 진지하게 만나구 싶대.”

“만날 거야?”

“근데 너랑 두 번 다시 만나지 말래.”

쇼타로가 초코우유를 쭉 빨아 마시는 동안 성찬은 비로소 피가 차게 식는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이별이라는 건가? 이제 평생 못 만나는 건가? 성찬은 마른침을 삼키며 쇼타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응, 그랬어? 나름 괜찮은 척을 하고 있지만 얼굴에서 분명 티가 다 날 것이다. 아, 빌어먹을. 쇼타로는 성찬의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빤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 팔을 뻗어 어깨를 끌어안는다. 너 완전 따뜻하다, 성찬아.

“우리 이제 끝이야?”

“네가 잘 모르는 게 있어.”

내 우선순위는 언제나 너였어. 중얼중얼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상태로 쇼타로는 고백한다. 얼마나 살게 될지 모르겠다만 하늘이 갑자기 두 쪽이 나지 않는 이상, 쇼타로의 0순위는 분명 정성찬일 것이다. 그 어떤 인간을 데리고 와도 상대가 정성찬이라면 쇼타로는 고민도 없이 성찬을 고를 수 있었다. 나는 네가 제일 중요해. 그리고 분명 가장 사랑하고, 그래서 유독 약한 거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고. 지독한 사랑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절대 자신이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 이렇게 헤어졌으면서 어떻게든 우선순위에 놔두고 싶어서 자리를 반듯하게 만들어놓고, 예외라는 핑계를 만들어서 매일 얼굴을 보는 것. 헤어진다고 해서 세계는 무너지지 않지만 그 세계에 존재하는 사소한 것 하나를 봐도 그 상대가 생각나는 것. 모든 게 재깍재깍 멀쩡하게 돌아가지만 이상하게 나만 멈춘 것 같은 기묘함에 빠지게 되는 것. 얼굴을 마주 봐야 비로소....... 내가 이 세계에 맞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그러니까 비밀번호 바꾸지 마. 초인종 안 누를게. 응? 쇼타로의 천천히 이어지는 고백에 성찬은 한동안 말없이 쇼타로의 등을 다독인다.

“있잖아, 형.”

“으응.”

“비밀번호 바꾼 거 형 때문에 아닌데.”

에에, 그럼? 당황할 때 나오는 그 일본인 특유의 '에에-' 발음이 마냥 귀여워서 성찬은 결국 큭큭, 웃음을 터트리며 휴대폰 화면을 보여준다. 분명 혼자서 술 마신다고 못 본 게 분명했다. 아, 바보 같은 오오사키 쇼타로. 그만큼 사랑스러운 오오사키 쇼타로.


[ 옆집 도둑 들었다고 해서 비밀번호 바꿨어. ]

[ 비밀번호 우리 처음 만난 날.]

허억, 성찬의 휴대폰 화면을 보고 쇼타로는 술이 확 깨는 느낌을 받는다. 나쁜 놈아, 개자식아, 온갖 할 수 있는 욕은 다 했는데. 잠시, 잠시만! 타임을 외쳐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게 무슨 망신인지. 얼굴이 터질 것 같은데 여기서 또 자신이 한없이 사랑하는 한 살 연하의 전 연인은, 얼굴이 딸기색이네. 이런 팔불출 대사나 하고 있으니. 아, 저리 가. 밀어내도 밀려나지 않는다.

“타로.”

“형이라고 불러어.”

“여태껏 본 모습 중에서 가장 솔직한 거 알아?”

성찬은 다시 한번 쇼타로의 손을 훑는다. 여전히 반지가 없었다. 반지는 어디 갔어?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내 목에 있어, 바보야. 짤막하게 대꾸할 뿐이다. 두꺼운 후드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구나. 성찬은 별 대꾸없이 목걸이를 풀어내더니 다시 쇼타로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준다. 목걸이도 다 좋지만, 역시 반지의 구실은 약지에 자리 잡을 때 가장 완벽하니까.

결국에 자신을 고른 오오사키 쇼타로. 정성찬은 감격에 반짝인다. 모두에게 다정하지만 유독 자신에게 약하던 오오사키 쇼타로. 아마 세계를 구할래, 정성찬을 구할래? 라는 선택사항이 쇼타로의 손에 달려있을 때, 결과론적으론 자신을 구하지 않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 고민의 대상이 되었으면.

이 우선순위와 예외가 얼마나 사람을 벅차게 만드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얼굴빛은 딸기처럼 붉어서, 술에서 깼다고 하지만 아직 취기에 어눌한 말투로 저리 가라고 밀어내는 것도 그저 사랑스러워서, 성찬은 허락도 없이 자신의 전 연인에게 입을 맞춘다.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지면, 결국 시선이 닿고 혀가 엉키는 건 어쩔 수 없는 육체적 사랑론 아니겠는가.

“형, 내가 그때 사랑한다고 말 못 한 건.”

“......말 안 해도 알아.”

“어떻게 알아.”

“나 같은 애랑 연애하기 힘들잖어.”

솔직하게 행동할게. 그리고 침묵. 다시 한번 이어지는 쇼타로의 말.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거짓말도 안 할게. ... 아, 정말이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성찬은 사랑한다는 말을 항상 세 번씩 하곤 했다. 한 번 하면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것 같아서. 두 번 하면 뭔가 모자라서. 세 번이 딱 적당하다고. 정성찬은 다시 한번 관계를 재정립한다. 나 친한 동생 하기 싫어. 그 말에 쇼타로는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한테만 키스하는데.

“형, 더 이상 이별은 없는 거야.”

“네가 말하던 결혼 주례사처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문장을 생각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듣기 썩 나쁘진 않지만 한 가지는 수정하고 싶었다. 이젠,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거라고. 그저 그런 일반적인 보통의 연애에서 다시 한번 가장 특별한 연애로 상승궤도를 유연하게 그린다. 그래, 솔직히 사랑 정말 별거 없었지만, 누군가에겐 죽음에 대한 운명을 논할 정도로 정말 별거였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지금 하는 세 번의 사랑고백은 얼굴이 딸기색으로 바뀐, 이기적이고 다정한 사람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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