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Stendhal

타협이 불가능한 세계를 우리는 독선이라 부른다.

220 by Aster
148
0
0

 미화원 님의 미츠나루 IF만화(하단 링크 참조)를 베이스로 작성된, 1월 디페스타 역전재판 쁘띠존에서 발행한 배포본입니다. 작성자의 역량에 따라 논커플링적 기조로 작성되었으나, 커플링 여하와 좌우구분에 민감하신 경우 원산지 성분에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루호도 류이치가 연극영화과가 아닌 회회과에 진학했으며, 검사가 된 미츠루기의 근황을 알고도 변호사가 되기를 택하지는 않은 세계선의 IF입니다. 기초가 된 만화의 내용 흐름과 일치하지 않거나 자의적인 해석이 덧붙은 전개가 존재합니다. 고증의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쪼록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에게는 중심적 사건일지라도

다른 이에게는 끝없는 원주(圓周) 위,

무한수의 일점(一點)에 지나지 않는다.

 

― 구스타프 라드브루흐, 『도미에의 사법 풍자화』

 

 

 

1.

 

젊은 예술가들의 합동전은 본디 영세한 규모였다. 서클 참여자 중 대부분이 국공립 예술대학 출신에, 전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이들이었다. 그러니 도심 번화가의 갤러리를 대관할 수 있었던 데는 사립대학을 나올 만큼 유복한 배경에 반골 정신까지 겸비한 어느 참여자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여차여차하여 마련된 3층 전시실은 동선이 썩 좋게 나오지 않는 곳으로 유명했고, 맞은편 건물의 대형 갤러리는 해외 유명 아티스트의 단독 기획전을 진행 중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신출내기들의 졸작보다는 개당 수백만 엔을 호가하는 작품들이야말로 대중의 이목을 끌기 좋은 법. 그럼에도 그들의 합동전이 조기 폐전(閉展)되지 않은 것은 우연한 기회로 그곳을 들른 메이저 평론가의 촌평 덕분이었다. 월간지에 게재된 칼럼이 업계에서 소소한 화제가 될 즈음, 사람 보는 눈을 자랑하고팠을 갤러리의 관장이 2층에 공실이 났다는 이야기를 꺼내 왔다. 두 배가량 넓어진 공간에서 전시를 연장하면서 추가적인 비용 청구는 하지 않겠다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예술을 향한 열망만큼이나 볕들 기회에 언제고 목마른 청년들이었다. 모처럼 허락된 공간과 필드로부터의 살그마한 주목도에 부응하려면 전시의 내실이 중요하다는 데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는바, 청년들은 각자 화실에 보관하고 있던 작품 한둘씩을 더 내놓기로 했다. 꽤 괜찮은 감식안을 지닌 예술품 딜러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는 관장의 귀띔은 때마침 불어 드는 순풍과도 같았다.

그렇게 대중과 평단 앞에 추가로 공개된 작품 중 하나가 나루호도 류이치의 《세계》였다.

 

2.

 

‘호랑이 검사를 둘러싼 검은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모월 모일의 보도 이래, 상급검사 집무실 1202호에는 줄잡아 수십 통에 달하는 투서가 접수됐다. 발신인의 이름은커녕 주소조차 없이 날아든 우편물들에는 사법 조직의 전횡과 각종 비리를 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담당하지도 않은 사건을 빌미로 연대 책임을 독촉받거나 엄정하기 그지없었던 수사 과정조차 엔자이라 뭉뚱그려지는 수준에 이르면 비웃음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주야로 분망한 검사를 대신해 휘하의 실무관이 우편물을 단속하는 일이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된 어느 날, 도시마구의 소인이 찍힌 우편물이 집무실 책상에 올라 있었다. 몇 시간 뒤 있을 재판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채 봉인을 뜯어내자, 테레빈유 특유의 알싸한 향이 코끝을 건드렸다. 선 자리에서 장장 두 장에 걸친 편지지의 내용을 훑은 남자는 차게 굳은 얼굴로 집무실 내 문서 파쇄기의 전원을 올렸다.

얼마 전 강력부로 영전한 제2차장검사에게 초대권을 건넨 것은 그에게 특별히 잘 보이고픈 욕구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구독 중인 잡지에서 언뜻 스쳤던 전시의 제목이, 운전 중 습관처럼 청취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다뤄졌던 사연이, 아무쪼록 우아한 방식으로 그것을 처분하라는 설득처럼 다가왔을 뿐이었다. 석 장의 티켓을 한달음에 처분하고 홀가분해진 것도 잠시, 여느 때처럼 검사실을 정돈하던 실무관이 딱 한 장 남은 초대권을 내밀었다.

― 폐지함 속 봉투에 들어 있었는데, 혹 찾으실까 싶었습니다.

업무의 합을 맞춘 지 이제 겨우 반년째인 실무관은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싫은 내색 없이 이쪽의 편의를 봐주곤 했다. 연상의 부관이 지닌 점잖은 면면을 봐서라도 처치 곤란의 티켓을 마다할 수 없게 되니 소리 없는 침음이 입에서 새었다. 하루 중 비는 시간 내내 떨쳐내지 못한 종잇장의 처분 방법을 고민하던 남자는 결국 고토구 소재의 모 갤러리의 주소를 내비게이터에 입력했다.

소비 문화를 선도하는 젊은 층이 발걸음하기에 알맞은 장소라던 세평대로 갤러리의 내부는 적당한 인파로 북적였다. 입구에 선 요원에게 차 키를 맡기고 주차권을 받아 놓으려 들른 1층 데스크에는 초대객 대상으로 무상 배포 중이라는 도록과 오디오 가이드용 단말기가 비치되어 있었다. 기기를 소지하고 작품 앞에 서면 해설이 자동으로 재생된다는 직원의 설명에서 상근 도슨트를 기용하기에는 다소 빠듯했을 참여자들의 지갑 사정이 짐작되었다.

2층의 양실 중 한 곳을 모두 돌아봤을 즈음만 해도 남자의 감상은 적당히 대중적인 성격의 전시라는 수준에 머물렀다. 드문드문 참신한 관점과 기법이 보이긴 했으나 하이엔드에 익숙한 눈을 매료하기엔 조금 부족하거나 이른 작품들이 대다수였던 까닭이었다. 기실 이런 자리에서는 개개의 출품작보다 아티스트의 잠재력이 실매물로서 주목되는 법이므로 큰 흠이라고 할 수 없을 한계였다. 십수 년간 이룩한 미감을 방패처럼 거느린 채, 남자는 연결공간의 모퉁이를 천천히 돌았다. 맨 벽일 줄만 알았던 자리에 백 호 크기의 캔버스 유화가 걸려 있었다.

저물녘의 교실 한가운데, 책걸상들의 작고 동그란 모둠, 그 가운데 우뚝 만개한 해바라기 한 송이.

《세계》를 해설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미츠루기 레이지의 발밑을 흔들었다.

 

3.

 

줄잡아 십수 개의 베드가 놓인 장소에서 정신이 들었다.

천근만근으로 느껴지는 몸을 일으켰을 때 맨 먼저 시야에 잡힌 것은 의료진의 부산한 모습이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났던가?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인식 탓에 멀뚱한 남자를 백색 유니폼의 간호사가 만류했다. 곧 당직의가 올 테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안정을 취하라고. 그 설득에 힘을 실으려는 듯 지독한 두통이 엄습해 왔다.

눈 밑이 꺼멓게 죽은 레지던트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하길 반복하고서야, 이곳이 대학병원의 응급실이며 자신이 정신을 잃은 채 이송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최초 신고자였던 갤러리 직원의 진술에 따르면 돌연 쓰러져 과호흡 증상까지 보였다는 것 같았다. 어쩐지 이름과 주소, 사는 곳과 근무지 따위를 끈질기게 묻더라니. 만일 지금이 용의자를 심문하는 상황이었다면 저이는 유죄 판결을 따내기에 손색없을 증언을 거머쥐었을지도 모른다. 늘 추궁하는 자의 입지에 서 온 남자는 경황없이 솔직하였던 스스로를 향해 속으로 냉정히 일갈했다.

정밀검사의 권유를 고사하며 자의퇴원서를 써냈을 때 당직의는 지친 표정으로 딱 한마디를 했다. 평소에 없던 증상이 나타나면 인근의 병원에라도 들러 보시고, 당분간 직접 운전대를 잡을 생각은 삼가십시오. 일손이 어지간히 달리는 듯 바로 옆의 병상으로 몸을 트는 의료진을 가엾게 봐서라도 흘려들어서는 안 될 충고였다. 별수 없이 병원 앞에 서 있던 택시를 잡아탄 남자가 목적지를 부르려는 때,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싸늘하리만치 친숙한 열한 자리의 넘버가 액정 위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악명 높은 호랑이 검사가 일개 아마추어의 그림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더구나.

―…….

―게서 퍽 예술적인 경험을 한 모양인데, 그래, 소문의 당사자로서 소감이 어떠하느냐.

―불초 제자가 선생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좋지 못한 소문일수록 과연 파급력이 크고 재빠른 법이다. 그 냉엄한 현실을 일깨우듯 표정을 굳힌 스승의 앞에서 제자는 저의 면구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혈색이 덜 돌아온 젊은 낯을 흘기며 혀를 차던 카르마 검사는 이내 문서철 하나를 툭 내려놓았다. 사흘 치의 병가가 재가된 근태 기록부의 사본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완벽’한 검사로 복귀하는 것이야말로 너의 소임이자, 이 몸의 자비에 대한 대가다.

주말까지 포함해서 닷새다. 그 안에 결착을 짓거라. 여느 갤러리에 비견할 만큼 웅장한 복도에서 남자는 카르마 검사의 마지막 말마디를 곱씹었다. 황금색 프레임이 둘린 스승의 반면 초상은 그저 존재할 뿐이었지만 제자에게 어떠한 암시를 주고 있었다. 그 가르침을 받들고자 들린 잿빛의 시선이 서서히 저의 출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루호도 류이치를 만나야겠다는 한 길 결론을 향해, 영영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구둣발이 움직였다.

 

4.

 

주말 오전에 펜을 들어 월요일 아침에 봉한 서신의 내용은 초안에서 거의 변동이 없었다. 초상화 작업을 의뢰하고 싶으니 다가오는 수요일에 화실을 방문하겠다고. 가능한 한 단출하게 용건을 적으면서도 상투적인 안부 인사 한 줄 보태지 않는 무례함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그쪽의 일정상 어렵겠다는 회신이 닿아 오거나 화실에 방문했을 때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 일은 거기서 일단락될 따름이라고. 위악을 떨듯 애써 그러모은 포부는, 그러나, 저 수줍은 환대 앞에 한없이 초라해질 따름이었다.

―어, 그, 아, 안녕. 생각보다 일찍 왔네.

일을 마치고 저녁쯤에나 올까 싶었다며 반색하던 나루호도 류이치가 걷어붙였던 셔츠의 소매를 훌훌 폈다. 한창 캔버스 틀에 타카를 치느라 초인종 소리를 못 들을 뻔했다는 너스레를 반쯤 흘려넘기며 남자는 화실 내부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서로 다른 결의 무질서가 패치워크처럼 자리한, 그러면서도 묘한 질서감을 구축 중인 공간이었다.

―이런 곳은 쉐어로 운영되는 건가?

―아, 응. 아무래도 그렇지. 오늘은 어쩌다 보니 나만 나와 있지만.

그나마 정돈이 잘 된 이젤자리에 멈춰 선 나루호도 류이치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화실의 다른 사람들은 부업을 하러 나가거나 휴식하는 날이고, 본래라면 자신도 도립 예술원 소속의 연구사와 미팅 자리가 약속되어 있었다고. 공과 사의 우선순위를 한참이나 잘못 견준 자의 자백에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런 사정을 말했다면 오늘 찾아오지 않았을 거다.

아직 부족한 입지를 염두에 두자면 이곳저곳에 얼굴을 비쳐도 모자랄 판에, 몸값을 올릴 기회와는 하등의 연관도 없는 약속 따위에 응했을 줄이야. 미안함보다는 꾸짖음에 가까울 시선과 어조로 다그치는 그였음에도 나루호도 류이치는 굴하지 않았다.

―그럴 것 같아서 네게 말하지 않은 거야, 미츠루기.

미팅 날은 다시 상의할 수 있어도 오늘이 아니면 너를 만날 기회가 영영 없을 것 같았어. 한심하게 들리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 두자. 말을 꺼낸 사람으로서는 멋쩍은 얼버무림으로 끝내면 다가 될 이야기겠지만, 듣는 처지에서는 선득할 정도로 감이 좋은 판단이었다. 그예 더는 말꼬리를 붙들지 않고 묵비하던 남자는 벗어든 프록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근처의 철제 스툴을 끌어다 앉았다.

5.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사과할 게 있는데.

―뭐지?

―실은…… 편지를 받기 전부터 너를 그리고 있었어.

앞치마의 끈을 묶느라 한참을 꼼질대던 나루호도 류이치는 간신히 제 손가락의 반도 안 되는 크기의 리본을 묶고는 이리로 돌아섰다.

―종종 매스컴에 오르던 네 모습을 참고로 인물화 작업을 시도했거든. 실제 모델을 눈앞에 두지 않아서 그런지 스케치 단계에서 매번 좌초됐지만.

초상권이라거나,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민감하게 받아들일 것 같아 말할지 말지를 고민해 봤지만, 역시 이런 문제는 본인에게 터놓는 게 맞겠지 싶더라며. 반들반들 빛바랜 토시 한 쌍을 찾아 끼고 웃는 그 모습이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이제 제법 예술가의 행색을 한 이가 민짜 캔버스가 놓인 자리로 다가서려는 것을 만류하며 남자가 말했다.

―그럼 그걸 내 의뢰작 삼아 완성하면 되겠군.

―……어?

―너는 못다 한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고, 나는 목적했던 초상화를 받아볼 수 있다. 각자의 바람과 필요에 부합하는 대안으로 이 이상 가는 것이 있나?

차라리 잘된 셈이다. 초안 삼을 것이 이미 존재한다면 이 남자와의 만남을 그만큼 단축할 수 있을 테니. 공무적 사유로 시간을 오래 내기 여의찮다는 핑계로써 제 주장에 한 줌 어치의 당위를 보탠 남자는 스스로조차 놀랄 만큼 떳떳한 얼굴을 유지했다. 결국 선반 깊은 곳에 두었던 사십 호 캔버스를 꺼낸 나루호도 류이치가 끄으응, 하며 긴 한숨 소리를 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적지 않은 리스크를 지고 가는 선택이야. 초상화라는 건 처음부터 의뢰자의 취향과 의도에 꼭 맞게 작업해야 만족도가 높은 편인데.

―네 눈에 비친 지금의 나를 그리면 된다. 처음부터 그걸 원해서 찾아왔으니, 나중 가서 불만을 제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뭣하면 보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선지급할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말해주면……, 나야 고맙긴 한데.

폐기하지 않고 보관 중이던 습작은 이것뿐이라며 그가 내민 캔버스에는 두상부터 가슴 위까지의 스케치가 담겨 있었다. 전형적인 인물 초상의 구도를 따른 한편, 무척이나 흐린 필치로 이목구비를 처리해 둔 이유를 이제 와 알 것도 같았다.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타인의 이미지란 결국 편린에 불과한 법. 번번이 그림을 망쳐 재료를 낭비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안전 일로를 택하고 싶었으리라.

―오일 페인팅은 완성까지 빨라도 몇 주, 길게는 두 달 이상 걸리거든. 오늘은 드로잉의 완성과 밑색 처리까지가 최대일 것 같네. 바쁜 와중에 너무 여기에 시간을 뺏기지 않게 노력해 볼게.

―아무쪼록 부탁하지.

―음, 그리고……. 괜찮다면 내가 직접 구도를 잡아도 될까?

―좋을 대로 하게.

―으응, 그럼……, 잠시 실례할게.

이젤 위에 천 액자를 안친 뒤 연신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던 나루호도 류이치가 대단한 각오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도심 근교의 화실에서 바라다볼 수 있는 창밖 풍경이란 그저 풍경일 뿐, 그리 뛰어난 운치를 자랑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유리창 너머의 경관에 부러 시선을 고정한 남자는 정물이 되고 싶다는 일념에 의식을 옭았다. 골똘하니 상기된 표정의 예술가가 모델의 앉은자세와 얼굴에 끼치는 광량 따위를 조절하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넓지도 좁지도 않은 보폭으로 예닐곱 걸음을 떨어졌다 가까워지길 되풀이하며 간간이 가벼운 접촉까지 동반한 디렉팅은 얼마간 시행착오를 수반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깨에 실린 긴장을 반절이나 덜고 위로 들렸던 시선을 삼십도 가량 내린 남자를 나루호도 류이치가 한 줄기 감탄으로써 멎혔다. 일생토록 취해본바 없는 안정과 균형 속에 자신을 박제한 이의 목소리는 순연한 화색을 띠고 있었다.

―지금 그 모습, 정말로 미츠루기 너답게 보여.

몹시도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한마디였다.

 

6.

 

회적색의 색연필이 놓인 것은 오후 한 시를 갓 지났을 무렵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도통 완성할 수 없었다는 밑그림을 퍽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나루호도 류이치는 뒤늦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작업에만 집중하느라 모델에 대한 배려가 충분치 못했다며, 밑색 단계부터는 좀 더 편하게 있어도 될 거라는 사과에 남자는 짧은 고갯짓으로써 대답을 갈음했다. 캔버스를 보고서 피드백을 주겠느냐는 제안은 거듭 사양했으되, 그가 화실 찬간을 뒤져 간신히 내놓은 주전부리는 군말 없이 입에 대었다. 천생 예술가의 얼굴을 한 이에게는 그것이 사뭇 기쁜 일이었는지 본래도 유순해 뵈는 눈꼬리가 천진스레 휘었다.

―……아, 이런.

―무슨 일이지?

―그게, 용해유가 좀 부족한 것 같아서.

산미가 떨어지는 찻물로 예의껏 목을 축이고 있을 때, 콘솔 테이블에 화구를 차려놓던 나루호도 류이치가 난색을 보였다. 채색 작업에 없어서는 안 될 전색제가 정량보다 적게 남았다며 설명을 부연한 그는 곧 뒤축이 닳은 운동화에 발을 꿰었다. 창고에서 기름을 찾아 배합한 뒤 기왕이면 냄새까지 날리고 오겠으니 그동안 잠시 화실을 구경하고 있어 달라는 먼 외침을 끝으로 공동 화실의 현관이 닫기는 소리가 났다. 정적의 복판, 따사로운 햇볕이 고루 발린 마룻바닥에 장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그로부터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접이식 침대의 좌우로 붙어 선 수납공간은 각종 서적과 노트들로 빼곡했다. 외서로 추정되는 도록들과 전공서의 해진 모서리를 스쳐 지난 눈길은 그보다 한 칸 아래에 꽂힌 드로잉 북들을 주시했다. 하나같이 손때가 묻어 있을뿐더러 우직한 노력의 흔적까지 고스란한 공책들이었다. 무작위로 빼 든 세 권째의 노트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남자는 이 관음 아닌 관음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저만치에 놓인 사무용 책상 위, 네 자리의 숫자와 물결 기호가 제목처럼 휘갈겨진 바인더가 주의를 끌지만 않았어도 필시 그랬을 터.

크라프트 재질의 커버를 펼치고서 마주한 내지에는 여덟 장의 사진이 철해져 있었다. 기물들의 배치와 자연광의 톤은 제각기 달랐으나 모두 같은 장소에서 촬영되었음이 분명한 이미지였다. 사진과 함께 펀칭된 아이디어 노트에는 색조의 전반적인 구성과 표현 방식, 오브제의 가감 여부 등을 고민해 온 내력이 역력했다. 문장의 매 말미에서 획을 삐쳐 내는 독특한 필체는 틀림없는 나루호도 류이치의 것이다.

속독으로 훑어 넘긴 페이지가 반절 가량에 달했을 무렵, 점 하나 찍혀 있지 않은 은백색의 간지가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뒤로 어떤 내용이 이어지고 또 최종적으로는 무엇을 향해 귀결될지 짐작하고서도 저를 구태여 들추겠냐는 양 해사한 빛깔의 종잇장은 되레 심기를 불편케 했다. 잘못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거슬리는 그것을 부득불 횡으로 제치며 남자는 입 안의 살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았다. 며칠째 잘못 든 습관이 비릿한 동통을 수반했다.

목하 이어지는 페이지들은 십수 장에 달하는 초벌화였다.

소위 에스키스(esquisse)라 불리는 초벌화는 아트워크의 첫 가닥을 잡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습작이다. 실제 도폭에 작품을 그려내기 전, 별지 위에 휘갈겨지는 무정형의 상들은 줄곧 상상의 영역에만 존재했던 열망에 작가가 부여하는 골조와도 같다. 단정한 프레임째 갤러리에 걸린 작품만을 예술이라 회자할 뭇사람들은 이들 시작(試作)에 눈짓조차 꺼릴 테지만, 그야말로 예술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었다. 진정 예술을 애호하고 감상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술가의 개성과 관점을 방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에스키스임을 부인하지 못할 터다.

켄트지 속 그림들이 《세계》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임을 이해한 미츠루기 레이지처럼.

실선의 다발로 뭉뚱그려진, 색명의 가늠마저 자디잔 선으로 갈무리된 오브제들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명징했다. 이제 남자는 그날 갤러리에서 보았던 도상이 가장 점잖은 형태로 설계된 알레고리였음을 안다. 해바라기꽃이 만발했던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던 여타의 가능성 역시 크게든 작게든 자신을 겨냥한 소재라는 사실 또한. 미욱하였던 과거를 자양분 삼은 회화가 그리도 끔찍하게 여겨졌던 데는 그러한즉 합당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 사실을 직감하였던 제 육신이기에 《세계》의 앞에 굴했는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에는 일말의 비참함마저 따라붙었다.

공기 중에 밴 페인팅 미디엄의 여취가 기도의 살점을 할퀼 듯 시큰했다. 관성적으로 숨을 뱉고 또 들이쉬기를 반복하던 남자는 바인더의 금속 레버를 눌렀다. 파일의 맨 뒷면에 고정되어 있던 플라스틱 백에는 반으로 접힌 갱지 한 장이 든 것의 전부였다. 이제 와 새삼 무얼 꺼리겠으며 설마하니 이보다 더한 충격이 있겠느냐는 일념에 따라 움직이던 두 손은, 그러나, 어느 정론지로부터 오려내어진 보도문 앞에서 뻣뻣이 굳기에 이르렀다.

 

‘원죄(エンザイ)로 얼룩진 법정의 현주소’

 

원죄(怨罪)와 원죄(冤罪)라는 루비 문자가 도드라진 표제의 바로 아래, 피고인석을 노려보고 선 미츠루기 검사의 조상(照像)이 검날처럼 엄숙했다.

7.

더께처럼 잠들어 있던 십오 년 전의 기억 속 나루호도 류이치에게는 집념이라 부를 만한 구석이 존재했다. 교과서적 의미의 우등생으로 분류하기에는 범상한, 그러나 옳고 그름에 관해서는 다소 예민한 데가 있었던 급우. 다른 건 몰라도 뚝심만은 어지간하였던 아홉 살 소년을 이제 와 돌아보기란 몹시도 새삼스러운 일이라, 딴에는 혹 이것이 부자유한 일신에 반발하는 무의식의 발로인가 싶은 지경이었다.

과거의 단상을 흩으며 포커페이스를 고수하는 동안에도 이젤 앞의 나루호도 류이치는 초칠에 열심이었다. 용해유에 물감을 갤 적만 해도 그는 소학교 동창들의 근황 따위를 수다스럽게 읊었는데, 유심히 귀 기울여 들을 만한 화제는 못 되었다. 앙숙으로 이름났던 누구와 누가 고학년 들어 교제를 시작한 이래 이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느니, 수험을 망쳐 모두의 걱정을 샀던 누구는 3지망으로 진학했던 게 되레 더 적성에 맞아 전화위복이 되었다느니.

얼굴은 물론 이름도 가물가물한 타인의 근황을 듣는다 한들 반가움이 우러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해 동안 익힌 사회인으로서의 처세조차 발휘되지 않는 이 애매한 상황에서 남자는 감탄어의 용례에 그저 충실했다. 음. 그랬었나. 아아. 그랬군. 이도 저도 아닌 반응으로 대화를 지탱하는 것이 고역으로 여겨질 때, 머쓱히 웃음 짓던 나루호도 류이치가 슬슬 작업을 재개해야겠다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게 아니고서야 그도 방금까지의 대화가 제대로 된 대화의 반열에 들 수 없었음을 눈치챘을 터. 필요 이상으로 붓결을 가다듬는 동작 하며 소리 없이 벙긋대다 말 뿐인 입 모양새를 남자는 그리 해석했다. 피아(彼我)의 안부를 확인하는 데만 지나치게 연연하던 나루호도 류이치가 오늘따라 제삼자를 언급하는 심산이 아주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심 가는 바가 있을수록 전황을 살펴 상대의 자백을 유도하는 습관은 남자의 입술을 다물렸다.

―저기……, 고마워. 오늘 이렇게 만나 줘서.

장장 한 시간가량 이어지던 침묵을 깨뜨린 것은 결국 이번에도 나루호도 류이치였다. 줄곧 편지를 부쳐왔어도 이렇게 연락이 닿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저랑 만날 생각을 다 해줬는지 모르겠다는 넉살 앞에 비로소 남자의 입이 열렸다. 지난번 편지에 동봉된 티켓과 그곳에 출품됐던 작품 하나가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노라고.

―《세계》라는 제목이었던가. 어디서 본 것 같은 풍경이지 싶었는데 태그에 적힌 네 이름을 보니 과연 착각이 아니더군.

―아……, 봤구나, 그거. 대중 앞에 선보이는 건 처음이라 여러모로 걱정됐는데, 네가 보기엔 어땠을까 모르겠네.

―남들에겐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실로 끔찍한 작품이었다.

손에서 놓친 휠버트 브러시가 마루 위를 구르는 몇 초간, 나루호도 류이치는 당혹감이 빤한 얼굴이었다. 바닥에 남은 물감 자국과 붓을 수습하려 몸을 굽힌 그를 내려다보며 남자는 사뭇 저열한 쾌감에 젖어 드는 스스로를 인지했다.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거두어들일 적의 승리감을 닮은 그 만족감은 그러나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아, 음, 네가 보기엔 그랬구나, 하하……. 뜻밖의 이야기라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의견 고마워.

―감사받을 만한 이야기라 여기나? 진심으로?

―필드 밖으로부터의 감평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작가에겐 중요하거든. 동기 부여의 측면에서 좋은 자극이 된달까.

서클 사람들끼리 크리틱을 주고받다 보면 이보다 더한 소리도 왕왕 나온다며 열띠게 사족을 붙이는 나루호도 류이치였다. 제 작품에 겨누어진 근저 없는 혹평을 불쾌하게 여기기는커녕 체질에 맞지도 않을 허세를 동원하는 태도에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는 의견과 그렇지 않은 걸 구별하는 것도 아티스트의 자질이다. 고작 그 정도도 버거울 지경이라면 진로를 재고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넌 검사라면서 어째 깐깐쟁이 교수님처럼 말을 다 하고……. 하긴, 뭐, 어렸을 때도 나이답지 않은 얘길 해서 주위를 놀래던 게 어디 갔을까. 동갑인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어려운 말을 한다 싶었었는데.

―…….

―정말이지,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또다. 향수에 젖은 표정으로 과거를 그리는 저 묘한 태도. 농으로든 진으로든 못 미더운 인사로 여겨지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양 자아내는 웃음. 언제든 노랗게 되살아날 듯한 《세계》의 기억과 눈앞의 나루호도 류이치가 끌어내는 정서의 유사성을 직감한 때, 남자는 그만 참지 못하고 빈정거렸다.

―빈 캔버스와 화구들을 벗 삼느라 정작 사람을 상대로 화법을 익힐 기회는 없었나? 아니면, 듣는 쪽의 기분 따윈 상관없이 말을 뱉는 그게 자네 천품인가?

―……어?

―서신의 주제가 늘 거기서 거기였던 건 나에 대해 아는 게 적어 그러려니 싶었다. 한데 이렇게 면대면의 자리에서도 옛일을 화제 삼으며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듯 구니, 듣기에 고역이 아닐 수 없군.

―…….

―내 근황을 모르고 지내지도 않았으면서 이리 구는 저의가 뭔가.

―질 나쁜 농담이라니, 그런……. 나쁜 의도로 한 말은 더더욱 아냐. 난 그저 네가 걱정돼서…….

―십오 년 만에 얼굴을 보게 된 동기에게 끝없는 동정을 살 만큼 내 삶이 마냥 불우하게 이어지진 않았다만.

꼬여버린 심사를 떠나더라도 사실 그대로의 진술이었다. 스승의 철두철미한 훈육과 한없는 베풂 덕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남자는 세상 누구보다도 확신해 마지않았다. 그런 제 믿음을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주장할 방도를 고민하는 사이, 나루호도 류이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주변머리 없이 군 건 인정할게. 반가운 마음이 지나쳐서 정작 네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나 봐. ……그치만 걱정됐던 건 진심이야.

―그러니까 내 어딜 봐서 말인가. 무얼 근거로.

―기사가 났잖아. 미츠루기, 너를 의심하고 폄훼하는 기사들이.

희한할 정도로 강단이 실린 항변 앞에, 남자는 바인더에 들었던 스크랩의 원문을 처음 맞닥뜨렸던 날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문득 떠올렸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도 잊은 펜대들의 수작에 혀를 차고, 저들에게 그다지도 만만하게 보였나 싶은 불쾌감을 목뒤로 눌러 삼켰었지. 그러면서도 실제와 과장을 교묘히 병치시킨 내용에 대해서는 일체의 감정적인 판단을 보류했었다.

타고난 일생 중 스물네 해를 제한 삶의 모든 가망을 통틀어, 저들 줄글에 쓰인 모습과 행태를 지니게 될 가능성을 과연 제로라 단정할 수 있나. 불길한 예언을 점지받은 옛 시대의 필멸자들이나 그 깊이를 알 법한 꺼림칙함은 검사 미츠루기 레이지의 정당한 그림자였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한, 죽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지워지지도 않을.

―아버지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다던 네가 돌연 검사가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더군다나 그런 의혹이라니…….

―…….

―하지만 미츠루기, 난……,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알아. 널 제대로 마주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러니,

―……만일.

―응?

―내가, 그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맞다면.

―…….

―그때는 어쩔 테지?

저 자신조차 은연중에 수긍했던 가능성을 어떤 논리로 반박할 테냐는 물음 앞에 내내 간곡했던 눈빛이 더럭 흔들렸다. 가변적인 정황 증거 따위에 향방이 좌우되던 교실 분위기에 기가 꺾인 아홉 살 소년이 몸만 커진 채 이 자리에 불러들여진 모양새였다. 그 시절의 저와 달리 무고를 호소하지 않는 완고한 태세야말로 상처라는 듯 망연한 표정은 《세계》의 해제를 청취했던 그날의 기억을 재차 환기했다.

 

‘……작품 《세계》는 일종의 자전적인 아트워크입니다. 살다 보면 사소한 불운과 오해가 생에 길이 남을 기억을 낳곤 하는데, 제겐 소학교 시절의 학급재판이 그랬습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추궁받고 모두가 보는 앞에 죄를 뉘우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심정이란, 세상 전부로부터 등을 떠밀리는 것 같았죠. 다행히 절 지지해 준 한 친구 덕에 누명을 벗을 수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과 정서를 형상화한 결과물이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그림입니다.

화면 중앙부의 해바라기는 두 가지 의미 층위를 지닌 미적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십오 년 전 친구의 존재 자체입니다. 그 녀석은 변호사를 지망했는데, 변호사 배지의 모양이 꼭 해바라기 같거든요. 이걸 알고서 보게 되면 식상한 데가 있는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첫 번째 의미 층위가 사적인 경험에 근간을 둔 데 반해, 두 번째 의미 층위는 집단 무의식 속 정동을 표현하기 위한 실험 의식의 일환이었습니다. 저는 이걸 곧잘 ‘정동적 오브제’라 부르곤 하는데, 정물화 속 과일과 꽃이 미적 관념의 대리물이자 알레고리로 해석되는 데서 착안했습니다.……’

 

입직 사 년 차의 검사가 인식하는 세상이란 지면 위를 까맣게 적신 활자들의 더미 자체다. 시사 매체는 연일 사회 내 팽배해 있는 부도덕의 징후를 거론하고 있지만, 전국 각지의 수사본부와 형사과로부터 넘어오는 보고서에는 그조차 우습게 능가하는 내용 천지였다. 사건사무규칙에 따라 각종 조서를 꾸미고 사실상의 훈시규정이라 불리는 비공식 지침들을 외기 시작한 이래, 남자는 흰색과 검은색, 말라붙은 적색이야말로 인세의 민낯이리라는 지론을 고집해 왔다. 일체의 감정적인 수식을 걷어낸 서류들이 총천연색의 영상물보다도 두터운 해상도를 지닌 현실이야말로 불변의 이치라 확신하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울일 수 있는 다정함이 메마르지 않는 한, 삶에는 무한한 희망과 의지가 함께 하리라는 것. 제가 《세계》를 통해 관람객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눈앞의 해바라기처럼 당당하게 선, 언제고 소중하게 추억할 만한 존재가 있지 않으신가요? 그 존재가 사람이든, 혹은 사람이 아니든, 여러분의 마음에 깃든 그 귀중한 감정을 한 번쯤 소리 내어 전해 보세요. 내가 당신을 이해하고, 참 많이 애정하고, 언제나 신뢰한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그런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변치 않는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게 될 겁니다.’

 

어느 웅대한 서사시를 낭송하듯 삶의 환희를 읊던 목소리란, 그러한즉 뜬눈으로 맞이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작품의 가장 후미진 시야각조차 따스히 어루만지는 저 예술가의 진술이 어찌 끔찍하지 않을 수 있나. 그의 붓이 구축해 낸 신념의 근간이 곧 자신이라는데. 부친의 시늉이나 낼 줄 알았던 그 시절을 상기시키는 저이의 오만에는 머리보다도 몸이 빠르게 반발했다. 어린 주먹이 열리지 않는 철문을 두드렸을 적의 소리가 빈맥을 일으키며 남자의 왼쪽 가슴을 짓눌렀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나루호도. 네가 그리도 연연해하는 옛적의 나를 지금의 내게서 애써 찾으려 들지 마라. 그게 무엇이 됐든 꼴사나운 미련에 불과할 테니.

―왜……, 그렇게나 스스로를 그릇된 사람인 양 말하는 거야.

―계기만 주어진다면 어떠한 이유로든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니까. 내 ‘세계’에서 변치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

―네 그 바람과 다르게 여전하지 않은 나를 눈앞에 보이면 만족할 만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 정도로는 서로의 눈높이가 자라났을 거라는 기대마저 결국은 내 오판에 지나지 않았군.

―…….

―《세계》를 아주 포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타협이었어.

―미츠루기, 제발…….

―독선에 찬 예술가의 붓을 멈춰 낼 방법이란 결국 그의 세계를 침탈하고 무너뜨리는 방법뿐인 것을.

나동그라진 스툴의 쇳소리가 화실 내부의 공기를 따갑게 긁어내렸다. 삼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감을 단 여섯 걸음 만에 죽여 낸 남자는 여즉 미욱해 뵈는 예술가의 어깨를 붙들었다. 격양에 찬 숨결이 콧등을 적시는 순간, 한 세계의 연약한 겉껍질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8.

 

닷새 만에 복귀한 집무실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들이 그득했다. 병가 중에도 수사관들과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배당 사건의 반수 이상을 떨어냈음에도 남은 게 그 정도였다. 전산 입력을 마친 사건들이 차장실과 부장실을 거쳐 각 검사실로 배당되기까지 두 시간쯤 소요될 것을 염두에 두자면 지금의 절반쯤 되는 양의 문서가 추가로 반입될 것이 자명했다. 재판을 거칠 필요조차 없는 단순 사안은 집행계로 이첩을 마쳤다는 실무관의 보고가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관할 서로부터 송치되는 사건의 수가 일일 1만 건을 웃도는 작금, 법무성 산하의 조직들은 연중무휴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다. 더욱이 사사로운 업무 공백이 공동의 능률을 저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 바로 도쿄의 지방검찰청이다. 당직 순번까지 바꾸어 가며 보고서를 작성한 수사관들의 노고가 개인의 선의를 넘어서는 문제임을 아는 한, 평시의 업무 효율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인계된 서류들을 오전 내내 검토하고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 뒤, 로비에 게시된 공판 일정을 확인했다. 병가를 사유로 부재중이었던 처지를 나름 배려해 준 것인지 이번 주에는 금요일 오전 열 시에 지방재판소 제2 법정에서 진행될 재판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 봤자 다음 주부터는 모든 일정이 정상 궤도에 올라야 할 테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오후부터 시작될 참고인 조사를 염두에 둔 남자는 채 가시지 않은 피로감을 털듯 고개를 흔들었다.

검사실을 나와 직원 전용 주차장에 세워 둔 자가용에 시동을 걸었을 때는 저녁 아홉 시를 갓 지나 있었다. 카 스테레오의 주파수를 맞추고 기어를 당기는 동작에 호응하듯 스피커에서는 시사 뉴스의 오프닝이 흘러나왔다. 한산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어도 밀림 없이 달릴 수 있을 시내 도로를 주파하며, 남자는 도막 나 있는 기억에 상흔처럼 맺힌 한 얼굴을 생각했다.

화실에서 언쟁을 벌인 직후부터 집으로 돌아가 신경안정제를 삼키기 전까지. 장면과 장면 사이에 남은 공백이 솎지 못한 거스러미처럼 뇌리에 깔깔했다. 평소 교분이 있는 한 신경외과의에게 메일로 증상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해도 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심인성 둔주로 추정된다는 애매한 대답뿐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심리적 충격에서 곧잘 비롯하는 증상인데, 심하게는 몇 개월 내지 연 단위의 기억이 사라졌다며 내원하는 케이스도 있다나.

고작 네 시간 남짓을 잊었다 해서 일상에 지장이 생기는 불상사는 없었다. 서류를 검토하고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는 내내 티끌만 한 실수도 없었다는 점이 남자의 우세를 방증했다. 매일의 소임에 필요치 않은 감정을 절제하듯, 기억 또한 저버릴 수 있다. 무의식의 저변으로 끌어내려진 시간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었겠느냐는 최종 결론은, 그런 갑작스러운 망각조차도 자네의 명민한 중추 기관이 내린 일종의 선택일지 모른다던 신경외과의의 추신과도 일맥상통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미나미센주 인근에서 한 40대 남성이 방화를 시도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관들과 수 시간 대치한 끝에…….

가로등의 불빛과 더불어 고급 택지들의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에 밀려들 즈음, 라디오에서는 지역별 강력 사건의 보도가 한창이었다. 저 또한 머잖아 경찰청에서 지정한 사건 번호를 달고 사무국에 들어와 하고많은 배당 사건 중 하나로 분류될 터. 발 딛고 선 혼탁한 현실을 향해 통렬한 눈초리를 띤 남자가 핸들을 천천히 좌로 꺾었다.

 

9.

 

‘검찰청의 24절기란 스무 개의 중대 사건과 네 개의 미제로 구성된다.’ 사법의 최전선에 속한 이들이라면 백이면 백 불후의 금언이라 회자하는 이 문장은 본디 아마자키 요시나가 전 검사국장이 남긴 은퇴사의 첫머리였다. 서심제도를 안착시킨 검찰청의 총수가 지난 이십여 년을 돌아보며 남긴 소회가 참문(讖文)의 위상을 얻게 된 데는 이른바 사법의 징크스라는 요소가 작용했는데, 각 부서의 장들이 매해의 정례회에서 ‘아마자키의 24절기를 발본할 것’을 독려할라치면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튀어나와 검경의 골머리를 썩이는 식이었다. 4/4분기의 특별 치안 강화 정책으로 사회 질서가 안정되는가 싶던 헤이세이 28년조차 희대의 두 사건으로 말엽이 얼룩지게 되면서 아마자키 징크스는 검찰청 내에서 여전히 건재할 수 있었다.

도내 호수공원의 부지에서 원인 모를 악취가 난다는 민원을 접수한 관리원이 보트 대여소 안에 든 변사체를 발견한 것은 12월 27일 오전의 일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두 변사자의 신원을 ‘나마쿠라 유키오’와 ‘신원 불상의 남성(50대 추정)’으로 각각 특정했다. 관할 서로부터 송부된 변사보고서의 검토를 마치고 보강수사를 단행한 검찰은 문제의 신원불상자가 하이네 코타로라는 이름의 남성이며, 앞서 신원이 특정된 나마쿠라를 살해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과거 어느 재판에서 자신의 변호를 맡았던 이를 결딴낸 하이네는 모질게도 자신의 목숨조차 손으로 끊어냈다 한다. 사건 현장의 벽면에 ‘부당 판결’이라는 네 글자를 저 나마쿠라의 피로 남긴 채. 정보산업체 코나컬처 산하의 황색언론이 쏘아 올린 호외는 연말 특수를 누리기 아깝지 않을 만큼 흥미롭고 수상쩍은 뒷소문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 하이네의 동기와 사인에 관한 이야기가 분분한 사이, 검찰 내부에서는 대외비를 유출해 조직의 신뢰를 떨어뜨린 원흉을 색출하는 작업이 있었다.

사망 추정일로부터 닷새가 지난 12월 29일, 연내 생산된 문서를 완결 처리할 수 있도록 하라는 재촉에 쫓기듯 효탄 호수 살인사건의 수사가 최종 마무리되었다. ‘피의자 사망에 따른 수사 종결’이라는 결론이 기재된 보고서는 결재권자의 승인을 거쳐 불기소 처분 기록에 포함되었다. 보존 기한이 도과한 사건 기록물들을 떨어낸 사무국 보존계에서는 수레째 실려 온 당해의 마지막 생산 문서들을 인수한 뒤 겨우 몇 시간 전에 자리가 난 문서고의 선반을 채웠다.

 

10.

 

정초를 맞아 인사를 올리러 간 사저(師邸)에는 처음 보는 박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줏빛의 몸통부와 다르게 색색이 다채로운 날개깃을 지닌 그것을 가리켜 스승은 코뉴어 앵무새라 소개했다. 저 몸집 작은 것을 깃털 한 점 상하지 않게 온존하려면 상당한 품이 들었겠다는 제자의 감상에 그만한 수고가 아깝지 않았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순다섯의 춘추에도 정정한 미소를 띤 카르마 검사의 맞은편에서 남자는 송죽매가 그려진 잔을 받쳐 올렸다.

입직을 앞두고 주도(酒道)를 배웠던 이래 오래간만인 두 사제 간의 대작이었다. 묵은해의 사기를 내쫓고 복록을 기원하자는 그 취지처럼 잡스러운 데 없이 깨끗한 것이 과연 오토소(お屠蘇)라, 귀한 약재들만 모아 우렸다는 약주를 들이켤수록 목 안쪽과 뱃속이 홧홧해졌다. 두 번째로 올려잡은 사카즈키에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술을 따른 스승은 전주에 있었던 승소를 치하하는 관용까지 보였다. 한 해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합당한 결과였다는 상찬에 감읍하듯 젊은 제자의 눈높이가 낮아졌다.

효탄 호수 살인사건 못지않게 파급력이 컸던 보육아 학대치사 사건의 증거물이 검찰청 내부에서 사라졌던 일은 관계자 모두가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다. 압제 번호까지 따놓은 물증을 허투루 취급한 것은 사무국 말단직의 오롯한 실책이었으나, 기소 결정의 적법성 자체가 흔들릴 위기 앞에서는 주임 검사의 결단이 막중했다. 승진심사의 마지막 연한을 앞두고 서슬이 퍼렇던 부장검사를 혼자 힘으로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염치 불고하고 독대를 청한 제자에게 스승은 망실된 증거품과 꼭 닮아 있는 물건 하나를 건네 왔다.

압수 목록에 있던 증거품이 분실되었다가 돌아오는 일은 어디에나 알음알음 존재했다.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여죄까지 적시해 줄 그 무기에 압수물 태그를 단 손은 새로이 출력한 증거신청서를 횡으로 펼쳤다. ‘행정 착오 보완에 따른 목록 재송부’를 문서의 비고란에 기재했던 칠 일 전 이래, 미츠루기 검사는 자타가 인정하는 카르마의 인간으로서 훌륭히 그 두각을 나타냈다. 개정 후 십여 분 만에 검사석을 향해 욕설을 퍼부은 피고인이 형량을 두둑하게 늘려 받은 사실은 그해의 종무식 내내 미담처럼 거론되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격언이 무색하게도 달게 남던 약주의 뒷맛이 제법 정신을 몽롱케 했다. 주취자의 전형 같은 모양새로 운전대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사저의 충직한 발렛이 대리기사의 역을 수행했다. 자가용의 키를 내미는 사용인의 손에 차비와 더불어 적당한 사례를 쥐인 남자는 코트의 안주머니를 뒤지다 말고 인상을 찡그렸다. 어느 날 이래로 제 소유처럼 남은 캔버스 스크래퍼가 기어이 피 맛을 보았음을, 손바닥을 뜨뜻미지근하게 적시는 통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한 손에는 피 묻은 손수건을, 다른 손에는 현관 열쇠를 든 채 들어선 실내는 불 한 점 없이 적막했다. 넉넉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규모이면서도 함께 깃들일 존재라고는 온통 사물뿐인 집안이 곧 그의 회귀점이었다. 열흘 전 받아 놓고도 뜯을 생각 한번 않은 대형 소포 하나를 제하면 용도와 생김새가 빤한 기물들을 남자는 무덤 속 부장품 바라보듯 했다. 그러고 나니 기이하게도 유쾌한 기분이 들어, 내내 외면하고 있던 소포의 실체를 들여다볼 의욕이 생겼다.

북이탈리아주의 국제 우편 소인이 박힌 방수포장지에는 테이핑 처리가 여러 겹으로 되어 있었다. 일일이 그 끝을 더듬어 뜯기엔 무리가 따르는 컨디션이었으므로 남자는 아까 전 손을 베인 날붙이를 찾아 쥐었다. 산짐승의 급소를 찾아 가르듯 포장의 이음매를 도려, 매끈매끈한 촉감의 방수지와 바로 아래의 백로지를 떨쳐낸 내용물은 차갑도록 반듯한 사각이었다. 묵직한 프레임을 콘솔 테이블 위에 괸 남자는 간접등의 불을 올리고서 소리 없이 신음했다.

어두운 바탕 속 남자의 흉상은 더없이 익숙한 삼색의 조합이었다. 전구색 불빛 아래에서 바라보는 피부색은 희게 질린 양 창백했고, 머리카락과 눈은 본연의 색조보다 한층 짙었다. 톤 다운된 재킷의 붉은빛이 여태 곤하였던 정신을 흔들어 낼 즈음, 프레임의 한쪽 모서리에 끼인 종잇장이 남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시리도록 하얀 모조지에는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필체가 두 줄로 선명했다.

 

《Nemico contro l'oscurità》

―2016. 12.

 

손에서 놓친 캔버스 스크래퍼가 딸그랑거리며 대리석 바닥을 구르다 멎었을 때, 핏물 진 손바닥 위로 남자의 얼굴이 내려앉았다.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