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없는 꽃
2026년의 언젠가(4.5시점) 배경, 로맨틱 감성
미츠루기 레이지가 상급검사 집무실 1202호를 비우게 된 날, 그가 나서야 할 장소와 들어서야 할 장소 모두 발 디딜 틈이라고는 없이 온종일 북적거렸다. 집무실의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채웠던 자료들과 그의 귀티나는 개인 물품들이 더 높은 자리를 향해 날라져 가는 광경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사뭇 엄숙하기까지 했다. 일찍부터 검사국의 총아로 주목받았던 인물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을 축하하고 싶다며 그와 접촉을 시도하는 객(客) 또한 많았다. 사법계의 중진들은 물론이요, 어딘가에서 한 번이라도 명함을 교환해 본 일이 있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신임 검사국장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보였다. 면대면으로 만날 상황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서신과 함께 이런저런 선물 따위를 보내 왔다.
크게든 작게든 ‘법의 암흑시대’에 일조하거나 그를 묵인해 온 자들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을 강구해둔 지도 어언 수 개월이었다. 검사국장 미츠루기 레이지는 자신이 치러 마땅한 전초전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대화를 잇는 내내 숨소리 한 모금만큼의 빈틈조차 보이지 않고, 이쪽으로 악수를 청해 오는 손을 잠시나마 맞잡을지언정 그들이 괴어 두려는 ‘성의’만큼은 철저히 고사했다. 모든 선물은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돌려보냈으며, 누구나가 알아볼 법한 기관명 내지 인명 따위를 두르고서 경조사 자리에 동원되는 흔하디흔한 화환마저도 집무실 문간에 서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면담과 더불어 교통 정리까지 얼추 끝내고서 간신히 숨을 돌릴까 싶은 늦은 오후 즈음. 또 다시 누군가가 검사국장실의 문을 두드려 왔다.
“실례합니다. 미츠루기 레이지 님 앞으로 된 특별 송달물이 있습니다만…….”
“아, 정말들 질리지도 않는 것 같슴다! 선물 같은 건 일절 사양한다고 미리 공지까지 돌렸는데, 어떻게든 이쪽에 뭔가를 찔러넣어 보려고 혈안이 된 게 아님까?”
“무엇이, 어디까지 통하는지를 알아보려 애쓰는 사람들이 초장부터 있을 줄은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지. 하지만 이번 건 확실하게 받아도 되는 물건일 걸세.”
척수반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방문자를 박대하려는 부관, 이토노코기리 케이스케를 제지시키며 미츠루기 레이지는 기사를 집무실 안으로 들였다. 서명을 끝내고서 수령한 박스는 제법 큼직하고 무거웠다. <취급 주의 요>라는 주의문까지 달고 꼼꼼히 마감된 포장을 풀어내고 박스를 열자마자 드러난, 수려한 보랏빛의 꽃다발과 아담한 묘목 한 그루가 두 남자의 시선을 일시에 사로잡았다.
“음, 잘 만들어진 꽃이군. 이번에는 콜럼바인(Columbine)을 골랐나.”
주저 없이 꽃다발을 들고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미츠루기 레이지의 곁에서 이토노코기리 형사가 반문했다. 콜롬보(Colombo)라면 형사가 아님까?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의아해하는 옆자리의 부관을 위해 그가 차분히 설명을 덧붙였다.
“콜롬보가 아니라 콜럼바인일세. 다른 이름으로는 아퀼레기아, 국내에서는 오다마키(オダマキ; 매발톱꽃)이라는 명칭으로 유명하지. 함께 온 것은 감람수(橄欖樹)의 묘목이라네. 지중해 연안이 원산이라 일본의 도심에서 흔히 접하기는 어려운 수목인데, 보아하니 실내에서 기르기 용이하게끔 품종을 개량한 듯 싶군.”
“우오오옷! 미츠루기 검사님, 아니, 국장님께서 꽃과 나무에도 일가견이 있으신 줄은 몰랐슴다.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봄철 야유회에도 매번 불참하시면서…….”
“어쩌다 보니 상식 수준으로는 알고 있을 따름일세. 이런 소재를 잘 아는 사람은 내 주변에 따로 있지.”
“어라? 그런데 이 꽃, 향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슴다?”
“생화가 아니니 향기가 없는 게 당연하네. 동봉된 에센스 보틀을 통해 실제 꽃의 향기를 맡아볼 수 있으니, 꽃가루에 취약한 나로서는 더욱 반가워할 수밖에 없는 선물이군.”
“그럼 이게 조화(造花)란 말임까!?”
“음. 실제 꽃잎의 감촉과 색까지 완벽히 재현해 낸, 정교한 세공품에 가까운 것일세.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있는 공예가의 수는 전세계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지.”
“……뭐랄까, 윗선에서 ‘성의’를 보이는 데 동원하는 선물 그 자체 아님까? 정말로 이런 걸 받으셔도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슴다.”
“글쎄, 그녀가 내게 청탁을 해 오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네만.”
그제야 눈앞의 선물을 보내 온 이가 누군지 감을 잡게 된 이토노코기리 형사가 우왓, 하며 습관대로 어깨를 움츠렸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무해한 꽃 선물, 심지어는 생화의 몇십 배는 호가할 고급품이다. 거기에 미적으로도 ‘완벽’한 센스까지 곁들인 것을 미츠루기 레이지에게 제시할 수 있는 여자란 세상에 한 사람뿐이지 않은가.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이들이 잠재적 우방인지 아닌지를 하루 온종일 가늠하던 검사국장의 능란한 표정 대신, 흉금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무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비치는 것만 보더라도 필시 답은 정해져 있었다.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이토노코기리 형사는 이내, 무언가 대단한 발견을 한 듯이 아! 하고 목청을 높였다. 꽃과 달리 나무는 진짜이니 분재갈이를 해 줘야지 않겠느냐며, 검찰청 내의 조경 구역에서 흙을 바로 날라올 수 있노라고 자신하며 성큼성큼 집무실을 나서는 추진력이 과연 그다웠다. 여전히 자신에 관한 일이라면 몸부터 움직이고 보는 부관의 뒷모습을 지켜볼 기회가 앞으로는 다소 뜸해질 듯 하기에, 이토노코기리 형사의 성급한 행동거지를 오늘만큼은 굳이 제지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그로서도 곧장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상급검사 집무실에서부터 가져온 고풍스러운 생김새의 꽃병은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향기 없는 보랏빛의 꽃을 그 안에 꽂아 멋스럽게 흩뜨리고 생화로부터 추출된 에센스를 몇 방울 떨어뜨리자,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금시에 비강을 사로잡았다. 아름답고 향기롭기에 앞서 탁월한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네가 거두어 낸 그 승리에 제대로 된 본질(essence)을 더하기를 잊지 말라는 충고를 입 한 번 벙긋하지 않고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카르마식의 은유가 되는 줄을 그는 능히 알아보았다. 이토록 의미 깊은 선물을 받아든 이상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성의’를 되돌려주는 것이 올바른 법이기에, 미츠루기 레이지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종종 찾곤 하는 고급 화원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은 세 번도 채 이어지지 않았다. 반색을 하며 승진을 축하해 오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적당히 감사를 표하며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늘 그래왔듯, 가장 싱싱한 생화여야만 하네. 먼 길을 가야 하니 취급에 각별히 주의를 부탁한다는 당부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익숙한 일이라는 듯 이번의 목적지를 물어 오는 상대에게, 며칠 전 메일에서 보았던 해외 대도시 소재의 6성급 호텔의 주소를 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어주었다. 오늘도 세계의 각지를 누비며 자신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진실을 사냥하고 있을, 자신에게는 너무도 완벽한 여자의 아름답게 뻗은 속눈썹을 떠올리며. 검사국장 미츠루기 레이지의 입매가 짙은 호선을 띠었다.
“―구할 수 있는 가장 화사한 금빛의 장미꽃다발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게.”
보라색 매발톱꽃과 월계수(나무)의 꽃말은 ‘승리(를 맹세함)’이며, 황장미의 꽃말은 ‘완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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