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마

수심 모를 삼월의 바다 밑에서

ㆍ키류 생일기념ㆍ키류마지 ㆍ전All 시리즈 스포일러 주의

후스마를 열자,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해바라기의 식당. 환한 불빛 아래 커다란 식탁이 있고, 벽에는 원생들의 그림이 아기자기하게 붙어있다. 저 편에 있는 식당에서는 아스라이,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발을 내딛자 마른 나무장판이 삐걱인다. 슬리퍼를 신는 것이 좋다. 튀어나온 나뭇조각이 발에 박히는 것이 싫다면.

지금도 신고 있다. 조각난 천을 덧대어 만든 신을 직, 직 끌며 니시키와 유미에게 다가간다.

니시키는 언제나처럼 식탁에 숙제를 펼쳐놓고 투덜대고 있다. 유치원 시절에는 숙제같은 거 없었는데.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한다. 가끔 붙들려서 같이 하게 되지만, 결국은 내팽개치고 놀러나가게 된다. 두 사람 다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니까. 그래도 니시키가 자습장 구석에 그리는 낙서는 멋있다.

니시키가 얼굴을 든다. 지루해 보인다.

"키류! 잘 됐다. 이거 하나도 모르겠어"

잘 되긴 뭐가 잘 돼, 다른 녀석에게 물어야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그냥 반갑다고 할 것이지. 식탁까지의 거리가 멀다.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진다. 전에도 이렇게 종종걸음으로 걸었던가, 생각한다. 식탁이 어깨 높이까지 닿을 정도로 작았던가.

"아, 안해. 안할래! 우리 공원 가자! 저번에 왕 큰 풍뎅이 봤거든?"

좋지. 유미는?

돌아본다.

유미는 식탁에 앉아있다.

뻥 뚫린 얼굴에서 검푸른 바닷물을 쏟아내며.

아니, 유미인가? 얼굴을 알 수 없는데. 하지만 가슴께에는 흰 연꽃 문신이 있다. 그러니까 유미가 맞다.

그런가?

"유미는 못 가"

니시키의 목소리를 따라, 돌아본다.

없다. 방금 전까지 여기에 있었는데.

"밖이 온통 바다잖아"

창문을 본다. 벽 한 면에 크게, 바깥을 향해 난 창에는 온통 검푸른 물이 차 있다. 탁한 물빛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유미의 얼굴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처럼.

그제서야 깨달았다. 물소리는 여기에서 나고 있었다. 식당이 아니라.

아니, 식당에서도 나고 있었다. 깜깜한 식당에서 검푸른 물이 밀물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발 밑에 벌써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언제 불이 다 꺼진 거지? 언제 이렇게 식당이 작아진 거지?

어둠 속에서, 유타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니면 유미, 아니면. 모르겠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늙은 건지, 젊은 건지.

모르겠다.

뻥 뚫린 얼굴에서 검푸른 바닷물을 줄줄 흘리며, 잘 모르는 것을 건넸다. 맨 처음에 떠오른 건 하루토였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아기란 건 어떻게 생겼더라. 어떻게 생기는 거더라.

어떻게 다루는 거더라.

그래도 하루카가 주는 거니까, 받았다.

축 늘어진 리키야의 몸만큼 무거웠다.

포장된 유미의 생일 반지만큼 가벼웠다.

남의 것이지만,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얼굴에서 끊임없이 바닷물을 쏟아내며, 야요이는 팔을 뻗어 가리켰다.

등 뒤를 돌아보자, 후스마가 있었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를, 발목까지 차오른 물살을 헤치며 나아갔다. 품에는 하루토를 안고.

나가기 전에, 바깥을 봤다. 창문에 금이 가고 있었다. 안팎으로 바닷물이 쏟아졌다. 쏟아진다.

도망치자. 한 손으로 힘겹게, 무거운 후스마를 밀었다. 빠져죽기 전에.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격류에 떠밀려 그대로 바깥으로 떨어졌다. 하루카를 한 번 더 돌아볼 새도 없이.


후스마를 열자,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여기에서 진구의 경호원들이 쏘는 총알을 피하고, 돈다발이 휘날리고, 네 명이 각자 때리고 싶은 사람을 때리고, 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을 때리기도 하고.

밀레니엄 타워 옥상이다. 너른 헬기 착륙장이 초저녁 밤하늘 아래 펼쳐져 있다. 빗방울이 추적추적 떨어진다. 오늘 밤은 비가 내리는 건가.

붉은 등이 깜박거리고 있다. 항공... 뭐더라. 비행기가 부딪히지 않게 켜 둔다는 그거다. 저 멀리 빌딩 가장자리에서,

여자가 서 있다. 점멸하는 붉은 빛 사이에서 나타났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거센 비바람이 분다. 비에 젖은 긴 머리가 휘날린다. 굵은 빗줄기가 물풀처럼 펄럭이는 머리카락과 엉기어 가파른 사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빗물 젖은 바바리 코트 자락이 깃발처럼 무겁게 나부낀다. 위태롭게,

떨어진다.

뛰어가려는 순간, 오른손에 잡아당기는 듯한 무게를 느끼고 휘청인다. 흰 아타셰 케이스다. 직감적으로 1억이 들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아니, 10억? 100억?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손목을 잡아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간다. 여자를 포기할 수는 없다. 돈가방도, 포기할 수는 없다. 

하루카에게 받은 거니까.

닻처럼 땅을 향해 가라앉는 은빛 케이스를 들고 빗속을 달린다. 빛이라고는 저 밑에서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도심의 불빛, 깜빡이는 붉은 경고등이 전부인 캄캄한 옥상을.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니시키가 돌아본다. 좋아하던 붉은 수트를 입고.

아니, 아니다. 입고 있는 건 피에 물든 흰 수트다.

마치 가지 말라는 것처럼, 아타셰 케이스가 손을 잡아끈다. 그럼에도 떨어지기 전에 니시키에게 다가갔다. 이제 몇 걸음만 더,

"미안하다"

어둠 속에서 그렇게 말하고, 니시키는 천천히 뒤로 기운다.

비명처럼 니시키의 이름이 터져나온다.

터져나오지 않았다.

목이 졸린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메마른 입을 한껏 열어 소리쳤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내뻗은 손이,

허공을 잡았다.

니시키가 떨어진다, 떨어진다. 잡아야 하는데. 난간에 발을 올리고, 저 밑을 향해 뛰어들 준비를 하는 순간.

굉음.

아찔한 빛과 함께 발 밑이 터져나갔다. 고막을 꿰뚫는 파열음. 내장을 후려갈기는 충격파가 뒤를 이었다. 호랑이가 휘두른 앞발에 맞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허공으로 붕 날아가면서 느꼈던.

크게 뜬 눈에 비치는 커다란 폭발. 하늘에 거꾸로 돋아난 타워 상층이 터지고 있었다.

자신이, 거꾸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니시키를 찾았다. 저 멀리 빛나는 카무로쵸와 무너지는 타워의 파편들만 보였다.

떨어진다, 끝도 없는 나락으로.

갑자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아타셰 케이스가 훅 하고 위로 떠올랐다. 수면을 향해 떠오르는 부표처럼. 필사적으로 그것을 붙들었다. 케이스는 몸부림치듯 흔들리다가 파각, 입을 벌렸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새하얗게 만 엔권이 터져나왔다.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온 사방에 종잇조각이 휘날렸다.

그게 케이스를 위로 떠오르게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붙잡은 팔을 끊어낼 기세로 솟아오르던 아타셰 케이스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아래를 향해 추락하는 케이스가 은빛으로, 새하얗게 빛났다.

지폐가 아니었다.

물방울이었다. 새까만 물보라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느 새 무너져 내리는 밀레니엄 타워는 사라지고 저 밑바닥에, 흑요석처럼 번뜩이는 바다가 사납게 파도치고 있었다. 미친듯이 불어닥치는 물방울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수면에 떨어지기 직전, 니시키의 붉은 수트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꺼풀을 열자,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작지만 화려한 무대, 바 카운터와 수많은 좌석들. 양 옆에서 샴페인 세례가 쏟아진다. 기운차게 뽑혀나가는 코르크 마개.

"포샤인에 어서오세요~"

"어때? 오너, 놀랐어?"

박수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잊을 리가 없다. 아이카, 쇼코, 코유키... 익숙한 얼굴의 카바걸들이 이쪽을 보며 웃고 있다.

유키가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와 병목에 리본이 감긴 와인병을 하나 쥐어준다.

"짜잔 ! 깜짝파티 대ㆍ성ㆍ공! 놀랐죠?"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깜짝파티? 받아든 와인병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 와인이 아니라 샴페인이다. 이것도 잊을 리가 없다. 스파클링 골드 샴페인. 가게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술이다. 유키는 그대로 팔목을 잡고 끌어당긴다.

"이쪽으로 와 봐요, 키류 씨! 오늘은 엄청 대단한 거 준비해 놨으니까!"

"진짜 대단하다니까" "너무 놀라지 마시라고요?" 저마다 깔깔거리며, 손뼉을 치며 말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유키의 뒤를 따라 무대로 향한다.

샴페인 타워다. 피라미드 형태로 쌓인 와인잔에는 이미 황금빛을 띤 술이 넘치도록 차 있다.

뭐지? 어쩐 일이지? 무슨 기념일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즐겁다.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오랜만에.

갑자기, 손에 들고있는 샴페인 병이 지독하게 무거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끝이 아니거든요. 기대하시라, 짜잔! 이 쪽을 보시죠!"

유키가 양 팔을 쭉 펴고, 활짝 편 손을 흔들면서 저 편을 가리킨다. 막연한 기대를 품고 돌아본다.

유리로 된 벽이었다.

검푸른 바닷물이 가득한. 저 아래에 모든 불이 꺼진 80년대의 카무로쵸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 곳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타치바나의 응접실.

돌아봤다. 유키도, 캬바걸들도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산더미같은 샴페인 타워와,

기우뚱, 글라스의 탑이 물결쳤다. 무너진다. 찰나와 같은 순간에 그렇게 판단하고 뒤로 물러서자, 거대한 탑이 천천히 바닥을 향해 쓰러져내렸다.

수십, 수백의 유리잔이 박살나며 파편이 튀었다.

투명한 물방울, 투명한 파편들. 그리고 투명한 굉음이 유리조각처럼 바닥을 튀어 고막을 난도질했다. 금빛 물결이 빠르게 퍼져나가 하얀 가죽구두를 삼켰다. 사방에 샴페인의 향이 진동했다.

샴페인의 강에 잠긴 채, 깨진 유리더미는 보석처럼 어지럽게 빛을 반사했다. 카메라의 플래시처럼 아찔한 섬광을 피해 눈을 돌리자, 벽 한 쪽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자신을 본뜬 순금 동상이었다. 분명 부동산업을 하던 시절, 돈이 남아돌아 주체를 못 하던 시기였다. 재미삼아 발주한 물건이던가. 지금 생각하니 꽤나 악취미적인 발상이었다. 잘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 동상도 버블이 꺼지고, 부동산이 망하면서 어디론가 팔려나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수중에는 돈 한 푼 남지 않게 되었던가. 말 그대로 거품같은 환상이었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하지만 손을 대면 톡 하고 꺼지고 마는.

그 동상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걸까. 자세히 보니, 그 뒤에, 응접실의 현대식 인테리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후스마가 있었다.

이것 또한 익숙한 것이었다.

묵직한 스파클링 골드를 양 손으로 받쳐들고, 발목까지 차오르는 샴페인 속을 걸어 나아갔다. 그리고 후스마의 한 쪽을 붙들었다. 꽤 무거웠다. 종이만 발린 문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잠시 병을 바닥에 놓고 두 손으로 밀어볼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만 뒀다.

선물받은 걸 버릴 수는 없으니까.

겨우 문이 옆으로 밀려나갔다. 거품을 일으키며 흘러넘치는 황금빛 물살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후스마를 열자,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싸한 방향제 냄새가 코의 점막에 스민다. 방향등이 점멸하는 소리. 틱, 틱, 틱. 와이퍼가 작동하는 규칙적인, 단조로운 마찰음.

차창 밖은 물 속이다. 온통 검푸른,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흐릿하게 일렁이는 물살 속을 희멀건 티끌이 부유한다. 조명등이 눈부시게 작동하고 있는데, 알 수 있는 거라고는 이 택시 아래에 바닥이 있다는 것 뿐이다. 이따금, 어떤 움직임을 타고 뿌옇게 떠오르는 흙먼지가 보인다.

"행선지는"

뒷좌석에서 먹먹한 말소리가 들린다. 몸을 틀어 방탄유리 너머를 돌아본다.

카자마 어르신이다.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검은 지팡이를 짚고서 앉아계신다. 동생인 죠지일 수도 있지만, 목소리를 듣고서 확신한다. 어르신이 틀림없다.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부두에서. 곁에서 임종의 순간을 지켜봤던 것을 기억해 낸다.

"행선지는"

또다시, 물어온다. 행선지? 어디로.

앞을 보니, 운전대가 있다. 그렇다. 자신은 택시 기사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하지만 택시가 떠나려면 우선 행선지를 알아야만 한다. 행선지는 손님이 정하는 것이다. 기사가 아니라.

"운전대를 잡고 있는것은 너다"

마음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카자마 어르신이 대답하신다. 하지만 지금, 행선지를 정하는 것은 카자마 어르신이다.

"그렇게 계속 멈춰 서 있으면"

탕, 머리가 날아간다. 어르신이 쓰러진다. 구멍 뚫린 유리창에서 검푸른 물이 쏟아져 내린다. 어르신의 관자놀이에 피가 고인다. 중절모는 저만치로 날아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어르신의 입이 움직였다. 아니다, 어르신이 아니다.

양이었다. 커다란 검은 양이었다. 나이를 꽤 먹은.

유리창에 간 금이 점점 커졌다. 바닷물은 벌써 무릎께까지 차올랐다.

"가라"

뜨개바늘을 쥔 양이 입만을 움직여 말했다. 가로로 긴 동공은 허공에 두고. 또 총성, 잇달은 총성. 강화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바닷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이대로는 총에 맞아 죽는다. 아니면 물에 빠져 죽거나. 황급히 문의 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열릴까? 이런 물 속인데.

"뒤도 돌아보지 말고"

 어르신의 목소리로, 양이 쏟아지는 바닷물 속에 잠겨가며 말했다. 동시에 문이 열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떨어졌다, 떨어졌다. 끝도 없는 무저갱 저 아래로, 폭포같은 바닷물과 함께 떨어져 내려갔다.

문득, 허리춤에 달군 쇠와 같은 열기를 느꼈다. 손을 가져가자, 단단한 물건이 잡혔다.

권총이었다. 아직 가는 총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먼 검푸른 바닷속에서, 뜨개바늘을 쥔 양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문을 열고 떨어진 곳은 익숙한 장소였다.

단단한 지면에 나동그라진다. 처음에 느낀 것은 등에 가해지는 커다란 충격, 그리고 몸 위로 쏟아지는 폭포같은 물줄기. 어마어마한 바닷물이다, 잠시 숨을 쉴 수 없었을 정도였으니.

부딪힌 등뼈를 매만지며 일어선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렇게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이만한 고통으로 끝났다. 어딘가 한 군데쯤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 주위를 살핀다. 지하경기장이다. 카무로쵸의, 삼도천에 있는. 보자마자, 아니. 등에 전해졌던 충격으로 이미 깨닫고 난 뒤다.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이 느껴본 감각이니 모를 수가 없다.

관중석에 조명이 하나 들어온다. 꽃장수가 자주 앉아있던 상석이다. 거기에 코마키 할아범이 앉아있었다. 코마키류 고무술을 전수해 주고, 여러가지 훈련을 시켜준 스승.

"무엇을 하느냐, 시합은 이미 시작됐거늘"

무엇을 물어볼 새도 없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한다. 뒤를 돌아보자 쿠제 형님이 덤벼들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는것이 보인다. 전직 복서다운 경쾌한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접근해서 펀치를 날린다. 황급히 손을 뻗어 흘러넘긴다.

형님은 강했다. 지금도, 강할 것이다.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그렇다고 해서 자신도 그 무렵의 자신이 아니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훅을 피하며 적당한 공격을 기다린다.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잽. 이걸로 하자. 품 속으로 파고든다. 빈틈은 순간이다. 형님이 반응하기 전에 명치에 정권을 꽂아넣는다. 코마키류 호랑이 떨구기.

쿠제 형님이 비틀거리다 그대로 무릎을 끓는다.

"더 있다. 긴장을 풀지 말거라"

퍼뜩 옆을 돌아보자 류지가 달려든다. 손에 든 커다란 태도를 검집째로 휘두른다. 흘릴 수 있는 공격이  아니다. 굴러서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코마키류 고양이 구르기.

"봐라, 옆에 하나 더"

달려드는 놈이 하나 더 있다. 사에지마다. 코뿔소처럼 돌진하며 내지르는 숄더 태클을 간발의 차로 피한다.

이건 힘들다, 한 번에 이 둘을 견제하면서 싸우란 말인가.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흐른다. 두 사람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온다.

"이쯤이면 슬슬 의문을 입에 담을 때도 되지 않았는고?"

하지만 해볼 만 하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들리지도 않는가, 전투광 놈이"

재차 류지가 태도를 내지른다. 어떻게 하지? 순간, 작은 의문이 발목을 잡는다.

아차,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몸 안쪽까지 검집이 파고 든 뒤다. 뒤늦게 팔을 올려 검격을 비튼다.

빡, 가볍게 금이라도 간 듯한 소리와 함께 격통이 밀려온다. 다른 손으로 검집을 쥐고 잡아당기며 옆으로 빠지자 류지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끌려나온다.

자신을 노리고 사에지마가 갈기던 암 해머에 바로 머리를 후려맞는다. 뻐억, 팔이 부러질 때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바로 류지가 무릎을 꺾으며 힘없이 링 위로 쓰러진다. 목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에지마가 곧장 다시 덤벼든다.

이 녀석의 공격은 맞으면, 죽는다. 이를 악문다. 몸을 있는 힘껏 던져 다시 한 번 어깨를 들이밀며 달려오는 거구를 피한다. 그 큰 체구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동작으로 곧장 몸을 틀어 팔을 벌리고 초크를 걸어온다. 바로 양 팔을 들어 목을 보호하자, 통나무같은 팔이 강타한다. 방금 전에 태도를 빗겨맞은 팔에 끔찍한 격통이 터진다.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이 튀어나온다.

사이가 좁혀진 틈을 타 사에지마의 이마에 대고 있는 힘껏 머리를 박는다. 쾅, 하고 시야가 일숫 하얗게 물든다.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사에지마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 기회다.

앞으로 내달아, 뛰어오른다. 그 기세로 그 단단한 옆통수에 주먹을 내리꽂는다. 빠악, 두꺼운 나무판자가 동강나는 소리가 들렸다. 사에지마가 그대로 한 팔을 짚은 채 무릎을 끓는다.

씨익, 씨익. 어깨로 숨을 쉬며 코마키를 돌아본다. 코마키 영감은 팔짱을 끼고 앉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평소의 뚱한 얼굴 그대로다.

"마지막, 하나 더 남았다. 앞을 보거라"

뭐가 더 남았다는 건가? 인상을 찡그리고 코마키가 말한 대로 앞을 본다.

거울이 있다.

어리둥절한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고개를 까딱, 움직이자 거울 속의 자신도 갸우뚱, 고개를 비튼다.

"말했잖느냐, 마지막 상대라고"

거울이랑 어떻게 싸우란 거야. 미간에 힘을 주고, 할아범을 향해 팔을 벌려보인다. 코마키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린다.

"아무리 네녀석이라도 상대가 이래서야 손을 못 쓰는가... 됐다, 한 번은 이긴 셈 쳐 주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거울과 싸워본 적은 없고, 이긴 적은 더더욱 없다. 드디어 노망이 난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거울 쪽을 돌아본다.

후스마가 있었다.

"네녀석이야말로 뭔 소리를 하는 게냐. 줄곧 싸워오고 있지 않느냐.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울하고 싸운 적은 없었다.

"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머리만큼은 수련으로도 해결을 못하니..."

코마키 영감이 들으란 듯이 콧방귀를 팽 뀌었다. 됐다. 어차피 나가는 문은 찾은 뒤였다. 고집불통인데다 노망끼 난 영감님하고는, 글쎄.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상대해 줄 시간이 없었다. 후스마를 향해 발걸음을,

"우승 상품은 받아가야 할 게 아니냐, 성질 급한 녀석아. 빈 손으로 떠날 셈이냐?"

옮기려다 다시 한 번 돌아봤다. 몇 번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냐, 망할 할아범. 코마키에게로 시선을 옮기기 전에 종이 조각 하나가 날아와 스윽 발치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영감의 선물이었다. 어차피 용이나 원숭이가 그려진 예의 그림이겠지. 아무것도 없는 종이를 뒤집었다.

사진이었다. 나팔꽃에서 원생들과 함께 찍은.

없었다. 급히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올려다 봤지만, 코마키 할아범은 사라진 뒤였다.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러나 사진은 소중히 받아들고 후스마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여태까지 거쳐온 장소 중에서 그나마 가장 편안했던 곳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후스마를 열자,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눈부시게 하얀 백사장, 속이 비치는 투명한 바다.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이 멀다.

자주 낚시를 하곤 하던 그 해변에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나팔꽃이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미키오가 지어준 마메의 집, 키 낮은 철봉, 축구 골대. 전부 기억속의 모습 그대로다.

천천히, 마침내는 뛰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루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토는 자신을 기억할까.

해변이 이토록 넓게 느껴진 적이 없다. 달려도 달려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마치 사막 위를 달리는 것처럼.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나, 둘. 점점 더 많이. 나중에는 숫제 바가지로 퍼붓듯. 사방이 점차 어두워지는 중이다. 야자나무가 미친듯이 흔들린다. 마치 태풍이라도 불어닥친 것처럼. 무슨 일이지?

올려다 본 하늘은 마치 미로다. 똑같은 모양의 일본식 다다미방이 수도 없이 이어진 무한한 공간. 거기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후스마를 밀어젖히며 달려가고 있다. 문을 열고, 또 열고...

눌려 죽을 것만 같은, 숨막히는 공간에서 눈을 떼자 보이는 것은 사방에서 밀려닥치는 검푸른 파도다. 번갯불에 섬뜩하게 번뜩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파도가 진로 앞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몰아닥치고 있다.

빠져죽는다.

그 전에 나팔꽃에 도착해야만 한다.

젖먹던 힘을 다 해서 뛴다. 이유야 아무래도 좋다. 파도에 말려들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들어가야만 한다. 나팔꽃이 부서지기 전에, 자신이 빠져버리기 전에.

백사장을 건너,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 불어닥치는 짭짤한 바닷물과 미칠듯한 바람소리에 파도가 가까워지는 걸 느끼면서 나팔꽃의 앞마당에 들어섰다.

불은 전부 꺼진 채였다. 인기척도 없었다. 약간의 기대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들어가야만 했다.

바로 옆의 옆집까지 집어삼키며, 굉음과 함께 몰아닥치는 거대한 파도. 사방에서 몰려오는 물보라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후스마의 방 사이에서 달리는 자신을 뒤로 하고,

문을 열었다.


눈이 부셨다.

자신이 들어왔던 곳은 불꺼진 나팔꽃의 현관 아니었나. 검푸른 폭풍이 몰아닥치는. 여긴 너무 밝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한여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밀레니엄 타워 앞 광장. 보도블럭은 새하얗게 여름 태양빛을 반사시키고 있었고, 썬팅이 된 타워의 창문들은 하나하나 눈 따갑게 번쩍이고 있었다. 주변의 건물들은 달구어질대로 달구어져 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광장을, 홀로 걸었다. 저 앞의 그늘, 벤치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익숙한 검은 정장, 까슬한 뒷통수.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지만, 누구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오랜만에 만나는.

잰 걸음으로 뛰어갔다. 이번에도 신기루처럼 사라질까봐. 또 자신을 두고 가 버릴까봐.

벤치에는 아무도 없었다.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부여잡고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려 애썼다. 먼 발치에서 봤을 때는 분명히 있었는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 두고 가 버린 것은 자신이었던가.

그 사람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흰 꽃다발이 있었다. 여느 꽃다발같지 않게 나팔꽃으로 가득한. 안개꽃이 나팔꽃 사이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파스텔 톤의 꽃송이들이 한여름의 햇빛을 받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기억났다.

자신의 생일이었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구나. 오늘 이걸 선물하기 위해서.

늘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제서야, 막혀있던 목이 뚫린다. 폐부에 가득 차 있던 바닷물이 모두 빠져나가고, 먹먹했던 목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차는 것이 느껴진다.

한아름 꽃다발을 들어올려 품에 안는다. 그리고 지금 여기 없는 사람을 막연하게, 소리내어 불러본다.

"형님"


딱.

어깨에 가벼운 충격이 전해지고, 정신이 돌아온다.

일본식 정원이 보이고, 그리고 가부좌를 튼 다리가 보인다. 그렇다. 좌선중이었다. 또 졸고 있었던 건가.

그 모든 것들, 어지러운 광경들은 전부 꿈이었던 건가.

정진봉으로 어깨를 두드린 스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이 그의 역할이기 때문에. 그 후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손을 들여다 본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데, 꽃다발의 무게만 선명하게 기억난다. 여름 햇살을 받고 눈부시게 빛나던 흰 색채와.

아니다. 주먹을 쥔 손을 도로 내린다.

죽은 사람에게 꽃다발은 필요없다. 모두 놓아버리기로 하지 않았던가. 모든 세월도, 모든 인연도.

형님도, 놓아야 한다. 끝난 인연에 기다림은 필요가 없다.

눈을 감는다.

다시 버려야지. 모두 비워버려야지.


후스마를 열자,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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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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