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ADENT

DECADENT 3

유청연 X 천서진

“마馬장에 포包장. 외통수예요, 할아버지.”

“하이고, 참말이네. 우리 강생이. 인자 내는 몬 이기겄다.”

월백재에 위치한 유택현 회장의 내실은 전통 가옥의 형태를 표방해 지어졌다. 건축가 장석제 선생이 유택현의 의뢰를 받아 몇 달을 고심한 결과였다. 손주와 마주 앉아 장기판을 유심히 살피던 유택현이 혀를 내두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유청연은 제 마馬로 조부의 궁宮을 눌렀다가 손아귀에 쥐고는 내가 이겼어요, 속삭였다. 웃는 낯이 답지 않게 무구하고 천진했다. 유택현은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주름 진 손을 뻗어 청연을 제 곁으로 불러 들였다. 청연은 조부의 발치에 앉아 그 무릎에 뺨을 기댔다. 유순한 시선으로 마룻바닥의 무늬를 좇다 손끝으로 그 요철을 더듬었다.

“청연아. 니 장기를 언제 배웠는지 기억 나나.”

“다섯 살 때요.”

“아이고. 그기 그래 오래 됐나.”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은 다들 장기를 둘 줄 알아야 한다. 판 전체를 읽는 법을 알아야 하고, 말을 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나가 그랬제. 니는 대여섯 살 묵었을 때도 그래 똑똑했대이.”

유택현 회장은 유청연을 유달리 사랑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며느리의 품에서 뺏어 와 월백재에 거둬 키웠다는 이야기는 세간에서도 이미 유명한 것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유청연이 유택현의 아내이자 제 할머니인 서영옥을 유독 빼닮아서라든지, 실은 유청연이 유택현과 윤성희 사이의 정사로 태어난 아이라든지 하는 추측들이 난무했으나 하진 측에서는 어떠한 공식 입장도 내어놓지 않았다. 조회수만을 노리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 대는 황색 언론이며 찌라시들에 일일이 대꾸하기엔 그 양이 지나치게 많은 탓이었다. 유택현은 청연의 하얀 뺨을 쓸었다. 주름 진 노인의 손이 연한 볼에 닿아 거칠했다. 청연은 조부를 밀어내지 않았다. 본래가 조부라면 후한 구석이 있었다.

“청연아. 내는. 느그 아부지보다도, 희수 그 아보다도. 니를 제일 아낀다. 니도 알고 있재.”

“알아요.”

“내는…. 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니한테는 정말로 좋은 거만 주고 싶었다. 니가 하진병원에서 태어나 갖고…. 간호사가 강보에 싸인 니를 따악, 내한테 안기 주는데. 니는 울지도 않고 내를 빤히 봤다 안 하나. 내는 그 때부터 알았다. 니는 느그 애비나 느그 언니랑은 다르다꼬. 니는 내라고. 그캐서 내 니를 이 집에 데꼬 오는 날 오 실장한테 그랬다, 니가 원하는 거는 그기 이 집 기둥이라도 뽑아 줘 삐라고. 니는 내를 닮아서 갖고 싶은 거는 고마 다 가져야 한다꼬. 청연아. 내는 니가 원하는 거는 다 주고 싶었다 ….”

“그것도 알아요.”

“알고 있나. 아이고. 우리 청연이 모르는 게 없네.”

“할아버지.”

“와 부르노.”

“할머니를 사랑했어요?”

조부의 손이 청연의 뺨 위에서 굳었다. 청연은 고개를 물려 택현을 올려 보았다. 유청연의 눈은 검고 깊었다. 사람들은 청연이 제 어미를 빼닮았다지만 유택현은 청연의 얼굴에서 언제나 청연의 조모와 제 얼굴을 읽어 냈다. 유청연은 죽은 아내를 닮았고, 저를 닮았다. 그런 아이가 택현을 물끄러미 올려 보며 물었다. 단단하면서도 금방 깨어질 듯 위태로운, 유리 같은 시선에서, 택현은 아내를 떠올렸다. 유택현은 아내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지역 유지인 서 사장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간 날이었다. 안채에 들기도 전에 문 앞서부터 풍금 소리가 났다. 동경대에 유학을 다녀 왔다는 외동딸이라고 했다. 그게 아내였다. 서 사장이 제 딸과 택현을 인사 시켜 주었을 때에는 악수를 청하려 내민 손이 마구 떨렸다. 아내는 저보다 훨씬 키가 큰 사내가 그토록 긴장하는 것이 퍽 재미있었는지 웃었고 매끈하니 흰 손을 내밀어 택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젊은 날들이었다. 유택현은 아내를 사랑했다. 서 사장 또한 비교적 어린 나이에 제 사업을 일으킨 택현을 사윗감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이미 동경대 유학 시절부터 만난 연인이 있었다. 바깥 일을 오래 해 살결이 그을리고 키가 큰 택현과 달리 살결이 희고 키가 적당한 사내였다. 솜털 난 뺨이 계집애의 것처럼 고왔다. 그 사내 또한 아내처럼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다. 이따금 서 사장의 집에 가면 서 사장의 부재를 틈타 아내를 만나러 온 그 사내가 있었다. 둘은 대청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풍금을 켰다. 예이츠니 셸리니 하는, 택현으로서는 난생 처음 듣는 이국의 문학 작품들을 읽었다. 꼭 닮은 연인이었다. 유택현은 아내를 욕망한 만큼 아내의 연인인 그 사내를 증오했다. 그래서 장인을 충동질해 아내와 혼약을 맺었다. 아내와 그 사내가 바다에 몸을 던져 정사를 기도할 것은 장인도 택현도 예기치 못했다.

사내는 그 겨울 바다에서 죽었고 살아남은 아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택현과 결혼했다. 아내는 그 사내가 죽은 뒤부터 점차, 그러나 빠르게 미쳐 갔고 죽어 갔다. 자살 기도와 약물 남용 끝에 유택현은 아내를 침실에 가둬 두고 보호사라는 명목의 감시인을 붙였다. 아들 유정하가 태어난 후로 아내의 병세는 더욱 심해져 끝내 잠든 아이의 얼굴을 쿠션으로 짓누르려 드는 때에까지 이르렀다. 택현은 아들과 아내를 분리시켰다. 지옥 같은 날들은 아주 오래 이어졌고 태어난 이래 이 집에서 자란 청연 또한 그 지옥을 보았다. 청연은 이제는 제 정신인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은 조모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랐다. 조모는 착란 증세가 심해지는 날이면 벗은 발로 이화원 중정을 헤매었고 아홉 살의 청연은 그 광증의 기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 속의 조모는 언제나 미쳐 있었다.

그럼에도 조부는 조모만을 사랑했다. 청연이 스무 살이 되던 겨울 조모가 죽던 날까지도.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 안의 분위기가 어쩐지 소란스러웠고 오 실장은 조모가 죽었다고 말했다. 조부는 죽은 아내의 시체를 침대에 눕혀 두고 그 침실에서 혼자 경야를 보냈다. 그 누구도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청연은 조모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채, 다만 조부의 말로 그 임종을 전해 들었다. 병으로, 아파서, 그래서 죽었다. 청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유청연의 인생에 조모가 중요한 존재였던 적은 없었다. 청연이 기억하고 아는 한 조모는 일생을 침실에 갇혀 살았고 이따금 새벽이면 괴성을 지르고 물건을 부쉈다. 침실에서는 조모를 어르고 달래다 애원하는 조부의 목소리만이 그 비명에 얽혀 들려 왔다. 청연은 잠이 깨면 층계참에 앉아 귀를 막고 낡은 문장을 외웠다. 조부는 그럼에도 아내를 사랑했다. 어리석게도.

유청연은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들을 경멸했다. 세상을 다 쥔 듯 이사진들 위에 군림하다가도 미친 아내 앞에 한없이 어리석어지는 조부와 방 안에 갇힌 채 로테스터의 아내처럼 미쳐 가는 조모와 조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구하던 젊은 연인이었던 아니 그 순간엔 이미 부부였던 유희수와 경태하와 죽은 줄리엣과 자살한 테스와 그 또한 숨을 거둔 히스클리프와 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어와…. 어리석은 것들의 종말이란 으레 비극적이기보다는 짜증스러운 것이 아니었나. 사랑이란 온전해지고자 하는 욕망이었고 그리하여 신은 사랑의 대상이 될 뿐 주체가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오직 결핍된 것들만이 사랑을 했다. 청연은 제가 이미 온전하다고 믿었다. 청연에게는 결핍도 온전성에 대한 갈망도 없었다. 청연은 그래서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실은 무엇도 사랑하지 않았다. 조부의 지옥에서 청연은 어린 신이었다.

그러나 열일곱의 유청연이 조부의 방 문간을 넘어 들어와 어리고 아름다운 낯으로, 제 화살에 손끝을 찔린 에로스와 같은 얼굴로 제 조부를 불렀을 때에 유택현은 놀라지 않았다. 유택현은, 유택현만은 언젠가 유청연이 사랑에 빠질 것임을 이미 알았다. 유청연은 유택현을 지나치게 닮아 있었고 그건 혈육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저주 같은 것이었다. 반면 열일곱의 청연은 순진했고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 애는 낯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손을 대어 볼까 망설이는 어린 애와 같았다. 유택현은 청연을 그저 두었다. 도덕적인 이유를 내세워 혼을 내지도 풋사랑일 뿐이라며 웃어 넘기지도 않았다. 그저 저녁마다 조부의 침실을 찾아와 열병에 걸린 듯 몇 시간이고 두서 없이 늘어놓는 말들을 가만 들어 주었다. 청연이, 그 선생에 대한 욕을 했다는 이유로 동급생의 머리를 의자로 내려친 날에도 유택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일을 덮었다.

유택현은 유청연이 고른 것이 청아재단 이사장의 딸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일생 좋은 것만 주어 키운 애였다. 제 언니처럼 가난한 양장집 개천용에게 빠져 어리석게 굴 리 없다고는 진즉부터 생각했지만 청아재단 맏이라면 기대보다도 훌륭한 안목이었다. 천서진이 이미 결혼을 해 아이를 두었다는 사실은 택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청연이 무엇을 욕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그 욕망의 대상이 그 애의 격에 걸맞는 수준의 고급품이었으며 그 애의 욕망은 또 유택현의 장기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정하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청연이 동급생의 머리를 의자로 때렸고, 그 애가 반신불수를 겨우 피했으며, 유택현이 하진화학의 하청 업체를 운영한다는 그 애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합의금 일 억에 문제를 끝냈다는 걸 알았을 때에 유정하는 그로서는 드물게 먼저 아버지를 찾아 왔다.

“청연이 일, 아버지가 해결해 주셨다고요.”

“내 새끼 일인데 우예 내가 안 나서겠노.”

“제 새끼 일이기도 합니다! 청연이가 그러는데, 아버진 이미 알고 계셨다고요. 정말 알고 계셨어요? 아니, 천명수 이사장님 딸 결혼식에도 가셨잖습니까. 천 이사장 딸 결혼한 것 아셨잖아요. 애를 타이르셨어야죠, 그걸 그냥 두셨어요?”

“사람 맘을 내가 우예 할 끼고. 정하야. 나가 그런 능력은 없대이. 아가 선생 좋다카는 게 그리 질겁을 하고 붙을 일이가? 나는 가가, 어릴 때부터, 뭐라 카더라. 탐미주의? 맞나. 암튼 이쁜 거를 하도 좋아해가 행여나 얼굴만 반지르르한 아랑 만난다카는 건 아인가 걱정했다. 청아재단이믄 나쁠 기 없다. 어린 아 첫사랑, 그기 뭐 대단하다고.”

“청연이가 그냥…. 그냥 애는 아니잖아요. 그 애 성격 모르세요?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아버지랑 가장 닮은 애니까. 못 하게 하셨어야죠. 적어도 잘못이라곤 하셨어야죠. 아버지, … 제발 좀. 제발…. 아버지는…, 어머니 그렇게…. 그렇게 만들고도 아직 만족이 안 되세요?”

유택현은 유정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청연을 기다렸다. 청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다. 2년을 다녔고 그 선생의 데뷔 10주년 공연에 반주를 해 주었으며 그 날을 기점으로 서서히 학교를 나가지 않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하다 이윽고 제 침실에서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유택현은 그 때에도 기다렸다. 희수는 제 동생의 칩거에 안절부절 못하며 억지로라도 문을 열어 보아야 한다고 우겼으나 유택현은 고마 둬라, 지도 다 생각이 있을 기다, 두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유청연은 몇 주 후에야 제 침실을 나와 제 할아버지의 서재를 찾아 왔다. 유택현은 그조차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듯 여상스레 청연을 맞이했다. 방 문을 열고 들어선 아이는 밝은 조명에 눈이 부신 듯 인상을 찡그렸다. 몇 주 사이에 살이 내린 얼굴이 창백했다. 청연은 이제 스물 두 살이었다. 사내가 바다에 빠져 죽던 그 해, 아내와 결혼을 하던 택현의 나이도 꼭 그랬다. 스물 두 살.

그 날 밤 택현은 청연에게, 원하는 것은 쥐어야 한다고, 그토록 욕망하던 것들은 으레 쥐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말했다. 그건 병이라고. 쥐어 본 순간에야 낫는 병이라고. 유택현은 아이를 제 자리에 앉혔다. 하진제분 제13공장이 문을 열던 날, 지금은 서거한 전임 대통령이 표창과 함께 내린 의자였다. 흑단 나무를 잘라 만들었다고 했던가. 청연은 어린 시절부터 조부가 자리를 비울 때면 그 의자에 앉아 간식을 먹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쉬운 자리였으니 탐을 낼 리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건 택현의 패착이었다. 극 무대에 서든 피아노를 치든 언젠가는 이 자리를 원할 줄로 알았다. 청연은 정하나 희수처럼 보채고 달래고 강제한다고 말을 들을 아이가 아니었다. 반골 기질이 있어 제 길을 정해 두고 강요하면 되려 흥미를 잃고 어긋날 애였다. 그렇단들 저를 닮은 면이 있으니 언젠가는 제 자리를 찾으려들 줄 알았다. 그러나 청연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울지 않아도 모든 것을 쥘 수 있는데 구태여 소리 높여 우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천서진은 유택현의 기회였다. 욕망에 눈 먼 것들은 다루기가 쉽다. 청연 또한 맹목 앞에 예외는 아니었다. 욕망을 충돌질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었나. 택현은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손아귀에 굴리며 살아 왔다. 장인도, 이사들도, 청연도. 택현이 굴려내지 못한 마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택현은 청연이 앉은 의자에 깊게 패어진 나무의 옹이를 손끝으로 훑어내리며 말했다. 무언가 원할 때는 그것을 쥘 수 있는 자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라고 속삭이며 연인을 잃고 바다에 빠져 어떤 죽은 사내와 부유한 사내에게 빠져 변절한 연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보아라. 오직 강한 것들만이 제가 원한 모든 것을 쥐고야 만다. 그 해에 청연은 아직 어렸고 사랑에 빠져 있었다. 젊음은 아름다운 만큼 어리석었다. 눈 앞의 것만을 좇았고 작은 희망에도 전부를 걸었다. 택현은 청연의 눈을 더욱 가렸다. 청연은 그렇게 외국으로 떠나 학위를 땄고 하진 홀딩스의 기조실장으로 발령받았다. 모든 것이 유택현의 뜻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서른의 그 애가 스물 둘의 택현을 여전히 꼭 닮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여전히 눈 먼 채라고. 그 눈멂이 고통스럽다고, 당신께서는 알지 않냐고. 이 고통은 언제쯤 끝이 나냐고. 택현은 그 얼굴에서 이미 오래 전에 지나버린 과거의 기억만을 읽었다. 택현 또한 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택현의 고통 또한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에 감히 청연의 고통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장사치의 말은 믿을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 데에는 그 말을 한 제 조부마저도 믿지 말라는 함의가 담겨 있었으나 청연은 그걸 몰랐다. 그래서 쥐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택현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 또한 몰랐다. 사실은, 택현은, 여전히 사내가 죽은 바다에 있었다. 바다에서 막 건져 낸 사내의 시신은 온 몸이 퉁퉁 불고 살껍질이 벗겨져 차마 보기조차 힘들었음에도 아내는 그 흉진 몸을 기꺼이 품에 안았다. 택현은 힘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그 때에 알았고 이후로 결코 잊지 못했다. 그러나 택현은 또 거짓말을 했다. 청연은 더욱 욕망해야 했고 더욱 많이 쥐어야 했다.

“하모. 청연아. 니가 살면서 몬 가진 기 처음이라 그렇대이. 쥐고 나면 그때사 알게 되는 기다. 쥐어 봐야…. 그때사 안다.”

*

“대리 부른 게, 유 이사님이셨어요?”

오윤희는 으슥한 골목 어귀에 세워진 1978년식 카마로와 유청연을 번갈아 보았다. 유청연은 물고 있던 담배를 한 모금 빨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리를 부를 적부터 윤희가 올 것임을 알았다는 듯 담뱃재를 털어내는 태가 여상스러웠다. 오윤희는 유청연 앞에 다가가 섰다. 가까이 다가서니 연초 탄내에 섞여 술 냄새가 났다. 얼굴 또한 취기로 상기된 것이 적잖이 마신 모양이었다. 술은 안 좋아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구태여 그 사정을 캐묻는 것도 괜한 오지랖 같아 객쩍은 데가 있었다.

“그 담배는 갈색이네요. 특이하게. 담배는 전부 흰 색인 줄 알았어요. 에쎄도 그렇고, 디스도 그렇길래.”

“흡연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네? 아이, 전 아니죠. … 죽은 전 남편이 폈었어요.”

“배호철.”

“맞아요, 유 이사님이 로나 아빠를 어떻게 아세요?”

“그러게. 왜일까요.”

유청연은 다 타들어간 담배를 담벼락에 비벼 껐다. 한결같이 고저 없는 음성에서는 어떤 감정이나 정보도 읽어낼 수 없었다. 유청연은 윤희가 되물을 틈도 주지 않고 가죠, 짧게 뱉곤 뒷좌석에 올라탔다. 윤희는 차체를 돌아 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유청연은 피곤한지 머리를 의자 헤드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주머니를 뒤져 청포도 맛 사탕 하나를 꺼내더니 입에 넣었다. 담배와 사탕.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윤희는 차의 시동을 걸어 골목을 빠져나왔다. 청연은 내내 말이 없이 조용했다. 윤희는 이따금 백미러로 청연의 얼굴을 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그 창백한 얼굴 위를 붉게 스쳤다.

“제니 엄마 말론 본가에 가셨다 그러던데.”

“갔다 왔죠.”

“그 후원 행사 준비 때문에 바쁘신가 봐요.”

청연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무슨 행사, 묻듯 백미러 너머로 윤희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윤희는 괜히 그 시선이 불편했다. 남의 소식을 캐묻고 다니다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강마리와 고상아가 먼저 천서진이 받은 초대장을 운운하며 혹시 윤희 씨도 같은 것을 받진 않았느냐 캐물어 왔다, 고 말하는 것조차 이제 와서는 어설프게 덧댄 변명 같을 듯했다. 그러나 청연은 그 어색한 침묵을 길게 끌고 가지 않았다. 다만 다시 몸을 뒤로 젖혀 편히 기대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연의 검은 눈동자에 창 밖의 풍경이 맺혔다 이내 허상처럼 사그라졌다.

“내 업무는 아닙니다. 그 행사는.”

“천서진, 아니, 천서진 선생님이 받은 초대장을 유 이사님이 직접 보낸 거라고 하길래 전 또. 그런 것도 유 이사님 일인 줄 알았어요. 어쨌든 멋있어요. 자선 경매 파티. 장학 재단에서 지원하는 환아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라면 취지도 좋은 거잖아요.”

“그럼 오윤희 씨도 가죠.”

“네? 에이. 저 같은 사람이 그런 데를 어떻게 가겠어요. 솔직히, 저번엔 천서진 고 계집애가…. 여튼. 말을 하도 얄밉게 해서 한 마디 해 주긴 했지만. 저 같은 사람한텐 헤라팰리스에서 사는 것만 해도 이미 과분한 운인데요.”

“부동산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올 겁니다. 인맥 쌓는 데엔 도움이 되겠죠. 오윤희 씨한텐 그런 게 필요하고.”

“그야 그렇겠지만….”

“같이 가면 되겠네요.”

“같이요? 유 이사님, 지금 농담….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농담 주고받을 만큼 친밀한 사인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유 이사님은 천서진 좋아하시잖아요.”

“그게 내가 오윤희 씨를 대동하지 못할 이유가 됩니까?”

천서진이 좋아할 리가 없을 걸요. 오윤희는 그 말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유청연이 그걸 모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뭘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윤희는 유청연의 얼굴을 연신 힐끔대며 그 속내를 읽어 보려 애썼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천서진을 그렇게나 좋아해서, 천서진의 데뷔 십 주년 공연엔 반주를 하고 천서진을 위해 퀸 엘리자베스 콩쿨 파이널리스트를 차지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천서진의 눈 밖에 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오윤희를 위할 까닭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았다. 유청연은 그 의혹마저도 이미 읽어낸 듯 입꼬리를 틀어 웃었다.

“내 얼굴에 답이 써 있진 않아요.”

“덥석 받아들이기엔 너무 말도 안 되게 좋은 제안이라 믿기가 어렵네요. 천서진이 저 싫어한다는 거 모르세요, 혹시?”

“모를 리가.”

“근데 왜요? 저한테 잘 해주는 거, 서진이가 싫어할 걸요.”

“오윤희 씨.”

“네.”

“천일야화를 읽어 봤습니까.”

“… 네? 그, 책이요?”

“그 책에. 어부와 마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그러한 마신이에요. 그래서 한 때 구원이라 믿으며 기다렸던 모든 것들을 증오하게 되었고 또 증오하면서도 간원하게 되었어요. 그뿐입니다. 그러니 가고 싶다면 다음 주 주말까지 알려 주면 됩니다.”

유청연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는 말을 섞을 의사가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양 팔을 제 가슴 앞에서 팔짱 낀 채 차창에 이마를 대었다. 밤거리는 고요했다. 청연의 숨소리만이 고르게 들려 왔다. 오윤희는 유청연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어부와 마신에 대해서 생각했다. 유청연이 구원이라 믿으며 기다렸던 것은 천서진이었나. 증오하고 간원하는 것도. 오윤희는 유청연을 동정했다. 눈을 내리감은 얼굴이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어쩌다 하필 천서진 같은 여자를 좋아해서는. 오윤희는 헤라팰리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유청연은 차가 멈춰 서자 금세 다시 눈을 떴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에도 유청연은 내내 말이 없었고 오윤희 또한 그랬다. 유청연은 고층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윤희는 저층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려다 청연을 돌아 보았고 결연히 내뱉었다.

“갈게요. 그 행사. 데려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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