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나누순무 단편

underneath by 시그
1
0
0

그해 겨울은 웬일로 매서웠다.

수도가 꽁꽁 얼어붙고 눈이 쌓였으며 온기를 모두 앗아갔다. 불꽃타입 포켓몬들의 수요가 늘어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풀숲을 헤매며 그들을 쫓았다. 포켓몬들은 무자비한 포획과 추운 날씨에 어딘가로 도망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포켓몬만이 아니었다. 순무는 어느날 잠에서 깨자 침대에서 함께 자고 있어야할 연인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말수 적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연인은 멋대로 행동하여 순무는 늘 뒤를 쫓기 바빴다. 이번에도 또 무슨 변덕때문에 어젯밤엔 그렇게 뜨거웠으면서 아침 일찍 훌쩍 떠나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몇년동안 교제를 잇고 있지만 연인인 나누의 직업상 잦은 해외출장에 함께한 시간은 따져보면 얼마되지 않는다. 국제경찰은 해외로 도주하는 범죄자들을 추적하고 자료를 공유하는 데에 힘을 쓰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엘리트라 일컬어지는 나누는 더욱 바쁘신 몸이었다. 잠깐 짬내서 만나는 것도 일개 지방 트레이너인 순무에게는 감지덕지할 정도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도 잠깐,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난방이 잘 되어가는 방문을 열고 좁은 거실로 나가보면 두툼한 순무의 외투를 입은 나누가 추위에 벌개진 귀끝을 어루만지면서 막 들어오고 있었다. 어딜 다녀왔는지 물어보니 아침을 준비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없어서 사러다녀왔다고 대답한다. 벽시계를 보면 아침과 점심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순무는 나누가 아직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손에서 물건이 든 비닐봉투를 빼앗았다. 그런 뒤에 순무가 씻을동안 나누는 옷소매를 걷어올리고 느긋하게 식사 준비를 했다. 포켓몬들의 밥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욕실에서 나온 순무는 기분이 들떴다. 코를 파고드는 구수한 기름냄새, 커피가루가 온수에 녹아가는 냄새, 뒤에서 풍겨져오는 비누냄새. 늘 혼자있는 집구석에서 오랜만에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

말끔해진 순무와 작은 식탁에 마주보며 앉아 꺼진 배를 채운다. 순무의 식스테일이 나누의 무릎 위로 올라오려 하자 밥먹는 중이니 나누가 나중에 놀자고 어르고 달랜다. 어쩐 일로 순무가 늦잠을 잔 것인지는 굳이 묻지 않는다. 이른 저녁부터 밤늦도록 그를 시달리게 한 것은 나누였으니 말이다.

순무가 식탁 정리를 하는동안 나누는 침실에서 휴가인데도 직장에서 온 전화를 받고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내심 그런 나누가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마음이 콕콕 쑤셔왔다. 나누의 위치는 목숨이 달린 만큼 위험하진 않지만 현장직과 관리직을 모두 관리하는 입장이었기에 더럽게 바빴다. 통화 내용이 들려 어쩔 수 없이 듣고 있지만 무슨 내용인지까지는 일반 트레이너이기에 이해하기 어렵다.

뒷정리를 끝내고 어느새 조용한 말소리가 줄어든 침실로 들어가면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의 나누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일어서며 담배를 피고 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 날은 저녁부터 눈이 내렸다. 더욱 추워진 날씨에 나누와 순무는 서로의 체온을 나눠 뜨거운 열기에 허덕였다. 있는대로 인상을 쓰고 있지만 힘없이 풀린 입에서는 상대방을 홀리는 흐느낌이 삐져나왔다.

이윽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만끽하며 천장을 바라보는 순무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누는 바삐 움직이며 휴지로 순무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리곤 제 할일이 끝나자 옆에 털썩 드러눕는다.

몸을 돌려 그쪽으로 향했으나 나누는 돌아봐주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듯 불켜진 천장만 바라보자 순무는 조금 서글픈 마음으로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 덮어 맨몸의 온기를 유지했다.

나누는 갑자기 손을 올려 얼굴을 한 번 쓸었다. 그 모습을 본 순무는 괜챦냐고 물었다. 나누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내 존재가 괜히 끼어들어서 네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

그 조용히 울리는 말에 순무는 손을 뻗어 나누의 어깨를 감쌌다.

"네 외로움을 달래는 데에 도와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래, 그랬다. 나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처음 만났을 때 순무는 외로운 상태였다. 어쩌다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되어 진실로 사랑까지 하게 되어버린 것인데 그것에 대해 나누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잘 해줄 거라 믿었는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못났나봐."

나누는 드디어 몸을 돌리고 순무를 바라본다. 붉은 눈동자는 불안한 표정의 순무를 본다. 겨울 이불 속에서 손을 올려 얼굴을 쓰다듬자 순무는 눈을 감는다. 그가 예상하는 말이 아니기만을 바란다.

"미안해."

나누의 한 마디는 결정타였다. 순무는 뺨에 머물러있던 손을 손으로 붙잡고서 울었다. 몇년동안 사귀며 있을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상황이 닥쳐오자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널… 잊을 수 없을거야."

겨우 울음을 그친 순무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나누는 발목을 붙잡는 순무의 말에 가슴 속이 사무쳤지만 그것을 감춘다.

"잊어버려. 지금처럼 못 돌아올 수도 있어."

그리고 낮에 있었던 통화내용에 대해 설명한다. 알로라 지방에 큰 사건이 일어나 급히 파견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알면 안 되는 극비사항이라 더는 말해줄 수 없다고 한 뒤에 정성스레 순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일, 일, 일.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지쳤다. 순무는 나누를 놓을 수 없었지만 체념한 척 하며 나누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나누는 이제서야 웃을 수 있었다.

나누는 그 날 새벽 슬그머니 떠났다. 계속해서 우는 순무를 달래주며 울컥하여 눈물이 나왔지만 결코 울어보일 순 없었다. 언제부터 자기자신에게 혹독해진 것인지 곱씹어보며 잠든 그 얼굴에 한 번 입맞춤을 내리고 일어났다. 나누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무의 곁을 떠났다.

나누는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의 결말은 처음부터 이렇게 정해져 있었다고. 결국엔 위험한 일이 터지리라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이런 직업에 몸담은 주제에 순진한 연인을 만들어버린 것에 씁쓸한 웃음이 튀어나온다.

이번에는 정말 아까 한 말대로 못 돌아올 수도 있다. 나누는 상부에서의 지침에 따라 옛날에 미리 써놓았던 유서에 추가할 내용을 골똘히 고민하며 눈내리는 길거리를 걸어갔다. 나누의 발자국 위에는 새로운 눈이 덮이고 덮여 그의 흔적을 모조리 숨겨갔다.

그 해 겨울은 웬일로 매서웠다.

매일같이 눈물로 하루를 꼬박 보내던 순무는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약인지라 나누에 대한 연정이 사그라지자 자기자신을 돌보기로 한다. 먼저 잘 챙겨먹지 않던 밥상을 오랜만에 힘주어 차려보았다. 포켓몬들에게도 특식을 해주며 웃어보인다.

손대지 않아 엉망인 침실을 정리하지만 나누의 흔적이라곤 털끝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에 금새 마음이 약해졌으나 순무는 결의를 다지고 방을 청소했다.

그런 순무의 마음 한켠에는 나누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있었다. 일이 잘 해결되었다며 돌아와 그의 품에 안길 것이란 희망. 순무는 그 희망에 모든 걸 기댔다.

트레이너로서의 자질에 흠이 가지 않도록 언제나 해오던 훈련도 다시 시작했다. 그럴 때면 나누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몸을 이리저리 굴리느라 땀을 빼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체육관에도 여러번 도전하여 배틀 기록을 갱신하고 곧 봄에 열릴 포켓몬 리그에도 등록 신청을 완료했다. 주변사람들은 다시 기운이 치솟는 순무에게 응원과 격려의 말을 해주었고 사랑받는 욕구가 충족된 순무는 나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줄었다.

비록 챔피언 자리는 따내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어느 봄날, 순무는 집으로 도착한 우편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기를 관람한 리그 관계자들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저멀리 물건너 가라르 지방에서 순무를 스카웃해가고 싶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순무는 주변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가라르 지방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매스미디어와 다른사람들의 입을 통해 가라르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갔다. 최근 가라르에서는 다이맥스라는 것이 유행한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이것을 포켓몬 배틀에 적용시키는 중이라는 것이 가장 최신 소식이었다.

문득 순무는 가라르 지방에 대해 조사하며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가라르의 체육관 관장들의 인터뷰 기사를 읽던 그는 가라르에서 유명세를 타면 나누도 알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타 지방에서 러브콜을 보낼 만큼 실력이 출중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인 만큼 거기 가서도 열심히 하면 누구든지 눈에 들지 않을까. 그럼 이름이 알려질 테고 혹시나 살아있을 나누도 알 것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며칠 후 포켓몬 리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나누는 국제 정세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아침마다 배달오는 신문을 집어들고 뒤통수를 긁으며 파출소 문을 닫았다. 모종의 사건으로 직위를 박탈당하고 좌천당한 그는 현재 알로라에 머물며 촌동네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팀의 임무에서 사망사건이 발생해버리자 상층부에서는 쉬쉬하기 바빴고 제각각 나누와 그의 팀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결국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위치의 그들은 입이 꿰매진 채 본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누는 한편으론 이런 느긋한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같은 동네에 껄렁한 녀석들이 성가시긴 했지만 바쁘게 살아오던 날들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느지막이 늦잠을 잔 뒤에 여유롭게 커피를 타마시며 신문을 펼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려한다. 전 지방의 포켓몬 리그 관련 칼럼을 눈으로 좇는다. 매주 한번씩 포켓몬 리그에 대해 호평이나 비판을 하는 이 작은 기사가 어쩐 일로 많은 지면을 차지 하고 있다.

가라르 지방에서는 포켓몬의 크기가 커지는 다이맥스라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주최측에서는 이를 포켓몬 배틀에 적용해 논란이 일고 있었다. 나누는 코웃음을 치며 대체 뭐하는 짓인지 궁금해져 계속 해서 기사를 읽어본다. 포켓몬에 대한 신체 학대를 비롯해 형평성의 어긋남-다이맥스 발동이 늦을수록 배틀에서 이득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에 대해 기존의 배틀과 다른 재미를 보장하기에 환영하는 의견들도 있다.

가라르에선 이 기술을 접목시킨 배틀방식을 홍보하는 차원으로 몇년 전부터 각 지방의 엘리트 트레이너들을 스카웃해왔다고 한다. 가라르의 포켓몬 리그가 그 어느 지방의 리그보다 축제로 여겨지길 바란다는 가라르 협회의 말을 읽으며 아직 리그도 없는 알로라 지방이 무색해져보였다. 비슷한 언어와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즐길 거리에 관해선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관광객의 방문은 곧 지방의 자본과 관련이 되어있는 법이다. 알로라 지방도 관광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만 스포츠가 있고 없는 것은 얘기가 달랐다.

나누는 그만 읽기로 하고 다음장으로 신문을 넘겼다. 그러다 큼지막하게 찍힌 흑백 사진에 가슴이 철렁하며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 한다. 색이 없어도 분명하게 그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몇년 전과 마찬가지로 쓸어올린 짧은 흑발, 길게 늘인 옆머리, 삐죽 튀어나온 세갈래의 머리칼, 주욱 찢어져 냉정해보이지만 웃으면 귀여워지는 눈매와 작고 둥글둥글한 머리통.

나누는 잊고 지냈던 순무의 웃는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급하게 사진 아래에 달린 설명을 읽는다. 가라르 지방에서 직접 스카웃해온 트레이너들이라고 적혀있다. 그 아래의 기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 호연 지방에서 온 순무 선수는 스카웃 제의를 받았을 때 믿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동안 꿈을 잃고 지냈으나 가라르에 오고나서부터 열정을 되찾아 열심히 노력 중이다. 누구보다 뜨거운 불꽃타입 전문 트레이너인 그는 물심양면으로 가라르에서 현재 주목받고 있는 선수이다.

나누는 손을 덜덜 떨며 그 기사를 다시 읽고 또 읽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동안 꿈을 잃고 지냈던 것은 분명 자기 탓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라르에서 행복하다면 됐다. 괜히 또 순무의 인생에 끼어들어 그가 괴로워하는 것은 볼 수 없었다. 씁쓸한 맛을 느끼고 싶어져 커피를 마신다.

가라르는 이제 모의 배틀을 끝내고 정식으로 다이맥스 리그를 개최한다고 한다. 새로운 배틀 방식과 새로운 볼거리에 잔뜩 기대감에 부푼 채 기사는 끝났다.

나누는 신문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긴다. 순무를 만나고 싶었지만 홀로 관리하는 파출소를 떠날 수는 없었다. 상부에 연락할 수 있지만 이유가 고작 가라르 리그 관람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한숨을 내쉬고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얼마 후, 생필품을 사러 마트에 가면 사람들 사이엔 온통 가라르 얘기뿐이었다. 알로라도 가라르의 리그 개최에 들떠있었고 텔레비전만 틀면 가라르에 대한 방송이 나왔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가라르 소식에 순무가 생각나버린 나누는 젊을 때와 달리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졌다.

결국 그는 막무가내로 파출소 문을 걸어잠그고 무작정 떠났다. 신경쓰이긴 했지만 뒷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착한 가라르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적당히 예약해둔 호텔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시차적응을 위해 한숨 잤다. 그런 뒤에 거리로 나가 밥을 챙겨먹은 뒤 묻고 물어 슛 스타디움을 찾아가면 한 데 모여 무어라 적힌 천막을 들고 반대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가판대에서는 트레이너들의 리그카드라는 것을 팔고 있었다. 나누는 그것을 둘러보며 순무의 것을 찾았으나 이미 품절된 상태였다. 알로라 신문에 나올 만큼인 순무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누는 카드를 판매하는 직원에게 리그카드가 품절되다니, 대체 순무 선수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직원은 가라르어로 능숙하게 얘기해서 가라르 사람인줄 알았다며 웃어보이곤 순무의 커리어에 대해 설명해준다.

가라르에서 순무는 초신성같은 존재인 모양이다.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루었으니 잘 됐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리그카드가 또 언제 입고되는지를 물었다.

순무를 만나고 싶었지만 어디에서 머무는지도 몰랐다. 나누는 허리를 숙이고 석조다리에 몸을 기댄 채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봤다. 그 때 너무 매정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죽을 수도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평생 나누를 가슴에 묻고 아파하며 살아가길 원치 않았으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을 바로잡는다.

저녁노을이 지는 풍경이 꽤나 아름답지만 알로라에서 보는 것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서서히 쌀쌀해지는 기온에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었다. 이제 뭘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스타디움 방향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달려가는 게 신기해서 고개를 돌려 슛 스타디움 쪽을 바라본다.

순무는 팬들이 내미는 자신의 리그카드 하나하나마다 정성스레 싸인을 해준다. 경호인들이 사람들을 제재하느라 바빴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달라면 찍어주고 방긋방긋 웃는 얼굴에 나누는 입을 벌리고 한참동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순무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한참 그러고 있다 이젠 가야한다는 순무의 가라르 말을 듣고 나누는 서둘러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슴 속은 쿵쾅거렸지만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장하고 순무가 어서 자길 발견하기를 바라며 순무의 얼굴만 쫓았다.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순무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봐주었고, 마침내 사람들의 뒤쪽에 서있던 나누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순무는 웃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곧 나누 쪽으로 쏠렸다.

나누는 집중받는 것에 부끄러움을 감추고 어색한 미소로 오른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누구냐며 나누를 쳐다본다. 순무는 웃음기를 지우고서 턱을 떨며 여전히 기억나는 우는 얼굴을 지으려한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울지 않았다. 그것이 내심 기특하게 여겨져 나누는 한 걸음씩 순무에게로 다가간다. 어디서 파파라치가 튀어나와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마침내 사람들이 길을 터주고 둘은 오랜만에 마주하게 되었다. 나누가 순무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순무는 주먹으로 나누의 가슴을 가격한다. 그 충격에 한걸음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고 경호인들이 순무를 말리며 안전을 지켰다.

순무는 울음을 꾹 참으며 나누의 손목을 잡고 그를 잡아끌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점차 소란스러움이 되어갔다. 경호인들의 안내를 받아 미리 대기해둔 차에 얼떨결에 올라탄 나누는 옆에 털썩 앉는 순무를 감히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어디로 갈까요, 하는 운전기사의 질문에 순무는 그제서야 나누에게 어디 묵고 있는 곳이라도 있냐고 물었다. 나누는 체크인해둔 호텔 이름을 말했고 순무는 운전기사에게 그리 가자고 말했다.

리그 홍보차 촬영과 인터뷰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이후의 일정이 없다고 덧붙인 순무의 얼굴을 쳐다보면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누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순무의 손을 잡아보았다. 깜짝 놀란 순무는 입술을 떨더니 결국 예전처럼 작은 손짓에도 울어버린다. 도착할 때까지 나누는 순무를 가슴에 기대게 하고 등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호텔 앞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린 순무는 운전기사에게 며칠 후의 날짜와 시간을 얘기하며 그 때 다시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한다. 기사는 다시 스케줄을 확인받은 뒤 차를 몰고 떠났다.

순무는 얼굴도 가리지 않고 고개를 든 채 나누와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순무를 보며 웅성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걸 보면 순무가 정말 많이 강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가슴이 무거워진다.

승강기에서마저 둘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나누는 카드키로 방문을 열어 순무가 먼저 들어가게 한다. 신발을 벗고 실내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코트를 벗어 벽에 달린 옷걸이에 걸었다. 순무는 아무렇게나 외투를 벗어 두었다. 나누는 그 외투를 들고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주었다.

순무는 좁은 침대에 앉았고 나누도 그 옆에 앉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리며 창밖을 보면 이미 밤에 가까웠다. 어두운 밖과 대비된 밝은 실내의 모습이 창문에 비친다.

"…저기."

초조해진 나누가 결국 먼저 입을 열고 만다. 순무는 약간 화난 얼굴로 나누를 쳐다본다. 눈가와 코끝이 벌개져 울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눈은 예전과 달랐다. 마냥 나누만 쫓던 눈은 이제 나누를 무시할 줄도 알았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이라도 해봤어?"

순무의 말에 나누는 다시 고개숙였다. 물론 떠나면서 많이도 생각해봤다. 또 울고 있진 않을지, 끼니는 챙길지, 어쩌면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을지. 그 때 나누도 남몰래 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었는데 왜 연락 하나 없었는지 물어봐도 돼?"

아직 화가 난 순무의 가시돋친 목소리에 나누는 고개를 들고 멋쩍게 미소지어본다.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옛날부터 수백번 넘게 들었는데,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네."

비꼬는 순무에게 나누는 할 말이 없어져버린다. 그러나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진지한 얼굴로 순무의 손을 잡았다. 순무는 갑작스레 손이 잡혀 흠칫 떨었다.

"너야말로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

역시나, 나누가 옛날처럼 굴면 순무는 얌전해진다. 우물쭈물거리며 눈동자가 아래로 향한다. 나누는 쥐고있는 순무의 손에서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이윽고 순무는 나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나누는 알로라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순무도 알아야할 일이었다. 임무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것, 이런 일에 대비하라고 하지 않았던 상층부를 원망한 것,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치료를 한 것, 혹독한 징계를 받는 대신 알로라로 좌천된 것.

이야기를 끝내면 순무는 참았던 눈물을 다시 흘리며 나누를 그 품에 안았다. 순무의 품에서 나누는 잠시동안 위로받는 느낌을 가지고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뜨거운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불편한 자세에 허리가 아파져오자 순무에게서 떨어져 손가락으로 눈물을 대신 가져갔다.

그런 뒤에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이어졌다. 서로 미안하다며 사과한 뒤에 괜찮냐 묻고는 그동안의 서러움을 채우듯 각자의 마음에 각자를 담아갔다. 순무는 가라르로 온 뒤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았다고 말해왔다. 나누 역시 마찬가지였다.

멈춰진 시계가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예전에 느꼈던 느낌을 떠올리며 서로를 품었다. 뜨거운 몸덩이와 주고받는 숨결, 다시 뜨거운 몸. 겨우 몇년 떨어져있었으나 처음 하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해내갔다. 머리는 잊고 있었으나 몸은 기억하는 법이다.

뒷얘기까지 쓰다가 흠.... 스러워져서 지우고 여기까지 깔끔하게 끝

2020. 2. 8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