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ADENT

DECADENT 1

유청연 × 천서진

세상의 모든 것에는 급이 있다. 자동차도 집도 하물며 사람마저도 그렇다. 모두가 더 높은 계급을 욕망하지만 그 공고한 서열을 넘어서 계급 상승을 거머쥐는 인간은 극소수다. 그들조차도 계급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다만 더 높은 계급에 속하기를 갈망한다. 그 누구도 카스트의 계급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청아재단 이사장의 손녀는 제이킹 홀딩스 회장의 딸과 어울려야지 자격증조차 없이 부동산을 보여주고 다니던 여자의 딸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 헤라팰리스 내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규칙을 어기는 자는 늘 사람들의 눈 밖에 나게 된다. 헤라팰리스 내의 소식은 늘 빠르고 사람들은 계급의 변동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95층에 사는 하진의 유청연이 45층의 오윤희와 얼굴 맞대고 차를 마셨다는 소식은 오후가 되기도 전에 헤라팰리스 전체에 퍼졌다. 48층에 사는 회계법인 대표가 카페에서 둘을 목격했고 골프를 같이 치는 50층의 이규진에게 말을 전했고 이규진은 헤라 클럽 단톡방에 대박 소식, 을 전했다. 단톡방에 불이 났다. 고상아는 유청연이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라 했고 강마리는 그에 맞장구를 치며 오윤희 그 여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하윤철과 천서진은 침묵을 지켰다. 그건 고작 누가 누구와 차를 한 잔 마셨다 따위의 일이 아니었다. 유청연은 하진이었고 헤라팰리스 내의 입주민이라면 누구나 유청연과 차를 마시고 싶어했다. 유청연은 번번히 그런 제안들을 거절하며 노골적인 선을 그었다.

하진이라는 배경 앞에서는 그런 무례마저 쉽게 용서를 받았다. 입주민들은 하진과 유청연을 결부시켰다. 하진이라면 그럴 수 있지. 유청연 특유의 자폐적인 성격마저 고고함의 상징처럼 포장되고 칭송받았다. 헤라팰리스 내에서는 유청연의 이미지가 곧 하진의 이미지가 되었고 유청연의 취향이며 태도가 곧 하진의 그것이 되었다. 입주민들은 유청연을 선망했고 그래서 천서진을 부러워했으며 서진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유청연이 이화원을 두고 헤라팰리스에 입주한 것이 오직 천서진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천서진만이 유청연에게 질문을 했고 원하는 답을 얻었고 유청연을 불러냈다. 그건 신의 신탁을 받는 것과 같았고 신은 오직 서진만을 사랑했다.

서진은, 내일 아트 스터디에 유 이사님도 부르는 건 어떠냐 따위의 말을 흘리며 은근한 시선을 던져오는 강마리와 고상아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나중에는 애원으로 잦아드는 눈길 앞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건 서진만의 특권이었다. 유청연은 언제나 천서진의 권유를 받은 뒤에만 자리에 나타났다. 누구나 한 번쯤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어 안달인 그 애가 서진에겐 그렇게 쉬웠다. 청연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으레 서진을 찾았다. 유 이사님은 뭐 좋아하세요. 언제 한 번 약속이라도 잡아 주시면 안 될까요. 그냥 자리만 만들어 주시면. 선물을 싸 들고 온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비굴했다. 서진은 그 순종이 청연을 향한 것임을 알았다. 그들이 그렇게나 두려워하고 추앙하는 아이는 서진의 시선이며 어조 앞에 무한히 파멸했다. 그것이 좋았다.

"유 이사님은 진짜 왜 그러신대요?"

"맞아요. 아니, 우리가 차 한 잔 하자 그럴 때는 항상 딱 잘라 싫다 그러시더니. 어떻게 오윤희 씨랑 차를 마셔요? 우리가 오윤희 씨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천 쌤. 말 좀 해 봐요. 유 이사님 생각이야 천 쌤이 제일 잘 알지 않겠어요?"

그러니 오윤희와 단둘이 차를 마신 것은 유청연의 정치적 실패였다. 사람들은 누구도 갖지 못하는 것을 선망하지만 저보다 못한 사람이 제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것에는 부당함을 느끼고 분노했다. 유청연이 오윤희에게 자리를 내어 준 것이 유청연의 평판에는 치명타였다. 하기야 그런 평판 따위를 신경 쓸 애가 아니었다. 강마리는 유청연을 앞에 두고는 결코 못 할 소리들로 불평을 늘어 놓았다. 옆에 앉은 고상아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대꾸 대신 반쯤 식어 미지근해진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 삼켰다. 지금 막 퇴근한 사람을 공용 커뮤니티에 붙잡아 둘 때는 다 이런 목적이 있었겠지. 결국 제들끼리 청연을 찾아갈 용기는 없으니 서진이 총대를 메고 이 사태의 전말을 따져물어 달라는 것이 그 불평의 저변에 깔린 의도였다.

"글쎄요. 저라고 특별할 게 있나요."

서진은 그 얕은 수작에 넘어갈 마음이 없었다. 유청연이 오윤희와 차를 마신 일이 유쾌하지 않긴 했으나 그런 식의 수작에 맞추어 움직이는 일 또한 유쾌하지 않은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유청연의 의중을 읽는 일은 어려웠다. 제아무리 천 길 바닷속은 알아도 열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유청연의 경우는 유별났다. 찾아가 무슨 생각인지 따져 물어도 돌아오는 답을 이해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유청연은 그랬다. 강마리는 서진의 대답에 맥이 빠지는지 아휴,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말을 덧대려던 고상아의 시선이 커뮤니티 입구 문간에 붙박였다. 벌어진 입술에서 어머어머, 하는 경받스러운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서진은 고개를 돌렸다. 유청연과 오윤희가 유리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유청연은 지금 막 퇴근한 듯 정장 차림이었다.

"둘이 이젠 아예 같이 다니기로 한 거예요?"

고상아가 숨 죽여 던진 물음은 많은 것을 함의했다. 그 짧은 문장에 오윤희와 유청연의 관계에 대한 추측에서부터 서진의 특권이 오윤희에게로 승계된 것 아니냐는 은근한 조롱까지 담겨 있었다. 서진은 와락 짜증이 났다. 유청연은 오윤희와 대화를 나누며 커뮤니티 구석의 자리로 향했다. 서진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별다른 인사가 없었다. 평시에도 알은 체를 하며 살갑게 구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눈이 마주친 이상 고개라도 까딱해 보일 법 한데, 청연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둘은 서진을 지나쳐 2인용 좌석에 앉았다. 뭉개져 뜻을 알기 어려운 문장들이 조금씩 들려 왔다. 유청연이 무언가 묻고 오윤희가 답을 하는 듯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서진 가까이 고개를 숙인 강마리가 숨 죽인 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둘이 무슨 이야기 하는 걸까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유 이사님, 천 쌤한테 아는 척도 안 하는 거 봤어요?"

"나 참..., 유 이사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래요?"

이러저러한 낭설들이 난무했다. 비단 강마리와 고상아 둘의 일이 아닐 터였다. 헤라팰리스 전체가 유청연과 오윤희의 일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서진은 유청연을 보았다. 테이블 위에 비치된 일회용 냅킨에 무엇을 그려 가며 설명하는 태가 짐짓 진중했다. 오윤희 또한 유청연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윤희 따위와 유청연 사이에 그리 중요한 대화가 있을 리는 없었다. 자격증도 없이 부동산이나 보여 주고 다니는 여자 따위와 하진 홀딩스 기조실장 간에 사업상의 볼일이 있을 리가. 서진은 한 쪽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유청연은 설명이 끝난 듯 펜을 제 재킷 안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오윤희가 냅킨을 챙겼다. 그 쯤 되니 둘의 대화를 애써 모른 체 하던 강마리와 고상아는 몸이 달아 어쩔 줄을 몰랐다. 어쩌면 그 냅킨에 하진 건설의 재개발 호재나 하진 바이오의 신약 실험 결과가 담겨 있을지도 몰랐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열심히 한대요?"

"냅킨 챙기는 거 봤죠. 뭘까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가요, 민혁 엄마."

"네? 가면 뭘 어쩌려고요?"

"아이. 나도 몰라. 밑져야 본전이지."

"아니, 제니 엄마. 진짜 가요?"

강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마리를 말리려던 고상아 또한 끝내는 서진의 눈치를 살피다 강마리의 뒤를 따랐다. 서진은 오윤희와 유청연 간에 무슨 일이 있든 저와는 관계가 없을 뿐더러 관심 또한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강마리는 오윤희에게 말을 붙이며 자연스레 오윤희의 옆 자리를 꿰고 앉았다. 고상아는 유청연의 옆자리에 앉아도 좋을지 몰라 얼떨떨한 낯으로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유청연은 편히 앉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제 몫의 음료를 마시다 문득 고개를 들어 홀로 남은 서진을 흘깃 일별했다. 서진과 청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데. 유청연의 눈은 닫힌 창이었다. 무엇 하나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 쪽에선 무엇도 읽지 못했는데 상대는 제 속내를 훤히 읽어내는 것은 불쾌했다. 서진은 청연에게 속에 든 것을 내보이지 않으려 무감한 낯을 지어 보였다. 유청연은 입꼬리를 말아올려 웃었다. 나른하면서도 도발적인 묘한 웃음이었다. 흠 없이 아름다운 낯짝이 지독하게 불쾌했다.

유청연의 시선을 눈치 챈 강마리가 먼저 일어섰다. 뒤늦게 서진의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천 쌤만 혼자 남겨두고 왔네. 저 쪽으로 가요, 그런 말을 주워 섬기며 엉거주춤 몸을 트는 것이 보기에 꼴 사나웠다. 서진은 짐짓 듣지 못한 체 찻잔에 담긴 티백을 꺼내 찻잔 받침 위에 올려 두었다. 합석 따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홀로 앉아 있다 먼저 돌아가는 것은 싫었고, 오윤희 따위에게 밀렸다는 인상을 주는 일은 결단코 사절이었다. 인사조차 않고 데면데면하게 굴 때는 언제고. 유청연은 순순히 자리를 옮겨 왔다. 서진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오윤희 또한 달리 싫은 티를 내지 않고 유청연의 옆자리를 꿰찼다. 강마리가 천 쌤, 괜찮죠? 하며 뒤늦게 의사를 묻는 것이 성질을 더욱 긁었다. 서진은 애써 태연한 체 괜찮죠, 대꾸했다. 입 안이 바짝 타는 듯해 차를 한 모금 삼키자 맞은편에 앉은 유청연의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근데 아까 봤는데. 유 이사님, 오윤희 씨한테 뭐 써주신 거예요? 냅킨에 막, 쓰시던데?"

"유 이사님 혹시 오윤희 씨한테만 투자 정보 같은 거 알려주신 거 아녜요? 저희한테도 좀 알려 주세요. 이웃 좋다는 게 뭐예요."

"아이 참. 투자 정보 그런 거 아닌데...."

"그럼 둘이 그렇게 비밀스럽게 할 이야기가 대체 뭔데요? 우리도 좀 알자. 응? 오윤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사람이 실속 있는 타입이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아닌 척이겠지."

강마리와 고상아는 멋대로 떠들어댔다. 겉으로는 오윤희를 상대로 하는 말이었으나 그 실질은 유청연을 향한 비난이었다. 유청연은 그 공격을 알면서도 모른 체 흘려냈다. 오윤희를 두둔할 필요도 이유도 달리 느끼지 못한다는 듯 무심한 태도였다. 그 편이 유청연다웠다. 짧은 순간 느낀 잠깐의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기야 일생 가장 좋은 것만을 누리며 빈곤을 사전적 의미 그 이외의 무엇으로도 느껴 보지 못한 아이가 오윤희라는 낯선 대상에 조금의 흥미를 느끼는 것은 그리 신기할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오윤희가 아닌 그 누구인들 같았을 터다. 빈곤이라는 추상적 개념 그 자체에 대한 학구적인 열의 앞에서 오윤희라는 개체는 단지 빈자의 표현형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니까, 오윤희 네깟 게 넘볼 자리도 아이도 아니다. 헤라팰리스 입주민 사이에서 일종의 소속감이라도 느끼는 양 묘하게 들뜨고 신난 듯 보이는 오윤희의 태도가 우스웠다. 서진은 소리 없이 조소하다 유청연이 이 편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유청연은 소파 팔걸이에 몸을 반쯤 기대어 앉아 있었다. 사냥 끝에 성공적인 식사를 마친 짐승 같았다. 언제부터 이 쪽을 보고 있었는진 몰라도 서진의 표정을 본 것만은 분명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음기 머금은 눈동자가 묘한 이채로 빛났다. 당신 속내쯤은 훤히 안다는 여유로움이 그 태도며 얼굴에 적나라했다. 개자식. 서진은 뒷덜미가 괜히 홧홧해졌다. 오윤희를 향한 물음들은 이제 반쯤 추궁이었다. 오윤희는 연신 손을 내저으며 진짜 별 것 아니라니까요, 항변했으나 고상아도 강마리도 오윤희의 말을 믿을 생각은 없는 눈치였다. 단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잠재울 수 있을 유청연이 한참 입을 다문 채 서진의 얼굴만을 응시하고 있으니 오윤희 혼자 그 모든 억측들을 감당하느라 고군분투할 수밖엔 없었다. 서진은 유청연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되려 그 눈을 마주 보았다. 그저 끝없이 검은 눈동자였다. 네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에 심연도 너를 들여다볼 것이라 말한 것이 니체던가.

"법원 경매 매커니즘에 대해 물은 게 실속 논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짧은 대꾸를 흘렸다. 여전히 시선이 서진의 낯을 좇고 있었다. 서진은 짜증스러운 심경을 들키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유청연은 목적 없는 언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제가 오윤희 편을 들면 천서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어 부러 서진의 성질을 긁는 게 빤했다. 어린 애 장난질에 놀아나고 싶진 않았다. 서진은 청연의 대꾸를 무시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다면 신경을 긁어서라도 관심을 받아 보겠다니. 하진의 상속자치곤 발상도 태도도 지나치게 어렸다. 서진은 유청연이 오윤희의 역성을 들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굴었다. 강마리와 고상아만이 그 답의 진위 여부를 두고 왈가왈부 말이 많았다. 오윤희 씨가 법원 경매는 왜요, 부터 그걸 왜 유 이사님한테 물어본대요? 까지 무엇 하나 문제삼지 않는 게 없었다.

"아니, 오윤희 씨가 법원 경매는 알아서 뭐 하려고 그걸 물어?"

"저도 부동산으로 돈 좀 벌어 보려는데 뭐 아는 게 있어야죠."

"부동산으로 돈은 아무나 버는 줄 아나. 참 나."

"제니 엄마도 하고, 주 회장님도 하고 헤라팰리스 사람들 다 하는데 내가 못할 게 뭐 있어요."

서진은 기어코 인상을 쓰고 말았다.  그 말 한 마디가 신경을 완전히 긁어 놓았다. 대부분의 입주민들은 헤라팰리스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주상복합이자 입주민 대부분이 선별된 사회 지도층인 이 작은 바벨탑은 안과 밖을 구분짓는 경계였고 그건 일종의 선민 의식으로 이어졌다. 내외부의 사람들에게 헤라팰리스는 곧 부유함을 상징했다. 비록 그 내부에서도 각 층으로 구별되는 서열이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어찌 되었든 헤라팰리스의 입주자들은 바깥의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오윤희는 헤라팰리스 바깥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은 주 회장의 작은 실수로 헤라팰리스에 입주해 있지만 헤라팰리스 내의 누구도 오윤희를 그들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윤희는 그저 헤라팰리스라는 하나의 유기체에 생겨난 작은 종양 같은 거였다. 언젠가 깔끔하게 도려내어질 테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 그냥 두었을 뿐인. 그러나 그 종양이 저를 전체의 일부로 여기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서진은 차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그게 뭐. 설마 여기 사람들이 너랑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운 좋은 덕에 평생 꿈도 못 꿀 과분한 집에서 살고 있으면 주제 파악을 좀 하는 게 어떨까. 오윤희."

"맞아. 나 운으로 여기 들어왔어. 내 평생 꿈도 못 꿀 과분한 집도 맞고. 근데 서진아,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좀 웃긴다. 너도 부모 잘 만난 운으로 여기 사는 건 똑같잖아. 설마 그게 네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오윤희. 네가 진짜 돌았구나."

"정말 네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오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생각도 못 한 말을 들었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낯짝이 가증스러웠다. 서진은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윤희의 얼굴에 찻물을 끼얹었다. 제법 거친 동작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오윤희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액체가 목덜미며 옷을 적시고 더럽혔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유청연 또한 몇 방울을 맞았는지 제 옷소매를 툭툭 털었다. 오윤희는 종이 냅킨으로 제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내고는 서진을 올려 보았다. 이 정도의 수난은 이미 각오했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듯 결연한 눈빛이었다. 서진은 그 눈빛이 질렸다. 청아예술제 대상 트로피를 내어 놓으라며 달려들던 그 날의 눈이 떠올랐다. 천서진과 오윤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보았다. 유청연은 그 첨예한 대립조차 유흥의 일부라는 양 앉은 자세를 편히 늦추고 동태를 살폈다. 강마리와 고상아만이 휴지를 가져 온다 직원을 부른다 하며 소란을 피웠다. 커뮤니티 입구에서 누군가 엄마! 하고 불렀다. 배로나였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 로나야. 괜찮아. 별 일 아니야."

"다 젖었는데 뭐가 별 일이 아니야. 무슨 일인데 그래."

"됐어, 엄마 진짜 괜찮아."

제 엄마에게 달려온 아이가 냅킨이며 교복 소매로 오윤희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갈등이 해소되는 전개치고는 지나치게 맥이 빠졌다. 천서진은 배로나와 오윤희의 모습을 일별하고는 등을 돌려 커뮤니티를 나섰다. 천 쌤, 부르며 천서진을 쫓아가려던 고상아를 강마리가 붙들었다. 지금 따라가 봐야 좋은 말 못 들어, 저 성격을 몰라? 하는 속살거림 위로 천 쌤이 이런 거야? 묻는 배로나의 목소리가 겹쳤다. 오윤희는 아니라고 말하지도 그렇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괜찮아, 무의미한 어구만을 반복했다. 고장난 축음기 같았다. 유청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란한 것은 질색이었고 극적인 장면들은 모두 막을 내렸다. 무대를 떠난 소프라노는 고층부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화를 삼키지 못한 듯 한껏 날 선 눈빛이며 열기로 붉어진 뺨 따위가 사랑스러웠다. 곁에 다가와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서진의 얼굴이 더욱 차게 굳었다.

"꺼져."

"보는 눈 있는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한 건 어리석었어요."

"누가 너더러 그따위 조언 해 달랬니. 꺼지라는 말 못 알아들어?"

"오윤희 씨가 왜 그렇게 싫은데요?"

"유청연. 인내심이라는 것도 끝이 있어."

서진은 청연을 올려 보았다. 마지막 경고였다. 청연은 서진의 얼굴을 빤히 보다 제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서진의 얼굴에 튄 물방울 위로 손수건을 가져다 대었다. 유청연이 손을 놀릴 때마다 셔츠 아래 드러난 흰 손목에서 옅은 향수 향이 풍겼다.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서진은 그 세심한 손길에 더욱 짜증이 났다. 오윤희와 합심해 제 열을 올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생각해 주는 양 구는 것이 되려 역했다. 적당히 좀 해, 서진은 청연의 손을 힘껏 쳐냈다. 느슨하게 쥐고 있던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청연은 놀라는 기색조차 없이 서진을 보았다. 그 정도의 반응은 이미 예상했기에 달리 놀랄 이유도 없다는 듯 태연했다. 청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진 또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도착음 끝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서진은 청연을 노려 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탔다. 딛은 하이힐 굽에 유청연의 손수건이 밟혔다. 상관 없었다. 유청연은 엘리베이터에 따라 오르지 않았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는 애였다. 서진은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느릿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유청연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