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라자로는 말구유의 꿈을 꾸었다

- 와카이치 - 7 스포 주의

"연말에 약속 있어?"

타타타타. 가늘게 떨리며 돌아가던 바퀴살이 멈추었다.

"아아니, 완전 한가한데?"

"그지이. 우리가 뭐 그렇지~"

목도리를 두른 여학생 여럿이 와글와글 휠체어 앞을 지나갔다, 춤추듯이 스텝을 밟으며. 전부 지나가고 나서야 바퀴는 천천히,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너는 약속 없냐?"

아래에서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휠체어를 밀던 이치반의 고개는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올려다 보는 차가운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맞았다.

"이치"

아라카와 마사토는 굳이 확인하듯, 자신의 시중을 드는 녀석의 이름을 입에 내었다. 탈탈탈. 돌아가던 휠체어의 바퀴가 잠시 느려졌다.

"그야... 있을 리가 없죠. 제가"

타타타. 잠시 느려졌던 바퀴는 다시 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맨손은 새빨갛게 얼어있었다. 쿨쩍. 목에 감고 있는 붉은 털실 목도리가 앙증맞게 달랑거렸다.

"하긴. 이치가 그렇지"

마사토는 한심하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스가 이치반의, 추위에 질려 빨갛게 물든 볼이 크게 부풀었다.

따지고 보면, 도련님도 약속은 없잖슴까.

목구멈 바깥까지 기어나온 말을 애써 도로 집어넣었다. 그 말이 마사토에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올해도 마사토는 홀로 새해를 맞이하게 될 운명이었다. 아라카와 조의 조장을 맡고 있는 아버지는 바빠서 그를 위해 낼 시간이 없었고, 다른 조원들 역시 도련님에게 신경을 쓸 여유같은 건 없었다. 결국 이치밖에 없었다. 한가하고, 쓸데없이 상냥하며, 마사토의 마음에 드는 상대 같은 건.

"같이 아라쿠레 퀘스트 하시겠슴까? 엔딩까지 노세이브 스피드런으로"

"싫어, 멍청아. 넌 도대체 한 소프트를 몇 번이나 가지고 놀 셈이냐. 게임이 오징어냐? 이제는 좀 새 게임을 사라"

"에이, 저 그럴 돈 없어요. 아시면서"

타타타타.

차가 쌩쌩 지나가는 도로 옆을 지나면서, 둘은 시답잖은 이야기로 연말 분위기에서 소외된 쓸쓸함을 잊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온 연말, 당연하다는 듯이 외면하는 어른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두 소년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서,

"정 심심하시면요,"

가끔은, 그러니까 모처럼 돌아온 올해의, 단 한 번 뿐인 하루를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한 번 가 보실래요? 역 앞"

타탁.

바퀴가 멈췄다. 빨간불이었다.

"코인락커? 거긴 왜"

마사토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치반을 다시 올려다봤다.

"아니, 뭐. 딱히 갈 데도 없잖아요. 타임스퀘어에 갈 것도 아니고, 파티에 갈 것도 아니고. 그럼, 기왕에 성지순례나 한 번 가는 것도, 뭐, 나쁘지 않지 않지 않슴까? 따지고 보면 고향같은 거고"

"뭐야, 그게"

딱히 이유랄 건 없었지만, 그래서인가. 한 번 돌아가기 시작한 혀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치반이 구구절절 늘어놓는 헛소리에, 도련님도 조금 마음이 동한 모양이었다. 마사토의 이치반을 향한 눈빛은 조금 누그러진 것이 되었다.

"내가 들은 연말 계획중에 최고로 바보같은 생각이야"

"아 예, 죄송하구만요, 바보라!"

"하지만 뭐, 나쁘지는 않네"

"예? 방금 그거, 진심이십니까?"

"뭐냐, 이치. 네가 꺼낸 말이잖아"

"하지만 그, 몸이, 안 괜찮을 거 아닙니까. 거기까지 가면 해 다 질텐데요?"

"내가 그 정도로 약해보여?"

아차, 그만 도련님의 역린을 건드려버린 모양이었다. 마사토는 무릎 위까지 덮인 체크무늬 모포를 그러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추위따윈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만..."

"아아, 시끄러, 이치 주제에. 이렇게 된 이상 오기로라도 가고 말 테다! 이치, 휠체어 역 앞으로 몰아!"

"예에에~? 어르신한테 혼난다구요, 저..."

"시끄러, 시끄러! 나한테 혼나고 싶냐, 아버지한테 혼나고 싶냐!?"

그야, 둘 다 싫지만. 이치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역으로 향했다.

막 지기 시작한 해에, 연말이었다. 역으로 향하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핸드폰을 두드리며 수다를 떠는 갸루들과 지쳐빠진 샐러리맨들 사이에 끼어서, 두 소년은 느릿느릿 바뀌는 신호등을 지나며 나아갔다.

빵빵, 지기 시작한 해에 지나가는 차들이 하나둘씩 전조등을 키기 시작했다. 어둑어둑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은 먹구름이 구물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쏟아질 듯이.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진작에 학원이나, 따뜻한 집에 돌아가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대를, 두 어린 소년은 하얗게 입김을 내뿜으며 인파를 헤치고 달려나가고 있었다. 확신과 기대에 찬 눈빛으로, 네온과 가로등이 추위 속에서 뿌옇게 명멸하는 황량한 도쿄의 길거리를.

"아라쿠레 퀘스트 하니까 말인데"

"예? 뭡니까? 갑자기"

"너, 저번에 내 캐릭터 장비 멋대로 팔았지"

"앗"

"앗, 이 아니야. 바보 이치"

"그게, 저기. 제 건줄 알고, 헷갈려서..."

"그러니까, 새 게임 좀 사라고. 요즘 세상에 세이브 슬롯이 한 개뿐인 구식 게임을 누가 한다는 거야. 네 세이브, 내 세이브. 나눠서 관리하면 안 되냐?"

"그러니까 돈이 없다구요~"

"돈 정도는 내가 내 준다고"

"아, 싫어요. 도련님한테 신세지는 것 같고! 그리고"

"맨날 신세지고 있잖아, 바보 이치. 또, 뭔데?"

"도련님하고 저는, 둘이서 하나나 마찬가지잖슴까"

타타타타, 바퀴살이 경쾌하게 돌아갔다. 이치반은 달렸다. 혼잡한 도쿄의 밤거리를. 역 앞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이브 나눠버리면, 뭔가. 그렇잖슴까. 저랑 도련님이랑 남남이 되는 느낌이라"

타타타. 마사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뭐야, 그게"

"느낌상 그렇다는 거죠"

"그런 끈적한 거 징그럽다고, 네 그런 면. 후덥지근한 점? 아무튼, 귀찮아, 너"

"예에? 징그럽다는 너무하잖슴까"

"거리 감각이 버그 걸린 것 같다고! 학교도 같이 가지, 학용품도 같이 쓰지, 화장실도 같이 가야되지, 진짜 형제도 이 정도는 안 한다!"

"그렇지도 않잖아요! 애초에 도련님, 외동이잖슴까! 친형제 사이의 뭘 안다고 그러심까!"

스크램블 사거리가 눈앞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역 앞, 코인락커였다.

하지만, 그렇지. 이치반은 생각했다. 도련님과 자신이 정말 형제였다면. 문득,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그랬으면, 하고 바랐던가.

도련님과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높이에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자신에게는 너무 빛나는 존재인 이 사람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면.

시기하고, 질투할 필요 없이 순수히 좋아하게 될 수 있다면.

순전하게 웃는 얼굴로 마주하는 사이가 될 수 있다면.

어차피 밑바닥인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삶이겠지만, 그래도.

꿈 정도는 꿀 수 있잖아.

어느새, 코인락커 앞까지 왔다. 방금 전에 지나온 거리와는 전혀 다른, 한적한 공간이었다.

타타타, 바퀴살이 경쾌하게 떨리는 소리와 함께 이치반은 열심히 뛰었다.

100번은 어디 있지? 83, 92...

"이제 됐어, 이치"

앞에서 도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스가 이치반은 멈춰섰다.

100번째 코인락커의 앞에는 도련님이 서 있었다.

그때처럼 파란 양복을 입고, 피와 먼지로 엉망이 된 채로.

"여기까지 수고했다"

목소리만큼은, 전에 없이 평온했다.

"왜"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이런 목소리였던가, 자신은. 이렇게 쉰 목소리였던가. 늙고, 지친 목소리였던가.

"크리스마스니까 말이야. 그러고보니, 생전에 네놈에게 한 번도 선물을 준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려서 말이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용한 거리에, 추위로 번진 네온사인과 가로등의 빛마저 아스라이 먼 거리에, 싸라기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마치 그날 밤처럼.

"선물이라고 해 봤자, 난 네놈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지 뭐냐. 너는 뭐든 다 가지고 있으니 말이지"

그건 자신이 할 소리였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돈도, 지위도, 부모도.

그래도 괜찮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형제니까.

우린 서로의 반쪽이니까.

그야, 시샘이 아주 안 났던 건 아니었지만.

한 번도 밉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대신 저주나 해 주려고 왔지.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도련님은 짖궂게 웃었다.

자신이 잘 아는 얼굴로, 아라카와 마사토의 표정으로.

"평생 그렇게 살아라. 바보같이 우직하게, 남의 도움이나 받으면서. 너같은 건 밑바닥이 어울려"

어렸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그 때 그 모습으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바보 이치"


따다닥. 따다다다닥.

경쾌하게 드럼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스가 이치반은 하마코의 집 2층에서 눈을 떴다. 창문을 가린 분홍빛 커튼 사이로 아침해가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여전히 드럼 두드리는 소리를 내는 전자시계를, 더듬더듬 더듬어 집어올리고, 스위치를 눌렀다. 겨우 반복적인 리듬이 멈췄다. 시계에는 올해의 연도와, 날짜도 표시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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