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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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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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기반이 되는 썰의 일부 : https://radiyyo.postype.com/post/5712334

미몽 迷夢

무엇에 홀린 듯 똑똑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정신 상태, 혹은 헛된 꿈

꿈, 그것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사그라드는 것.

꿈, 그것은 감은 눈 속에선 선명하지만 뜬 눈 속에선 잊히는 것.

꿈, 그것은…….

관동의 여름은 덥다.

하지만 남쪽인 호연은 더 덥겠지.

나누는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바깥 풍경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산을 뚫은 긴 터널을 빠른 속도로 지날 때 보이는 나무마다 녹음이 짙게 깔려 있고 비행 포켓몬들이 떠도는 하늘은 당연하게도 푸르렀다. 그런 한여름의 순간들이 재빨리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객차 내에 냉방이 돌고 있어도 더웠기에, 휴대용 음향 기기인 포켓탭을 만지며 더위가 가실까 싶어 시원한 느낌의 음악으로 바꾸어도 더위는 마찬가지였다. 도착 전부터 이렇게 더우면 호연은 얼마나 더 더울까.

관동 토박이인 나누는 호연으로 가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호연 지방에는 친척이 살고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가끔 놀러 가곤 했다. 동쪽에 위치한 관동에서 출발하면 도착하기까지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부모님은 비행 포켓몬 소지 자격증이 없었기에 늘 아버지가 자가용으로 운전을 하였는데, 어린 나누는 그 시간이 억겁의 시간과도 같았던 것을 떠올린다. 읽을 책도, 들을 노래도 없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참 신기한 시절이다.

호연 지방은 온천이 유명하여 사계절 내내 관광객이 들끓지만 특히 여름과 겨울이 성수기였다. 나누는 어릴 때부터 호연으로 떠나 부모와 함께 친척 집에 머무르며 온천이나 관광을 즐겼다. 그러나 커가면서 자연스레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오히려 나누는 좋았다. 친척 어른들의 무단한 관심과 친절이 썩 반갑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나치게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거나 귀찮을 정도로 관심을 표했다. '무던'함과 겨우 한 글자 차이인데,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관동 지방의 행정 공무원인 아버지의 영향과 스릴러나 추리 장르의 영화, 소설 등을 좋아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누는 어릴 때부터 경찰관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주변에서도 항상 그렇게 말해왔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아버지를 따라 공무원이 될 거라고. 그래서 대학도 경찰과에 지원하였고, 머리가 영특했기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사귀고 강의에 참석하면서 별다른 일 없이 무난하게 이 년이 지났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났다. 여름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스물한 살이 되고 삼 학년으로 접어든 지 반년이 지나자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점점 많아졌다. 여름 방학이 되기 전에 전공 교수로부터 여름에 1차 필기시험이 있다는 공지를 받은 나누는 맛보기로 필기시험에 응시하기로 하였다. 아직 졸업 전이라 어렵겠지만 어디까지나 맛보기인 것이다. 접수한 후에 집으로 날아온 우편물을 뜯어보니 이번 필기시험의 시험장이 호연 지방에 있다는 공지와 함께 지도 그림이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나누는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가족회의 끝에 호연에 있는 친척 집에 잠시 머무르는 것으로 결정됐다. 나누의 집은 도심에 있어 소란스러움과 가까웠고, 그냥 시험 삼아 치는 시험인데 학원에 다니기엔 수업료가 아깝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친척 집은 도심에서 떨어진 조용한 동네에 있었다. 솔직히 친척 집에 가는 건 싫었지만 이제 성인이니 예전만큼 아이 취급은 당하지 않을 거란 안일한 생각에 거기에 동의했다.

여름 방학 동안 친척 집에서 공부하며 시험을 치자마자 빨리 돌아올 계획은 품에 안은 나누는 지금, 이른 아침부터 나서서 기차에 몸을 싣고 남쪽으로 떠나는 중이었다. 옷도 몇 벌 챙겼고, 제일 중요한 교재들도 챙겼고, 없으면 입이 섭섭한 담배와 라이터, 부모가 하사한 용돈도 잘 챙겼다. 연락 수단인 포켓내비는 언제나 중요한 것이고, 휴대용 음향 기기인 포켓탭과 좋아하는 음악의 테이프도 몇 개씩 가방에 넣었다. 그러면 준비가 끝났다.

낡은 기차는 달리는 내내 덜컹거리는 소음을 냈고 냉방도 그리 시원한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선로 방향이 바뀌어 뜨거운 햇빛을 맞게 되자 차창을 가림막으로 가린 뒤에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는다. 앞으로 몇 시간이 걸리는지 머릿속으로 계산해 본다.

역시나 호연 지방은 여전히 무더운 곳이다. 기차에서 겨우 내린 나누는 저녁인데도 뜨거운 태양빛을 받자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셔츠의 단추를 하나 푼 상태였지만 하나 더 끌렀다. 가슴께에서 생긴 땀방울이 배꼽까지 주르륵 흐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어서 빨리 해가 지길 바란다.

기차역에는 많은 사람과 포켓몬이 뒤섞여 있었다. 기차역에 소속된 물타입, 얼음타입 포켓몬들이 허공에 물을 뿌리며 더위를 가라앉혀 주고 있다. 아이들이 물줄기를 따라다니며 즐겁게 소리를 지르고 까불댄다. 이 더위에 지치지도 않나 보다. 나누는 그 혼란 속에서 빠져나와 매점으로 들어간다. 냉수를 사서 단숨에 들이킨 뒤, 짐이 담긴 보스턴백을 들고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안에 책들과 옷가지 등이 있어서 꽤 무겁다. 한 걸음씩 천천히 계단을 올라 사람들과 뒤섞여 밖으로 나간다. 기차역 입구 근처에 서서 포켓내비로 친척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자 지금 가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나누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고 친척 아저씨를 기다린다.

손부채질로도 막기 힘든 뜨끈한 공기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면으로 된 반바지 통 사이로 따뜻한 공기가 들어오자 허벅지마저 땀이 날 것 같다. 나누는 미지근해지기 전에 남은 생수를 다 마시고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윽고 친척 아저씨의 차가 나누를 데리러 왔다. 전화를 받으며 걸어가서 보면 그의 차는 최신 모델에 가까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투톤 색상이 유행하는 시기였기에 친척 아저씨의 차도 짙은 감색을 바탕으로 두고 연청색으로 도드라지는 포인트를 주고 있다. 트렁크에 보스턴백을 욱여넣고 뒷좌석에 앉으면 가벼워진 몸이 그리 편할 수가 없다. 나누가 한숨을 쉬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친척 아저씨의 에나비가 고개를 뒤로 돌리고 귀엽게 짖었다. 몇 년 만에 보는데도 나누를 기억해 주는 것이 고마워 왼손을 뻗어 에나비를 쓰다듬는다.

"되게 오랜만이네."

"안녕하셨어요."

나누는 살짝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가벼운 인사를 한 친척 아저씨는 차를 몰며 요즘 유행하는 가라르 지방의 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꽂았다.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누도 라디오에서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잠깐의 휴식을 방해할 만큼 그의 입이 시끄러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친척 아저씨는 유행에 민감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젊은이들의 감성을 쫓곤 했다. 그것은 그를 더욱 세련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가르마 탄 단발에 볼륨감을 주고 곱게 빗어넘긴 머리 스타일도 최근에 유행하는 것이었다.

"그 작았던 꼬마가 벌써 다 커서 스물한 살이라니. 세월이 무섭긴 무섭구나."

"그러게요."

원래 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붙임성 좋은 성격도 아니었기에 들떠있는 친척 아저씨의 기분과 달리 차 내의 분위기가 축 처진다. 나누가 오랜 여정으로 피곤할 것이라 짐작한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기로 하고 운전에 집중했다. 달리고 달려서 먼저 도착한 곳은 보라시티. 호연 지방 중부에 위치하여 오가는 사람이 특히 많고, 호연에서도 손에 꼽는 대도시 중 하나다. 그런 보라시티가 커진 지는 불과 몇 년이 채 되지 않는다. 현재 보라시티의 체육관 관장인 암페어라는 사람이 작은 마을을 이렇게까지 부흥시켰다고 전해진다. 모두 젊은 나이에 대단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했다.

나누도 텔레비전이나 주위 소식을 통해 장성한 보라시티 이야기를 접했으나 실제로 와 보니 더 큰 도시였다. 여름밤을 맞이한 대도시의 번화가에는 밤마다 밴드가 연주하는 바도 있었으며 관광객 유치를 위한 오락 시설(거의 도박장이지만)도 성행하고 있었다. 자전거 판매점, 포켓몬 기술 전문점, 심지어 호연의 유일한 텔레비전 방송국까지 있었다. 나누는 차창 너머로 그 모든 풍경을 살펴보며 번화가는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한다.

차는 번화가를 벗어나 주택 밀집 지역으로 진입한다. 넓은 골목으로 몇 번 꺾어 들어가면 나타나는 친척 집은 옛날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다.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운 뒤 친척 아저씨와 나누 그리고 에나비가 다녀왔습니다, 하고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 친척 아주머니가 달려 나와 그들을 맞이한다. 아주머니도 나누를 보며 많이 커서 몰라보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멀리서 오느라 피곤했겠네. 방은 2층. 알지?"

"네. 감사합니다."

항상 가족들과 놀러 올 때마다 머물렀던 2층의 손님방을 나누 혼자 쓰게 되었다. 그땐 셋이 잠을 자도 넉넉했는데 꽤나 작은 방이다. 이미 연락을 한 뒤라 손님방은 정돈된 상태였다. 이부자리, 작은 텔레비전, 좌식 밥상, 옷장. 여름날이기에 대나무 돗자리 위에는 새하얀 모시 이불이 깔려 있다. 한숨을 돌린 나누는 보스턴백을 바닥에 둔 뒤 땀에 전 몸을 이끌고 샤워부터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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