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칼

마땅한 욕심

"내 욕망대로?"

"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저를 마음대로 써 주세요!"

"이미 그러고 있는걸?"

뭔가 했더니 언제나의 응석이었나. 보고 있던 논문집에 다시 시선을 옮기니 위로 검은 채찍이 대뜸 내밀어진다. 고개를 올리면 무슨 연서라도 건네는 소년마냥 수줍게 웃고 있는 남자의 푸른 머리칼이 시린 바람에 흩날린다.

"부디... 어젯밤처럼 저를 엉망진창으로..."

"싫어."

팽! 그의 손에 있던 채찍을 후려치니 저 멀리 날라간다. 쌩하니 달려가 도로 그걸 주워오는 모습마저 잘 훈련한 개 같다. 다시 갖고 와 싱글거리며 내미는 걸 이번엔 저 멀리 분수를 향해 던졌다. 이거로 잠시간은 조용해지겠지.

... 책을 몇 장 읽지도 못했는데 션은 그걸 또 헉헉대며 갖고 온다.

"카롤리나... 사양, 허, 허억, 안해도 됩니다... 저는 오늘을 오직 당신에게 몸과 마음을 다해 봉사하기 위해 모든 업무를 처리하고 왔으니까요."

"아니, 이건 내가 아니라 네 욕망이잖아."

"후후... 과연 그럴까요? 이걸 들고 제 등을 가혹하게 내려쳤을 때의 얼굴을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죠."

"응. 내가 하고 싶은거 생각났어. 네가 저 분수에 머리부터 처박혔음 좋겠네."

"지금은 12월입니다만 저의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

"일단은 우리 저택의 정원에도 정원사가 일하고 있으니 내 허락없이 탈의를 하지 말아줄래?"

내 말을 듣자마자 바로 셔츠 단추를 다시 잠구는 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음, 역시 좀 짜증났으니까 그가 도로 입으려던 새하얀 정장 마이를 가로채선 내 어깨에 덮어 두었다. 엉거주춤 서 있던 션이 으슬으슬 몸을 떨면서도 정체 모를 미소를 짓고 있다. ...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더 불쾌하다.

“과연. 극한의 환경에서의 방치로군요.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그러니까... 내 욕망이 아니라 자꾸만 네 욕망대로 하고 있잖니. 주인을 자꾸 성가시게 하다니 벌을 받고 싶은가 보구나.”

엣취! 하고 크게 재채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책의 글자를 눈으로 훑는다.

“그것도 좋겠지만은, 말씀드렸다싶이 오늘은 정말 카롤리나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고 싶으니까요.”

... 책을 덮는다. 작게 한숨을 쉬며 내 전속 집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 기쁜건지... 실실 웃는 얼굴의 두 뺨이 발그레져 있다. 그것이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어.”

카롤리나 마리에트 클라크. 내 이름에 담긴 의미를 그가 모를 일은 없었다. 부족함 없이 자랐다는 자각은 있다. 같은 백작가의 영애들보다도 나는 훨씬 내 맘대로 사는 중이었다. 그 중 하나가 작위도 지위도 없는 이 남자랑 곧 결혼한다는 고집이었고.

“너도 알고 있을텐데?”

“하하, 그런게 아니라...”

션이 스스럼없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귀족과 평민. 단지 그 차이로 자신의 자존심을 낮출 남자는 아니었다. 날 올려다보는 안경 너머의 눈이 행복으로 가늘어진다. 것봐, 또 네 욕망대로 하고 있잖니.

“제가 당신의 욕망을 채워주고 싶어서 그래요.”

“... ... .”

나에게 봉사하는 것만이 자신의 기쁨인 사람처럼 웃는다. 황홀하게, 혹은 그 외에는 모두 덧없는 짓이라는 듯이. 그 시선의 기저에 깔린 감정이 무엇인지는 이제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홱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버티고자 하면 버틸 수 있을 체격과 완력 차이를 두고서도 션은 내 이 나약한 손아귀 하나만으로 몸을 일으키고, 내가 이끄는 대로 옆에 앉았다. 자신의 중심이 없기에 이리 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중심은 나이기에 그저 믿는 것이겠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대도.”

션의 머리를 꾹 눌러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가 흠칫 놀라는 것이 굳은 어깨를 통해 전해져 온다. 그럼에도 일어나지 않는 건 네 욕심이니? 아니면 내 명령이 없었으니까? 어느쪽이든 귀여운건 마찬가지구나.

“... 저기... 카롤리나...”

“조용히. 책 읽는데 방해되잖니.”

사실 책 같은 건 그냥 펼쳐 놓았을 뿐이다. 빨개진 귓가며 좁은 벤치에 몸을 웅크려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며... 지금 나한테는 이쪽이 더 재밌는 구경거리니까. 푸른 머리칼을 몇 번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톡, 일부러 귀에 걸쳐진 안경대를 건들기도 했다. 션이 움찔거리다 고개를 돌리려던 걸 턱을 살살 간지르며 막았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요...”

“내가 허락했던가?”

“...아니요...”

곧바로 얌전해지는 게 고분고분하니 좋았다. 왜 이러는지는 잘 몰랐지만. ... 역시 좀 추웠던 걸까?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보면 오히려 평균 체온보다 따듯했다.

“내 욕망대로 하게 해준다며?”

“이게 당신의 욕망인가요?”

“아마도.”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게 그 욕망의 본질이라면... 그럴지도. 허나 그에게 앞서 했던 말들도 전부 사실인건 매한가지다.

“생각해보니 건방지네... 내 욕망대로 해도 되는 날이라던가, 그런걸 언제부터 네가 정한거니?”

“아니, 제 뜻은 흐에 아이라...”

쭉 그의 한쪽 뺨을 꼬집으며 중얼거리니 무릎 위에서 꿍얼거리는 변명이 들려왔다. 손을 옮겨 이번에 귀를 잡아당긴다. 아프다고 작게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션은 여전히 내 무릎을 베고 있다. 날은 충분히 차가웠으나 나는 이 순간 온기를 느끼고 있다. 맞붙은 사람과의 체온... 보다는 더한 무언가로 인해서.

욕망을 숨기는 삶은 아니었다. 나는 환경도 받쳐준 덕분에 지금의 클라크 백작 영애가 될 수 있었다. 사교회에는 도통 얼굴을 비추지 않고 매일 연구실에서 연구만 하는 괴짜. 아카데미 출신의 콧대 높은 백작 영애. 모두 내가 이뤄낸 삶이었다. 거기에 성벽이 이상한 남자를 집사로 들인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나는 너를 원했고, 내 욕심을 부려 데려왔다.

그리고 그 결정에 일말의 후회도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욕망대로 살고 있어. 너에 대한 건 특히.”

고개를 내려 살며시 붉어진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내 사람, 나의 집사, 오직 나만 바라봐야 할 내 귀여운 강아지에게

“그러니 얌전히 내 곁에 있으렴.”

나의 욕망은 네가 내 곁에 있어주는 것. 그걸로 비로소 시작되고, 또 완성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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