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루시] 새빨간 거짓말
6,445.
아스타리온에게 루시안과의 첫 성관계는 지나가는 수많은 밤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그와 연인 놀이를 하면서도 언제든 그의 뒤통수에 단검을 꽂을 준비를 했다. 왜 하필 그를 골랐냐고? 어쨌든 다른 애들보다는 그가 쉽게 느껴졌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말이 잘 통하기도 하고, 탐욕스러운 적안은 온기 하나 없이 그의 몸을 훑는다, 생김새도 그리 나쁘진 않고. 그가 자신의 의도를 눈치챘다는 위화감이 들기는 하지만 그뿐, 그는 단 한 번도 아스타리온의 접근을 밀어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끼를 부리는 아스타리온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두 팔을 벌려 단검을 맞이했다.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계속 거짓말을 했고, 루시안은 그의 거짓말을 계속 받아주었다.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있었다. 거짓말은 계속 하면 언젠가 그 사람의 안에서 진실이 된다. 그는 언젠가는 루시안의 마음 속에 거짓된 진심이 심어질 거라고 자신했다. 근거 없는 확신은 아니었다. 그는 200년 동안 그 짓을 해왔고, 지금까지 그 짓이 실패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인지 스스로가 헷갈릴 정도로.
하하, 그가 날 사랑할 리가 있겠어. 사랑한다면 내 외모뿐이겠지. 물론 내 외모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가끔씩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신경써준다는 착각이 들 때, 아스타리온은 애써 그 가정을 부정했다. 달빛과도 같은 유려한 피부에 마음을 뺏긴 것뿐이겠지. 아스타리온의 몸에 남은 얕은 상처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제 소매를 찢어 팔에 동여매주는 루시안을 내려다보며 아스타리온은 혼자만의 생각에 수긍했다. 그는 능숙하게 그의 팔을 지혈한 후 다음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파도 참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아스타리온은 그대로 가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돌아본다. 그의 녹안을 마주했을 때 아스타리온의 심장은 큰 소리를 내며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남녀들의 시선과 그의 시선은 달랐다. “왜?”라고 그가 말했다. 순간이지만 아스타리온은 입술을 달싹였다.
“키스 안 필요해?”
200년간 사람을 꼬셔온 뱀파이어답지 않은 얼뜨기 소리를 해버렸다. 아스타리온의 말을 들은 루시안은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아스타리온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가볍게 웃으며 “넌 정말 얼굴로 많은 사람들을 꼬셔왔나보네.”라고 말했다. 너도 그렇잖아? 너도 내 외모에 홀려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입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집어삼키며 아스타리온은 인상을 썼다. “무슨 소리야, 자기, 내가 얼마나 달콤한 말들을 잘하는데? 기억이 안 난다면 또 들려줄까?” 흐응, 그는 재밌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다 기억하고 있기도 하고 지금은 갈 길이 멀잖아.” 그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아스타리온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네 달콤한 말을 듣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거든.”
“그럼 내게 필요한 게 없어?”
“뭐가?”
“그러니까… 네가 날 치료해준 거잖아. 그 보답은 필요없냐고.”
“뭔 소리를 하는지 했더니. 딱히 필요없….”
루시안의 말이 멈췄다.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긴 그를 바라보며 아스타리온은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꼈다. 생각을 마쳤을 때 루시안의 인상은 험악해져 있었다.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아까부터 그 ‘필요’랑 ‘보답’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아스타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밑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브앤테이크는 당연한 거라고 말했다.
“네가 내게 도움을 줬으니까 당연히 나도 네게 보답해야지.”
“…아하, 그럼 너랑 내가 그것뿐이라는 거야?”
그가 화나 보인다. 말을 멈춘 아스타리온 대신 루시안이 먼저 입을 열어서 대화를 이었다. “첫날밤은 그렇다 치고, 그럼 지금까지의 스킨십이 전부 다 내가 널 도와줬기 때문에 보답해준 것뿐이라는 거네?” 그는 화가 난 게 맞다. 쿵.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이 추락했다. 결국 아스타리온은 또 관계를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여러 얼굴들이 순식간에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성공하기도 전에 관계를 망쳐버렸으니 실패의 대가가 곧 닥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실패할 때마다 끔찍한 미소를 짓던 카자도르를 떠올렸다. 처벌을 가장한 고문에 비명을 지르는 자신에게 다가온 그가 지껄였던 말이 생생하게 귀에 울린다. “역시 네 비명 소리가 제일 듣기 좋구나, 아들아.” 아스타리온은 곧 자신에게 밀어닥칠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몇 초가 흘러도 그가 예상했던 폭력은 그에게 들이닥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루시안은 팔짱을 낀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낮은 음성으로 ”뭐해?“라고 물었다.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깐 주저했다. ‘신체적으로 고통이 닥칠 줄 알았다’? 네가 날 때릴 거 같았다고 고백하는 듯한 말같아서 그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전부 다는 아니다’? 그는 왜 자신이 그를 위해 몰래 치즈와 와인을 숨겨 가져왔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단순히 그를 꼬시기 위해서였나? 동료들 몰래 은근슬쩍 치즈와 와인을 챙기며 그가 머릿속에 처음 그렸던 장면은 그의 환심을 사는 장면이 아니라 그가 미소를 짓는 장면이었다. 설마 기쁘다는 듯이 웃는 그가 보고 싶어서…? 이제야 자신의 마음을 엿본 아스타리온은 당황했다.
“잘 모르겠어.”
정적 후에 아스타리온이 내뱉은 말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루시안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아스타리온을 응시했다. 스스로는 잘 모르는 거 같지만, 그는 거짓말을 할 때는 입가에 완벽한 미소를 그리고는 했지만 진심이 한 톨이라도 들어있는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루시안은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아스타리온을 바라보다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래? 그게 끝이야?”
“그럼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길 원해, 아스타리온?”
무엇을 원하냐는 말에 유독 약해지던 너, 그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루시안의 예상대로 아스타리온은 버벅이더니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닫았다. 곧 그는 망설이는 목소리로 그럼 우리는 이제 끝난 거냐고 물었다. 망설임을 넘어서 체념까지 비치는 그의 눈동자에 루시안은 분노를 느꼈다, 이렇게까지 분노를 느낄 일인가 싶을 정도로 아주 큰 분노를. 그는 바짝 타오르는 입술을 이로 짓누르며 네게는 끝나는 일이 그렇게나 쉽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우리의 관계가 끝나길 바라?” 루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고 아스타리온은 다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과장스러운 손동작마저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손동작을 크게 하며 “설마 내가 자기랑의 관계를 끝내버리고 싶겠어?”라고 되받아쳤다.
“내가 자기를 얼마나 좋….”
“….”
“…아하는데! 난 그저 자기가 이제 나랑 하기 싫어졌을까봐 물어봤던 것뿐이야. 나는 좋아, 자기랑 계속 이 관계를 이어가는 거.”
가벼운 목소리에 비해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아스타리온의 눈동자에는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었다.
“나도 좋아.”
“…정말로?”
그의 대답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아스타리온의 눈썹 한쪽이 치켜올라갔다.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그의 표정 루시안은 한숨을 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어.” 더 했다가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할 거 같았다. 가슴 속에서 폭발할 감정이 어떤 감정일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안은 자신이 그 기분을 원하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는 루시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 ‘무언가’가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뒤로 어정쩡하게 뻗었던 손을 내리며 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린 그는 발걸음은 멈췄으면서도 그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지금 당장 그의 표정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 그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그가 짓고 있을 표정이 그는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지 안 뛴지 오래된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쿵쿵 소리를 내며 그에게 경고하기 시작했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한치의 떨림도 없었다. 루시안은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지금 짓고 있을 표정 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루시안은 조소했다. 지금 그의 입가에는 분명 완벽한 미소가 덧그려져 있을 것이다.
거짓말이 진실로 변했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 분간할 수 있을까?
그날 루시안은 아스타리온의 사랑한다는 말에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평소처럼 그가 “거짓말”이라거나 “사랑을 속삭이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라고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정말 좋았을까? 결국 밤잠을 설친 아스타리온은 찝찝한 마음을 안고 밤하늘 아래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바로 후회했다. 오늘 보초가 루시안이라는 걸 난 왜 잊고 있었을까? 죽어가는 불을 살리고 있던 루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숨기에는 이미 늦어버려서 아스타리온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안녕.”이라고 말했다. 아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안녕’이라니, 인사를 내뱉자마자 아스타리온은 자괴감이 들었다.
“안녕.”
그리고 루시안은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그 때문에 아스타리온은 더 어색해졌다. 아스타리온은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가 장작을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곁에 있자 어색함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대체 언제부터? 아스타리온은 과거의 기억들을 곱씹었다. ‘자기야, 난 자기랑 있을 때가 제일 좋더라.’ 그 말이 언제부터 진심이었더라. 아스타리온은 모은 두 무릎 위로 턱을 올리며 밤공기를 맛봤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떨어진 거리감에 만족하며 그는 드디어 인정했다. 그에게 루시안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가 어떻게 자신에게 특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어쩌면’이라는 연약한 단어 하나로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그의 손에 뻗었다. 그의 새끼손가락이 그의 새끼손가락에 닿았다. 불을 살리던 루시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스타리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루시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뭐하는 거냐고 물으려고 했던 루시안의 입술이 조가비처럼 꾹 닫혔다. 스쳐지나간 표정이긴 했지만 그는 서로를 건드리기만 할 뿐 엮이지는 않은 두 새끼손가락을 응시하며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에 루시안의 마음은 또 동해버리고 만 것이다. 서프라이즈는 싫다.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상황이 싫다. 하지만 그 싫은 감정보다도 먼저 든 생각은 그의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드디어 시선을 든 아스타리온의 적안과 루시안의 녹안이 마주쳤다.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아스타리온은 그가 자신에게 키스를 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스타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이 부딪혔을 때 아스타리온이 느낀 감정은 두근거리면서도 역한 감정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스킨십을 할 때보다는 덜 역겹긴 헀지만 그와의 스킨십은 그에게 여전히 역겨웠다. 두근거리면서도. 그는 그와 키스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키스를 하면 두근거리면서도 더 역겨운 기분이 들 거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아스타리온의 예상과는 다르게 루시안은 그저 그의 눈밑을 제 검지로 쓸었을 뿐이었다. 당연히 키스라고 생각했던 아스타리온이 보기 드문 순한 얼굴로 눈만 느리게 두어 번 깜박였다. 루시안은 그에게서 거리를 다시 벌리더니 이제 들어가서 자라고 말했다.
“왜? 키스하고 싶었어?”
멍때리는 아스타리온에게 루시안은 그렇게 물었고, 정신을 차린 아스타리온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면 다시 키스를 해줄 생각이냐고 물었다. 루시안은 그의 미소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들어 키스해줄 것처럼 부드러운 시선으로 아스타리온을 바라보던 그는 키스 대신 다른 단어를 내뱉었다.
“거짓말.”
너 나랑 키스하기 싫잖아, 아스타리온. 아스타리온이 다른 변명을 내뱉기도 전에 루시안은 단호한 어조로 못박았다, 네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말을 잃었다. 그답지 않게 그대로 멀어져가는 루시안을 잡지도 못하고 그는 그저 그렇게 서있었다. 그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언제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몸을 쉽사리 던질 준비가 되어있었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과 스킨십을 할 때마다 발목부터 스물스물 올라오던 불쾌감이 그의 목을 졸랐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는 이제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인지조차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뭐가 거짓말이고 뭐가 진심인지 가르쳐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바랐다. 루시안이라면 답을 알까? 자신과 조금 멀찍히 떨어져서 망을 보고 있는 루시안을 그는 바라보았다. 적안에 비친 그의 모습이 울렁인다. 아름답다. 이 세상에서 봤던 것들 중에서 그가 제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타리온은 더 이상 뛰지 않는 자신의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 마음만큼은 거짓말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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