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왜성 (2022년 작)

닥터 옥토퍼스 (노 웨이 홈)

2차 백업 by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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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산발적인 불빛 탓에 사위로 얕은 어둠만이 깔린 밤이었다. 추적자가 붙었다면 인간적인 감각만으로도 쉽게 알아챌 만큼 밝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려워할 실체가 없으니 오토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기껏 되찾은 고요를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 혹은 자기를 향한 불신일지도 몰랐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제 그는 여러 일을 무의식중에 해내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군중의 눈을 피해 움직이느라 여념 없는 그를 대신해 정리하자면, 이는 무력감이었다. 어린 피터가 한껏 인상 쓴 얼굴로 걸어 나갔을 때 노먼은, 고블린은 피터를 걱정하는 대신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어.”

혼잣말에는 더이상 응답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침묵이 계속되자, 어쩌면 이 사고가 인공지능과의 완전한 동기가 종료되면서 발빠르게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쳐지기’ 전에 개중에서 가장 공격성이 큰 사람이 본인이었음 또한 사실이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피터 파커에게 유의미한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오토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력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가도로에 다다르자 건물을 덮은 스크린들이 저마다 데일리 뷰글 방송을 내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건물 일부가 파괴되며 다수의 부상자와 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그 책임은 스파이더맨에게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 피터.”

온 시야를 비추는 시대의 변화나 기술의 발전은 당장의 오토에게 어떠한 감명도 남기지 못했다. 그는 항상 자부심을 품고 살았다. 누구보다도 영민하며, 이를 선을 위해 사용한다는 자부심. 또는 자만. 두 단어의 형태가 같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토는 자만으로 타락했고 또 파멸 직전에 처했다. 그런데도 더욱 빛나는 지성으로, 그리고 단지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선을 행하는 피터를 동정하고 있었다. 피터 주변에는 인간성을 깎아내리고, 생명을 앗아갈 각오까지 한 적들이 가득했다. 순수한 선의 대가, 그 대가가 이토록 잔인해야만 했을까.

어느덧 오토는 이 세계의 피터를 처음 마주쳤던 곳에 도착했다. 도로는 소동의 흔적이 미처 수습되지 못하고 군데군데 통제되어 제 기능을 거의 상실한 채였다. 마주하기 두려운 그의 자취였다. 그로부터 눈을 돌리고, 기계 다리로 구조물 아래 매달려 열차가 다니는 철로를 지나면 저 아래로 강이 흘렀다. 혼탁한 물결 위로는 오직 가로등 불빛만이 형체 없이 번졌으나 그의 눈에는 이성을 놓치기 전 마지막으로 응시했던 상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열의에 찬 과학자였던 그는 많은 것을 해냈다. 그러나 힘겹게 누적한 단계를 통해 마침내 목표이자 과업을 완수하고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때 그의 온 세계가 무너졌다. 사명, 책임, 사랑… 잔해 위에는 긁어모을 부스러기조차 없었다.

폐허는 어찌 보면 새로이 시작할 기반이 되어줄 땅이기도 했다. 몸을 뉘일 집이 없다면 새로 만들고, 밭을 갈 땅이 없다면 돌멩이를 골라낸 뒤 흙을 뒤엎으면 됐다. 그렇기 때문에 오토는 역류해 들어오는 인공지능의 제안과 설득과 강요와 협박에 응했다. 모든 일을 돌이키지는 못하더라도 일부의 수습에는 손을 대볼법 했다. 오토가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을 알았다면 분명히 자신이 이를 경험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오토는 늘 그랬듯 무언가를 간과했다. 원자 부스러기조차 남기지 않는 폐허는 그 위에 무엇을 도모하더라도 폐허였다. 아무리 애를 쓴대도 블랙홀은 이전처럼 빛과 열을 만들어 뿜어낼 수 없었다. 인공지능의 의지로, 아니, 자신의 의지로 저질렀던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평생 눈을 돌리리라 다짐했지만 결국에는 인정해야만 했다. 범죄의 주체는 항상 그였다. 넷이나 되는 목소리들을 달고 다녔더라도, 실제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인물은 그였다.

그는 괴물처럼 살고 싶지 않았고, 그럴 바에는 자신이 창조한 괴물과 함께 사라지길 원했으며 더는 괴물이 아니었다. 온전한 자신이 바라던 것을 마침내 얻었을 때 그는 도리어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이대로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괴물이 아니게 되었다고 해서 과거의 일이 같이 사라지지는 않는데. 오토가 하늘이 들여다보이는 도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대답이 돌아올 일이 더욱 만무할, 공허한 질문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로지. 내가 구하지 못했고 내 자만으로 잃어버린 유일한 동반성.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구하지 못할 것이다. 오토에게 지워진 운명은 이미 집행되었고 그걸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백색 왜성은 한창 타오른 후 서서히 식어가는 원자 덩어리에 불과함에도 특정 조건 아래에서는 끝없이 빛을 낼 수 있다…….

“망설이지 말라고 했겠지? 하지만 내가,”

내가. 나. 나는. 그 말만을 반복하던 오토는 강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반사면에 진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처절했다. 작은 물방울들은 충분한 속도를 얻어 수면에 부딪치며 미세한 물결을 연달아 만들었다. 긴 회상과 감상이 마무리될 때 고민 또한 끝났다. 피터가 자기 잘못으로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언젠가의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날 파괴한 괴물을 없애버리고 말겠어.’ 당시 오토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으나, 어린 피터는 달랐다. 그는 이런 일을 겪어서는 안 됐다. 

 

오늘 밤은 아주 길 것이다. 그는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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