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자 부재중: 회신을 남기시오

크리캐시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수도에 도착했노라는 편지를 보낸 게 벌써 삼 개월 전이었다. 스미스 저택과 수도는 육로로도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최근 이 지역과 수도를 한 번에 잇는 운하가 생기면서 과일이나 해산물같이 썩기 쉬운 물품도 손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하물며 편지 같은 것은 어떻겠는가. 남편에게 정부가 생긴 게 아니고서야, 아니, 오히려 남편은 정부가 생겼다면 더욱 성실히 편지를 쓸 사람이었으므로 그 편지를 마지막으로 그 어떤 소식도 날아오지 않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스미스 가는 궁핍한 가문이 아니었으므로, 그 안주인인 캐서린은 자신에게 배치된 예산을 운용하여 어렵지 않게 사설탐정을 고용할 수 있었다. 후한 값에 고용된 탐정은 일주일도 안 되어 이 지역 집배원 전체가 누군가에게 매수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미스 씨로부터 스미스 부인에게 보내지는 편지, 스미스 부인으로부터 스미스 씨에게 보내지는 편지가 전부 한 사람의 손에 모이고 있었다.

"그자가 누구지?" 캐서린이 부채 뒤에 숨은 입으로 닦달하듯 묻자 탐정은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을 혀 위에 담았다.

 

"그는 크리스토퍼 폭스워드. 당신의 오라비입니다."

 

범인의 이름을 들은 캐서린은 즉시 탐정에게 웃돈을 주어 직접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고 오라고 명령을 내린 뒤, 결혼하고 처음으로 친정에 연통을 넣었다. 남편도 없이 적적하니 방문하고 싶다는 내용의 한 줄짜리 편지였다. 답장은 다음 날 오후에 바로 돌아왔다. 일개 심부름꾼도 아니고 무려 부집사의 손에 쥐어져서.

 

캐서린. 너라면 나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너는 단지 내게 요구하기만 하면 돼, 지금과 같이.

 

신실함을 담아,

크리스토퍼 폭스워드.

 

그녀는 답장을 전부 훑어낸 즉시 벽난로에 넣었다.

 

 수신자 부재중: 회신을 남기시오

부모님은 장남에게 작위를 물려주자마자 요양을 빌미로 저택을 떠났기 때문에 이제 그녀의 유년 시절을 전부 보낸 폭스워드 저택은 오라비의 것이었다. 오라비의 것이었다. 젊은 폭스워드 가주에게는 아직 안주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결혼 적령기가 여자보다 길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아직도 미혼을 고수하는 크리스의 행태는 이상했다. 심지어는 약혼녀조차 두지 않고! 오죽하면 여동생이 손위 형제보다 먼저 시집을 갔을까. 그러나 폭스워드 가문은 이 근방에서 가장 인망이 높은 집안이었고 가주인 크리스토퍼 폭스워드 또한 허우대 멀쩡한(너무 멀쩡해서 열 받을 정도일) 사내였다. 남자에게는 그 정도 흠은 충분히 가려줄 수 있는 배경이 있었다는 뜻이다. 결혼 적령기보다 약간 나이 먹었더라 해도 그이가 일흔 먹은 백발노인도 아닐진대, 크리스토퍼 폭스워드의 옆자리를 원하는 여자는 여전히 많았다.

혹자는 크리스토퍼 폭스워드의 오만한 여유를 비난하며 손가락질했다. “저렇게 오는 혼담 다 걷어차며 콧대 높게 굴다간 영영 독신으로 살게 될걸!” 그러나 그는 집안의 후광을 믿고 총각 시절을 십분 누리는 여유 따위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다. 심지어는 뭇사람들의 말처럼 영원히 독신으로 살다 죽게 된대도 그는 지금의 방만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캐서린은 알았다. 캐시만이 그의 진짜 속내를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덜컹거리며 이동하던 차가 어느새 서서히 멈췄다. 창밖으로 익숙한 저택이 보였다. 제 것이었으되 제 것이 아니었던 저택이다. 언젠가 제 것이 될 줄 알았으나 기어코 오라비가 손에 거머쥔 저택이었다.

캐서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으로써 억지로 떠나온 친정이었으나 막상 다시 보게 되니 아주 반갑지도 않았다. 스미스 씨는 6살이나 어린 아내를 귀애할 줄 아는 남자였고 외모도 썩 나쁘지 않았다. 원래도 어디 가서 괴롭힘당하며 살 성정은 아니었으나, 남편의 애정에 힘입어 캐서린은 더욱이 빠르게 스미스 가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제 손으로 일궈낸 안정된 결혼 생활을 깨트린 크리스의 집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게 아무리 제 유년 시절을 전부 가져간 친정이래도... 이미 크리스의 손에 떨어진 이상은.

이윽고 차 문이 천천히 열렸다. 캐서린은 일전에 답장을 전달하러 왔던 부집사가 차 문을 열어준 것이겠거니 넘겨짚으며 차 밖으로 나왔다.

 

"안녕, 캐시."

 

다감한 목소리를 듣고 여자는 우뚝 멈춰 섰다. 거기 서 있는 것은 크리스토퍼 폭스워드, 크리스였다. 캐시의 하나뿐인 오라비... 캐서린은 무심코 미간을 좁히려다가 이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입매를 부드럽게 풀었다.

 

"크리스! 저택이 주인께서 여기까지 직접 나와 준 거야?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별말씀을. 넌 내 하나뿐인 여동생인걸. 자, 안으로 들어갈까?"

"...그래야지."

 

캐서린은 크리스토퍼가 내민 팔에 팔짱을 끼고 에스코트를 받으며 천천히 조경수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저택으로 걸어갔다. 범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크리스가 캐시를 안내한 곳은 그녀가 처녀 시절 쓰던 방이었다. 캐시가 결혼하며 출가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인테리어가 그대로였다. 주인이 없는 방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원래대로였다면 그녀의 조카딸이 쓰고 있어야 할 방이었다. 가주의 직계 여식에게 배정되는 방이니까. 그러나 크리스토퍼 폭스워드는 아직 미혼이고 그래서 이 공간의 주인은 여전히 캐서린 폭스워드였다.

환한 낯짝으로 크리스가 물었다.

 

“그래서 캐시, 무슨 일로 온 거야? 네가 먼저 방문 의사를 밝혀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모르는 척하지 말고. 내 남편의 편지나 내놔."

"편지... 편지라니?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는걸."

"나를 바보로 알아? 이미 다 태워 실물이 없다면 편지를 태우고 남은 재라도 가져와. 그걸 네 얼굴에 뿌리든지 해야 기분이 좀 풀리겠어."

 

캐서린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답하자 생글생글 웃고 있던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척이 아니라 정말 모른다니까. 내 말을 믿어주지도 않는 거야?"

"이미 사설탐정을 통해서 조사 마친 지 오래야."

"다른 남자의 말은 믿기고 혈육인 내 말은 안 믿긴다는 거야?"

"여기서 남자고 뭐고가 왜 나와? 그리고 크리스, 네 평소 행실을 좀 돌아봐. 네가 내 혼전에 무슨 짓을 했었는데!"

"그래. 네 남편의 편지, 내가 가로챘어. 네가 위선을 떠는 꼴이 우스워서 내가 남자 한 사람 구하는 셈 치고 가로챈 거야."

"위선이라니 무슨 소리야? 너."

 

돌연 크리스가 캐시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어느새 그는 숫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캐시는 기가 찼다.

 

"네 남편이 불쌍하지도 않아?"

"어째서? 우리의 결혼은 합당한 것이었고 나는 안주인의 의무에 충실하며 정부도 두지 않았어.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지."

"아니. 네 남편은 네가 이미 남자를 안다는 사실을 모르고 너와 반지를 나눠 끼웠잖아."

 

서서히 크리스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기울었다. 어깨를 부여잡던 손이 올라와 캐시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오라비의 악력에 억지로 고개가 들린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크리스의 얼굴을 손으로 막아냈다. 손바닥에 맞닿은 사내의 얼굴 근육이 구겨지는 게 느껴진다. 다음 순간 축축한 것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접촉에 동시에 깨닫는다. 그것은 입술 안쪽의 점막이었다. 크리스가 그녀의 손바닥을 깨문 것이다. 가벼운 통증을 느끼며 캐시는 손을 털어냈다.

 

"너 미쳤어?"

"캐서린... 캐시. 그 불쌍한 남자를 어디까지 기만할 셈이었어? 그 남자가 너한테 죽고 못 사는 꼴이 그렇게 보기 좋았어? 응? 편지를 보니 아주 너에게 단단히 홀린 모양새던데, 그 남자…"

"나도 그 사람이 좋으니까 편지를 주고받은 거야! 싫어하는 사람한테 공들여서 글귀를 적어줄 것 같아?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내 결혼 이후로 넌 한 번도 내 편지를 받지 못했으니!“

"캐서린 폭스워드!"

"캐서린 스미스야! 난 유부녀라고!"

 

단말마와도 같던 비명은 이내 크리스의 입안으로 먹혀들었다. 조금 전에 제 손바닥을 훑었던 그 온도가 거칠게 침범해 왔다. 익숙한 감각이라 캐시는 차라리 혀를 깍 깨물고 죽고 싶어졌다. 남자의 혀가 고르게 난 이를 두어 번 두드리자 습관처럼 그녀는 입을 벌렸다. 입천장을 쓸어내는 움직임에 소름이 돋아 어깨가 움츠려졌다. 배 안쪽이 간지러웠다. 몇 차례나 겪어본 적 있는 감각. 그녀는 맞닿은 점막을 통해 크리스의 입안에 난 돌기를 읽어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이것은 경고였다. 크리스토퍼 폭스워드는 여전히 과거를 묻어 둘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윽고 서서히 타인의 숨이 멀어졌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제 것을 기댔다. "크리스." 여자가 가볍게 호명하자 크리스의 입술과 인중 사이 애매한 경계에 키스가 와 닿았다. 살결끼리 거의 맞닿은 채로 그가 속삭였다.

 

"너는 이미 죄를 지은 몸이라는 걸 명심해."

 

그리고 네 공범자는 나니까 앞으로 편지 더 자주 보내고. 응?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온몸으로 안겨 오는 덩치만 커다란 오라비의 체온을 느끼며 캐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달래줘야겠지. 실크 셔츠로 감싸인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자 크리스토퍼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그새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미친놈. 편지하겠다고 확답도 안 했는데 키스 한번 했다고 내가 다시 '폭스워드'가 된 줄 안다.

남편의 편지는... 아마 이미 전부 불태워졌을 것이다. 캐시는 크리스를 닦달하느니 그저 저택의 어린 하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를 택했다. 그 편지를 태운 건 더는 오라비가 아니다. 편지를 관리하는 하녀의 부주의로 태워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크리스의 말마따나, 공범자를 숨겨 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캐서린 폭스워드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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