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루시] 어느 날의 대화
7,539.
아스타리온은 꾸준히 악몽을 꾼다. 200년 동안 새겨졌던 각인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흐려지기는커녕 점점 진해지기만 해서 아스타리온은 과연 근본을 없앤다고 해도 자신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처음으로 보는 색채 있는 발더스 게이트는 그가 기억하는 것과는 달랐다. 인생처럼 절망이 이리저리 얽혀있긴 했지만 적어도 흑백은 아니었다. 그는 이리저리 채이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방향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가 원했던 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자연스럽게 누리고 살 수 있는 것, 자유, 상대적 박탈감이 그의 심장을 쥐어뜯는다.
"카자도르 먼저 죽이러 가자."
카자도르의 성 위치를 알아내자마자 루시안은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아스타리온도 그리 주장하려고 하긴 했지만 발등에 불 떨어진 건 똑같은 그가 먼저 나서 말하니 입맛이 찝찝해졌다. '네 문제는 어쩌고?'라고 물으려던 아스타리온은 뒷맛을 억지로 삼키며 다른 문장으로 대체했다. "그래, 카자도르 먼저 끝내고 살인광 사이코 집단을 끝내자. 내가 그 힘을 흡수하면 네 싸움에서도 도움이 될 테니 일거양득이지." 문장 하나로 자신의 일이 미뤄지는 건 사양이다.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는 아스타리온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시안은 진심으로 그 힘을 흡수하고 싶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자기야, 그 힘만 있다면 난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태양 밑도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을 테고...." 고작 7명을 희생양으로 바친다고 해도 눈도 깜박이지 않을 거 같은 제 귀여운 살인마 애인이 그 의식에 대해서는 자꾸 뜸을 들이니 아스타리온은 답답했다. 7명의 목숨 때문은 분명 아닐 텐데 왜 그렇게 자꾸 물어보는 거지.
"자기도 원하는 거잖아?"
"그래. 나는 원하지."
"그럼 뭐가 문제야, 달링? 자기도 원하고, 나도 원하고, 모두가 행복한 해피 엔딩! 물론 7명에게는 아니겠지만."
"난 7명의 엔딩엔 관심없어. 네가 신경쓰는 건 오직 너뿐이야."
아니, 나도 원한다니까? 루시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스타리온은 인상을 썼다. 그 힘만 있다면 아스타리온은 200년 동안 이어져온 그 빌어먹을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넌 왜 자꾸 내 속을 들쑤시는 거지? 속이 울렁거린다. 속이 울렁거리는 이유가 그 때문인 건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아스타리온은 루시안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이상하다. 7명을 희생하면 속이 더 울렁거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다. 바보같은 생각이다. 속이 더 울렁거릴 리가 없다. 7명이 불쌍하긴 하지만, 그 7명은 다들 죄인이니까, 나처럼- 절대로 죄를 씻어내릴 수 없는 망령들. 대화가 멈췄다. 멈춘 대화에 루시안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화가 끝나자 그저 무심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자헤이라와 얘기를 하고 있는 루시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아스타리온은 그가 자헤이라와 부쩍 친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
바알의 자손이라면 자헤이라와 본능적으로 친해질 수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루시안은 자헤이라를 의지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강해서? 아니, 자헤이라는 루시안보다 강하지 않다.
날 미워해도 돼, 아스타리온.
네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어.
...자헤이라라면 자기를 눈도 깜박이지 않고 죽여줄 수 있을 거 같아서?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구토감처럼 그의 턱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그와 다르게 루시안은 그날 밤 이후로 쉽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려고 들었다. 저항해. 계속 발버둥쳐. 죽으면 전부 끝이라고. "부, 아스타리온이 엄청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젠장, 내가 같이 있어준다고 했잖아. 네가 그 충동에 이길 수 있게 내가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사악한 표정이라니? 난 언제나 이 표정이었어, 대머리." "부는 대머리가 아니다! 물론 민스크는 대머리지만!"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이 머저리는 왜 내 옆에서 정신사납게 구는 거야? 아스타리온의 미간이 더 깊어지든 말든 민스크는 그의 주변에서 서성이며 적들에게는 그런 표정을 지어도 환영이지만 친구한테는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친구의 기준이 너무 낮은데. 대체 언제부터 너랑 내가 친구였다는 거야?" "친구가 아닌가? 부도?"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동행자일 뿐이잖아." 민스크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친구다!" "아니.... 하, 내가 왜 이런 바보같은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자헤이라와 루시안은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데도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깝다. 아스타리온은 루시안의 침낭 위치가 자헤이라의 텐트와 가까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오늘따라 더 신경질적이군. 부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참지 말고 다 말하는 게 낫다고 본다."
"하?"
"친구가 아니라 연인한테라면 더더욱."
네가 뭘 안다고- 하지만 아스타리온의 입술에서는 평소의 날카로운 어조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흠' 소리와 함께 입술을 가볍게 짓이기며 붉은 시선을 허공에 던지고 생각에 잠겼을 뿐이었다. 아스타리온이라고 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200년 카자도르의 밑에서 자신의 몸과 영혼, 그리고 자살할 자유마저 가질 수 없었던 그는 몇 번이고 죽음을 바랐었다. 아마 지금의 루시안보다 더. 하지만 200년의 세월은 그를 고통에 조금이나마 무뎌지게 만들었고, 포기에는 아주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죽음이 낫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물어봤다면 당연히 죽음이 낫다고 대답했겠지만, 그 문장조차 혼자서는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그는 카자도르의 노예로 살았다. 그래서 지금 죽고 싶냐고? 그럴 리가. 아스타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는 이대로 죽는 건 억울해서 못 죽는다고 분을 토해냈다. 그는 자신이 남들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 당신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마저 못 가졌으니까. 그는 보상이 필요했다, 지금까지의 비참한 삶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큰 보상이.
그리고 그건 너도 그렇지 않아?
바알에게 몸과 영혼을 다 뺏기고 자랐으면서, 지금이라도 죽는 걸 원한다고? 아스타리온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까지 네가 죽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럴 리가, 내가 아는 너는 절대로 참회하고 싶어하지 않아. 붉은색 눈동자가 그의 검은색 뒤통수를 응시한다. 시선이 느껴진 건지 루시안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고작 네 손으로 나를 죽일까봐, 라는 귀여운 이유 때문이라니.
아스타리온은 루시안이 두렵지 않다. 밤에 자신을 죽일 뻔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스타리온은 단 한 번도 그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탐욕스러운 초록색 눈동자는 어느 순간부터 붉은색 눈동자를 마주할 때만큼은 상냥하게 반짝이고는 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널 무서워하겠어, 작은 바알 귀염둥이. 아스타리온은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달링."
남들은 쉽게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이 두 사람 사이에서는 유독 어려웠다. 사랑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 때 아스타리온은 몇 번이고 그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정의하려고 노력했다. 연인? 의미도 없이 그를 지나쳐간 연인들이 형태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이런 내가 네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네 옆에 있고 싶다고, 네가 필요하다고, 너를 원한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아스타리온은 가끔 루시안이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해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하는지도.
"무슨 일인데?"
그런데도 가끔씩 왜 그는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 걸까, 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아스타리온은 싫었다. 질문을 받을 준비도 되지 않았으면서 자꾸만 그에게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 아스타리온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니까, 나는, 음.... 오늘 네 피가 필요해." 죽고 싶군.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들이 대체 무슨 쓸모지? 아스타리온은 진심으로 죽고 싶어졌다. "사실 이제 네 피맛이 기억이 안 나거든. 그리고 난 네 피맛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고." 쓸데없이 붙은 변명들은 그를 더 처참하게 만들었다. 그런 아스타리온을 멀거니 바라보던 루시안은 셔츠의 깃을 풀었다.
"? 진짜로?"
"네가 물어본 거잖아?"
하지만 너 나한테 피 주는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자기도 모르게 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타리온을 멀거니 바라보던 루시안은 팔짱을 끼더니 다른 할 말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아니, 전혀, 없어, 그런 거." 빠르게 그의 말을 부정한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성큼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에 짓눌려 없어진다.
부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참지 말고 다 말하는 게 낫다고 본다. 친구가 아니라 연인한테라면 더더욱.
"죽지마."
"뭐?"
"남들한테 죽여달라고 좀 하지 말라고. 지랄하지 말고 그냥 발버둥쳐. 난...."
네가 죽는 게 싫어. 하나였던 악몽이 두 개가 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처음으로 익숙하지 않은 악몽을 꿨을 때, 아스타리온은 깨어난 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루시안의 자리를 찾았다. 자신과 똑같이 악몽을 꾸고 있는 건지 인상을 쓴 채로 뒤척이고 있는 그를 보며 얼마나 큰 안도감을 느꼈었는지, 아스타리온은 손가락으로 그의 뺨선을 쓰다듬으려다가 말았다. 그는 날선 목소리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뭐가 나쁘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 살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누구한테나." 내게 이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을까?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카자도르의 밑에서 처음 악행을 저질렀을 때 그의 심장을 죄어오던 문장이 산산조각나서 그의 발앞에 떨어졌다. 그는 피어나려는 죄책감을 몇 번이고 짓밞으며 이기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무장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거였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 살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의 시야를 좁혔다. 누구나 자기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법이야. 그러니 나도 나를 제일 먼저 챙겼을 뿐이야. 이 세상에 날 진심으로 신경써주는 사람은....
"있어."
"...."
"그냥 여기 있어."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안은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려다 어정쩡하게 멈췄던 그의 손을 잡았다. 가벼운 스킨십에 그는 순간 멈칫하긴 했지만 그뿐, 그는 루시안의 손에 손을 잡힌 채로 가만히 있었다. 조심스럽게 껴오는 손깍지가 따스하다. 아스타리온은 순간 그가 자신을 안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날 느꼈던 온기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에게 그날처럼 안아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부탁을 했다면 루시안은 당연히 그의 바람을 들어줬겠지만, 아스타리온은 욕심을 부리다가 손깍지의 온기마저도 잃을 거 같아서 두려워졌다. 지금 느껴지는 이 온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그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야, 아스타리온. 나는 네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고 싶어. 예쁘고, 반짝거리고,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가득 담아서 네 품에 안겨주고 싶어."
"...방금 닭살이 돋은 거 같긴 하지만 일단 네가 잊고 있는 거 같아서 말해줄게. 그것도 자기가 살아야 줄 수 있는 거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응?"
"알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네게 남은 것들을 앗아갈 뿐이야."
"네가?"
아스타리온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은 채 핏기 없는 입술만 움직였다. "네가 내게서 뭘 앗아갔는데?" 그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을 잃어왔다. 거울은 모든 것을 빼앗긴 그를 비웃듯이 언제나 허공만 비추고는 했다. 아스타리온은 이제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잃어버렸던 것들을 하나씩 돌려준 사람은 루시안이었다. 그는 원한다면 자신이 네 거울이 되어주겠다고 말했었다. 장난으로 시작한 대화는 점점 섬세해져만 갔다. 버티지 못한 아스타리온이 먼저 손사래를 치기 전까지, 루시안은 초록색 눈동자에 비친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그날 밤, 아스타리온은 남몰래 루시안의 설명을 되짚어가며 머릿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의 녹안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는 그가 잊고 있었던 것들을 깨닫게 해주었다. 여전히 그가 자신의 외모가 아니라면 어떤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그래서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아름다운 엘프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는 자신이 외모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너는 언제나 내게 주기만 했어."
그는 그에게 대가 없는 호의가 뭔지 알려줬다. 그저 그가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하는 행동들, 합리성 따위는 잃어버린 동기들, 그는 그에게서 긴 세월 동안 까맣게 잊고 있어서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감정들을 깨워주었다. 아스타리온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안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이 감정들은 그가 곁에 있을 때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감정들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그의 녹안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 녹안이 바라보는 끝에는 내가 있을까,
"그러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답지 않게 겁쟁이처럼 굴지 말라고, 달링."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뭘 맞이하게 될까. 아무 것도 모르겠다. 사실 미래를 그리기에는 현재가 그의 목을 졸라오지만 지금 이 '현재'만 해결되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의 '미래'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아스타리온은 생각했다. 루시안의 푹 꺼진 고개가 아스타리온의 어깨에 기댔다. 꼿꼿히 서있던 아스타리온의 머리도 곧 그의 머리 쪽으로 기울어졌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두 사람의 손깍지는 헤어지지 않았다- 라고 이야기의 끝을 맺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밧줄에 묶인 채로 으르렁거리며 핏줄이 다 터진 시뻘건 녹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루시안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아스타리온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보다는 내일 그가 짓게 될 표정이 더 걱정되었다.
"그만 좀 괴롭혀."
바알은 자신의 자식들을 악몽으로 괴롭히고 정신적으로 무너뜨린다고 들었다. 그러니 내가 죽는 게 바알에게는 최고겠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내 죽음이니까. 아스타리온은 쓰게 웃었다. 역시 그는 7명을 희생하더라도 더 강해지고 싶었다.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서도, 자신이 강해진다면 그는 악몽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충동을 이기지 못한 그가 자신의 손목에 손톱을 박으며 이를 갈았다. "너의 내장을 터뜨려 바닥에 전시할 거야." 하! 어디 한번 시도해보라지! 내가 호락호락하게 당할 줄 알고? 아스타리온은 그의 녹안에서 그를 찾아 헤맸다. 녹안의 살기가 조금 옅어졌을 때 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안- 미세하게 흔들리는 녹안에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난 아직 살아있어, 루시안."
가까스로 조금은 돌아온 그의 이성이 눈동자에 비친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지만 결국 말하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너도 살아있고." 그에게 들릴지 들리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타리온은 계속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살아있어. 계속 걸어갈 거고."
"그러니까 내가 포기하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마, 루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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