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미도] 최면 합본

카멜리안 X 국장

*카멜리안의 심문 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스포 주의해 주시고, 심문을 보시지 않아도 이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본 글에 나오는 의학적 지식은 전부 근거가 없으며 단지 팬픽션으로써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벵엔즈 의과대학을 나온 캐릭터이기 때문에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상처 봉합술 등의 수업은 수료했음을 가정하고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w. 아웅이

“혼자 열심히 이별을 고해보세요. 일방적인 이별은 연인의 끝이 못 되니까요.”


탈주하여 기어코 복수를 실현시키려던 카멜리안을 다시 수감실에 넣었고, 뒷수습을 끝마쳤다. 저항은 일절 없었던 그는 순순히 체포되어 의문을 들게끔 했지만, 며칠이 지난 현재는 밀린 업무로 인해 그럴 생각조차 사치가 되도록 되어버렸다. 파도같이 마구잡이로 밀려오는 업무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허벅지에 난 총상이 아릿하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바쁜 앤과 아이언이 내 상처를 봤다가는 무서운 잔소리로 시간을 보낼 거 같아 국장실에 있던 구급상자로 처리를 하였는데 아무래도 더디게 낫는 듯 했다.

거동이 불편해져 이제는 나이팅게일의 눈에도 띈 모양인지 책임감이 강한 부관의 충고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지속적인 고통에 참다못해 결국 의무실로 향했다. 나와 비슷하게 바쁜 부관을 부르기엔 개인적인 문제라 미안해 벽에 손을 짚고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움직여 의무실로 향했다. 떨어진 체력으로 걷는 것은 크나큰 무리였고, 극심해진 고통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복도에 주저앉았다. 벽에 기대어 끙끙거리다가 가벼운 구두 소리가 들리다가 멈춰 서 내 관심을 끌었다.

“…하.”

“어머, 그 때의 상처가 덧 난 건가요. 아니면 치료 자체를 하지 않은 건가요.”

지금으로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유유히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와 주저앉은 내 앞에 서 눈높이를 맞춰 나를 보고 있었다. 연한 카라멜의 머리칼은 한쪽으로 넘겨져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연한 푸른색의 눈동자는 나를 비추고 있었다. 이미 파리해진 안색의 입술을 잘근 잘근 씹으며 벽에 손을 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저라면 그렇게 무리 하지 않겠어요. 무리하게 움직였다간 염증이 퍼져서 다리를 절단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의무실 가는 중이었어.”

“어라. 앤과 아이언은 오늘 파견 나가고 없어요. 결국 의무실로 가신다고 해도 제가 상처를 봐야할 텐데요?”

제발.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이 현실의 야속함에 혀를 내둘렀다. 점점 창백해지는 내 얼굴을 보더니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은은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니 어깨를 으쓱이곤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균형을 잡는 팔을 붙잡았다. 딱 봐도 아픈 이를 부축하는 꼴이어서, 수감자들이 지나갈까 거절할 변명을 토로하는 시간조차 만들지 못하고 아무런 말없이 그에게 기대어 의무실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훈련을 빼먹고 싶은 이들이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꾀병을 부리고 있었다. 아이언이 자리를 비운 탓에 틈을 노린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 예상이 되었다. 툴툴대며 의무실 담당들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에 반박하며 빼먹으려 노력하던 이들은 나를 발견하곤 하나둘씩 시선을 피하고, 하릴없이 전부 제 발로 의무실을 나갔다. 남은 이들은 정말 아픈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내 존재로 간단하게 추려진 환자들의 수에 마키아토나 아리엘들은 내게 인사를 하며 자신의 할 일을 마저 해치우기 시작했다.

“이럴 땐 국장님 같으시네요.”

“착한 애들뿐이니까.”

“흠. 그렇게 믿으신다면 그런 거겠죠. 국장님은 이쪽으로 앉으세요.”

안쪽에 위치한 침대 위로 나를 가볍게 올린 카멜리안은 침대 주변에 새하얀 커튼을 치고 옆쪽에 빠져 있던 의료 카트를 끌어왔다. 그리곤 한 손에는 작은 가위 하나를 쥐고 있었는데 바지를 찢을 것인지, 벗을 것인지 내게 선택을 하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분의 바지가 있었던가. 국장실의 개인 캐비닛 안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또다시 개인적인 사색에 빠지니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처가 난 쪽의 바지를 붙잡고 가위를 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절 앞에 두시고 자꾸만 사색에 빠지시면 곤란해요. 국장님?”

“이, 이번이 처음이잖아.”

“며칠 전 창고에서 한 번, 아까 복도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한 번.”

가위를 쥐고 있던 손의 검지가 쿡, 가볍게 내 뺨을 찔렀다. 의미를 모를 행동에 내 얼굴에 홧홧함이 돌았다. 두 눈을 껌벅이며 시선이 마주치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어깨를 으쓱이던 그는 가위를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다른 이들이라면 수치심 따위 참겠지만,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냥 바지를 찢으라는 내 대답에 그는 비음만 흘리더니 가위를 다시 원통형 통에 집어넣더니 정장 바지의 후크를 풀며 그대로 끌어내리려 했다.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일반인의 근력을 가진 나는 수감자에게 이기는 것이 불가능했고 작은 발버둥에 가소롭다는 듯 웃는 카멜리안의 미소를 마주한 채 그에게 들려 바지가 벗겨졌다. 그리곤 엉성하게 말아놓은 허벅지의 붕대를 보곤 마치 아이언이 나를 볼 때처럼 큰 한숨을 나에게 들리게끔 내쉬었다. 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랑곳 하지 않고 작은 핀으로 고정한 붕대를 풀었다. 붕대가 스칠 때마다 허벅지가 저릿하게 아파왔고, 피딱지와 지혈제로 덩어리진 것들이 붕대에 얽혀 떨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아이언이 돌아왔을 때 무슨 잔소리를 들을까 두려워졌다.

“총상에 지혈제라니요. 국장님, 의무실이 왜 있는 건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아. 음, 미안.”

“관통상이라 단순히 시술로는 안 돼요. 수술하셔야 해요.”

“단순히 집는 걸로는 안 될까?”

“…일단 부분마취로, 상처를 봉합할게요. 원래 이것도 수술실 들어가야 하는 건데 그냥 해드리는 거예요.”

“빚을 졌어.”

수술로 한다면, 장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갈 수도 있어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 그저 여기서 바늘로 몇 땀 집는 방법이었다. 길게 친 커튼 사이로 빠져나간 카멜리안은 바깥에서 재고 정리를 하던 마키아토와 짧은 대화를 나누더니 주사기 하나를 들고 와 제자리로 돌아왔다. 포장지를 까 툭하고 앰플을 용액을 주입하더니 공기를 빼내고는 상처 부위 주변에 주사를 놓았다. 조금 따끔거림에 움찔거리며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그걸 본 그는 작게 웃으며 곧 감각이 없어질 거라며 빈 주사기를 폐기함에 던져 넣었다. 점점 아무런 느낌이 없어진 한쪽 다리에 이상함을 느끼고 툭툭 건드렸다. 정말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낯설었다. 그 뒤로 일사천리였다. 라텍스 장갑을 낀 그가 바늘과 수술용 실을 가져와 상처를 허벅지 위아래로 봉합하기 시작했고, 대략 30분, 지루함과 피곤함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길 수 없어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푹 숙여진 목에 뻐근함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야 정상이었다. 여긴 어디지. 덜 풀린 정신과 나를 괴롭히는 만성피로가 몰려와 노곤하게 하품을 하게끔 만들었고, 졸린 탓에 가늘어진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있을 적, 곧장 내 옆에서 들리는 타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다급하게 움직였고, 그것은 이내 봉합되어 있던 허벅지 근육이 아우성을 치며 목을 잔뜩 긁는 비명을 내뱉게 했다.

“마취가 다 깼으니 그렇게 갑작스럽게 움직이시면 많이 아플 테니 살살 움직이는 게 좋아요.”

“내, 큼, 내가 얼마나 잤지?”

“보자. 대략 3시간이네요. 자리가 불편했을 텐데 잘 주무시는 걸 보면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자느라 가라앉은 목소리에 책을 읽는 카멜리안의 눈치를 한 번 보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회중시계의 뚜껑을 펼쳐 시계를 확인한 후 내게 말해주었다. 시간을 듣고 난 후 나는 국장실에 밀려있는 서류더미들을 생각하며 경악했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지만 그에게 막혀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움직이시는 건 금물이라고 말했어요? 못 들으신 건 아니겠죠?”

“업무가 밀려있어. 이 정도면 푹 쉬었어.”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까 국장님의 부관이 국장님을 찾아 왔었거든요. 푹 쉬라고 당부 하더군요?”

결국 나이팅게일의 귀에까지 소식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한숨을 푹 내쉬고, 카멜리안이 넘겨주는 내 정장 바지에 아직도 내가 하의를 입지 않았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그걸 본 그는 나긋하게 웃으며 환자의 벗은 몸에 흥분하는 의료종사자는 없다며 천천히 움직이라고는 했지만, 그건 그의 생각이었고 환자의 입장이었던 내 생각은 달랐다. 최대한 빨리 바지를 입으려고 했지만 아찔하게 만드는 고통에 입술을 꽉 깨물었고, 그걸 본 그는 내게서 바지를 앗아가 손수 하의를 입혀주는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고맙군. 빚졌어.”

“이걸로 빚은 2개인가요?”

“나도 단순한 월급쟁이야. 뭘 원하는 데.”

‘툭’

수감자인 그가 뭘 바랄까.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두렵기도 했다. 습관인지 안경다리를 매만지던 그는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회중시계를 쥔 손의 손가락으로 그것의 뚜껑을 가볍고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렸다. 처음에는 신경이 쓰이다가도 그저 습관이겠거니 넘겨짚고서 다시 이야기의 주제에 집중했다. 호기롭게 말하긴 했지만, 탈주 사건이 단지 며칠 전이었다. 확실히 말해 무얼 말하는 지 주의를 기울여야 피해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긴장하며 있으니 가볍게 내 이마를 두드린 카멜리안은 답지 않게 크게 웃으며 긴장을 풀라고 말을 내뱉었다.

“뭘 그리 긴장하고 계시는 거예요. 왜요? 제가 출소시켜 달라고 하면 국장님이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그건 안 돼.”

“후훗,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럼… 이렇게 하죠. 빚 2개를 동시에 갚을 수 있는 기회예요.”

“뭐지?”

“저와 교제해 주세요.”

‘툭’

교제? 그다운 우아한 단어 선택이었지만, 요컨대 자신과 연인 관계가 되어달라는 말이었다. 아이러니한 말이 던져져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굳어있으니 그저 두 눈만을 껌벅이던 그는 재촉하지도 않고, 그저 미소와 함께 내 대답을 기다렸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패닉이 온 나는 그 찰나 동안 상처의 고통을 잊었다. 허벅지의 상처보다 그의 말이 더 큰 충격으로 와서 그런지 줏대를 알 수 없는 이 선택지들이 너무 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교제 관계를 원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국장님이 저를 다른 수감자들보다 조금, 아주 조금 먼저 생각해 주면 되는 관계가 되고 싶어요. 어때요? 저와 교제해주는 동안은 제 주체적인 사건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게요.”

아주 매혹적인 말이었다. 최면을 능력으로 다루던 카멜리안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매혹해 자신의 장기 말로 만드는 재주가 있어 골치가 아팠다. 심지어 며칠 전만 해도 심문을 하던 나 역시 그에게 당해 일을 크게 만들어두었으니 보증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제안을 간단히 수락하기엔 많은 벽들이 있었고, 그것을 이겨내기엔 난 한 없이 작은 존재였다.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투툭’

“정말요? 모든 일정이 끝난 뒤 제 수감실로 와 5분만이라도 대화하는 걸로 만족할 텐데?”

“수감자와 부적절한 관계가 될 수는 없어.”

“흐음. 그럼 뭐. 또 기대해주세요. 무슨 일을 벌일지?”

“그건 참아줬으면 하는데.”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그럴게요.”

나 같은 것이 뭐가 좋아서 저렇게 고집을 부릴까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늘 웃는 얼굴인 그는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로 다가와 침대 시트를 그러쥐고 있는 내 손을 잡고서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나보다 반 마디 정도가 긴 손가락이 마치 쉽게 바스러지는 낙엽을 잡는 것처럼 살포시 손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깊숙이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짧게 닿는 부드러운 촉감에 기겁하며 손을 떼려하자마자 닿는 촉촉하고 말캉한 느낌의 것이 닿았다. 어린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핥듯 일부러 내 눈을 응시하여 나에게 과시를 하며 장난친 그는 손을 떼고 나서도 혀를 내밀어 유린하듯이 놀려댔다.

“뭐, 뭐하는 거야.”

“손바닥에 국장님 피가 묻어있었거든요. 그저 티슈에 닦기 아쉽잖아요?”

“티슈에 닦게 해줘.”

“그래서 대답은? 국장님께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요? 최소한의 관심으로 추후의 일을 막을 수 있는데 왜 힘든 길로 가는지 저는 이해가 안 되네요.”

‘툭’

거슬리게 자꾸 들리는 가볍지만 둔탁한 소리. 귀를 간지럽혀 그에게 그만 하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였지만, 착각인지 그의 회중시계는 앞주머니에 고이 넣어져 있었다.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지 한 쪽 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아리송하던 찰나 대답을 재촉하는 손길에 결국은 승낙하고 말았다. 자신도 그렇게 큰 관심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라 여기며 믿지 못하는 눈빛으로 방긋 싱그럽게 웃는 그를 바라보았다.

“거슬리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내 뺨에 그 립스틱으로 자국을 내고 만족감을 내비치며 나를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주었다. 뺨을 문질러 닦아내려고 하니 ‘오늘부터 연인 관계인데 너무 섭섭하게 구시네요.’라는 말을 들어 어찌 할 바를 모르다 그냥 내버려두었다. 축 늘어진 인형처럼 저에게 기댄 나를 보던 카멜리안은 의미 모를 기쁨을 표정으로 내비치다가 다시금 알 수 없는 퍼즐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커튼을 치고 밖으로 나오니 파견에서 돌아온 건지 앤이 붕대를 들고서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상대 역시 나를 발견하고, 입 한 가운데에 검지를 치켜세우고는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했다. 아무래도 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아이언도 여기 있다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에게 들켰다가는 큰 일로 번질 것 같아 카멜리안의 팔을 붙잡고 되도 안 되는 발버둥으로 의무실에서 나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국장.”

아주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섬뜩하게 등골이 때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상처가 벌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그저 이 곳에서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랬다간 훗날 더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해 요지부동으로 가만히 있기를 선택했다. 아이언이 인상을 아주 많이 잔뜩 찡그린 채 피가 약간 묻어 있는 기계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로 다가와 목발 하나를 내밀었다.

“그 사이비가 의무실에 얼굴을 안 비치게 해. 국장.”

“그, 그럴 권한이 내게 없….”

“국장님이 다치지만 않으시면 여기에 올 일 없어요. 아이언.”

“허. 마음대로 해. 국장은 그렇게 티를 내고 싶었나. 나가기 전 얼굴은 확인하고 나가.”

뺨에 난 립스틱 자국, 나도 아는데. 닦고는 싶지만 워낙에 무서운 사람이 자꾸만 눈치를 줘서 그렇게 못한다는 걸 아이언은 알까. 슬며시 내 옆에 서 아이언과 눈치 싸움을 하고 있는 카멜리안를 보며 뺨을 셔츠의 소매로 닦았고, 앤의 곤란한 얼굴과 환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 어쩔 수 없이 아이언이 준 목발을 짚고서, 카멜리안의 외투를 살짝 잡아당겨 조용히 속삭였다.

“나가자.”

“알겠어요. 그럼 다음번에 봬요. 아이언. 앤.”

“다시는 그 낯짝 안 보기를 빈다.”

“조심히 가세요. 아이언도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하지 말고요.”

앤에게 혼나는 아이언의 투덜거림은 우리가 나가는 와중에도 아주 잘 들렸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의무실에서 드디어 벗어난 나는 알코올 냄새가 사라진 공기를 맡으며 숨을 내쉬었다. 목발은 처음이라 어색함이 좀 있었지만, 나름 지지할 곳이 생겨 허벅지에 들어가는 무게가 줄어 고통이 덜한 것은 참 좋았다. 목발에 차차 익숙해지려 하던 찰나에 내게 내밀어진 카멜리안의 팔에 휘둥그레 눈을 뜨고 내게로 내밀어진 팔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목발도 좋지만, 저에게도 의지해 주세요.”

“아. 알겠어. 그래도 목발이 있으니까 좀 낫네.”

“당신도 참 연애 못 할 스타일이시네요.”

“응? 그래?”

그의 팔에 내 팔을 휘감고, 한 걸음 힘겹게 내딛었다. 나를 놀리곤 작게 미소를 띤 그 얼굴은 답지 않게 순진한 표정이어서, 안경 너머의 처진 눈매에 시선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 흘긋 눈동자만을 굴려 나와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호선을 그리며 미소로 응답을 해주었고, 나는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돌리곤 국장실로 가는 걸음에 집중했다. 다행히 내가 저를 보고 있는 것에 대한 물음은 오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조용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이 불편하지는 않았고, 되레 편안함을 주었던 것 같았다.

한참의 시간이 걸려 국장실에 도착한 나는 의자에 앉기까지 카멜리안의 도움을 받았고, 목적지에 간신히 도착한 나는 진땀으로 셔츠가 반쯤 젖어있었다. 무거운 숨을 내쉬자 카멜리안은 외투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새하얀 약 2개 든 봉투를 내게 건넸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놔둔 약은 진통제로, 오늘내일 상태를 보고서 약을 복용하라는 충고를 주고서 그는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국장실을 나갔다. 희미하게 나는 립스틱의 향에 익숙하게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내곤 그가 준 의심쩍은 약 봉투는 서랍 안으로 곧장 직행했다.

“갑작스럽게 무슨 바람이 든 걸까.”

요주의 인물이기 때문에 충분한 경계심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저 최면이 아닌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나와의 교제 관계 역시 그 중 하나로 생각이 되고, 그저 나는 아까 전처럼 순수하게 미소를 짓던 카멜리안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아 그가 계속해서 그런 얼굴로 사람을 마주하면 좋을 것 같다는 작은 희망을 가슴에 품었다. 작게 미소를 짓고, 누군가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집요한 고통에 잠시 몸부림을 치고서, 산더미 같이 쌓여가는 서류 더미를 느리게나마 조금씩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똑같은 자세로 보낸 걸까. 굳어버린 근육은 움직일 때마다 아우성을 쳐댔다. 중력에 의해 꿰맨 상처가 눌러져 진물과 함께 피가 약간 새어나온 듯 했다. 짧은 탄식과 함께 붕대를 갈기 위해 구급상자와 함께 개인 샤워실로 들어가 걸터앉을 곳을 찾고 있던 찰나였다. 똑똑, 정갈하게 2번만 두드려지는 노크 소리에 나이팅게일인가 싶어 다리를 절며 샤워실의 바깥으로 몸을 반만 내미니 쟁반에 찻잔과 찻주전자를 들고 온 카멜리안과 마주쳤다.

“카멜리안?”

“차라도 드릴까 해서 왔는데 붕대 바꾸시려고요?”

“응. 진물이 나온 거 같아서.”

“붕대 이리 주세요. 온 김에 제가 해드릴게요.”

어떻게 안 걸까. 그저 구급상자를 든 상태로 서성이고 있으니 쟁반을 책상 위로 두고서 내게로 온 그는 자연스럽게 내 팔을 붙잡고, 의자에 다시금 앉게 만들었다. 손에 잡히는 건 잡아 체중을 지탱하고, 가까스로 의자에 앉은 나는 바지의 버클을 풀기 위해 바지를 붙잡은 두 손을 막아 세웠다. 물론 내가 환자인 것은 맞지만 자꾸만 벗기려는 행세가 나에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수치심을 주는 것을 즐기는 듯 했다.

“…내가 할게.”

“어머. 편한 대로 하세요. 저는 당신을 벗기는 쪽도 괜찮아요.”

“의사와 환자잖아?”

“거기에 연인 관계를 추가해 주시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요.”

높은 콧대여도 아래를 보면 안경이 흘러내리는 건가. 익숙하게 흘러내린 안경을 차갑게 다시 올린 그는 샛노랗게 물든 붕대를 보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무표정으로 돌아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손을 움직였다. 바늘로 꿰맨 상처가 눈에 들어오고 새로운 붕대로 가는 동안 역시나 나와 그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저, 상처가 덧나 살짝 문드러진 탓에 붕대가 누르는 압력에 신음만 조용히 흘릴 뿐이었다. 살갗에 닿을 때는 그렇게나 아프더니 덧대졌다고 고통이 덜한 게 조금 민망함이 들었다. 엄살이 심한 사람을 볼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일부러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려 책꽂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붕대를 감은 상처 위에 검지를 놓고 꾹 누르는, 정도가 심한 장난에 화들짝 놀라 곧바로 카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선을 피하시면 어떡해요. 슬프게.”

“카멜리안. 새로운 취미를 찾는 건 괜찮지만, 왜 상대가 나인지 물어도 될까?”

“말했잖아요. 나와 당신은 동류라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당신뿐인데 그럼 뭘 골라야 하는 거죠? 최선책을 두고 차선책을 선택하는 바보 같은 이가 당신이었나요?”

“나는 연애에 미숙한 걸 알잖아. 수감자들 중에서도 좀 더 연애에 적극적… 아!”

내가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상처를 보기 위해 내 다리 사이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우악스럽게 상처가 새겨진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올리고 그대로 붕대 위에 한 번, 맨살에 한 번 입술 도장을 찍었다. 생소한 그 느낌에 나는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고, 내 반응을 본 그는 희극을 본 어린 아이 마냥 내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키득거렸다. 그의 머리칼이 다리를 포박하듯 그 위로 흘러내리고, 흥미로 물들은 두 눈은 반짝거리며 오롯이 나만을 담고 있었다.

“아…, 이거 예상외인데. 이걸 어쩌지.”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교제 관계를 철회하는 게.”

‘툭’

“아니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이 무척이나 흥미로워서 나온 반응이에요.”

“나를 놀리는 건 아니지?”

자포자기의 표정으로 그에게 말하니 그는 떠나가지 않는 미소로 부정했다. 장난이라고 말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진심이라고, 진심이라고 했으니 믿겠지만, 능구렁이 같은 미소로 대하니 도대체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엉망이 된 붕대를 대충 돌돌 감아 책상 위에 올리더니 바지를 손수 입혀주려는 배려에 그만 얼굴을 손에 파묻고 말았다. 제발.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 아무런 미동 없이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어도, 수감자였던 그는 손쉽게 나를 들고서 하의를 입혔다. 하….

“노동의 대가를 주셔야죠. 당신?”

“대가?”

“여기요.”

자신의 뺨을 검지로 가볍게 두 번 정도 두드리던 그는 딱 입을 맞추기 편하게 눈높이를 맞춰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뭘 원하는 건지 몰라 아리송하게 있다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그가 나에게 했던 행동이 떠올라 입을 크게 벌렸다. 책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고서, 흐뭇하게 미소만 짓고 뺨을 내밀고 있는 그를 계속해서 바라보다가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빚을 기억하라며 다시금 자기 뺨을 두드렸다.

‘툭’

하는 수 없이 나는 굽은 허리를 피고, 고개를 뻗어 그의 뺨에 닿을 둥 말 둥한 거리로 입술을 맞췄다. 그것으로도 만족했는지 나를 훑던 시선이 이내 곱게 접어졌다. 내 입술이 닿은 뺨을 계속해서 손등으로 쓸다가 찻잔에 자신이 가져온 차를 담아 건넸다. 붉은 빛이 도는 것이 홍차인가 싶었지만 과일 향이 진하게 나는 것이 내 호기심을 건드렸다. 자신의 몫을 따르고 느긋하게 먼저 입을 대는 것을 보아 독은 없는 것 같아 두 손으로 잔을 들고서 한 모금 마셨다. 사과향이 입 안을 맴도는 게 입맛에 맞아 두 모금 더 마셨더니 기쁘게 바라보는 시선이 민망해 그만 잔을 내려놓았다.

“입맛에 안 맞으신가요?”

알면서 떠보는 것이었다. 얄밉게 짓는 미소가 밉지만은 않았으니 참으로 이상했다.

“천천히 마시려고.”

일부러 다른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천천히 차를 마시며 나는 그가 일방적으로 묻는 질문에 답을 말하며 시간을 보냈다. 차를 마시며 조금씩 서류를 해치우고, 허벅지의 고통이 얌전해져서 그 동안 간신히 다 해치울 수 있었다. 적응이 되어 잔을 들기 위해 손을 익숙하게 뻗었고, 동 떨어지는 차에 그저 먹는 시늉만 내는 꼴이 되었다.

“입맛에는 맞았나 보네요. 떨어졌는데도 자꾸만 마시려고 하시는 걸 보니.”

“맛은 있었어. 무슨 차야?”

“그걸 알려줄 수는 없죠. 알려드리면 잎을 구해 직접 차를 우리실 거잖아요?”

눈치 하나는 빠른 사람이란 걸 내가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낮게 웃던 그는 내 잔과 자신의 잔을 쟁반 위에 다시 올려 나갈 채비를 하였다. 가는 건가 싶어 주변을 정리하던 그의 등 뒤에서 앞을 보려 기웃거렸고, 정리하던 그는 ‘아’라며 짧게 탄식하더니 그대로 돌아서서는 내 턱을 자신의 손에 그러쥐었다. 부드럽게 쥔 손이 고개를 올리게끔 하고, 또 뺨에 입맞춤을 하는 건지 파악하려는 찰나 뺨에 닿았던 부드러운 것이 이번에는 같은 입술 위에서 느껴졌다. 그의 안경이 살짝 올라가 있고, 두 눈이 마주치는 거리가 비교적 매우 짧았다.

당황해 벌려진 입술 틈으로는 타인의 혀가 재빠르게 들어왔고, 내 목을 조르듯이 감싼 카멜리안은 자신의 체중을 내게로 밀며 내 두 다리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집어넣어 그를 밀어내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방금 마신 홍차의 향긋함과 맛이 엉킨 두 혀 사이로 넘어왔다. 누군가의 것일지 모를 타액을 삼키고, 목을 감싼 타인의 손이 점점 내려가 셔츠 깃의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거친 숨을 내쉬며 간신히 몸을 떨어뜨린 나는 힘이 빠져 자신의 쪽으로 당기는 손길에 의해 카멜리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었다.

“이래서 낙인을 찍나보네요. 그 누구도 탐내지 못하게.”

“갑, 갑자기 뭐야.”

“마음이 바뀌었어요. 사실 당신의 관심 따위 상관없었는데, 탐이 나기 시작했으니 책임져 주세요.”

“너무, 너무 억지 아니야?”

“그런 경향이 있지만, 뭐 어쩌겠어요. 당신이 긍정했잖아요? 저와의 교제에 대해서?”

‘툭’

“…그랬었지.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건 알지만. 방금은 너무 갑작스러웠어.”

“저도 그랬어요. 왜 그럴까. 의문이 드네요.”

본인 스스로가 한 짓인데 모른다니. 번들거리는 입술이 또다시 가볍게 맞닿았다. 그런 행위의 끝에는 그 스스로가 자조처럼 속삭이는 습관이 될 것 같다는 말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머리로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행위가 내게 주는 쾌락과 만족감에 차마 그러한 행동을 제제해야 할 터인 나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는 나를 잘 알고 있는 카멜리안은 두 뺨을 붙잡고 이마에 가벼운 키스로 끝맺음을 맺었고, 내가 뭐라고 잔소리를 내뱉기 전에 작별을 고하고, 들고 온 쟁반을 든 채 도망치듯이 나가버렸다.



그 뒤로부터 날마다 찾아온 그에게 적응이 되어 익숙해져가는 나를 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방문과 함께 헤어질 때마다 뺨에 가벼운 입맞춤, 그리고 이어지는 깊은 숨을 삼키는 키스 한 번. 초조해질 때마다 입술을 깨무는 버릇처럼 습관이 되어 헤어질 때 즈음, 내가 먼저 그의 품에 안겨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둥 어리광을 부릴 때도 있었고, 내 업무의 도중 카멜리안이 자리를 뜨게 되면 꼭 나를 불러 눈을 맞추기 보단 내 허리를 붙잡은 손을 굴려 살살 쓰다듬는 신호로 서로의 의사를 전달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그를 거절 할 때마다 들려오던 가볍고도 둔탁한 소리가 두 음절에 끊어져 들렸고, 자꾸만 신경을 그쪽으로 몰리게끔 만들었다. 그렇다가도 편안하게 늘어진 표정을 아무래도 좋아지고, 편안하게 숨을 쉬게끔 만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늘어져버린다. 어떻게 된 걸까. 이해가 되지는 않아도, 그저 하염없이 넘기게끔 되어버렸다.

그런 이질감에 휩싸여 국장실에 앉아 턱을 괸 채 카멜리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각 잡힌 노크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곧 내 부관인 나이팅게일임을 뜻했다. 오늘의 업무는 이미 전달을 받아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런 일이 생긴 걸까. 들어오라는 말이 들리고, 조금 불편해 보이는 기색의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품 안에 서류가 없는 것을 보아 급한 일은 아니었고, 도대체 영문을 모를 방문에 나는 미소를 생긋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야. 나이팅게일.”

“…참으로 곤란하게 되었습니다만, 일단 저는 국장님의 사적인 일에 간섭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 상대가 현재 상부에서 주의 깊게 보고 있는 수감자의 경우라 제재가 들어왔습니다. 국장님의 상태를 확인, 최면이 걸린 것이 아닌지 제 소관으로 판단하여 보고를 올리라는 명이 올라왔습니다. 거기에는 FAC 제9대대 랭글리 장관께서 주도적으로 확인 할 것이라는 말씀까지 덧붙였습니다.”

“…하긴, 그렇게 보이겠어. 국장과 수감자의 입장이니까.”

“예. 저는 국장님의 결정과 판단을 믿으며, 답을 찾으실 거라 믿습니다. 혹시 몸에 이상한 증상은 없으십니까? 환각, 환청 등 무엇이든 좋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괜스레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이상한 증상, 되도 안 되는 기이한 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는 것. 그것이 희한하게도 카멜리안에게 순종할 때에는 한 번, 거부할 때는 두 음절로 연이어 들린다는 것. 명백하게 최면에 걸렸다는 증거가 아닌가. 푹 한숨을 내쉬며 굳은 눈빛의 나이팅게일을 바라보았다.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벌인 일이었고, 책임을 쳐야했다. 또다시 카멜리안이 어딘가로 도주하여 피해를 내게 된다면 그는 하릴없이 FAC로 이송이 되어야만 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르게 수감자에 대한 시선이 가혹했고, 그것은 혹독한 처벌로 이어진다. 나는 그것을 막고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티가 나지 않게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이가 살을 파고드는 고통과 생각의 복잡함이 나를 자꾸만 괴롭혔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했고, 무엇을 포기해야만 했는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이미 나 덫에 걸린 사슴마냥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보고는, 나이팅게일이 알아서 적어줘. 부관에게 거짓으로 보고를 올리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잖아.”

“하지만….”

“상황은 파악했어. 소꿉장난이었지. 내가 알아서 잘 결말지을게. 그러니까 부탁해?”

사실은 이별 따위 아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억을 잃기 전이라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그가 첫사랑과도 마찬가지였고 그가 나에게 지어주는 편안한 미소를 볼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크게 맥동하며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만족감을 느끼는 나였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 좀 더 미소를 짓게 하고, 그가 과거의 복수를 미약하게나마 기억하지 않게끔 만들려고 했는데. 그렇게 만들기에는 나에게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았다.

나이팅게일을 내보낸 뒤 머리를 싸매고 그대로 책상 위에 쓰러졌다. 뭉개지는 서류 종이와 펜에서 샌 잉크가 내 손을 더럽혔지만, 개의치 않고 그저 멍하니 얼룩진 손만 바라보다가 째깍거리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7시, 직원들이 업무를 끝내고 퇴근하는 시간을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가볍게 책상을 손가락 하나로 두들기다가, 끝끝내 내뱉지 않으리라 믿었던 말을 하러 카멜리안의 수감실로 향했다.

이 얇은 철문 하나가 뭐가 이리도 어려운지. 국장이었던 나는 문을 열고 언제든지 들어갈 권한과 열쇠가 있었지만, 그것을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손을 뻗어 두드리기 일보 직전에서 그만 두기를 벌써 열 번째였다. 골머리가 아파와 그저 말 대신 한숨만 나왔고, 두통은 점점 거세졌다. 오늘, 오늘은 그만두자.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걸 다 처리한 다음 다시 오는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발을 돌리는 순간 듣기 힘든 철끼리 마찰되는 소리와 함께 나긋한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오늘은 애타게 만드는 날인가요?”

“아. 그건, 아닌데.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네요. 들어오세요. 마음에 드셔 하시던 차를 준비 할게요.”

하필, 귀는 밝아서. 영 마땅치 않는 얼굴로 주위를 바라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수감실과 마찬가지로 단조로운 구조의 방이었지만, 그만의 특색이 보였다. 책꽂이에 있는 수많은 심리학과 정신학에 대한 책들, 조금 낡은 철제 책상 위에 있는 회중시계와 안경을 보관하는 작은 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금 쌓인 진단서 더미들. 이 풍경도 점점 낯설지가 않게 되어서 얼마나 좋았는데. 그의 방에 아무런 언질 없이 들어가도 되게 본인에게 허락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 나였으니 생경한 기분에 휩싸였었다. 그걸 간파한 카멜리안에게 키스와 더불어 더한 것을 보답으로 받았지만.

원래라면 의자에 앉아 편하게 대화를 시작할 나였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손을 꼼지락대니 차를 내온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불안한 내 손에 저를 담아 고풍스러운 찻잔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리곤 그는 내 맞은편에 서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를 응시했다. 회중시계는 함에, 안경은 책상 위 덩그러니 놓여있다. 곧 수면 시간이어서 편한 복장인 그를 보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최면, 그의 가장 강력한 특기였다. 정말 내가 가진 이 감정이 그가 만들어낸 것일까 봐 두려웠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나를 인형으로 만들어 갖고 놓았는지 도대체가 알 수는 없었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이나 따스해서 거짓말이라고 하는 순간 내가 믿었던 그 무엇이 처참하게 무너져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초조해 하나요? 뭐가 그렇게 국장님을 아프게 만드는 건가요.”

야속한 이 현실은 기어코 내가 말하게 만드는 구나.

“상부에서 제재가 들어왔어. 수감자와 그들을 관리해야 할 국장이 사적인 관계가 된 것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고, 부관에게 그것을 확인하게끔 했어. 또한 랭글리 장관님의 주관 하가 되었고. 이제 현실을 봐야 해. 카멜리안.”

‘툭’

“그래서, 결론이 뭐죠. 나의 사랑스런 국장님?”

“…헤어져야 해.”

‘투툭’

말했다. 이렇게 내뱉으면 순식간에 토해지는 것을, 말하기 전에는 어째서 그렇게 고뇌를 하고, 몸부림을 쳤을까.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대답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뭐라고 말할까. 수많은 상상 속에서도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했고, 그저 묵묵히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마침내 들리는 그의 첫 마디는 처음 들어보는 거친 웃음소리였다. 늘 자신의 페이스를 따라 움직이고 말하던 그의 호흡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머리가 흘러내려 엉망이 될 정도로 벅찬 숨을 내쉬며 웃던 그는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훔치며 내게로 다가와 자신의 팔 안에 나를 가두었다.

“후후, 그래서요? 이별 하자는 건가요?”

“요청이 아니야. 통보지.”

“그렇구나. 후흐, 미안해요. 자꾸 웃으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이후부터는 개인적인 일로 만나는 걸 줄이려고 해.”

“안타깝게 되었어요. 국장님.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나와 동류여서이기도 하고, 유일하게 마음에 드니까. 그래서 놓아줄 생각, 전혀 없거든요. 미안해요.”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안….”

‘투투툭’

평소와는 다른 환청에 의문이 드는 동시에 시야가 암전이 되어 그대로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눈을 뜨니 한밤중이었고, 나와 카멜리안은 그의 침대 누워 곤히 잠을 자고 있었던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참다못해 낮은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다. 내가 국장실에서 어떻게 여기에 온 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보고서를 처리하고, 그러니까 그 다음에…. 분명 국장실에 누군가 찾아와서 노크를 한 것 같은 기억이 희미하게 머리 안에서 떠돌았지만, 그 뒤가 불분명했다.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왜 이곳에서 잠이 들어 있는지. 시간이 왜 이렇게 흘렀는지. 그리고 늘 ‘나의 연인’이 타주던 차의 향기가 이리도 진한지.

머리는 아픈데, 기억이 나는 건 없으니 생각이 점점 당혹감에 물들어갔다. 곤히 잠든 카멜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다 흔들리는 시야에 침대에 내려가려 몸을 일으키며 곧장 휘감는 팔들이 나를 휘감아 그대로 자신의 품에 끌어당겼다. 익숙해진 품에 좋은 향기가 맡아지며 몽롱한 두 눈을 감고서 나를 끌어당긴 이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목과 머리칼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고 살결을 맞닿았다. 그러자 잠에 긁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를 걱정했다.

“왜 깨셨어요. 안 졸려요?”

“조금, 머리가 아파서.”

“이런, 약이라도 찾아드릴까요?”

새카만 방, 그러나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으로 선명히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체향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며 그가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만족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씩 통증이 가시는 듯한 느낌에 고갯짓을 하고서 그를 품에 더 끌어당겼다.

“머리 조금만 더 쓰다듬어줘.”

“국장님의 어리광이 늘어 기쁘네요. 자, 얼른 주무세요. 피곤하실 테니까.”

“으응.”

까무룩 닫히는 눈꺼풀에 부드러운 손길과 토닥임을 느끼며 다시금 잠을 청했다. 그러는 탓에 나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없었다.

‘툭’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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