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아스루시] 무제

8,147. B양과 B군, 그리고 루시안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쓴 거기 때문에 두서없음. 마지막 아스루시는 내 마음 한스푼.

감정의 고저 없이 언제나 차가운 눈동자만을 하고 있던 남동생이 다른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날, 오린의 심장은 불쾌하게 뛰었다. 남동생의 그런 표정이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로 받아들이는 고타쉬를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오린은 불쾌해졌다. 고타쉬와 얘기를 나누는 루시안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아, 저 불쾌한 눈동자를 파내서 처참할 정도로 망가뜨리고 싶어라. 오린이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루시안은 고타쉬와 함께 멀어져갔다. 오린은 길게 늘어지는 그의 그림자를 있는 힘껏 밟았다. 얼마나 세게 밟든 그림자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그의 그림자를 밟아댔다. 광기 어린 웃음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울 때까지 쭈욱.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

오린이 그 질문을 던졌을 때 루시안은 망설임없이 마음에 든다고 대답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더니 "왜 마음에 들지 않아야 하는데?"라고 되물었다. 유연하지만 부드럽지는 않은 손짓이 공중에 펼쳐진다. "네가 마음에 들어하는 건 처음 봐서." "아하." 루시안은 감흥없는 얼굴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일단 고타쉬는 똑똑해. 그의 계획이라면 아버지의 말씀을 이 세상에 실천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는 것도 많지. 발더스 게이트를 돌아다니면서 그는 많은 것들을 내게 알려줬어. 또다른 이유라면.... 그래, 그도 나를 마음에 들어하니까."

"하."

고민도 없이 바로 쭉쭉 나오는 대답들에 오린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호감(Favor), 호감, 호감, 지금 네가 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아버지의 자식답지 않아.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루시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는지 같잖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글쎄. 그건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내 자리를 빼앗길 정도로 그 감정이 내 일에 지장이 가지는 않네."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그는 오린의 턱을 세게 잡더니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 "사랑하는 내 누이, 누나야말로 감정에 삼켜지지마." 살육에 대한 희열? 그건 바람직하지. 하지만 넘치는 희열에 의무를 잊어버리는 건 바알의 자식으로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위잖아? 루시안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오린의 얼굴이 분노로 굳었다. 저번에 실패한 일을 두고 말하는 게 틀림없다. 오린은 거칠게 고개를 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루시안은 놓쳐버린 그의 얼굴을 다시 잡지 않았다. 그는 그저 비어버린 손아귀를 한번 휘저으며 감정을 못 숨기고 있는 오린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곧 흥미를 잃고 시선을 돌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그저 그렇게 멀어져갔다. 오린은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단검을 잡은 손가락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의 심장에 단검을 꽂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가 자신의 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발버둥치는 꼴을 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가 숨을 멎을 때까지 가지고 놀 거다. 그리고 죽음은 가장 화려하게 맞이하게 해줄게, 나의 남동생이여. 웃음 소리인지 아니면 울음 소리인지 오린은 끽끽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오린은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그렇게도 싫었다.

바퀴벌레처럼 살아돌아온 자신의 혈족은 또 반짝거리는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반짝이는 눈동자는 고타쉬를 바라보던 눈동자와도 달랐다- 더 불쾌하다. 오린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루시안은 두려움 하나 없이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단검이 꽂힌 머리가 아파오지도 않는지 그는 오린이 무슨 말을 하든 팔짱을 낀 채 오만한 상판으로 대응했다, 예전과 똑같이.

"...그래서 네가 날 이 꼴로 만든 사람이 맞다는 거지?"

오린의 말이 끝났을 때 루시안은 딱 그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그가 자신을 제대로 떠올리지조차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는 여전히 오린을 같잖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린은 자신이 바알의 선택받은 자라고 말했다. "너는 바알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어. 화려하지도 않고 멍청하고...." "바알의 선택받은 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데."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저 말을 꺼낼 수 있는 네가 처음부터 싫었다. 오린은 루시안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낄낄 웃었다. "아버지를 거부한다고? 혈육이여, 그건 나도 못하는 거야. 우리는 절대로 아버지의 피를 거부할 수 없어."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오린,"

녹안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녹안은 오린을 바라볼 때가 아니라 옆에 있는 뱀파이어 스폰따위를 볼 때나 흔들렸다. 쿵, 쿵, 쿵, 흉터로 가득한 과거가 오린의 머릿속에 가득찬다. 루시안은 입꼬리를 비틀리며 웃었다. "왜 너랑 내가 같다고 생각한 거야?"

왜 너랑 내가 같다고 생각한 거야?

오린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그는 뾰족한 단검으로 루시안의 심장을 가리키며 아버지의 앞에서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비틀어진 미소로 위화감을 감췄다. 어쩌면 그때와 지금이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위화감을 남들한테서도 스스로한테서도 숨겨버렸다. 그때와 똑같을 리가 있나, 오린은 가슴 위로 단검을 세게 쥐었다, 슬레이어로 선택받은 건 쟤가 아니라 난데.


그가 널 특별히 여겼다고? 그래- 다른 사람들보다는 특별하게 여기긴 했지. 하지만 그뿐이야. 그는 우리를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 보고 있지도 않으니까. 너는 그에게 조금 더 예쁜 돌이었을 뿐이야, 이 돌대가리야. 고타쉬는 오랜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린의 하찮은 간계일 뿐이다. 그리고 설사 정말로 루시안이 자신을 그저 예쁜 돌로 봤다고 해도 고타쉬에게 그 사실이 큰 상처가 되는 건 아니었다, 작은 불쾌감이 되는 거라면 몰라도. 자신과 얼굴을 맞대면하고도 자신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암살자를 응시하며 고타쉬는 그의 과거를 짧막하게 풀어냈다. 모든 계획의 주동자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듣고서도 루시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 있는 동료들이 충격에 빠져 동공을 떨고 있는 거라면 모를까. 루시안은 팔짱을 끼며 그래서 자신을 부른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스몰 토크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간 고타쉬는 루시안에게 손을 내밀었고 잠깐 생각에 빠져있던 루시안은 고타쉬의 예상대로 그의 손을 잡았다.

"...."

"...이런 것도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군, 나의 아끼는 암살자."

루시안은 고타쉬의 손에 허리를 감긴 채로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평소의 루시안답지 않은 대응이었다. 서프라이즈를 싫어하는 그라면, 고타쉬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잡았을 때부터 손에서 전격을 뿜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겠지, "내가 서프라이즈는 별로 안 좋아해서.", 평소의 루시안이었다면. 각기 다른 생각들에 잠겨있는 동료들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그를 올려다보던 루시안은 한번 더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 "오린의 헛소리인 줄 알았더니, 내가 너와 나름 특별한 관계였던 모양이지? 생각보다 불쾌하지 않은 걸 보면." "조금이라도 불쾌했나?" 루시안은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 그의 손에서 가볍게 떨어졌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고타쉬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는 그를 잘 알고 있다. 그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고타쉬는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불쾌하지는 않았어."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조금 불쾌했다. 설마 내가 질투를 하는 건 아니겠지. 고타쉬와의 만남을 끝낸 후 야영지로 돌아온 루시안은 평소처럼 자헤이라와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루시안에게 화가 나는가? 아니, 루시안에게는 화가 나지 않는다. 그냥 조금,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루시안을 쳐다보는 고타쉬의 얼굴을 보면 그 상판을 갈아버리고 싶은 것뿐.... 질투 맞네. 아스타리온은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질투해?"

"내가? 그럴 리가! 당연히 그에게도 전애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의 현재 애인은 나니까 질투할 이유가 없지."

그래, 분명 질투할 이유가 없는데 왜 자꾸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걸까. 아스타리온의 깊어진 미간에 섀도우하트는 장난감을 찾은 아이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곧 애인의 전남친을 죽이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테니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냐고 물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못 해볼 경험이잖아? 의뭉스럽게 웃는 섀도우하트가 조금 얄밉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스타리온은 그에 맞춰 낄낄 웃으며 다른 건 몰라도 애인의 전애인을 죽이는 건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단검으로 손장난을 치며 이 단검을 어디에 먼저 꽂을지 상상하는 건 즐겁다고 말했다. "역시 목이 좋을까? 입으로 모든 걸 해내는 거 같던데 그럼 제일 먼저 목소리를 앗아가야 하지 않겠어?" 그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추락하는 꼴은 꼭 두 눈으로 봐야겠다며 낄낄대는 아스타리온의 뒤에서 윌이 혀를 찼다. "완전 악당의 미소를 짓고 있군." "오, 하지만 너도 기꺼이 이 악당의 놀이에 동참할 거잖아?" 윌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물론. 발더스 게이트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이지."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한 동료들 사이에서 아스타리온은 아무도 모르게 힐끗 루시안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여전히 자헤이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둡지는 않은 걸 보니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

대화를 나누던 자헤이라는 자연스럽게 루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부드럽게, 루시안은 그의 손길에 순간 놀란 듯 손가락을 움찔하긴 했지만 조금씩 경직된 어깨를 풀었다. 루시안의 머리카락을 몇 번 더 헤집은 자헤이라는 호탕하게 웃으며 넌 아직까지는 내 편에 서있다고 말했다. 루시안은 그의 손길이 떠난 자신의 머리를 몇 번 두드리더니 피식 웃으며 당신이야말로 아직까지는 내 편에 서있는 거라고 대꾸했다. 그의 대답에 자헤이라는 재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꼬맹이가!" 아, 두 사람의 대화가 어느 정도 끝났다. 루시안과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아스타리온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자기, 잠깐 이리와봐."

"? 무슨 일이야?"

그날 밤, 평소처럼 자헤이라의 근처에서 잘 준비를 하던 루시안을 부른 아스타리온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루시안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고타쉬의 품에 안겨있을 때보다도 더 느리게. "가만히 있어봐." 루시안은 그의 말대로 가만히 있었고 아스타리온은 가만히 있는 그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 위로 어색하게 올라간 손가락은 잠깐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더니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스..."

"조용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루시안은 그의 손길을 잠자코 받아들였다. 그의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던 아스타리온의 손길은 점점 더 부드럽게 변했다. 낯간지럽긴 하지만 이정도 스킨십은 불쾌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아스타리온은 계속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와 손을 잡는 것까지만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가 자신을 안아주는 것도 괜찮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도 괜찮다. 아니, 사실 '괜찮다'가 아니라 '좋다'인 거 같기도 하다. 할 수만 있다면 쭈욱 이대로 있고 싶다고 생각하던 아스타리온은 곧 그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범위가 넓어져가는 '편안함'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두려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끝났냐는 듯 루시안이 그에게 눈짓으로 물어왔다. 그는 팔짱을 끼며 "네가 자헤이라한테 머리를 쓰다듬당할 때 기분 좋아하는 거 같아서 한번 해봤어."라고 말했다. 루시안은 눈을 끔벅이더니 "그래서?"라고 물었다. "뭐가 그래서야?" "넌 기분 좋았어?" 아, 정곡을 찔린 느낌, 아스타리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좋았어."

"그래? 나도 좋았어."

그는 아스타리온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물론 자헤이라한테 쓰다듬받는 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네게 쓰다듬받아서 좋은 것과는 결이 달라. 네게 쓰다듬받으면서 나는 네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그는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자헤이라의 머리는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은발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아스타리온의 손길처럼 어색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는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아스타리온의 어깨가 점점 풀렸다. 그는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아스타리온은 발뒤꿈치를 땅바닥에 닿을락말락 살짝 올린 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루시안을 내려다보며 그래서 넌 어떠냐고 물었다. "생각보다 더 좋네." "당연하지. 내가 머리카락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이 야영지에서 내 은발보다 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을걸. 괜히 궁시렁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루시안은 짧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가 제일 아름다워. 셀루네의 은색보다도 더."

달빛이 은색이라고 하더라고 그 달빛만으로는 네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는 없을 거야, 아스타리온. 아부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어쨌든 아스타리온은 기분이 좋아졌다. 적안이 녹안을 바라본다. 언제부터일까, 저 녹안이 자신을 바라볼 때 온기를 품고 있었던 순간은. 녹안에 가있는 시선을 눈치챈 건지 루시안은 자신의 눈동자가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네 눈동자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 특히 날 그렇게 보는 눈동자는.” 아스타리온의 대답에 루시안이 웃었다.

“왜?”

“아니, 그냥, 누군가가 내 녹안을 엄청 싫어했던 거 같아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루시안은 말끝을 흐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사랑할 수 없어. 우리는 사랑할 수 없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니까. 도련님은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도련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니까요. 머릿속에 온갖 말들이 엉켜온다. 전자는 누가 했던 말인지 기억나지 않고, 후자는 꿈에서 집사에게 들었던 소리고, 그들의 말은 진짜일까. 루시안은 고타쉬의 팔이 훑고 지나갔던 자신의 허리를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네 눈에 비치는 내 눈이 어떤지 말해줘.”

“자기는 그냥 거울을 봐도 되잖아?”

“그냥 내 눈동자는 수없이도 많이 봐왔지. 하지만 거울로는 너를 바라볼 때의 내 눈을 볼 수 없잖아.”

거울로 보는 자신의 녹안은 얼음이라도 머금은 듯 서늘했고 피라도 고여있는 듯 사나웠다. 그 눈동자에 사랑이 있을 리가 없다. 말없이 루시안을 내려다보던 아스타리온은 피식 웃으며 애인의 장단에는 맞춰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짧게 목을 다듬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네 눈동자는 가끔 에메랄드 보석이라도 박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에메랄드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자기야, 눈동자 색부터 그런 색인데 자기가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건 그냥 개소리야.” 그런 건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는 건지, 루시안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앞에 있으면 가끔씩 오픈북이 되어버린 기분이 든다. 아직 성에 안 찼어? 그러면 더 말해줄게. 그는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그의 녹안을 묘사했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진심인지 거짓말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과장스러운 손동작과 함께 당신의 녹안은 신들의 사랑스러운 창조물이라는 것까지 말한 아스타리온은 마지막 말을 하기 전에 루시안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바알의 아이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날 바라보는 당신의 녹안에는 온기가 서려있어.”

“…”

“그래서 난 당신을 무서워해본 적이 없어. 자기는 날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거든, 적으로부터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도.”

그가 자신을 처음 안아줬을 때부터, 그의 온기를 마냥 받아들여도 자신이 아프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아무 의심 없이 그의 옆에 있어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 아스타리온은 그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스스로조차도 그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당신은 그 믿음을 이해하기는커녕 그 믿음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겠지.

“좋아, 좋아,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군. 한 문장으로 정리해줄게, 자기야. 나는 네 녹안을 좋아해. 그럼 된 거 아냐?”

자기는 나한테만 잘 보이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듣지 말고 내 말만 들어,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우리는 발등 위에 불도 떨어졌는데. ‘나는 네 녹안을 좋아해. 그럼 된 거 아냐?’-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루시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씩 보여주는 그의 아이같은 웃음, 아스타리온은 쫑알거리던 입술을 닫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아스타리온의 손에 자신의 다른 손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된 거지.”

“너만 좋아하면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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