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루시] 충동
할신루시도 살짝 첨가. 11,187.
"날 미워해도 돼."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체라면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것도 그 상대방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아스타리온을 바라보는 루시안의 초록색 눈동자는 감정의 물결 하나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그 눈동자를 응시하며 아스타리온은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미움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루시안이 차라리 자신에게 울고불고 매달렸다면 마음이 이렇게까지는 불편하지 않았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마음이 쓰인다. 걱정된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그의 심장을 조용히 두드렸다.
"나는 널 미워하지 않아. 그건 네가 아니니까."
그 말에 기뻐하는 표정이라도 지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스타리온의 대답에 루시안은 그저 눈만 느리게 깜박였다. 잠깐, 설마 여기서 헤어지자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본능적으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진 아스타리온은 재빨리 먼저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게 뭐든간에 우리는 이겨낼 거야. 네가 이겨낼 수 있도록, 내가 곁에 있을 거니까." '우리', 자기 입으로 그 단어를 말하면서도 아스타리온은 혀끝에 어색함을 느꼈다.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서 맴돌던 물음표는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먼저 입밖으로 내보내졌다. 아스타리온의 말에 루시안은 입술을 몇 번 꿈틀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아스타리온도 생각이 많아졌다.
그는 루시안에게 진심이 될 생각은 없었었다. 죽으면 좀 아쉬운 관계, 그와의 관계는 딱 그 정도의 관계까지가 적당하다고 그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그에게 원하는 게 뭘까? 처음엔 그에게서 안전만 원했었다. 아스타리온은 그가 목숨을 던져 자신의 고기 방패가 되어줄 정도로 그의 감정을 지배해서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걸 위한 방법으로 그가 아는 건 유혹밖에 없었고, 200년 동안 그 짓만 해왔으니 그는 자신도 있었다. 날 사랑하게 만들고, 난 사랑에 빠지지 않고, 실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단순한 계획이었다. 특히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절대로 실패할 일 없을 거라고 아스타리온은 장담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틀렸다.
날 미워해도 돼.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그의 옆에 있으면 자신이 안전해지기는커녕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에게서 멀어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가 걱정돼서 더 옆에 붙어있고 싶어졌다, 자칫 잘못하면 죽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아스타리온은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도 그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판단들이 죽죽 이어진다. '사랑', 처음 자신에게 '사랑해'라고 말해줬던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아스타리온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 감정을 정말로 순수하게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이 끝이 최악이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스타리온은 할신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루시안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아스타리온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그의 몸만을 바라지 않고, 할신과 대화를 마친 루시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아스타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마 그의 세상에서 영원히 유일할 존재. 허공만 바라보고 있던 아스타리온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붉은색 눈동자에 맺힌 눈동자는 초록색이었다. 에메랄드 보석은 사랑을 관장하는 신에게 바치는 보석이다. 아스타리온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에메랄드 보석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 대화가 좀 필요한 거 같아."
그는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하루종일 망설인 끝에 내뱉은 첫문장은 대화가 좀 필요한 거 '같다'는 말이었다. 피가 묻은 손을 씻지도 않고 내려다보던 루시안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타리온에게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났냐고 물었다. 끔찍한 일? 그건 아니라고 말하던 아스타리온의 입술이 멈췄다. 그래, 어쩌면 그의 말대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조금 끔찍할지도'라고 말을 바꾼 아스타리온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하지만 진심으로 이루어진 관계를 맺은 후 아스타리온은 예전보다 조금 더 행복해졌다. 그 행복은 피맛을 봤을 때 느끼는 행복감과는 결이 달랐다. 피맛을 봤을 때 느껴지는 행복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는 배가 가득 차는 행복이었다면 그가 자신의 곁에 있을 때 느껴지는 행복은 마음에 무언가가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행복이었다.
"아스타리온."
"듣고 있어, 자기야."
그래서 아스타리온은 루시안도 자신과 비슷하게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스타리온은 은밀하게 루시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루시안이 자기와 잊어버려도 좋을 하룻밤 상대 이상의 관계를 맺은 후 더 행복해졌는지 그대로인지 그것도 아니면 더 불행해졌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불안하다. 아스타리온은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며 루시안의 말을 기다렸다.
"네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어."
"뭐?"
그의 마이페이스는 한 문장만에 박살나버렸다. "다짜고짜 죽여달라니? 부연설명이 좀 필요한 거 같은데, 자기야?" 다른 사람이 죽여달라고 했다면 농담으로 대충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루시안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나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거 같아서 아스타리온은 바짝 긴장했다. "언젠가 이 충동은 날 집어삼킬 거야." 그의 문장에 '언젠가'라는 단어가 들어가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스타리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서? 그 충동이 지금 널 집어삼킨 건 아니잖아?" "집어삼킨 후에는 이미 늦어." "하지만 아직은 아니잖아? 난 그 바드랑은 달라. 네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스타리온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루시안을 보았다. 단검을 꺼낼 새도, 그의 몸을 밀 틈도 없이 아스타리온은 그의 힘에 밀려 등을 땅바닥에 받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애인이 정말로 돌아버린 줄 알았다.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하려던 그의 입술이 멈췄다. 자신의 가슴을 깔고 앉은 채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약하게 누르고 있는 제 애인은 제정신이었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아스타리온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뭐하는 짓이냐고 묻는 아스타리온보다 루시안의 말이 더 빨랐다.
"내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
알피라는 이대로 나에게 짓눌려 몇 번이고 칼질에 난도당해 죽었어. 알피라의 죽음을 얘기하는 그의 얼굴엔 희생양에 대한 애도는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아스타리온에 대한 걱정밖에 없었다. 그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물론 이렇게까지 몰린 그에 대한 걱정도 동시에 느꼈지만-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괜찮아, 자기야." 아스타리온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지금과 반대로 내가 그의 목에 단검을 겨누고 있었었지. 그리고 너는 기회를 틈타 그대로 나를 떨쳐냈고. 아스타리온은 괜찮다는 말에 순간 움찔한 그의 몸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민첩하게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루시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목 옆에는 단검이 싸늘하게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나는 쉽게 안 죽어."
루시안은 단검에 목을 기댔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목을 찔러달라고 말하는 것같아서 아스타리온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움직이지도 않은 단검 위로 그의 붉은색이 얽힌다. "내 시작은 네가 아니었을 테니 적어도 내 마지막은 너이길 바라." 얇게 베인 목에서 달콤한 피냄새가 난다. "네 마지막이 내가 되는 게 아니라."
"내 피, 지금 마실래?"
"...자기 싫어했잖아?"
"그냥 변덕이야. 싫으면 말아."
"싫을 리가 있겠어, 내 사랑."
네 목에 내 단검보다는 내 송곳니가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며 아스타리온은 그의 목을 덥썩 물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그의 피맛이 진하게 그의 피를 들끓게 했다. 그저 배가 채워지는 것과는 다르다. 쿵, 쿵, 쿵, 두려울 때 느껴지는 심장 박동과도 다른 느낌, 언어로 표현을 하려고 해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심장 박동 소리여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했다. 피맛을 적당히 본 후 아스타리온은 그의 목을 놓아주었다. 목을 놓아줄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던 걸 보아 그는 오늘 아스타리온이 이대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목을 빨았어도 저항을 안 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야."
자기,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꾹꾹 참지 말고 말하도록 해. 또 구석에 몰릴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고. 가만히 있는다고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까지는 바보도 아니면서 왜 그래? 아스타리온은 망설이면서도 그에게 손을 뻗었고, 아스타리온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그는 갑자기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그의 손에 움찔하고 팔을 움직였다. 짜악. 달콤한 소리 대신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둘 사이를 가른다. 아스타리온은 충격을 먹은 얼굴로 그에게 내쳐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지? 가슴이 욱씬거린다. 생각했던 것보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하게 욱씬욱씬- 아스타리온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아스타리온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던 루시안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나는...." 하지만 그는 아스타리온의 손을 잡지 못했다. 그의 손은 갈피를 잃은 채 바닥을 바라보며 꿈틀거렸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그는 곧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분노하고 혼란스러워하며 그는 아스타리온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갑자기 이런 얘기 꺼내서 미안해. 네 손을 내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뜬 그는 머리가 식으면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아스타리온에게 등을 보였다. 어쩌면 지금 놓아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가 차분해진 다음에 얘기를 이어가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그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행동이 먼저 나갔다. 아스타리온은 그의 팔을 붙잡은 후 물었다.
"정말로 '갑자기'야?"
루시안은 아스타리온의 손을 내치지 못했다. 그의 에메랄드 눈동자에서는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지만, 아스타리온은 그가 지금 울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혹시라도 그 생각을 한 게 아니라면 왜 네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 루시안은 말이 없다. 그래서 아스타리온은 대신 대답을 했다. "나를 죽여버릴 거 같아서?"
"안 죽일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안 죽일 거야.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어두운 초록색 눈동자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아스타리온은 그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걸을 길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와 함께 걸을 길을 보고 있는 걸까, 뭐가 됐든 그의 눈동자가 끝나는 길이 아니라 걸을 길을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스타리온은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마. 난 살아서 발버둥치는 자기가 좋으니까. 자기는 정말 귀여워서 보고 있을 맛이 나거든." 그는 그의 팔을 놓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루시안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섹슈얼 의미가 담기지 않은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진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겹쳐진 채 밤이 저물고 아침이 다시 하늘에 그려질 때까지 이어졌다.
'갑자기'가 아니었던 건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는다. 살육의 충동과 자살의 충동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루시안은 어둠의 그림자를 물리쳤다. 나이트송과 재회한 이소벨은 그에게 고마워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따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루시안은 사실 자기는 그녀를 죽였다고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죽음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아니 즐겼을 테다. 그녀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배한다는 감정이 싫었다. 그는 그저 말로는 자신을 모신다는 집사의 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고블린 무리나 어둠의 그림자나 그는 남을 위해 행동한 적은 없었다. 고블린 학살이나 티플링 학살이나 그에게는 똑같은 의미였고 그럼에도 그가 티플링의 편을 들어준 이유는 고블린 하나가 주제도 모르고 자기 발을 핥으라고 나댔기 때문이었다. 어둠의 그림자의 편을 드는 대신 하퍼 결사의 편을 든 이유는 자신의 충동이 이소벨을 죽여 하퍼들 모두를 그림자에 침몰시키라고 명령하는 거 같았기 때문이었고. 스스로를 위한 행위인데도 감사 인사를 받는 건 이상하다. 그렇지만 굳이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내비칠 이유도 없었기에 루시안은 재회한 연인들에게 고개만 몇 번 끄덕여주었다.
"어둠을 싫어한다는 건 아닌데, 이 어둠이 가신 건 좋네. 정말로."
하지만 카자도르에게 죽음을 선사해주고 싶은 이유는 아스타리온 때문이 맞다. 루시안에게 아스타리온은 특별했다. 그는 자꾸만 일을 틀어지게 만들고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자기답지 않은 일도 하게 만들고....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어서 엉망진창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에게 미운 감정이 들지 않았다. 루시안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를 죽일 바에야 내가 죽고 싶다는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느끼지 못할 감정이라서 소중했다. 오로지 나만의 감정, 어두운 충동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나만의 감정,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감정- 루시안은 아스타리온과 시선이 마추졌다.
그래서 너 때문에 죽고 싶어졌지만 여전히 나는 너를 소중히 여겨.
이 감정 때문에 자신이 정말로 죽게 된다고 해도, 루시안은 죽을 때까지 그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자기 목숨보다 그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그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낯선 감정으로 쿵쿵 뛰던 가슴이 고통으로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뿐만 아니라 심장까지 장악한 고통은 저항하지 말고 누군가의 욕망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시안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허리 아래로 쥔 주먹에 힘을 더 줬다. 가파졌던 숨소리가 다시 천천히 되돌아왔다.
"괜찮소?"
아, 할신, 언제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루시안은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순간 마이 페이스가 깨졌다.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걸로는 할신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할신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숨기지 마시오. 나는 그대가 흔들릴 때 지탱대가 되어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니. 그대도 내게 받침대가 되어주었으니 나도 그대에게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되주고 싶소." 그의 낮은 목소리 때문에 머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쥐어짜서 영원히 목소리를 못 내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시리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 루시안은 더 이상은 스스로 지탱할 수 없는 자신의 몸을 그의 몸에 기댔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게 자신의 허리를 지탱해주는 그의 손에 그는 이대로 기절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 대신 루시안은 그의 팔뚝을 꽉 잡은 채 눈으로 조용히 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머릿속에 기생충이 박힌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할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루시안을 데리고 자연스럽게 빈 방으로 향했다. 큰 덩치에 가려져서 안 보였던 걸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걸 보니 사람들이 눈치챈 거 같지는 않다. 방문을 닫고 루시안을 침대에 눕힌 할신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충동이오?"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아. 루시안은 자신의 목을 검지로 톡톡 쳤다. 침대에 눕자 의식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희미해졌다. 지금 정신을 놓으면 할신의 시체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니, 가장 아끼는 사람이 죽는다고 했으니 아스타리온의 시체인가-, 아스타리온의 시체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루시안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손을 모아 그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할신은 귀신같이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덤불을 소환하여 루시안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하지만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좀 쉬시오. 그대 얼굴이 창백하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다. 루시안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인 후 눈을 감았다. 그의 큰 손이 자신의 눈위를 덮는 게 느껴진다. 기도문일까? 뭔가를 외우는 거 같긴 한데 그의 목소리를 듣자 아까와는 다르게 평온해져서 루시안은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체를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
"정말 걱정스러운데. 계속 이렇게 의식을 잃는 것도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 그 충동에 공격당할지 모르니...."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고 내게 도움을 청했소. 우리가 조금만 조심하고, 그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함께 해낼 수 있을 거요."
"그가 계속 충동에 굴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내 안위도 있지만 자기 안위를 위해서라도."
"자헤이라한테는 말했어?"
"아니, 아직.... 그런데 대충 눈치챈 거 같기도 해."
내 얘기인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루시안은 아스타리온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들은 들려도 아스타리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이 여기 없나? 루시안은 번쩍 눈을 떴다. 곧 그는 걱정이 담긴 얼굴들과 함께 벽에 기대어 있는 아스타리온의 얼굴을 찾았다. 가슴을 쓸어앉는 안도감에 몸의 긴장을 다시 풀면서 루시안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냐고 물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너 정말 괜찮아?" 섀도우 하트는 표정은 딱딱하게 경직되어있었지만 눈망울만큼은 아기 사슴처럼 순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그래. 도움이 필요하면 말을 해, 그 시원찮은 죽상으로 발발 돌아다니지 말고. 왜? 나도 동료들은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방금 그 마지막 말 때문에 진정성이 70 퍼센트 정도 깎인 거 같은데."
"그리고 방금 그 말 때문에 너에 대한 내 생각도 70 퍼센트 정도 깎였고, 게일, 아주 고마워?"
아스타리온은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시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과 눈썹을 씰룩이더니 곧 시선을 돌렸다. 여러 얘기가 돌았다. 칼라크는 마지막으로 욕을 내뱉으며 루시안을 꽈악 끌어안더니 자기 몸은 자기가 챙길 테니 너도 네 몸을 챙기라고 말했다. "지면 안돼. 내 친구는 스스로 결정할 줄 알아야 하니까." '나도 그러고 싶어', 나올 뻔한 말이 혓바닥 위에서 빙빙 맴돈다. 루시안은 칼라크의 팔 안에 갇힌 채 노력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며칠을 못 잔 건데?"
모두가 간 후 아스타리온은 퉁명한 목소리로 질문을 툭 던졌다. "뭐?" "네 눈을 보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 게다가 쓰러지기까지 했는데!" 그는 입술을 씹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네가 갑자기 쓰러질 수도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잖아?"
"아니, 난 몰랐...."
"아니? 넌 알고 있었어. 왜냐면 옆에 있는 나도 네가 갑자기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지져스, 제발, 네 꼴 좀 네가 볼래? 거짓말을 할 거면 그럴 듯하게 하든가. 그래서 왜 내게는 말하지 않은 건데?"
"할신 얘기하는 거야? 아니야, 아스타리온, 난 할신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어. 난 그저.... 내가 견뎌낼 수 있을 줄 알았어."
머리의 통증은 익숙하니까. 울렁거리는 속도 익숙하고. 그리고 널 죽이라는 머릿속의 명령도 익숙하다.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 익숙함도 이겨내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이런 생각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네가 내게서 떨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스타리온, 나는...." 힘겹게 뗀 입술이었지만 헤어지자는 말은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낮추어 루시안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맞추었다.
"너는 뭐?"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해."
쿵. 쿵. 아스타리온의 붉은 눈동자가 커졌다. 루시안이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언제나 '널 아낀다' 또는 '널 소중히 여긴다'라고만 말했지 사랑한다는 말은 장난으로도 하지 않았었다. "너무 사랑해서.... 널 죽이려는 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계속 충동이 들어. 살육 충동과, 살인 충동과, 그럼에도 네 옆에 있고 싶다는 충동이." 루시안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젖은 초록색 눈동자가 보인다.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있지 않지만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메말라있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망설이면서도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내렸다. 아스타리온은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감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지금 루시안의 입에서 나온 '사랑해'라는 말이 그가 지금까지 들었던 사랑을 속삭이는 말들 중 제일 무겁다는 것만큼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나를 미워해도 돼, 아스타리온. 너는 그건 내가 아니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것도 나일지도 몰라."
"내게 미움받지 않고 싶지는 않아?"
"뭐?"
"네 안에 내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충동은 없냐고."
루시안은 더 이상 여유롭지 않다. 헝클어진 채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아스타리온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루시안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됐어." 무력감으로 망가진 그를 보며 아스타리온은 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을 본다. 마음이고 몸이고 통제감 하나 느끼지 못하고 서서히 '포기'라는 단어로 침몰해가던 과거의 자신이 초록색 눈동자로 지금의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그날도 했던 말이지만 넌 이겨낼 거야. 네가 이겨낼 수 있도록 내가 네 곁에 있을 거니까." 두 사람의 그림자는 겹쳐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마냥 혐오스럽지만은 않은 서로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충동에 시달릴 떄 그 충동에만 매달리도록 노력해봐, 달링. 내 옆에 있고 싶다는 충동과 내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충동에만."
우리의 머리 위에도 해가 뜰까? 어둠은 온 세상을 덮어버릴 만큼 깊지만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태양이 올 거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누구한테 들었던 거였지, 먹잇감 중에 하나였나. 기억의 형상은 흐릿하게만 존재한다. "그 충동도 꽤 거부하기 힘들지 않아? 대답은 안 해도 돼. 당연하니까." 어찌 됐든 아스타리온은 태양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그 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난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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