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칼

이해의 간극이 좁혀질 때

션칼 성사후 서사정리 로그

카롤리나 클라크는 증명 될 수 없는 건 믿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명확하지 않은 감정은 딱 질색이다. 경험하지 못했으니 알 수 없다. 아니지. 경험했다고 한들 그것이 진짜 ‘그 감정’ 일지 어떻게 확신하는가? 전부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고 살기 위한 본능이 감정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음에 불과하다고 카롤리나 클라크는 여겨왔다.

그녀가 모든 감정을 이리 냉소적으로 보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것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가령, 신뢰니, 우정이니, (사실 이것도 최근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충절이니 하는 것들. 그러나 카롤리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 사랑해요! 카롤리나… 당신은 역시 아름다워…”

사랑이었다.

션 오스본은 카롤리나가 자신의 집사로 데려온 남자였다. 개인 사용인들은 그녀의 성격에 못이겨 금방 그만둬 버리거나 그녀 자신이 해고시켜 버려 다 길게 일하지 못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카롤리나는 예상했다. 션은 제법 길게 버틴 쪽이다. 시제가 과거가 아니라는 말은 그가 아직 그녀의 성질머리를 받아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 받아주고 있는 건 자신 쪽이 아닌가? 처음엔 ‘급료만 밀리지 말아주십시오.’ 하던 남자가 일을 잘하니 월급을 올려 주겠다는 말에 수줍게 다른 걸 주면 안되냐고 물어왔다.

“내가 주기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면. 넌 내 전용 집사니까, 뭐든 요구해도 좋아.”

“오히려 그대 밖에 줄 수 없을걸요? 그 말 진심이십니까? 그럼…”

그리고 션이 카롤리나의 손에 들려준 것은 목줄이었다.

“당신의 개가 되고 싶습니다!!!”

카롤리나는 그 날 그의 햐얀 연미복에 홍차를 부어버렸고, 션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의 은혜에 바로 무릎 꿇었더랬다.


‘저를 책임져 주셔야지요.’ 션이 그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카롤리나는 그와의 계약 해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확실히 카롤리나는 그와 엮인 일이 있었다. 성적(性的)으로 얽혀 버렸으니 책임져 달라는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를 집사로 채용한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계기는 되었으니까. 어쩔 수 없네. 카롤리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가끔 보너스를 주기로 했다.

길들인 개에 대한 책임을 확실히 지는 것이 참된 주인이니까.

게다가 밤에 션과 보내는 시간은 확실히 스트레스 해소가 되었다. 애초에 카롤리나 클라크는 늘 자의로만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니, 책임감이니, 먼저 요구한 보너스 때문이라느니 하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와 밤을 보냈을 터였다. 성욕 해소라는 1차적인 욕구도 물론 있었다만… 그보다는 훨씬 원초적인 안정감이 그녀를 그의 곁에 머물게 만들었다. 이 사람은 날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이상한 신뢰감이 션 오스본에겐 있었다. 이유? 그건 카롤리나도 잘 알지 못했다.

그건 카롤리나가 그 ‘왜?’ 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찾고 있을 시기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눈을 천으로 가리고 나체로 손발이 결박되어 있는 션에게 바닥에 내려치는 채찍 소리를 들려준 직후이기도 했다.

“아, 사랑해요! 카롤리나… 당신은 역시 아름다워…”

사랑? 사랑이라니?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와버렸다면서 웃기나 하는 남자의 모습에 카롤리나는 급히 결론을 내었다. 아. 평소에 하는 헛소리의 종류가 늘어난 거 뿐이구나. 그럼 크게 신경쓸 필요 없겠지. 와중에도 그녀는 션의 눈을 가려두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의 자신은 늘 새하얗게 담담하던 얼굴이 붉은 당황으로 잔뜩 물들여져 있었을테니까.

아무것도 달라질건 없어. 그냥 평소대로 하면 돼.

카롤리나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션은 언제나와 다를바 없이 행동했다. 시중을 들고, 차를 내오며, 식사를 준비하고, 가끔 자신과 함께하는 밤마다 미친듯이 웃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녀를 향한 찬사 문구를 쏟아내었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이미 결론지어진 일에 의문이 남는 기분이 카롤리나는 영 석연치 않았다. 마치 술식의 글자 하나가 틀렸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마법식을 발동시킨 찝찝함이랄지. 이 남자는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타인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신경을 쓴 적이 없던 카롤리나였기에 그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학문이었다. 주종관계(낮이든, 밤이든.)에서 주인을 사모하는 감정이 그런 단어로 표현되고 만 거라면, 사적인 공간에서 아예 다른 관계로 만나본다면 어떨까? 평소엔 관심도 없던 외국의 마술 공연의 티켓 한장을 션에게 내민건 그런 탐구심이 발단이었다.

“시시했네. 겨우 거울의 착시현상을 이용한 거 가지고 다들 뭘 그렇게 놀라는지 몰라.”

“그렇네요. 그걸 한번에 알아보시다니 역시 카롤리나 아가씨군요.”

“마술은 너도 하잖아.”

“하하, 저 정도로 솜씨가 좋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탈출 마술 같은건 꽤 흥미롭지 않습니까? 저도 언젠가 한번 도전하고 싶달까요.”

“그래? 이따 돌아가면 수조 안에 가둬줄까?”

“제법 살벌한 농담이지만 당신의 입술에서 나오니 그 날카로움마저 제 심장을 갈라버릴듯 매혹적이군요.”

“응. 물 속에 들어가면 네 그 시끄러운 입도 조개처럼 다물어지겠지.”

쌀쌀한 가을 바람에 따듯한 색으로 물들여진 낙엽이 팔랑거리며 내려왔다. 카롤리나에게는 자연현상의 일부분으로만 보이는 것도 션에게는 달라 보였던 걸까. 남자의 손에 잡혔던 낙엽이 다른 손으로 가려지더니 눈꺼풀이 한번 깜박여지는 사이 붉은 장미꽃으로 변한다.

“그건 좀 봐주세요. 그대와 함께 들어간다면 환영이지만…”

넘겨주는 꽃 한 송이를 카롤리나가 머뭇거리다 받아들였다. 그녀가 같이 외출을 하자는 말을 했을 때부터 션 오스본을 관찰한 결과, 그는 묘하게 들떠 있는 듯 했다. 말이 많아지다가도 갑자기 다물곤 했고, 그렇게 조용할 시점엔 꼭 자신을 보며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미소란 즐거운 감정이 들어야 나오는 표정일텐데… 그 마술쇼가 괜찮았던 걸까?

“너는 재밌었나봐? 난 시시했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나요? 카롤리나 당신과 함께 있잖아요.”

이 또한 언제나 들어왔던 그의 습관에 불과할 터임에도, 카롤리나는 일순 자신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어그러진 걸 느꼈다. 자신의 빈 손을 살짝 잡아 끌어 손등에 입술을 맞추는 일련의 과정에는 가느다란 햇살조차도 허락되지 못한 밀도가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넌 늘 나를 보며 웃는구나.

그리 깨닫고 나서야 카롤리나는 어쩌면, 션이 했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재기 시작했다.


“너는 나만 보면 웃는거 같아.”

카롤리나의 말에 홍차를 찻잔에 따르던 션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졌던 물줄기에 불과했던지라 부드러운 동작은 이내 그대로 이어진다. 아가씨의 취향에 맞춰, 조용하고 우아하게.

“웃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늘 저를 곁에 두고 계신데요.”

마술사의 모자 안은 늘 비어져 있어야 하기에.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겉을 화려하게 꾸며 눈길을 뺏는다. 그러나 션은 그녀가 늘 자신의 트릭을 꿰뚫고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속임수가 밝혀졌음에도 계속 마술을 보여줘야 하는 비참함은 그녀가 비밀을 굳이 말을 하지 않음으로서 상자 안에 갇혀 있을 수 있었다. 숨기는 쪽도 고역이긴 하다만. 언젠가는 화려하게 내놓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너는 날 사랑하지? 션 오스본?”

추측도 가정도 아니었다. 이미 결론을 ‘찾은’ 자의 자신감이 카롤리나에게는 있었다. 그가 멍청하게 얼이 빠진 틈을 비집고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어왔다. 홍차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는 건 카롤리나가 이번에도 만족했다는 걸 의미했다. 찻잔을 든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얀 얼굴이 여상하다. 저 은빛 눈동자에 오롯히 담기기를 얼마나 소망했던지. 당신은 모를 거다. 아니, 알았을 거다. 그랬기에…

“네.”

션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복잡한 술식의 답이 너무도 간단명료해서, 결국 세상은 그걸 ‘정의’라 부르듯이. 카롤리나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안경 너머의 금안이 벅차다. 또 웃고 있구나. 그가 뺨의 열기를 숨기지도 않는 꼴을 이제 비웃지도 못하리라.

“당신이 저를 처음 묶어 주셨을 때부터… 쭉 당신에게 심장이 묶인 것만 같았어요.”

“… 꼭 그렇게 쓸모없는 말을 덧붙여야 하니?”

“아아! 그 눈빛! 그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며 하실때 저는 이 가슴의 유…”

“그만해.”

더 심해지기 전에 카롤리나가 션을 제지했다. 남자는 항상 한마디가 많았다. 평소엔 들은척도 안하고 계속 떠들더니 이번엔 그녀의 말에 묵묵히 멈추어 있었다. 지금은 눈을 마주치면 안돼. 자신의 심장이 빨리 뛰는 증거가 얼굴에 나타나고 말리라. 카롤리나는 그걸 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트릭이 다 밝혀져도 기뻐하는 비굴한 마술사하고는 다르게, 자신은 제 이론이 흔들리는 걸 감당 못하는 고고한 학자에 불과했으니까.

정원의 잔디가 천자락에 쓸리고 눌러지는 간지러움이 카롤리나의 귓가를 건들였다. 애써 조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면 자신의 집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기사를 흉내내었다기엔 마음이 급해 레이디의 기분을 세심히 살필 격식이 없었으니, 흔한 종의 마음가짐을 표현했을 뿐이었다. 션은 현실을 알았다. 제 분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방종맞은 사람이라 입이 근질거릴만큼 넘쳐 흐르는 감정은 그때 그때 뱉어내야 직성이 풀렸다.

“사랑해요. 카롤리나.”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주제도 모르고 주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이 남자는 제게 닿는 것조차 황송하다는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카롤리나는 그의 이런 얼굴이 말보다 더 성가실 때가 있었다. 사실은, 꽤 많았다.

“… 얼마나?”

여자는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자각한다. 몇번 가지도 않았던 사교회에서 약혼자의 사랑의 증표를 확인받고 싶었던 영애와 자신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 당장 키스하고 싶은 만큼이요.”

어이없게도 카롤리나는 순간 그 영애보다 자신이 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시약이 화약반응을 일으키는 것보다 자신의 가슴 안쪽이 따듯해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는, 논리도 계산도 없는 확신이 자신을 지배해 나갔다.

“그럼 지금 하지 그러니?”

그래서였을거다. 말이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와 버린 까닭은. 허락이 떨어지자 션이 튀어오르듯 일어나 카롤리나의 뒷목을 잡았다. 입술이 서로 겹치다 떨어지고, 다시 맞붙는 순간 둘의 호흡과 타액이 말캉한 혓덩이에 의해 섞여졌다. 자제심을 잃은 집사의 손이 아가씨의 뒷목에서 팔로, 점점 더 내려가 허벅지를 더듬어 나가자 그녀가 이로 남자의 혀를 콱 깨물었다.

“바깥이잖아.”

“… 그럼 안에서는 더 해도 되나요.”

“글쎄.”

발정난 개, 라는 매도 대신에 들려온 답을 션은 허락으로 알아 들었다. 곧바로 카롤리나를 안아 들어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의 한쪽은 들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다급해 보였다. 카롤리나가 한손으로 그의 뺨을 끌어 입을 맞추니 두 다리 모두 돌처럼 굳었지만.

“너는 참 재밌구나.”

션을 멈추게 할 이는 이전에도 이후로도, 한 명밖에 없으리라.


션은 결혼을 처음 해보지만, 원래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있었다. 일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단순히 카롤리나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위로를 받고 싶은 것 뿐이었는데. 모두 카롤리나가 밤에 상을 준다고 말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런데 상사에게 건의하니 돌아오는 답이

‘그렇네. 확실히 이대로는 문제가 있겠어. 결혼해야겠다. 우리.’

….라니.

션은 답지 않게 당황했다. 그 뒤로는 척척 일이 진행되었다. 클라크 백작 부부에게 알렸고 자신도 몇년만에 본가에 편지를 넣었다. 우르르 저택에 많은 손님들이 찾아 왔으며 집사장이 자신을 깍듯이 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 서류작업과 피앙새와의 결혼 준비와 (자신은 데릴사위의 자격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것까지 자신의 책임이었다.) 손님맞이… 몸이 세 개라도 부족했다. 덕분에 꼬박꼬박 월급을 모아 산 이 반지도 카롤리나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결혼식은 당장 내일로 다가왔다. 이대로는 프로포즈도 제대로 못한 약혼자라는 오명이 씌워지고 만다. 귀족들의 결혼은 이런식으로 처리될지 모르나 션 같은 평민은 아니었다. 자기 여자에게 반지도 끼워주지 못한 놈이라고 형제들에게까지 놀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요새 통 카롤리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그리움이 더 컸다만.

아가씨의 방문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내일이면, 이 안에 있는 여자는 자신의 부인이 된다. 결혼이 급하게 처리되는 것처럼 보여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어도 행복했다. 보답 받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마음이었으니. 하지만 여전히 걱정은 된다. 세간의 시선이나 신분차이라던가 그런 흔한 고민은 아니었다.

자신은 과연 카롤리나 클라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인가.

문을 두드리니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면 안은 조명을 낮춘 은은한 노란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쪽 벽이 화장대나 옷장이 아닌 책장이라는 게 카롤리나의 성격을 짐작케 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다리를 쭉 뻗은 채 고개를 뒤로 꺾어 눈을 감고 있었다. 이 결혼을 위해 어울리지도 않게 사교회를 부지런히 오간 건 카롤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살며시 눈을 떠선 옆눈으로 션을 보던 카롤리나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네?”

“제가 그리웠나요?”

대답없이 한숨만 깊이 쉬는 카롤리나를 보며 션은 준비한 따듯한 물에 아로마 오일을 몇방울 떨어트렸다. 백작 영애의 작지만은 않은 방 안이 금새 부드러운 향으로 차올랐다. 검은 셔츠의 소매를 걷어선 당연하게 무릎을 꿇어 카롤리나의 구두를 벗겨 내었다. 분홍빛의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미온수를 끼얹으며 조금씩 누르니 그녀의 발목이 움찔거리며 경직되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카롤리나의 얼굴을 보면 정말 본 목적을 잃어버릴것 같아 션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이런거… 부탁한 적 없는데.”

“이건 일종의 덤이에요.”

“그래? 내 얼굴 보러 온 김에?”

카롤리나가 허리를 숙이자 익숙한 단내가 션의 코끝을 찔러왔다. 산뜻하고, 시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조금 위로 올리자 곧바로 입술이 겹쳐져 온다. 뒤섞이는 타액을 삼켜내면서 손으로 젖은 발의 중점을 지긋이 누르니 그녀의 어깨가 흠칫 떨려 왔다. 션이 고개를 꺾으며 더 깊이 들어가려 하자 카롤리나 쪽에서 먼저 떨어졌다. 아쉬움을 남긴 은사가 그의 안경줄처럼 길게 이어지다 중간에서 뚝 끊어진다.

“하아… 안돼. 내일 예식이니까, 오늘은 참아야지.”

“언제부터 그리 예법을 지키셨다고…”

“자꾸 입을 놀리면 식 직전까지 얼굴 못 볼줄 알아.”

그래서 션은 입 대신 손이나 마저 놀리기로 했다. 반대쪽 발마저 마저 씻어내곤 자신의 손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닦아 내었다. 카롤리나의 손을 잡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었다. 맨손으로 잡은 적은 드물기도 했으니까. 감히 사용인이 주인의 살결에 허락없이 닿으면 안된다, 라는 법칙 정도는 션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일이 오기 전에…”

내일이면 자신은 적어도 이 손을 허락 없이 잡아도 되는 사람이 된다. 아마 그렇게 된다고 해도 션은 카롤리나에게 허락을 구하게 되겠지만. 그것마저 그는 자신의 특권으로 여겨졌다. 제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다 몇번 손을 현란하게 움직이더니, 그녀의 왼손을 한 손으로 살며시 덮고는 다른 손으로 딱! 손가락을 튕겨낸다. 모든 손을 떼어내면 카롤리나의 약지에 반지가 반짝였다.

은으로 만든 몸체에 아쿠아마린이 중앙에서 빛났다. 백작인 카롤리나에겐 이런 것쯤이야 흔하게 볼 수 있을테고… 내일 결혼식에선 아마 축복의 고대 술식이 새겨진 더 귀한 반지가 여기에 끼워지겠지만…

“전해주고 싶었어요. 직접 말하지도 못했잖아요. 저와 결혼해 달라고.”

카롤리나는 자신의 것이 아닌양 왼손을 들어 보였다. 은은한 조명에 비춰지는 반지의 빛이 눈부셨다가, 각도에 따라 옅어졌다. 아름다워. 카롤리나는 그렇게 또 추상적인 단어를 경험했다. 션 오스본만이 줄 수 있는, 실제하는 환상이었다.

“… 다른 말은? 안 해줘?”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가요?”

“평소엔 내 허락 없이도 잘만 하더니, 이럴 때만 모른 척이니?”

“저도 가끔은 직접 듣고 싶어서요. 그래서-”

무슨 말인데 그래요. 귓가에서 속삭이는 말소리에 카롤리나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션은 보채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 나름의 앙탈이란 걸 배웠으니까. 그렇지만 귓가에 입을 맞추는 건 계속 해도 되겠지. 한번, 두 번… 쪽쪽 거리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자 결국 카롤리나가 그의 멱살을 잡곤 홱 고개를 당겨냈다. 똑같이 귓가에 작게 들려오는 말에 션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첫사랑을 시작한 소년의 기분으로 션은 다시 카롤리나의 귀에 손을 둥글게 모아 입을 대곤 그녀가 원하는 말을 속살거려 주었다.

사랑해요. 카롤리나.


카롤리나는 도통 침대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배가 부른다고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옆에 딱 붙어선 그녀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몸이 고단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카롤리나는 본래의 자신이 그렇듯 임신 앞에서도 초연했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다며 벌벌 떨다 기뻐 울다 한 것도 션, 모든 음식에 거부 반응을 보이며 헛구역질을 3주 내내 했던 것도 션, 산파와 의사에게 꼬치꼬치 캐물으며 카롤리나 옆에서 계속 밤을 새느라 다크셔클이 죽 내려앉은 것도 다 션이었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합니다. 클라크 씨.”

“이제 의사를 보내줘. 네 말대로 세 번이나 검사했다고.”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안전에 안전을 가해야…”

침대 맡에서 일어나려는 션의 손목을 카롤리나가 홱 잡아 끌었다. 그대로 멈춘 션의 손을 살며시 자신의 부른 배에 갖다 대었다. 둥, 둥. 아주 미약한 움직임인데도 션은 생생하게 느꼈다. 건강하다는 증거를 아비에게 다시 한번 보여주려는 듯이 뱃속의 태동이 다시 션의 손바닥까지 전해져 왔다.

“우리의 아이야.”

카롤리나의 말에 션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들었다. 천천히 부인을 껴안고 흐느끼는 남자를 카롤리나가 한숨을 폭 내쉬며 등을 토닥거렸다. 익숙하게 봐온 장면이라서 그런지, 의사는 드디어 자연스럽게 방을 나가 퇴근할 수 있었다.

“이름은 뭐가 좋을까? 생각해 봤어?”

“뭐든 좋아요… 뭐든…”

“생각 해보라고 했지.”

꽉, 션의 머리칼을 카롤리나가 쥐어 뜯었다. 그러나 션은 아픔에도 웃을 수 있는 남자였다. 엉엉 울면서 입은 웃고 있는게 조금 기괴하다면 그랬겠지만. 그런 장면 또한 둘에게는 평범한 행복에 불과했다.

“아빠 사망!”

“야! 아버지라고 해야지. 꺄하핫! 아버지 사망!”

“로위나, 에이든. 서재에서는 달리지 말라고 말 했어.”

헉헉대며 자신의 옆에 웅크리며 눕는 션은 아랑곳않고 카롤리나가 말했다.

“네… 저는 죽었습니다. 이제 그만 할까요? … 카롤리나, 교체는 언제 해주는 거죠? 저는 한 3시간은 아이들과 뛰어 논 것 같은데요. 지쳤습니다. 이제 쉬게 해주시면 안될까요?”

“어. 아버지 말했다.”

“아핫! 아버지 살아 있어.”

“… 아닙니다. 방금 죽었습니다. 제발요.”

“너희들이 서재에서 뛰어다니는 게 이 시끄러운 인간 때문이구나.”

꽝! 카롤리나가 제법 두꺼운 책등으로 션의 머리를 내려쳤다. 툭, 뛰어난 연기인지 실제상황인지 알수 없는 모습으로 션의 눈에서 초점이 없어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어머니, 아버지 죽었어?”

“야! 돌아가셨냐고 해야지! … 아버지 돌아가셨어?”

“너희가 얌전히 있으면 다시 살아날거야.”

카롤리나의 말에 남매는 시시하다는듯 주변으로 흩어졌다. 이제야 조용해졌다며 카롤리나는 책장에 등을 기대어 다리를 쭉 폈다. 슬금슬금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 남편의 푸른 머리칼을 조용히 쓰다듬고 있자면, 주변에도 재미 있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달은 남매가 다시 부부 곁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담당하던 가정교사와 유모는 오늘 휴가였다. 클라크 백작가는 사용인들에게 돌아가면서 긴 휴가를 주곤 했으나 이제 성씨가 클라크가 된 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업무 양은 예전과 다를바가 없거늘. 션은 지금 휴가가 절실했으므로 꼭 눈을 감고 아들인 에이든이 자신이 누워 있는 모양새를 따라 책을 벽돌 삼아 벽을 세우는 것도 필사적으로 모른 척 하고 있었다. 그야 귀엽지만! 일어나는 순간 다시 아이들을 붙잡으러 다니는 온갖 종류의 괴물이 되어야 했다. 10살 된 딸과 8살 된 아들을 함께 놀아주는 건 이제 30대 후반인 션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오래된 사용인 생활로 체력은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마저 아이들은 소용없게 만들었으니.

“짠! 어머니~ 이것봐라? 내 안경 어디로 갔게?”

“소매에”

“에에- 어떻게 알았어?”

“네 아버지에게 배운 마술을 나에게 시도하려 하지 마렴”

실망감에 입술을 삐죽이는 로위나의 안경을 카롤리나가 다시 닦아 씌워주었다. 실눈으로 그걸 보고 있던 션이 결국 피식 새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걸 눈치 챈 에이든이 바로 션을 흔들기 시작한다. 동생이 하는 걸 보던 로위나가 바로 쪼르르 달려 오느라 에이든이 만든 책의 벽 일부가 무너진다.

“아버지 일어났어?”

“로위나… 이게 무슨 짓이야.”

“뭐? 아 이거? 미안.”

“사과로 끝날 일이었으면 제국에 법은 존재하지 않아.”

이런. 남매의 위기다. 션이 툭툭 몰래 카롤리나를 쳤으나 책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는 묵묵무답이다. 어쩔수 없는 건가… 아버지라는 책임의 무게를 이런 곳에서 느끼다니… 션은 따듯한 고행에 눈물을 흘리며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와아아!”

“아버지 일어났다!”

“꺄하핫! 잡아라~!”

그렇게 또 서재 안을 헤집으며 잡기 놀이를 하기를 1시간… 션이 다시 지쳐 카롤리나 곁에 눕자 이번엔 그녀가 죽은 괴물을 되살리는 포션이라며 무언가를 그의 입 안에 억지로 먹였다. (물론 평범한 피로 회복 포션이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카롤리나도 괴물을 되살리는 나쁜 연구자라고 달려 들었다. 본래 어떤 아동 서적이든 나쁜 과학자는 체력 싸움에선 지는 편이라, 카롤리나는 30분 만에 나가 떨어졌다. 바닥에 쓰러져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남매가 수근거렸다.

“어머니 아버지 둘 다 좀비 됐어.”

“우하핫! 저질 체력!”

“책에서 봤는데, 늙어서 그렇대.”

툭툭 발끝으로 부부를 번갈아 쳐보던 남매가 날다람쥐마냥 그 자리에서 뛰어선 션의 위로 달려들었다. 쿨럭! 복부와 가슴에 정통으로 아이들의 사랑을 받은 션이 아픔과 기쁨으로 울먹거렸다. 그 위를 뒹굴거리던 남매를 카롤리나의 손이 한명씩 거둬 일으켜 세웠다. 순순히 일어나는 걸 보면 이제 배가 고픈것 같았다.

“저녁 시간까진 좀 남았으니, 얌전히 방에서 기다리렴.”

“… 푸딩 먹고 싶어.”

“나도! 푸딩 먹을래!”

“디저트는 저녁 먹고 먹기로 했잖니. 그리고 요리사인 래빈은 지금 저녁 만드느라 바쁜거 알잖아. 더 성가시게 할 셈이니?”

“푸딩 먹고 싶은데…”

“푸딩…”

시무룩해진 얼굴로 바라봐도 카롤리나의 무표정은 끄떡없었다. 묵묵히 아이들 옷의 먼지를 털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단이 어머니다웠다.

“그럼 제가 만들어 볼까요?”

션이 덩달아 일어나며 에이든을 안아 들었다. 밑에서 환호하는 로위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는 그를 카롤리나의 커진 은안이 담아낸다. 시선이 마주치면 그녀의 얼굴은 변함이 없다. 늘 그렇듯, 담담한 무표정.

“아버지 요리해?”

“어머니처럼 독 들어가?”

“하하, 저는 보기보다 실력이 좋답니다. 기대해도 좋아요.”

꺄르륵 웃으며 먼저 서재를 빠져나가는 로위나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에이든이 발로 션을 마구 쳐댔다. 분부대로 소년을 내려주니 얼른 제 누나를 따라 달려 나간다. 달리지 말라고 그리 얘기했는데. 그러나 카롤리나는 어쩐지 더 이상 아이들에게 잔소리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서재는 엉망이다. 자신이 혼자 사용했을 땐 이렇지는 않았다. 위험 서적을 다 안쪽이나 위로 올린다거나 하는 번거로움도 없었다. 카롤리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그녀는 지금의 서재가 예전보다 마음에 들었다.

몸을 돌려 앞을 본다. 자신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남자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면 그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선천적인 조건반사처럼.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이상하고, 또 매혹적이었다. 그녀 또한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싶어지니까.

“션… 내가 너에게 말을 했었니?”

“까먹은 거 같은데… 이따가 벌을 주시겠나요?”

늘 이렇다니까. 고개를 가까이 하며 코 끝을 부벼 오는걸 한손으로 홱 막고 밀쳐내었다. “아하하, 아이들도 없는데 이리 튕기시다니 너무하십니다.” 금방 달라 붙어선 머뭇거리더니 살며시 손을 잡아온다. 바보 같은 사람. 그런 은유법으로도 말할 수도 있었으나, 카롤리나는 제대로 된 단어를 말하고 싶었다.

네가 있는 공간은 현실감이 없어져. 전부 타당한 논리와 그럴듯한 이해관계로 자아낸 현상임을 증명할 수 있음에도,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런 말로 표현하는 순간 너무 평범해져 버린다. 뇌의 화약 반응과 성욕과 오랜 시간 함께 지냈다는 친밀감이 빚어냈다는 우연.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쩌면 그런 평범한 마술쇼에 불과한 것일지도. 착각이며, 눈속임일지도 모른다. 카롤리나는 그런 가능성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쪽을 완전히 옹호하지도 않는다. 이것보다 멋진 마술은 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카롤리나는 션의 마술을 기꺼이 마법으로 여기기로 했다. 어떠한 장치도 속임수도 없습니다! 밑지는 셈치고, 속아보기로. 믿어보기로.

“나는 너를 사랑해.”

션의 두 눈이 그대로 멈추었다. 벌어진 입술이 믿지 못할 광경이라도 본 관객 같다. 그것이 즐거워 카롤리나는 결국 활짝 웃었다. 어떠한 논리도 이해관계도 없습니다. 현상과, 그걸 사실이라 느끼는 제가 있을 뿐입니다.

“너도 아름다워.”

와락 안겨드는 것이 아이들을 쏙 빼닮았다. 아, 아이들이 션을 닮은 것이겠구나. 카롤리나는 이제 이런 생각 하나만으로도 행복을 이해할 수 있다.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그의 등을 도담아 주다, 두 팔로 자신도 션을 꽉 힘주어 껴안았다.

품 안이 따듯했다. 그게 사랑의 본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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