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마

Danza de la Muerte

ㆍ키류마지 ㆍ0, 극2, 5~7스포주의ㆍ야매탱고주의ㆍ마지마 생일기념

지옥같은 카무로에도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은 있다.

향하는, 이라고 했다. 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마을에서 가장 천국과 가까운 곳은 틀림없다.

극장가의 카무로 시어터 빌딩은, 이름이야말로 아무런 개성도 없어 보이지만, 여타 카무로의 건물들과 다른 특징을 하나 가지고 있다.

공중정원이다. 가운데에 작지만 화려한 분수가 있는 적당한 넓이의 장소이다. 바닥에는 인공 잔디도 깔려있고, 주변에는 덩굴 식물이 자란 파고라와 관엽목도 놓아두었다. 보기에 제법 푸릇푸릇하다.

카무로쵸는 언제나 아수라장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런 평화로운 공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가끔 젊은 커플 몇몇이 '추억만들기'를 시도하더라는 목격담은 나온다. 막상 당사자들을 찾아보면 혹은 모르는 일이라고 손사래를 치기도 하고, 혹은 아예 없는 인물이 되어있기도 하다. 이유야 알 수 없다. 소문으로는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커다란 파치슬롯 가게의 뒷배가 동성회라고 한다. 소문이다. 확실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 곳은 잘 관리되고 있다.

그런 시어터 공중정원이, 별일도 다 있지. 텅 빈 날이다. 아마도 끈질기게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비 때문일 것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것도 아니다. 감질나게, 한두방울씩 뚝뚝 떨어지기만 한다.

온종일. 질리지도 않고. 구질구질한 하늘에, 구질구질한 빗물.

구질구질한 인생.

스즈키 타이치. 아니, 이제 굳이 이름을 숨길 필요가 있을까? 키류 카즈마는 공중정원 입구 바로 밖의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다. 택시 기사 시절의 구질구질한 코트를 걸치고. 코트만큼이나 구질구질한 표정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세븐스타를 필터 끄트머리까지 알뜰하게 빨아들이고는, 저 아래로 휙 던진다. 이렇게 버린 꽁초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루카가 봤다면 분명히, 아저씨, 담배꽁초는 쓰레기통에 버려야죠! 하고 화를 낼 것이다.

사실, 이렇게 줄담배를 태우는 이유가 그 하루카 때문이다. 아니지. 하루카라기보다, 키류 자신이 문제다.

결국 모든 문제는 돌고 돌아 키류에게로 온다.

 인기 아이돌 후보생의 양아버지가 야쿠자라는 사실이, 결국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하루카의 꿈은 망했다. 나팔꽃 또한 앞으로 어찌 될 지 알 수 없다. 자신은 왜 늘 일을 꼬이게만 하는가. 자신의 인생은 왜 이 모양인가. 옥상에서 떨어져 간 담배 필터 하나하나가, 사실은 그런 한탄인 셈이다.

그 꼴을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1월이다. 여느 때 같은 차림은 무리가 있다. 늘 입고 다니는 뱀가죽 재킷 안에, 간소하게 터틀넥 정도는 갖춰 입었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손에는 천천히 타들어 가는 하이라이트 한 개비. 발치에는 꽁초가 두어 개.

마지마 고로는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동생이자, 친구이자, 연인을 바라본다. 이따금 빗물이 굳게 다문 입을, 뱀이 그려진 검은 안대를 때린다. 그래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생물처럼 서 있다. 키류가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 떨어져 가는 세븐스타를 끄집어내고, 무념무상으로 불을 붙이는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다.

셋, 둘. 마침내 돗대가 뽑혀 나간다. 시간이 많이도 지났다. 여전히 비는 구질구질하게 내린다. 오랫동안 바깥에 서 있던 두 사람도 제법 젖었다. 마지마는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직 해는 떠 있다. 비구름의 장막 뒤에서 노란 원이 빛난다. 밀레니엄 타워 중간치에서.

원아들이 기다릴 거라느니, 추우니까 이만 들어가라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거기 있다. 내리는 것 같지도 않은 비를 맞으면서. 멍청하게 허공을 보면서.

키류가 신경질적으로 주머니를 뒤지고, 빈 담뱃갑을 확인한다. 난폭하게 구겨버리고, 뒤돌아 걷기 시작한다. 그제야 마지마가 입을 연다.

"어데가나 니"

키류가 멈춘다. 돌아보지는 않는다.

"담배 떨어졌어"

짜증과 분노가 묵은 때처럼 찌들어있는 목소리다.

"해 진다. 고마해라"

"시끄러. 내 맘이야"

"자학도 좀 더 나은 방법 읎드나?"

키류가 고개만 돌려 노려본다. 커다란 눈에 불꽃이 튀긴다. 마지마는 멍한 얼굴로 눈알을 굴린다. 글쎄, 뭐라고 대답해줄까.

키류는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다가, 우울한 표정으로 돌아선다.

"니 춤춰본 적 있나?"

다시 돌아본다. 약간 먼 곳에서 마지마는 멋쩍게 웃고 있다. 마치 자신도 얼마나 엉뚱한 소리인지 안다는 것처럼.

"무슨 소리야"

"비 내리는 카무로 옥상서 댄스 한 판 땡기는 것도, 마. 운치 있지 않나?"

"농담할 기분 아냐. 더 할 말 없으면 난 가 보겠어"

"우리가 말이다"

들고 있던 하이라이트를 입에 문다. 칼칼한 타르와 매연에 찌든 빗물 맛이 난다.

"이래 된 지 을매나 됐나"

"모르겠는데. 있기 싫으면 그냥 가"

"말고. 이래 연애질 비스름한 거 하고 나서 을매나 됐냐는 말이다. 기억하나, 니"

키류의 표정에 약간이기는 하지만, 당혹감이 서린다. 마지마가 바로 말을 잇는다. 마치 대답 따위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6년. 아이다, 7년 됐나. 마이도 있었제. 니가 오키나와로 날라삐지를 않나. 후쿠오카로 날라삐질 않나. 내도 마 니한테 말도 안 하고 죽은 척을 했지만서도"

눅눅한 하이라이트를 빨아들인다.

"그래도, 마. 용케도 아직도 이러고 있다, 싶다. 만나믄 떡이나 치고, 쌈박질이나 하고, 담배나 태우고. 그기 다인데 말이데이. 이게 사귄다, 카는건지는 내 잘 모르겠다. 니는 우예 생각하나"

키류는 잠시 생각하듯이 눈을 굴리다, 곧바로 이를 악물고 받아친다.

"지금은 관계 없잖아, 그런 이야기"

"내 지금 쪼매 진지한데"

말문이 막힌다. 마지마를 바라본다. 마지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주 바라봐준다.

멀리서 희미하게 자동차의 경적이 울린다.

"니가 뭐라고 생각하던"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습기를 끌어안은 연기가 비틀대며 날아가다, 빗방울을 맞고 녹아 사라진다.

"나는 아직은, 그래도 니만한 놈은 없다꼬 생각을 한다. 그만둘까, 싶다가도 결국은 니한테 오게 되드마. 무뚝뚝하고, 데면데면하고, 무심한데다, 피곤한 자슥이긴 해도. 그건 내도 마, 마찬가지니께... 키류야"

역시 물을 먹으면 맛이 없다. 마지마는 반쯤 남은 담배를 발치에 던지고 비벼 꺼 버린다.

"가끔은 행님한테도 좋은 추억 좀 남겨도라"

키류의 표정이 점점 당혹감으로 채워진다.

"나는... 이런 데에서?"

"와, 난 맘에 드는데. 우리같은 인생에는 딱 아이가"

그제서야 난간에서 몸을 뗀다.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탓에 몸이 굳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다가오는 형님을 보고 키류가 난색을 보인다.

"난 춤 같은 거 출 줄 몰라"

"안다 자슥아. 누가 니같은 놈한테 그란 걸 기대하나, 행님이 가르쳐 준다 안하나. 니는 따라만 하면 되는기라"

"형님이 춤도 출 줄 알던가?"

"내 밤의 제왕이었다 안카나. 소싯적에 스텝 좀 밟아봤제"

"그건... 7년 전 이야기잖아. 당신 한창 날 따라다니던 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잘 기억하고 있네! 그란데, 글쎄다. 너가 믿던 말던, 여전히 상관은 없지만서두..."

마지막으로 팔을 머리 높이 치켜들고 잡아당기는 동작을 취하면서, 마지마가 키류 앞에 선다.

"함 봐 볼래나?"

키류는 화를 낼까, 짜증을 낼까. 포기한다. 분명 자신은 형님에게도 못 할 짓을 많이 했다.

이 사람은 언제나 기다리기만 한다. 1년이고, 10년이고. 25년이고. 그래도 늘 기다려준다. 오늘도 자신의 옆에서 죽 함께 있어 줬다.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떠나고, 모두가 떠나더라도, 혼자 자리를 지켜줄 사람. 언제까지나.

"왈츠가 쉽긴 한데 우리가 그럴 군상도 아니고, 재미도 별로고... 탱고 하자. 니 여자 쪽 해라"

"뭐? 왜"

"포지션이 그렇다는거제. 그거 하는 게 쪼매 쉬워가"

"뭔가 싫은데. 남자 쪽은 안 돼?"

"좌우간... 고집 보소. 그래, 니 해라. 니 해. 봐라, 우선 허리에다 손을 올려놓고"

마지마의 말대로 키류가 어색하게 동작을 따라 한다. 한 손은 허리에, 한 손은 마주 잡고.

"이거, 엄청나게 부끄러운 짓인 것 같은데"

"그걸 인제 알았나? 마 여긴 카무로 옥상 아이가. 볼 놈도 없데이. 보더라도 조사삐면 그만이고. 히히히!"

"당신, 꽤 부끄럼을 타면서 이런 일은 또 적극적이군"

"우선 니 입부터 조사주까? 봐라, 스텝 가르쳐줄끼니. 우선 왼발을 옆으로 이래카고"

어색하게, 비틀비틀, 두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두 명의 거한이 가슴을 맞대고 스텝을 밟는 광경은 보기에 꽤 유쾌하다. 보는 사람은 없으나.

"아, 미안. 또 밟았어..."

"그래 괜찮다 안하나. 이래가 내 만날 징 박힌 구두 신고 다니는거제"

마지마가 화도 내지 않고 씨익 웃는다. 사실, 꽤 즐겁다. 딱히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키류가 눈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

마냥 재미가 있다.

"하낫둘셋넷 하낫둘셋... 넷에서, 오른발을 요래 다이아몬드 모냥으로다가... 갸아악!"

"우오악! 미안해 형님!"

"발만! 발만 움직이라꼬! 정강이를 차는 놈이 어뎄나!!"

키류는 정신이 없다. 아무리 형님이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고는 해도, 춤 자체가 처음이다. 자꾸만 실수를 하게 된다. 카무로의 옥상에서 춤을 춘다는 것도 어쩐지 어색하다.

"여기서 고개를 삭, 털고 해야되는긴데..."

"왜?"

"됐다... 일단 없이 하자"

"아니, 이유를 알려줘야 할 거 아냐"

"귀찮구로. 그리고 니가 그라면 내 웃겨가 수업이 안 된데이"

"뭐야, 그게. 놀리는 거야?"

의외로 숙달이 빠르다. 여전히 거북이가 기어가는 속도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시 없이 기초적인 동작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안고 있는 허리가 가늘다. 새삼 키류는 느낀다. 가까이에서 보니 자신보다 키가 큰 것도 실감이 난다. 평소에는 구부정한 자세에 선도 가늘어서 자주 잊고 마는데. 조금 분하다고 느낀다. 한편으로는 새삼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런 남자가 왜 여태까지 자신과 교제를 계속하고 있는 건지. 여자라면 모르겠지만, 자신 같은 남자가 왜 좋다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물어봐도 '세니까', '멋있으니까'. 그뿐이다. 더는 알려주지 않는다. 정말 그 뿐일 리가 없는데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다면 자신은 왜 애정을 느끼는 걸까. 정면에 있는 얼굴을 바라본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제법 진지하다. 스텝을 확인하기 위해 살짝 내리 깐 눈매가 시선을 붙든다. 좋은 냄새도 난다. "여기서 턴하고..." 우아하게 한 바퀴 도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 평소에는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미친 듯이 웃으며 중장비를 굴리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일 수가 있을까. 아니, 세 사람. 아니, 네 사람. 마지마 고로라는 남자는 아주 많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자신이 알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근본은 언제나, 단순하다. 숨이 찰 텐데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열심히 박자를 헤아리는 옆얼굴을 보면서 생각한다.

조금, 심장이 아프다.

역시 머리가 나쁜 건 아니라고 마지마는 생각한다. 그놈의 고집이 문제지. 몸이 좋으면 머리가 편하다던가. 새삼 잘 짜인 체격이라고 생각한다. 턴을 할 때마다 탄력 있는 몸놀림으로 따라붙는다. 무겁지도 않고, 우악스럽지도 않다. 거칠지만 어떤 품위는 있다. 돌밭을 굴러다니는 다이아몬드 같은 녀석이라고, 새삼스레 그렇게 생각한다. 카무로에는 너무 아깝다. 자신에게도.

어울려주는 것은 고맙지만 왜 자신 같은 남자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럴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포기해 줄 수 있는데. 하지만 이 놈은 언제나 자신을 찾아온다. 오키나와로 떠났을 때도. 후쿠오카에서 돌아왔을 때도. 왜냐고 물어봐도, 답은 언제나 똑같다. '당신 곁이 편하니까'. 언제나 말수가 적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달변가가 될 수 있는 주제에. 가장 중요한 말은 늘 속으로 아낀다.

괜히 얼굴이나 한 번 더 보려고 시선을 돌렸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긴 속눈썹에 가린 커다란 갈색 눈망울이 마지마를 들여다본다. 급하게 시선을 돌린다. "네 박자, 네 박자" 목소리가 떨린다. 갈비뼈 안쪽에서 심장이 뛰고 있다.

"자, 여기까지"

발놀림이 멈춘다. 마지마는 손을 탁탁 털고,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씨익 웃는다.

"역시 키류야는 쎄구마! 가르치는 대로 잘 따라 하네, 금방 기초 코스 다 밟아삔 거 보니께"

"응? 으음... 당신이 잘 가르쳐줘서겠지. 정강이는 괜찮아?"

키류는 반쯤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다. 아직도 체온이 심장 언저리에 남아있다. 조금 눅눅한 옷 너머로 전해지던.

"내 만날 니한테 치맞는데 고작 그거 갖고 죽겠나? 그거보다"

마지마의 눈매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진다.

"기분은, 쪼매 나아졌드나?"

그제서야 키류는 깨닫는다. 추억이니 뭐니는 핑계였다는 것을. 울분에 차 있던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던 형님의 배려였음을. 당신은 늘 그런 식이다. 말하기 위해 입을 연다.

곧 그만두고, 허탈하게 웃는다.

"나쁘진 않네. 형님"

"옹?"

"고마워"

꾸며낸 미소에 진심이 깃든다. 마지마는 부드럽게 웃으며 묻는다.

"나중에 더 갈쳐줄까? 니 소질 있어 보이는데"

"좋지"

키류는 웃는다. 그날 처음으로, 기분 좋게.


'죄송합니다. 변변찮은 선물밖에 준비할 수가 없어서'

품질 좋은 가죽 장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뚜껑을 닫는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래이, 어디 싸돌아다니지 말고. 내 밤새 어울려줄끼니'

그러고보니 밤새 B급 좀비 영화를 볼 약속도 했다. 다이고에게 받은 선물상자를 트레이닝복 앞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마지막 도피처가 소텐보리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또 이 감옥인가. 멀리서 번쩍이는 복어 그림을 보며, 마지마는 대차게 담배 연기를 토해낸다.

이래 봬도 스테이시는 이 언저리에서 꽤 오래된 바 Bar다. 마지마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던 시절부터 여기 존재했으니, 못해도 25년은 넘은 셈이다. 비록 내용물은 여러 주인과 리모델링을 거쳐, 완전히 딴판이 되었으나.

그 건물 옥상에서, 마지마는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딱히 어울려 줄 상대가 없는 건 아니다. 그냥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작은 건물의 옥상까지 올라올 호기심 많은 놈은 없을 것이다. 사람 만나기 싫을 때 딱 좋은 장소. 여기가 그렇다.

"해~피 버스데이..."

휘황찬란한 야경을 바라보며 첫 소절을 부르다, 후욱. 담배 연기를 뱉어낸다. 생일이라. 딱히 기쁘지는 않다. 환갑까지 반 남았다는 게 그렇게 축하할만한 일인가. 그것도 이런 상황에. 생각만 해도 저절로 니코틴이 당긴다. 담배를 물고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다.

동성회는 망했다. 자신들도, 글쎄. 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미 망했거나, 망할 예정이거나. 거대한 도박이 끝나봐야 알겠지. 아직은 룰렛이 돌아가고 있다. 아직은.

축하를 해 줄 사람은 거의 죽었다. 아니면 떠났거나. 가만히,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미나미, 니시다, 이 둘은 마지마 조 조원이었다. 요다, 유키. 이들은 선샤인 시절의 인연이다. G.B.홈즈, 이 친구는 인연이 있었다고 봐야 할까? 삼도천 꽃장수, 그리고.

그리고. 긴 한숨을 토해낸다. 짙은 하이라이트의 연기가 꼬리를 끌고 네온사인 정글 사이로 사라져간다.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웃는 걸 본 게. 멍하니 기억을 더듬는다.

예전에는 더 자주 웃었던 것 같은데. 얼굴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예전에는 더 자주 봤었는데.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거리는 멀어져갔다. 나이를 먹을 수록, 함께 웃는 일은 줄어들었다.

좋았던 추억들이 거품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담배 연기와 함께 사라져간다.

그래서, 왜 웃고 있었더라.

담배를 내버리고, 발로 밟아 비벼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칙칙한 콘크리트 바닥이 죽 이어지다 밤의 어스름 속으로 사라진다.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는 물탱크, 그리고 계단으로 향하는 문.

난간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어둠을 들여다본다.

"창피하나? 마지마 군~"

시끄럽다. 마지마는 대꾸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믄 그냥 해삐는기라. 그래가 미치기로 한 거, 아니었나?"

대답 대신 위를 쳐다본다. 이렇게 어두운데 별빛조차 없다. 소텐보리의 별은 죄다 땅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흉내를 낼라믄, 확실히 해야제. 마지마 군은 아직도 한참 모자라가~"

"병신같아가"

조롱을 쳐내고, 몸을 일으킨다.

자세를 잡고, 기본적인 스텝부터 시작한다. 네 박자.

"니한테 춤까지 가르쳐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형제 작품이고?"

당신은 너무 크다. 덩치도, 도량도, 야망도. 보폭이 넓어진다. 스텝이 어둠 속으로 이어진다.

"그래 마, 용케 여태까지 살아남았구마. 그래야제. 일찍 뒈져버리믄 오야 얼굴에 먹칠하는 꼴 아니겠나"

허무하지 않나. 앙갚음에 눈이 멀어 죽었다. 찔러도 베어도 죽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머리에 맞은 총 한 발에 가 버렸다.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고막에 생생하다. 광대짓이라고 할까, 언제나 자신의 재롱을 잘 받아주던 사람이었다.

네 박자, 네 박자. 빙글 돌아서, 다시 아스라이 빛나는 네온사인 위로 돌아온다.

"늦지 않게, 지옥의 특등석에서 봐야지"

그래서 불꽃놀이 소동은, 볼 만한 것이었을까.

"아쉬웠지. 폭죽 하나 터지지 않았잖아. 그래도 나름 재밌더군"

문득, 궁금해진다. 만약 자신들을 지켜보는 자가 있다면,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무엇을 느낄까.

"아직 안 끝났잖아, 당신들. 추하게 발버둥 치는 게 코미디가 따로 없어.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아. 언제까지 버티려나?"

느린 스텝으로 반 바퀴, 그다음은 빠르게 두 걸음.

카와무라.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자신의 조원 이름은 지금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였던 걸까. 애초에 녀석이 조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도박 때문이었다는 걸 떠올린다. 야쿠자가 되는 건 대개 그런 놈들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놈들, 지은 죄가 너무 많은 놈들, 천성이 글러 먹은 놈들.

"형님하고 조금 빨리 만났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이 업계에 있다 보면 좋은 결말을 보기 힘들다. 자신이 알던 놈들은 모두 더러운 끝을 맞이했다. 늦든, 빠르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자신들은 누군가를 등쳐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들이다. 곱게 죽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운전대를 쥐고 자신을 돌아보던 카와무라의 얼굴을 떠올린다. 한창 젊은 나이였다.

연달아 빠른 스텝을 밟아야 하는 구간이다. 대각선으로 주욱 이동, 그리고 턴.

"너 춤추는 거 좋아했냐?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춰 보고 죽을걸"

도지마 사무소 상층. 주먹 한 방에 벽을 박살 내던 모습을 떠올린다.

"골프, 여자, 비싼 술... 그런 것만 쫓다 보니, 등짝의 문신도 빛이 바래버렸어. 너 같은 놈을 좀 더 일찍 만났어야 했는데"

싸우기 꽤 즐거운 상대였다고 기억한다. 싸우고 난 후의 대화도, 글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만약 그때 자신이 죽고 그가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임마, 살아남아야 하는 건 나 같은 헛똑똑이가 아냐. 너처럼 한밤중에 옥상에서 춤추는 바보지. 여전하구만, 너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어간 사람이 너무나 많다.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긴 했지만, 언제나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결국은.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면서 살아온 것도 아닌데, 너무 분에 넘치는 행운 아닌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고, 다시 이동한다. 네 박자를 유지하며 느리게, 그리고 빠르게, 빠르게.

"흑에는 흑만의 방식이 있는기라"

길 한가운데에서 굉음과 함께 터진 밴을 떠올린다. 만약에 자신이나 마코토가 먼저 문을 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긴데, 니는 결국 니 방식으로 마코토를 보내줬구마. 흑도 백도 아닌 방식으로"

마코토는 어떻게 지낼까. 문득 생각하다, 머릿속에서 지운다. 그만두자.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끝났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동화는 동화로 남아야 한다. 역할이 끝난 조연은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와야지.

처음 밟아나간 스텝을, 역순으로 밟아 돌아온다.

"여어, 마지마쨩. 잘 지내고 있나?"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동성회에서 이름난 직계 조장인 시마노 큰형님과 독대하던 간부가 죽었다. 오미 내에서 어느 정도 급이 되는 자였겠지. 사가와는 어떤 방식으로든 케지메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손가락 한두 개로는 끝나지 않을. 헤어지고 나서 여태까지, 다시 만난 적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고 했잖냐. 뭐, 이러는 것도 미운 정인가 하는 거겠지만"

결국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무엇이었던 걸까, 생각한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말투도, 삶의 방식도.

너구리 같은 영감탱이. 적어도 빌린 담뱃불은 갚아야 했는데.

"너는 오래 살아라, 마지마쨩"

이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난간 아래에 떨어진 꽁초를 내려다본다. 스텝을 밟으며, 옥상을 한 바퀴 돌면서, 내내 생각하던 것이 있다. 가장 최근에 잃은 것, 가장 아쉽게 잃은 것.

그래서, 왜 웃고 있었더라.

다시 한 번 자세를 잡는다.

'뭐? 왜. 뭔가 싫은데. 남자 쪽은 안 돼?'

고집 센 놈. 언제나 그랬다.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절대 바꾸지 않았다. 독불장군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 제 갈 길만 갔다. 자기가 전부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양, 뒤에 남겨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왼쪽으로 돌아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비틀대던 발놀림을 기억하며.

'이거 엄청나게 부끄러운 짓인 것 같은데'

카무로의 미로 같은 옥상도 재개발을 거치면서 사라져 버렸다. 빌딩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극장과 공중정원은 사라졌다. 남은 건 파치슬롯 가게 뿐이다.

너와 함께 걸었던 추억들은 전부 다 사라져 버렸다.

'뭐야, 그게. 놀리는 거야?'

네 박자, 네 박자.

아직도 갈비뼈 속에서 뛰던 심장의 박동을 기억한다.

아직도 네 눅눅한 체온이 기억난다.

짙은 속눈썹 아래서 빛나던 네 갈색 눈동자를 기억한다.

태양은 눈이 부셨던가. 아니, 비가 오는 날이었던가.

'고마워'

갑자기, 걸음이 멈춘다.

너와 밟던 스텝이 더는 기억나지 않아서.

너무나 엉망인 그것이 더는 떠오르지 않아서. 마치 너와 나의 관계와 같던 그 발놀림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아서.

순간만은 아직도 이렇게 선명한데.

"안 죽은 거 안데이, 문디자슥아"

오랜만에, 마지마가 입을 연다. 네온사인을 등지고, 어둠이 내린 옥상을 향해 말을 건다.

"다시 추자고 약속한 거 다 기억난다. 행님 약속 안 지키는 넘 싫어하는 거 알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죽지 않았으니 대답할 리도 없지.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달이 하늘 꼭대기에 올라섰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네온사인이 하나둘 꺼져간다. 잠시 난간을 돌아보고, 한 대 더 태울까 생각한다.

그만 둔다.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까.

아래로 향하는 계단통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밤바람이 스산하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과거의 자신이 서 있다. 긴 머리에, 검은 턱시도.

너는 죽었을 텐데.

그렇다. 이 놈은 그날 죽었다. 큰형님께 목숨을 내맡겼을 때,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지배인 시절의 자신은 죽었다.

이마에 총을 맞은 창백한 시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후회하냐고. 잘못된 게 아닐까 의심하냐고.

아마도 가장 필사적이던 시절, 찰나와 같던 순간의 자신을 노려본다.

허깨비는 의중을 묻듯, 그냥 거기에 서 있다. 빛을 등지고, 비좁은 계단통을 들여다 보며.

그 뒤에는 어슴푸레한 난간이 보인다.

병신같아서.

손을 흔들어주고,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는다.

후회를 한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 너는 그렇게 죽어있어라.

깜깜한 계단통을 더듬더듬 내려간다. 저 아래에 스테이시의 불빛이 보인다. 그제야 형제와의 약속을 기억해낸다. 자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이고도 걱정하겠지.

걸음이 빨라진다. 빛이 점점 밝아진다.

어서 돌아가자.

달빛도, 불빛도 모두 사라진 옥상에는 담배꽁초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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