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씬] 집착 씨에게 집착을 03
탐정집착, 집착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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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아웅이
03 편 : 새싹
한참을 말없이 달려 도착한 사무소에는 탐정 보조가 먼저 도착해 서류를 정돈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나를 보자마자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다 뒤따라오는 그를 보곤 곧바로 입을 합 다물었다. 당혹스런 눈동자가 주위를 돌다 나를 따라오면 그저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에 앉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약간 책망하는 표정을 지은 보조가 살갑게 그에게 인사를 먼저 건네면 텅 빈 눈동자로 목례로 대답하곤 곧바로 소파에 앉아 작은 털실 뭉치와 미완성인 목도리를 연이어 만들어갔다.
“탐정님, 왜 저 분을 데리고 오신 거예요?”
“어제 미열이 있어서 그냥 우리 집에서 재웠어. 그 뒤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아하….”
“그냥 내버려 두면 돼.”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손은 여전히 어떤 이를 위한 목도리를 엮어 가면서도 나를 바라볼 때만 생기 도는 눈동자가 나지막이 물어왔다. 평온한 목소리는 속삭이는 나와 보조의 대화 가운데 들어와 흐름을 끊어놓았고 나는 근처에 있던 서류 뭉치를 보조에게 안겨주며 건네주라고 고갯짓을 했다. 손을 달달 떨면서 그의 앞에 서류를 전달한 보조는 곧바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자신에게 할당된 일을 하며 나를 흘겨보았다.
“왼쪽 위에 보면 알파벳이 적혀 있을 거예요. 순서대로 정리해주시면 돼요. 안 적혀 있거나 이해가 안 되면 보조한테 물어보세요.”
“알겠어요.”
‘저는 왜요?’라는 얼굴로 보조가 나를 째려보았지만 상하가 확실한 관계였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 깨갱거리며 꼬리를 내렸다. 그 목도리가 보기 싫어 내가 하면 되는 일들을 굳이 그에게 부탁했는데 꺼리는 기색 없이 서류를 받아든 그는 자신의 옆으로 목도리와 털실을 나란히 두고 서류를 손에 쥐었다. 그가 작업을 시작하자 사무소는 적막이 맴돌았다. 그저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와 펜을 끄적거리는 소리. 백색소음과도 같은 음악이 이 공간을 채웠고 나는 그가 목도리를 손에서 놓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편안함에 그가 일을 다 할 것 같으면 새로운 일을, 조금 머뭇거리는 일이 있으면 그에게로 다가가 조언 해주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뒤에 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저 커피를 다시 내리기 위해 왔다갔다 움직일 뿐이었지만 눈에 들어온 새삼스럽게 좁은 어깨와 마른 몸매가 조금 굽은 채 일에 열중인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 드러난 어깨의 살결이 부드럽고 말랑해 보여 욕망이 일었지만, 시간을 알려주듯 화창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초봄바람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저런 작은 체구로 그렇게 스토커 짓을 하며 사람을 해치고 다니니, 아마 그를 모르는 이였다면 헛소문이라며 혀를 내두를 것이었다.
“아직 모르는 건 없는데요.”
“네?”
“탐정님이 지긋하게 보고 계셔서. 서류가 아니라면 절 보고 계신 거예요?”
“자의식 과잉입니다. 그저, 의외로 일처리가 빨라 놀라워서 보고 있었습니다.”
“아쉽네요. 절 보고 있었으면 했는데.”
고개를 저으며 사무소 구석에 있는 커피 머신으로 피신했다. 잔을 두고 버튼을 누르니 투명한 온수가 점차 탁하게 물들어 향긋한 커피가 되어갔다. 나의 내면처럼 욕망으로 물들어가는 자신이 적응이 되지 않아 그저 머리가 아파왔는데 정작 나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편안한 미소로 어쩐 일인지 그에게로 다가간 탐정 보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라면 무관심과 침묵으로 대답하고 있을 이가 보조와 말을 섞고 있다는 것이 몹시도 불쾌해 두 눈 시뻘겋게 뜬 채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방 부주의로 손등으로 친 머그잔이 파열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그 소리에 탐정 보조가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고개를 돌리며 무감정한 그 표정으로 응시하더니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자 마치 승리한 사람은 저 자신이라는 듯이 입매를 올려 슬쩍 미소 지었다.
“탐정님, 괜찮으세요?”
“아…, 응, 손이 미끄러졌네.”
“얼른 찬물로 손 씻으세요. 치우는 건 제가 할게요.”
“아니야. 내가 치울게. 보조는 비품 필요한 것 좀 사올 수 있을까?”
“네? 지, 지금요…?”
바닥에 나동그라진 조각들을 손바닥 위로 조심스럽게 주워들며 보조에게 부탁했다. 뜬금없는 부탁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보조는 자신의 뒤로 다가오는 그를 보곤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물더니 끄덕이곤 제 외투와 지갑을 챙겨 조용히 사무소를 빠져나갔다. 하-. 부하의 앞에서 꼴사납게 이게 무슨 일이람. 그저 자조 섞인 한숨으로 지끈거리는 머리에 몇 초간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 손 안에 있던 조각을 근처에 있던 신문으로 한 번 싸고, 쓰레기통 옆에 던져두었다.
“탐정님답지 않게 많이 헤매시네요. 죽은 자의 길은 잘 찾아주시면서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길을 모르신다니.”
“알면 좀 단서라도 주시죠. 으레 사건들은 전부 단서나 흔적이라도 주는데 당신은… 그저 입 다물고 있지 않습니까.”
후훗, 조용히 속삭이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큰둥한 표정과 그것과는 다르게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매가 확실하게 그가 엮은 거미줄에 내가 걸린 것을 확인해 주었다. 새하얀 원피스가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찰랑이며 공중에서 요동쳤고, 그것을 보고 있자 내 속 또한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로 다가와 어깨에 두 팔을 올려 끌어안은 그는 생소하게 생기가 있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어 있는 내 모습이 그의 큰 눈에 비춰져 반짝이는 것이 뻔히 보일 정도였다.
슬그머니 배를 붙이고 거리를 좁혀 오는 그의 달콤한 유혹에 주먹 쥔 손에 손톱이 파고들어 따가움이 느껴질 때까지 버티다 숨결이 뺨에 닿고, 그에 이어 목에 닿아 이성을 그대로 흔들어버렸다. 평소라도 충분히 그를 밀어 거리를 만들고도 남았을 것이었는데 오늘은 그러질 못했다. 정말로, 그를 거부한다면 그가 제 소중한 이에게 가버리고 나를 홀로 둘까 봐. 늘 일평생을 홀로 살아왔고 그래왔는데 갑자기 무서워지는 이유는, 이 소외감 때문일까.
“…절 밀어내지 않으시네요. 이상하게.”
“…….”
“아. 혹시 깨달으신 거예요? 탐정님이 제게 있어서 유일하지 않은 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뭘 깨달-.”
이번 승기는 그가 쥐고 있었다. 그의 말에 홀려 반박하고 질문하려던 찰나 입을 틀어막은 탓에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조금 냉랭한 입술이 닿았고, 그에 이어 서늘한 살덩이가 들어와 내 것을 붙잡고 이의 끝으로 깨물어 뒤로 뺄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해주는 것에 당황해 어깨를 붙잡았고, 원래라면 그대로 반대편으로 밀어야할 것이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체온은 미열이 남아있는지 뜨겁다 느껴졌지만 내 안으로 들어온 살덩이는 서늘하고 차가운 편에 속해 그 간극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를 뒤로 밀어 테이블에 기대게 만들더니 주름 하나 없는 셔츠를 구겨 제 손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뜨거운 손끝이 닿자 몸은 긴장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작게 바르작대며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흥미로움을 담은 탁한 눈동자가 드물게 휘며 나를 마주하자마자 내게서 몸을 떼어냈다.
“이걸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흐, 뭐, 뭘 말하는 거예요.”
“탐정님이 저를 사랑하게 되시는 순간이요.”
“이런 추한 감정이 사랑이라곤 할 수 없어요.”
“어째서요? 집착이든, 욕망이든, 탐정님이 저를 향해 가지는 감정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둘이 그렇게 정의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되는 거예요.”
고르지 못한 숨을 헐떡이며 점점 그를 닮아 가게 되는 내 정신에 고개를 저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인정하기 싫은 그 감정에서 발버둥을 치며 절망하며 한사코 인정하지 않았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주 집착 씨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그 어느 하나도 사람이 쉬이 가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통상적인 ‘사랑’이 빛이라면, 같은 단어로 부르는 ‘사랑’이라 일컫는 그의 감정은 그림자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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