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ADENT 2
유청연 × 천서진
야. 하은별. 너 그거 들었냐? 천 쌤이 배로나네 엄마한테 차 끼얹은 거? 월요일 아침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민혁은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인 이규진도 어머니인 고상아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호사가였으니 그 자식인 이민혁이 남들의 소문 앞에 어떨지는 빤했다. 그렇단들 지나치게 큰 목소리였다.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기출 문제집을 붙들고 있던 은별의 표정이 굳었다. 헤라팰리스 내에서 서진과 윤희 사이의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강마리는 오윤희와 천서진 간에 오갔던 대화마저도 흉내를 내 가며 전했다. 그 끝에는 사견이 붙었다. 솔직히 천 쌤, 부모 잘 만난 건 맞지 않아요? 자기도 찔린 것 아니겠어요? 이따금은 어린 은별의 귀에까지 숨 죽인 대화들이 들려 왔다.
그러나 이제는 헤라팰리스 밖의 아이들마저 그 일을 알게 될 터였다. 청아예고는 헤라팰리스와 여러 면에서 닮아 있었고 소문이 빠르다는 것은 그 중 하나에 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헤라팰리스에 살지 않는 여자 애 한 명이 이민혁에게 다가가 뭔데? 무슨 말이야? 물었다. 그에 함구할 이민혁이 결코 아니었다. 잔뜩 신이 나 이게 또 대박 사건인데, 거들먹거리는 꼴이 볼성사나웠다. 은별은 애써 들리지 않는 척을 했다. 눈 앞에 펼쳐진 문제집은 읽히지 않았다. 검은 글자들이 눈에 스쳤다 허공으로 사라졌다. 은별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배로나도 오윤희도 싫었다. 이민혁은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뗐다. 아니, 배로나네 엄마가 천 쌤한테.
"... 저기, 미안한데. 조금 시끄러워. 민혁아."
낮은 음성이 이민혁의 말허리를 끊었다. 행여 상대의 기분을 해하지는 않을까 한껏 조심스런 어조였다.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경하준이었다. 경하준은 하진그룹 유택현 회장의 증손주였고, 하진전자 유희수 사장의 외동아들이었고, 하진홀딩스 유청연 이사의 조카였다. 둥근 안경테며 약간은 숫기 없는 표정 따위가 그 소심한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바이올린 전공이었으나 청아예고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내내 수석을 도맡아했던 유청연만큼 재능을 보이지는 못했다. 기실 하진이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청아예고에 입학한 케이스였다.
경하준은 늘 조금은 주눅이 든 듯 시선을 깔고 다녔다. 동급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법도 좀처럼 없었고 누군가 의견을 묻는다 치면 단지 어색한 웃음으로 일관했다. 그 얼굴의 어디서도 하진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입학 당시만 해도 경하준을 하진의 직계로서 우대하고 선망했으나, 개학 한 달이 지난 지금은 그저 소심하고 답답한 모범생 정도로 생각했다. 더군다나 입학식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청연이 대대적인 개혁으로 지주사를 변경하고 하진 홀딩스 내의 기획조정실을 부활시켜 기획조정실장 자리를 차지한 터라, 하진 가의 승계 구도가 유희수에서 유청연에게로 돌아설 것임이 자명해졌다.
경하준은 이제 하진의 직계가 아니었다. 그건 하늘과 땅 차이였고 아이들은 그런 것에 민감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경하준에게 부러 말을 붙여 보려 애쓰지 않았다. 더군다나 같은 방계라 한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유청연과 지금 경하준의 입지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하진의 직계인 부친과 한국의 케네디 가로 일컬어지는 정치명문가의 장녀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데다가 조부인 유택현 회장이 유달리 예뻐해 어린 시절부터 실권자 취급을 받던 유청연과 달리, 경하준은 어머니인 유희수가 가난한 검사와의 연애 끝에 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갖게 된 아이였다. 유택현 회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맏사위를 집안에서 내쫓으며 그 씨인 하준마저도 스위스의 국제 학교로 유배 보냈다는 사실은 정재계 인사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하준에게 베푼 친절은 다만 언젠가 그 애의 어머니인 유희수가 하진의 회장이 될 것이고, 그럼 또 언젠가 그 애가 하진의 회장이 될 것이라는 계산에서 기인했다. 하진의 승계 구도가 변한 이 때에, 아이들이 경하준을 우러러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더군다나 퀸 엘리자베스 콩쿨 위너로 자타가 공인한 천재인 유청연에 비해 경하준의 실력은 미진했다. 유청연은 10년 전에 학교를 졸업했지만 학교 복도에는 여전히 유청연의 트로피가, 유청연의 명성이 남아 있었고 유청연을 가르친 선생들 또한 남아 있었다. 유청연의 조카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때마다 아이들의 시선도 점차 노골적인 비웃음을 띠었다. 경하준은 그걸 알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애가 지금 이민혁에게 시끄럽다, 고 말했다. 반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동급생 상대라기엔 지나치게 공손한 어조이긴 했으나 그 본질은 닥쳐라였다. 이민혁은 얼떨결에 입을 닫았다. 무어라 반응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제아무리 하진의 방계라지만 기실 유청연의 조카였고 유희수의 아들이었다. 입을 닫고 있을 때야 만만했으나 행여 제 어머니에게 이르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크게 일이 날 것임이 분명했다. 아이들은 경하준의 눈치를 살폈다. 시선이 몰리자 하준의 얼굴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준은 어, 그, 고마워, 같은 소리를 마구잡이로 주워섬기며 제 자리에 앉았다. 이민혁은 경하준 따위에게 한 소리를 들은 것이 짜증스러운지 연신 쟤는 뭐야, 웬 간섭, 하며 투덜거렸으나 차마 경하준에게 직접 시비를 걸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민혁이 정말로 끝내 입을 닫을 리는 없었다. 점심 시간이 되자 전교생이 그 일을 알았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윤희와 서진 사이의 일을 논했다. 은별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학원이 마친 후 제 집에 가기 위해 헤라팰리스 로비를 지나는 배로나를 붙들어 세운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일과 시간 내내 억눌러 왔던 짜증이 기어코 터졌다. 배로나는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존재였다. 배로나 따위와 제가 같은 지붕 아래에 산다는 것이, 이웃사촌이라는 이름으로 묶인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애당초 배로나와 그 엄마만 아니었다면 이런 식의 소문에 시달릴 일도 없었다. 은별은 충동적으로 배로나의 팔을 세게 잡아 당겼다. 그 손길을 떨쳐 낸 배로나가 뒤를 돌아 보았다.
"뭐 하는 거야, 하은별."
"짜증나. 배로나 네가 뭔데 여기 있어?"
"여기가 우리 집이니까 있지. 너도 살잖아."
"너도, 너네 엄마도 다 거지 같아."
"뭐? 야. 하은별. 너 다시 말해 봐. 뭐라고?"
배로나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한 걸음을 딛어 바짝 다가오는 몸짓이며 가까워진 얼굴에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은별은 움찔 긴장하면서도 애써 대범한 체 굴었다. 거지 같다고, 너도, 너네 엄마도. 한 음절 한 음절을 떼어 짓씹듯 뱉어 냈다. 로나도 은별도 충동적인 성미였고 은별의 발언은 로나의 성질에 불을 붙이기 충분했다. 로나는 은별의 어깨를 밀치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입학 전 천서진의 레슨실 앞에서 입시 비리를 밝히라 농성하던 중 실수로 하은별을 밀친 탓에 합의금으로 1억을 지불해야 했던 일이 떠올랐다. 윤희는 그 1억을 위해 요구르트 배달이며 대리 기사 일까지 해야 했다. 로나는 주춤 손을 거뒀다.
"사과해. 하은별. 그딴 말 한 거 사과하라고."
"내가 왜?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너 지금 우리 엄마 때문에 이래? 우리 엄마가 천 쌤한테 한 말 때문에? 왜. 네가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해?"
이번엔 로나의 발언이 은별의 성질을 긁었다. 정곡을 찔린 탓에 더욱 화가 났다. 은별은 로나의 어깨를 밀치려 팔을 뻗었으나 로나는 몸을 옆으로 비켜 서 은별을 피했다. 짚을 자리 하나 없이 균형을 잃은 몸이 앞으로 넘어갔다. 넘어진다. 은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한 추돌은 없었다. 다만 바닥이나 벽보다는 훨씬 무른 무엇에 머리를 부딪혔을 뿐이었다. 마르고 긴 손이 은별의 어깨를 감쌌다. 은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이 눈에 들었다. 유청연이었다. 하필 또. 어쩐지 유청연에게는 늘 최악의 순간만을 목격당했다. 그것이 제법 자존심 상했다. 은별은 유청연을 밀어 내며 제 자리에 섰다.
"이런 식의 폭력행위가 어떤 결과를 수반하는지는 학기 초에 이미 뼈아픈 결과로써 학습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느낀 바가 전혀 없었던 모양이지."
"제가 밀친 거 아니에요. 하은별이 먼저...."
"귀책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결과론적인 문제지. 이번에도 내가 잡지 않았다면 합의금을 마련하느라 애쓰는 건 오윤희 씨가 됐을 텐데. 그 정도의 판단력은 있을 나이지 않나."
"그럼, 저는 하은별이 뭐라고 하든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했을까요? 그게 옳다고 생각하세요?"
"피로스의 승리¹라면 거두지 않는 편이 낫다. 손실이 큰 싸움은 피할 줄 아는 것도 지혜겠지."
은별은 청연의 얼굴을 곁눈질로 살폈다. 말의 의도를 짚어내기가 어려웠다. 딸의 실책으로 고생해야 할 오윤희를 걱정하는 마음인 건지 또는 그를 가장해 하은별을 두둔하고 배로나의 항변을 묵살하려는 의도인 건지. 불과 며칠 전 오윤희와 천서진의 설전을 방관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 와 은별과 로나 사이에 끼어들어 뜻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까닭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피로스의 승리 운운하며 엄마의 고생을 논하는 데에는 배로나 또한 할 말이 없는 눈치였다. 유청연은 양측 모두가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돌아섰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멀어지는 뒷모습마저 의뭉스러웠다. 은별은 로나를 노려보았다. 배로나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 시선을 되받곤 몸을 돌려 유청연을 뒤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헤라팰리스의 엘리베이터는 고층부와 저층부가 분리된 구조였지만,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기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은 서로를 피할 수 없었다. 유청연은 아까의 다툼은 이미 잊었다는 양 무심한 낯으로 고층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은별은 저층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로나를 노려 보며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저층부의 엘리베이터가 먼저 도착했다. 배로나는 은별에겐 시선 한 번 던지지 않고 청연에게만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유청연은 고개를 한 번 까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뒤이어 고층부의 엘리베이터가 섰다. 유청연은 먼저 타라는 듯 턱짓을 했다. 은별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둘만이 남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은별이 문득 물었다.
"왜 편 들어준 거예요?"
"자기 편을 들지 않은 건 한 번쯤 용서할지 몰라도 네 편을 들지 않은 건 한 번조차 용서하지 않을 사람이 네 엄마라서."
"우리 엄마 진짜 좋아해요?"
유청연은 허, 웃었다. 날카롭게 터지는 숨에 자조가 짙게 깔렸다. 엘리베이터 문 어귀에 시선을 두었다 허공을 보았다 이내 쓴웃음을 물고야 마는 태가 소년의 것 같았다. 오래 앓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은별은 유청연이 그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태어난 순간 모든 것을 가졌을 텐데. 5공 시절 육사를 졸업하고 군사정권 하에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다 여의도로 나서 9선 의원을 했던 외조부의 무릎을, 한국전쟁 뒤의 혼란기를 기회삼아 맨 손으로 황금의 제국을 일구어낸 굴지의 기업인인 조부의 품을 제 놀이터로 삼아 자라난 사람이었다. 세간에서는 정치 명문인 유청연의 외가에서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것이 대통령은 5년 단임이라 귀찮기만 하고 뽑아먹을 건 없어서, 라는 소리마저 돌았다. 할아버지인 천명수마저도 유청연이라면 우선 접고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렇게나 약해 보이는 얼굴이라니. 남은 건 상처뿐인 듯한 낯이라니.
"진짜, 좋아하는 건 어떤 건데."
"좋아하냐고요."
"좋아하는 건 또 어떤 거고."
"... 엄마한테 쓴 편지 봤어요."
"딸한테 보여줄 정도로 명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엄마가 보여준 거 아니니까."
서진은 늘 팬레터 따위를 모아 드레스룸 구석의 시크릿 박스에 담아 두곤 했다. 비밀번호는 은별의 생일이었다. 은별은 이따금 그 박스를 열어 서진에게 온 팬레터들을 읽어 보았다. 모두 소프라노 천서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무대 위의 서진이 얼마나 빛나는지, 서진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꾹꾹 눌러 써 놓은 애정 어린 필체들을 읽을 때면 늘 기뻤다. 유청연의 편지는 그 중 하나였다. 겉봉에도 내지에도 이름이 없었고 끝머리엔 언제나 시 한 구절이 쓰여 있었다. 다른 편지와는 다르다는 걸 한 눈에 알았다. 유청연은 결코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고 쓰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그 모든 문장이 사랑을 논하고 있었다. 역설적이었다.
"남의 편지를 훔쳐보면 안 되지."
"이름은 왜 안 썼어요?"
"스스로를 밝히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여긴 왜 들어왔어요? 진짜 우리 엄마 때문이에요?"
"이미 답한 질문 같은데."
진짜 재수없어. 은별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애써 삼켜냈다. 오직 결핍을 아는 이들만이 욕망을 압니다. 욕망은 곧 온전성에 대한 갈망이에요. 나는 그걸 이제 알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내 고통이에요. 요즈음 나는 고통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유청연은 편지에 그렇게 썼다. 잘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잠시 스쳤던 앓은 기색마저도 지워낸 얼굴이 다시금 고요하고 냉정했다. 세상 그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차가운 표면 아래의 어디에 그런 마음이 감추어져 있었을까. 어쩌면 이미 과거로 흘러가 버린 일들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 편지를 썼을 무렵 유청연은 많아야 열 아홉이었고, 지금은 서른이니까. 엘리베이터는 85층을 향해 오르고 있었고 은별은 그 낯에서 어떤 답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청연의 옆얼굴을 연신 곁눈질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것도 몰랐다.
"안 내릴 건가."
유청연은 열린 문 너머의 복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85층이었다. 은별은 그제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등 뒤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유청연은 은별의 뒷모습을 일별하곤 이내 시선을 거둬 제 발치를 보았다. 잘 가라거나 하는 상투적인 인사는 없었다. 그 쪽이 은별로서도 더 편하기는 했다. 은별은 복도를 걸으며 유청연에 대해 생각했다. 한 때 서진을 제 고통이라 부르던 고등학교 시절의 유청연에 대하여. 천서진을 가까이 두고 싶어 헤라팰리스에 들어오고도 오윤희의 역성을 들었던 지금의 유청연에 대하여. 서진을 진짜 좋아하냐는 물음 앞에 온전하게 무너지던. 그 깊고 오랜 날것의 상처에 대하여.
*
유청연이 거슬렸다. 오윤희와의 장난질은 길어야 일주일이면 끝이 날 줄로만 알았더니. 유청연은 그 이후로도 보란 듯이 오윤희를 대동하고 다녔고 사람들은 그 수작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진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오윤희에게 인사를 건네는 주민들이 제법 늘어난 것 또한 그 반증이었다. 천서진은 할 수만 있다면 유청연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개자식. 속 없는 개처럼 굴 때는 언제고. 강마리와 고상아가 서진의 눈치를 살살 보며 오윤희 씨도 이제 우리 헤라에 끼워 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저러다 진짜 하진 안주인이라도 될 지 누가 알아요.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것 또한 만만찮게 신경을 긁었다.
"천 쌤, 진짜 오윤희 씨랑 유 이사님이랑 덜컥 결혼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우리 지금이라도 줄 잘 서야 하는 것 아녜요?"
"그럴 리가요."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천 쌤은, 유 이사님 성격 아시면서."
"맞아. 천 쌤은 뭘 믿고 이렇게 태평해요? 오윤희가 하진 사람 되면 제일 피 보는 건 천 쌤 아니에요? 송 회장님 말론 하진은 다들 연애 결혼했다던데. 유 이사님도 안 그러란 보장 없잖아요?"
서진은 코웃음을 쳤다. 제아무리 유청연이 제멋대로 날뛰며 제 출신을 무시하는 듯 군대도 유청연은 어쩔 수 없는 하진의 핏줄이었다. 그것도 지금의 형국이라면 차기 하진의 회장이 될, 유택현의 후계자였다. 유청연의 조부인 유택현 명예회장은 셈이 빠르고 사리분별이 분명했다. 광복 직후 역 앞에서 행인들의 구두를 닦아 주며 생계를 잇던 가난한 집의 장남이 맨 손으로 대한민국 재계의 대부가 되었을 때는 그만큼 독한 구석이 있는 것이라고, 청아를 위해서는 그런 면을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천명수 또한 거듭 말해 왔다.
가난한 태생은 유택현의 성공 신화를 더욱 화려하게 했으나, 유택현 개인에게는 모든 컴플렉스의 근원이었다. 소학교조차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천학과 절대적인 교양의 부족은 일종의 꼬리표였다. 유택현의 앞에서 그런 부족을 논하는 사람은 결코 없었으나 등 뒤에서 나오는 말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유택현은 더더욱, 뼈대 있는 명문가에 집착했다. 그 자신의 아내는 지역 유지의 딸이었고, 그토록 예뻐하는 며느리 윤성희 또한 정치 명문가 태생이었다.
큰 손녀 유희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유택현은 큰 손녀를 유서 깊은 법조계 가문에 시집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한 혼사를 은밀히 생각해 두던 중 유희수가 당시 남자친구였던 경태하 현 지검장과 비밀리에 혼인 신고를 함으로써 계획이 엎어졌다. 경태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유택현 회장은 당시 크게 분노해 경태하를 이화원으로 불러들였다. 이화원은 폐쇄적인 집단이었고 천명수 또한 그 내부의 사정을 전부 알지는 못했으나 모종의 유혈사태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평소 그리 마음을 두지 않던 큰 손녀에 대해서도 그런 사람이었다. 하물며 어린 시절부터 곁에 끼고 예뻐하던 유청연의 결혼에 대해서라면 두 말 할 것도 없을 터였다. 유택현의 내심에는 청연의 외가인 다경 또는 그 이상의 집안과의 혼맥이 내정되어 있을 터였고, 더 나간다면 이미 어른들 간엔 은근하게 이야기가 오간 뒤일지도 몰랐다. 애당초 청연이 서진을 쫓아 다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오윤희라니. 유택현이 그 결혼을 허락할 리 없었고 서진이 아는 한 유청연은 오윤희 따위를 위해 하진을 버릴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어린 애가 심심해서 장난치는 것뿐이에요. 그딴 일에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유 이사가 오윤희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 솔직히, 톡 까놓고 말해서. 천 쌤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유 이사님이 언제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신경 쓰는 것 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유 이사님이...."
강마리는 눈치가 없었다. 어쩌면 기실 없는 척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서진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히 약을 올리며 내심 즐거워하는 강마리 곁에서 고상아만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 못 했다. 고상아는 팔꿈치로 강마리의 옆구리를 찔렀으나 강마리는 고상아의 팔을 자연스레 밀어 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오윤희 씨를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요? 피날레를 장식하려 준비되었던 말을 막은 것은 고상아의 손이었다. 강마리는 느닷없이 제 입을 틀어막은 고상아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민혁 엄마. 강마리는 고상아의 손을 떼어내며 역정을 냈으나 고상아의 시선은 이미 강마리를 향해 있지 않았다.
"어머... 권 비서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안녕하세요. 민혁이 어머님. 천 선생님도 안녕하셨죠? 다들 여기 계신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지 뭡니까."
서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유청연의 수행 비서였다. 서진은 고개를 한 번 짧게 숙이며 미소짓는 것으로 인사를 갈음했다. 강마리와 고상아의 시선이 바쁘게 주변을 훑었다. 권 비서가 여기에 있다면 유청연 또한 여기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건 서진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서진은 부러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행여 고개를 돌렸다 유청연과 눈이 마주치면 그 수작에 걸려든 것 같아 기분이 나쁠 터였고, 또 비서에게 말을 붙이라 명해 놓고는 멀리서 서진을 관찰하고 있을 그 어린 애의 얕은 수작을 보기 좋게 엎어 버리고 싶기도 했다. 고상아와 강마리의 탐색전을 눈치 챈 권 비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사님은 안 오셨습니다. 지금 이화원에 계세요."
"웬일로 이화원엘 다 가셨대요?"
"아. 자진출두는 당연히 아니고요. 유희수 사장님 호출로 불려 가셨어요. 요즘 이사님 기분이 영 안 좋아서 부쩍 신경질이 느셔가지고.... 유희수 사장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세요. 곧 정기 주총인데 거기서 사고 치실까봐. 아마 지금쯤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 먹으면서 귀염받고 계시겠죠. ... 아. 제가 이렇게 말했다는 건 비밀입니다. 이사님 아시면 난리 나요."
"알죠, 알죠. 근데 그럼, 권 비서님은 어쩐 일로 오셨대요?"
"아. 이사님이 초대장을 전하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무슨 초대요? 천 쌤만요?"
"어..., 네."
권 비서는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은 봉투 한 장을 꺼냈다. 겉봉에 하진과 다경의 문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천서진 선생님께, 하고 쓰인 글씨는 유청연의 것임이 자명했다. 유청연은 천재는 으레 악필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글씨를 날려 쓰는 습관이 있었다. 이름이라면 그나마 읽을 만 한 축에 속했다. 유청연이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시절엔 이따금 문학이나 윤리를 담당하는 교사들이 서술형 답안지를 매기다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유청연의 이름이 나왔다. 평소에는 수업도 듣지 않고 시험에도 관심이 없는 애가, 서술형 문제가 마음에 드는 날이면 시험지 양면 가득 그 문제에 답만을 채웠다. 그런 순간의 글씨들은 제 머릿속에 문장이 떠오르는 속도를 따라잡기 벅찬 듯 내달음질치곤 했다.
"얼른 뜯어봐요, 천 쌤."
"맞아요. 무슨 초대장이에요? 네? 얼른요."
강마리가 서진을 재촉했다. 고상아 또한 눈을 빛내며 서진의 곁으로 몸을 바투 붙여 앉았다. 서진은 한껏 여유를 부렸다. 기다리던 선물을 받은 듯 성급히 굴고 싶진 않았다. 유청연이 보았다면 필경 또 예의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서진의 속을 다 읽었다는 듯 얄밉게 굴었을 터였다. 애당초 서진에게만, 그도 구태여 권 비서를 시켜 전한 까닭은 서진이 그런 식으로 반응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속내를 너무 쉽게 읽힌 것 같아 분했으나, 어차피 지금 유청연은 헤라팰리스에 있지 않았다. 서진은 봉투의 겉면에 새겨진 하진과 다경의 문장을 손끝으로 쓸어 보다 이내 봉투를 봉한 실링 왁스를 뜯어냈다.
강마리와 고상아는 머리를 들이밀어 가며 봉투 안의 내용물을 보려 애썼다. 자신들에겐 주어지지 않은 특권을, 그 특권을 쥔 서진을 질시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 하진과 다경의 문장이 동시에 쓰일 정도의 행사라면 그 규모는 묻지 않아도 알 법했고 강마리와 고상아는 그런 화려함을 동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서진은 그런 눈빛이 기꺼웠다. 요즈음 짜증나게만 굴던 유청연마저도 이 일에 관해서라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내일쯤 헤라팰리스로 돌아온 유청연이 내 선물은 선생님의 허영에 걸맞았나요, 같은 소리로 약을 올려도 짧은 비웃음 한 번 정도로 기꺼이 웃어 넘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즈음이면 헤라팰리스 내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알게 될 터였다. 유청연이 제 무엇이라도 되는 양 착각에 빠져 설치고 다니는 오윤희까지도. 서진은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¹ 많은 희생적 비용의 대가를 치르는 승리. 그 손실이 너무 커 최종적으로는 패배와 다름이 없는 승리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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