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Guard you, Guide me 1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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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칼로스에서 가라르로 이어진 기차에 몸을 실은 나누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동료 두 명도 맞은편에 앉으며 일반 시민인 것처럼 잡담을 하지만 나누는 딱히 입을 열진 않고 어스레한 창 밖만 보았다.

칼로스에서는 얼마 전 포켓몬 트레이너의 자격을 시험하는 체육관 문화에 대한 폐단을 지적하며 이런 악습은 사라져야한다는 주장을 담은 종이들이 길거리에 흩날렸다. 목격자도 없고 누가 뿌린 건지 알 수도 없었기에 칼로스의 형사기구에서는 범인을 잡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수상한 무리가 한 체육관을 습격했고, 포켓몬 기술을 마구 써대서 체육관 건물을 못 쓸 만큼 엉망으로 만들었다. 관장과 소속 스태프들은 물론 지나가던 시민들도 크게 다쳐 아직 치료 중이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수가 많지 않았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고 한다. 체육관 건물에 기술을 날린 포켓몬들은 캥카, 갸라도스, 대짱이, 강철톤으로 알려져있었지만 더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모두 메가진화한 모습인데다 초보 트레이너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포켓몬인 대짱이-물짱이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뱃지를 따려다 실패한 트레이너들의 짓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사건 즉시 칼로스 체육관 테러사건 수사팀이 꾸려졌고 나누도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별 진전없는 수사는 난항을 맞이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갑자기 선동을 하며 예고도 없이 사고를 일으키고는 또 잠잠한 것이다. 의미없이 피해 체육관 주변만 수사하던 그 때, 칼로스와 가까운 지방인 가라르 지방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가라르는 특이하게도 체육관 문화에 오락적인 요소가 짙어 예로부터 배틀 결과 예상에 돈을 건다든가, 적대적인 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운다든가 하는 추한 모습이 유명한 곳이다. 그렇다 해도 체육관은 체육관인지라 관장과의 배틀에서 승리한 후 뱃지를 얻어야만 정식으로 리그에 출전할 수 있었다. 혹자는 가라르에서 일어난 사건이 칼로스에서의 사건을 모방한 것 아니냐고 의견을 냈다. 그러나 공격받은 체육관을 조사한 결과, 이용된 포켓몬이 칼로스 때와 동일한 것이 밝혀졌고 가라르에선 볼 수 없는 포켓몬들도 있어서 동일인물들일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이후 가라르는 국제경찰의 본부가 있는 칼로스의 형사기구에 공조수사를 요청했다. 본부는 가라르로 기존의 수사팀을 파견했고 그 중 한 명이 나누였다.

나누는 약 세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이동시간에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해본다. 가라르의 형사기구와 접촉해 사건의 개요를 듣고 수사에 착수하는 것. 곧 나누와 동료들은 가라르에 도착했고, 미리 대기 중이던 담당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발생한 사건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피해 범위는 칼로스 사건과 같았다. 다함께 가라르의 형사기구로 이동한 뒤에는 착석하여 자료화면들을 살펴보았다. 현재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범인들의 동선을 파악 중이라는 말로 회의는 끝맺었다. 그리고는 위험에 처할지도 모를 가라르 관장들의 명부를 받았다. 종이를 넘겨보던 나누는 특이하게도 그 중에 비슷한 인종의 사람이 있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흑백으로 인쇄된 인물사진을 얼추 보면 나이도 젊어보였다.

가라르팀은 흑판에 가라르 지방의 지도를 붙인 뒤 각 체육관의 위치, 명칭, 관장들에 대한 것을 요약했다. 나누의 눈길을 잡았던 그는 중부에 위치한 엔진시티의 관장인 순무. 이름에서도 토속적인 냄새가 나는 그는 호연지방 출신으로 오래 전, 가라르로 스카웃되었다. 트레이너들이 겨우 세번째에 만나는 관장이지만 그의 뛰어난 실력에 의해 많은 트레이너들이 중도포기를 한다고 한다. 첫관문이라 불리는 관장답게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는 말을 덧붙이자 다음 목표가 될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칼로스에서 습격을 받은 곳은 이설체육관이었고 가라르에서는 너클스타디움이었다. 아름다운 도전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체육관이 제일 먼저 습격당한 걸로 보아 범인들은 강하다는 것에 기준을 두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제일 마지막 뱃지만 따내지 못한 트레이너들이 똘똘 뭉친 것일 수도 있다. 칼로스 사건의 경우, 왜 이설체육관 이전에 들리는 향전체육관이 아니라 가라르로 목적지를 바꿨는지 현재로선 알 수가 없었다.

이후 각 팀은 너클시티로 가서 함께 현장을 조사했고 그것을 토대로 사진을 찍거나 하며 수사자료를 만들었다. 아침 일찍 가라르로 왔으나 이것저것 하다보니 조사는 저녁시간에 마무리되었다. 나누네 칼로스팀은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엔진스타디움 습격을 대비해 당분간은 수사도 겸하여 엔진시티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이것은 본부에서 내려온 지시였다. 가라르팀에게 이렇게 됐다고 말하면 소수의 인원이 칼로스팀을 안내해주겠다며 따라왔다.

너클시티에서 아머까오 택시를 타고 재빠르게 도착한 엔진시티의 첫인상은 장엄하지만 어딘가 딱딱했다. 전달받은 정보에 의하면 이곳은 가라르지방 최대의 공업도시였다. 온통 붉은 벽돌로 된 도시 건물에서는 끊임없이 증기를 내뿜었으며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사람들, 성별 관계없이 껄렁해보이는 인상의 젊은이들이 자주 보였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뭉쳐서 저녁시간의 엔진시티를 걸어가는 광경이 꽤나 신기한 건지, 길거리의 현지인들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수군거렸다.

가라르팀의 안내를 받으며 특이한 구조로 된 승강기를 타고 하층부로 내려간다. 도시가 꽤 넓기에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길을 익혀두기 위함이었다. 아래로 내려오면 탁 트인 미르시티와 달리 우중충하고 삭막한 분위기가 더욱 와닿는다. 원래 가라르 지방은 유난히 날씨가 궂은 편이고, 지금은 검붉은 도시의 색과 테러사건에 대한 불안한 분위기도 뒤섞여서 그다지 좋은 느낌은 받지 못한다. 상점가를 걸으면 기술머신을 비롯한 레코드를 파는 상점에서 유행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냄새나는 하수도 쪽도 수상한 점이 없는지 둘러보고, 다시 올라와서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본다. 참으로 묘한 느낌의 도시다.

그런 뒤에 음식점에 들어가 가라르팀에게서 이곳 엔진시티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리그 시즌이 되면 여기서 개회식을 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식사를 마치고 승강기를 이용해 다시 상층부로 올라갔다. 다음으로 안내된 곳은 스타디움 바로 옆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우선은 모두들 휴식을 취하고 내일은 바로 옆에 위치한 스타디움을 방문해야함을 알린 후, 가라르팀은 엔진시티를 떠났다. 나누와 동료들은 호텔로 들어가 중앙에 세워진 동상을 보고 감탄했다. 동상에 딸린 설명을 읽은 후 호텔 로비를 찬찬히 둘러본 뒤 카운터로 올라갔다. 본부에서 현지 철수를 명할 때까지 이 호텔에서 숙박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에게 말하면 이미 연락을 받았다며 객실의 호수가 적힌 카드키를 두 개 건넨다. 칼로스팀은 나누를 포함해 세명이었기에 누가 혼자 방을 쓸지 정한다. 팀원 둘은 칼로스인이었기에 나누를 배려해 그가 혼자 방을 쓰도록 권유한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나누와 함께 있는 것을 꺼려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누는 너무 이성적이고 냉정한 면이 있었기에 그와 친하게 지내려는 동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나누 입장에서도 딱히 나쁘지 않았기에, 승낙하고 카드키를 나눠 가진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객실이 꽤나 큼직하다. 도시의 체육관이 오랫동안 이어져온 불꽃타입 전문이라 그런지 인테리어도 붉은색 계열로 맞춰져있는 점이 재미있다. 적갈색 벽지와 진홍색 커튼, 주홍색 계통의 색상들로 채워진 러그, 연갈색으로 칠해진 바닥으로 인해 도시의 풍경과 다른, 따뜻하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나누는 구두를 벗고 실내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상의를 벗었다. 그것을 옷걸이에 건 후, 편한 자세로 침대에 걸터앉는다. 두명이 누워도 공간이 남을 침대가 어서 빨리 휴식을 취하라는 듯한 느낌으로 푹신함을 자랑한다. 잠깐 앉아서 그것을 맛본 뒤에 일어났다. 진홍색의 커튼을 젖히면 조금 전까지 걷고 있던 엔진시티의 전경이 통유리에 가득 찬다. 드높은 건물들과 검은 연기가 뿜어지는 산업단지,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포켓몬, 적갈색으로 물든 붉은 도시.

잠시동안 바깥을 바라보던 나누는 피로를 느꼈다. 따끈한 물에 몸을 씻은 후 드디어 폭신한 침대로 들어간다. 눈을 감고서 내일 할 일을 정리해본다. 엔진스타디움으로 가서 관계자들을 만나 조사를 해야했고 쭈욱 신경쓰이던 체육관 관장과도 면담을 할 것이다.

접선 시간이 점심 이후에 잡혀있었기에 나누는 동료들과 오전부터 한 방에 모여 어제 작성한 자료 분석을 한 뒤, 근처에서 대충 끼니를 떼우고 엔진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첫인상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도시다. 그런 감상을 가지기 이전에, 그들은 어디까지나 일을 하러 온 것이었다.

스타디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널찍하고, 역시나 붉은색으로 칠해진 로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회의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문이 나타났다. 이미 가라르팀은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감과 동시에 말소리가 잦아들었다가, 들어온 인물들을 확인하자 인삿말이 오간다. 처음보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인사를 나누면 그들이 가라르의 트레이너 협회원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협회장은 물론 간부 몇명이 끼어서 이 사건에 대해 한마디씩 말을 꺼냈다.

가라르 수사팀은 일찍이 오전부터 주변을 돌아다니며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곳은 나름 큰 도시인데다 공업도시라 24시간동안 근로자들이 돌아다니므로 작은 정보라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허탕을 쳤다며 한명이 자조적인 느낌으로 깍지낀 손을 뒤통수에 돌리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수사 단계가 아직 초반이니 힘냅시다."

다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대답을 억지로 짜내긴 하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선 현재까지 알아내거나 분석한 것들을 공유했다. 범인들이 다른 지방으로 달아나기 전에 모든 교통지에서는 소지한 포켓몬을 검문 중이었다. 그리고 칼로스와 가라르 양쪽에서도 필요한 인력을 추가로 투입할 예정이다. 기나긴 미팅을 마무리한 뒤 이제 엔진 스타디움의 관장을 모시기로 한다. 잠깐 한숨 돌릴 겸 다들 물이나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나누는 손목시계를 보고 생각보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나있음을 알아차렸다.

건물 밖으로 나와 동료들과 담배를 태우며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도록 시시한 화제로 잡담을 했다. 어디선가 그들이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회의실로 돌아간다. 회의실로 돌아가기 전,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동료들과 이야기한다.

"앞으로 몇번 왔다갔다 해야 할 텐데, 정장 빼입은 똑같은 사람들이 왔다갔다거리면 그쪽에서도 수상하게 느끼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수사이지, 잠복이 아니니까."

"그런가…."

업무 경력이 길지 않기도 하고 타지방에 이런 사건으로 머무른 적이 없었기에 나누도 동료의 말이 어느정도 일리있다고 생각하지만, 매일 가발을 쓰거나 분장하며 오가는 것도 수상하게 여겨질 것 같다고 판단해서 대답했다.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서 체육관 관장에 대해 설명을 듣는 도중,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위로 빗어올린 까만 머리칼, 걱정이 가득한 눈, 꽉 다문 입을 하고 있지만 모두 조합해보면 앳된 얼굴의 남성이었다. 나누는 이 먼 가라르에서 무려 체육관 관장을 하고 있는 그를 붉은 눈동자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의자를 당기고 앉은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걱정도 산더미일 테고 긴장도 되겠지. 나누는 손에 펜을 들었다. 이제부터 이어질 회의 내용을 요약하기 위해서였다.

관장-순무는 이 사태와 관련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전문이 불꽃 타입이기 때문에, 주변에 피해를 줄까봐 주로 체육관 실내에서 특훈을 하거나 광산까지 찾아가서 수련하는 것이 그의 주요 일과였다. 열심히 포켓몬들과 단련하는 동안에는 만나는 사람도 적을 테고 집중하느라 주변에 신경도 쓰지 못할 터였다. 범인들의 성질로 봐선 첫번째 관문이라 불리우는 순무가 아무래도 다음 타겟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하자 순무는 크게 놀랐다. 그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럴 수가… 라는 혼잣말을 내뱉고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협회 측으로부터 엔진시티를 비롯해 가라르 전역의 체육관은 사태가 나아질 때까지 임시 휴관에 들어가야겠다는 말이 나왔다. 지금은 그러는 편이 최우선이다. 챌린지 기간이 아닐 때에도 체육관들은 상시개관 중이기 때문이다. 또, 당분간은 각 마을과 와일드 에리어에 순찰을 돌고 야간에는 트레이너들이 캠프를 하지 못하도록 방지하겠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물으면 언제나 가라르에는 작은 소동이 많지만, 이렇게까지 큰 사건은 처음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협회원들이 언성을 높이거나 싸우지 않고 재빠르게 안전한 쪽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니 평소 가라르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골아픈 걸까,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회의를 마치고 스타디움을 나서면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나누는 동료들과 스타디움 입구 쪽에 서서 담배를 태우며 수사 방향에 대해 의논했다. 그러는 도중 스타디움의 출입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나자 나누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순무 관장이었다. 그는 스태프들과 인사를 하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누와 동료들을 보더니 눈썹을 올리고 흠칫한다. 동료 중 한 명이 가라르어로 이제 돌아가냐고 물으면 순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생하셨습니다."

상투적인 인사들을 주고받은 후, 나누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강하고 그렇게 존경받는 사람의 등이 저리 작아보일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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