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성 (2022년 작)

사랑하는 나의 동반성에게 5 (완)

오토로지

2차 백업 by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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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수와의 유리는 때때로 오토에게 공허감을 안겨주었다. 동력원을 잃고 사용을 기약 받지도 못한 채 한구석에 치워진 부산물들과 자신을 별반 다를 바가 없다며 자조하는 일이야 자주 있었다. 그러나 외로움은 단순히 타인을 만나는 것으로 잊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온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빼앗기만 하는 물건은 공허를 메우기는커녕 더욱 깊게 파냈다. 허무에서 벗어나야지만 쉴 줄 모르는 이 굴착기를 겨우 멈춰 세울 수 있음은 일생의 가장 큰 역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오토는 언젠가 비슷한 형태의 우로보로스를 끊어낸 영웅을 떠올렸다.

로지가 “지성은 분명히 개인의 소유겠지만, 세상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라고 강력하게 말한 뒤로 오토는 그 경구를 깊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본인과 로지가 보기에 떳떳하고 옳은 길만을 위해 노력했다. 물론 로지가 이런 종류의 결말을 예상치는 못했을 터였다. 오토가 성공이나 실현 따위의 망령 같은 욕망에 사로잡혔으리라 상상할 수 없었음이 분명한 원인이었다. 오토는 다시금 로지를 그렸다. 나의 사랑하는 동반성, 로지. 유의미한 실체가 더는 곁에 남지 않았더라도 직접 고안한 단어의 조합은 잔류했고, 오토는 이를 몇 번에 걸쳐 곱씹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추억은 시와 결을 같이 했다. 오토가 일기처럼 적어내는 편지는 두 사람을 위한 시집이었으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이 사실은 저자는 모를지라도 독자에게만큼은 명백했다.

 

해가 바뀌고 따뜻한 봄 날씨가 찾아올 즈음, 꺼림칙할 정도의 적막에서 오는 고독과 사념을 줄이고 싶어서인지 오토는 라디오를 구해 날마다 켜 두었다. 텔레비전이 이미 있었지만 정착할 정도로 오토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으며, 다른 일과 병행하기에도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주파수를 자주 바꿔가며 온갖 주제 속에서 헤엄쳤다. 그러나 금세 시간대나 날짜별로 청취하는 채널이 정해졌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바뀌는 일도 없었다. 온갖 사건을 간추려 전달해주는 뉴스 채널, 매주 주제 하나에 대한 설명과 토론으로 구성된 시사 채널, 곡에 대한 짤막한 정보와 음악만이 줄곧 나오는 클래식 채널,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코미디 채널… 언젠가 사연을 보내게 될 방송은 단 한 번 주파수를 잘못 입력했다가 우연히 접한 데에 불과했다. 그리고 다시 우연히도, 이 채널에서는 언젠가 로잘리가 들려주었던 음악들이 자주 나왔다.

 

 

라디오를 통해 오토의 생존을 확신한 로잘리는 친구를 통해 그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아주 짧은 시간밖에 들이지 않았는데도 그의 주소가 확실해졌다. 오토는 여전히 두 사람의 작은 세계에 머물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삶의 절반을 포기할 수 없었을 거라고, 로잘리는 추측했다. 오토가 살아 있었다. 로잘리가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통해 천천히 뱉었다. 저 문장을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벅차 왔다. 오토는 아마도 이전보다는 조금 초췌한 몰골로, 아니면 시간을 통해 극복하는 법을 알아낸 상태로 커다란 부재를 어떻게든 견뎌내려고 노력하는 중일 것이다. 어떤 쪽이든 로잘리는 오토를 다시 만나자마자 꼭 껴안고 토닥일 생각이었다. 서로의 오랜 고독은 그렇게 씻어버릴 수 있었다.

눈보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굵은 눈이 펑펑 쏟아져 창밖 풍경을 가렸다. 이런 눈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는 결국 내리지 않았지만, 올해에는 정말 희게 뒤덮인 세상 속에서 몇 시간이고 캐럴을 들을지도 모르겠다고, 오토는 생각했다. 라디에이터는 실내를 기분 좋게 데웠고, 실험기구의 인공지능을 수정하는 과정도 순조로웠다. 그때 누군가 녹은 눈과 함께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토는 항상 이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우편이나 소포, 신문이 배달된 시각은 아니었다. 이런 때는 대부분 다른 층 사람이 넋을 놓고 있다가 잘못 올라오는 경우였지만, 이번에는 그 발걸음이 현관 근처에서 뚝 멈췄다. 그리고 초인종이 울렸다. 오토가 방문객을 확인하러 몇 걸음을 겨우 뗀 순간, 잠가두었던 현관문은 꼭 잠긴 적이 없는듯 열렸다. 뒤로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토, 사랑하는 나의 동반성.”

유리 조각 때문에 생긴 흉터가 곳곳에 새겨져 있었으나, 로잘리의 목소리는 그 사고의 여향을 이미 견뎌냈는지 차분하고도 생기 넘쳤다. 오토의 얼굴에 경악과 기쁨이 한참을 오갔다. 로잘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양팔로 오토를 안고, 도드라진 금속 척추와 등을 한참 쓰다듬었다.

“로지. 나는 당신이─”

“─죽은 줄만 알았다고?”

겨우 입을 뗀 오토의 말을 가로챈 로잘리의 목소리는 먹먹했다.

“나도 그랬어. 나도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

그 대답에 오토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로잘리의 매끄러운 겉옷 표면으로 툭, 하고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왜 울어. 우리 둘 다 여기 있잖아.”

로잘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오토를 달랬다. 오토는 도리어 훌쩍이는 소리까지 내며 로잘리를 꾹 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하려 애쓰며 몇 분이나 붙들었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왜 당신이 항상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는지 정말 알 것 같아.”

그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달라고 말하며, 로잘리는 온기 속으로 오토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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