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화상 1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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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충격을 받았다. 이층의 방에서 공부를 하던 나누는 아버지가 우는 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바닥에 쓰러진 채 그렇게 슬프게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멀리 다른 곳에 살고 있어서 아주 어릴 때밖에 못 만났기에 그 가족은 모두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매번 명절이나 기념일마다 선물 혹은 특산품을 보내주는 가족이었다. 그만큼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다.

장례식장에 가면 나누 또래의 사내아이가 상주였다. 순무가 기억나지 않니? 어릴 때 함께 놀았는데. 아버지가 순무라는 아이를 소개했다. 나누는 인생에서 쓸 데 없는 것들은 곧잘 잊어버리는 성격이었기에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만큼 자기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아이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순무는 나누와 동갑이었고 똑같이 외아들에 이사오기 전에 둘이 엄청 친했다고 한다. 그래도 나누가 고개를 저으면 그때 사진 좀 몇장 찍어둘걸, 하고 혼잣말을 했다.

아버지의 친구였지, 나누의 친구가 아니었기에 순무에게는 기본적인 예의만 차리고 신경을 껐다. 헌데 며칠이 지나고 식탁머리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순무가 이 집에서 지낼 것이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나누는 먹던 밥이 목에 걸려 기침이 나왔다. 자기 영역을 침범받는 걸 싫어하는 나누는 우선 인상부터 찡그렸다. 부모님은 하루아침에 혼자가 된 그 아이가 고등학교는 나와야하지 않겠냐며 나누를 설득했다. 나누는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일년 조금 넘게 참으면 된다. 고등학교 이학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이층에는 마주보는 방이 두개 있었다. 계단을 올라 왼쪽은 나누의 방이었고 오른쪽은 손님용 방이었다. 나누는 부모님을 도와 손님용 방을 정리했다. 나누는 낯선이를 집에 들이는 것에 짜증이 났다. 부모님은 네 책상은 새 것으로 사주고 지금 쓰는 걸 순무에게 줄 테니 기분 풀라며 나누를 설득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었지만 두분이 속 편히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선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며칠이 더 지나자 나누의 방에는 새 책상을 들였고 원래 쓰던 것을 맞은편 방에 두었다. 책상을 바꾸는 김에 책장도 새로 맞췄다. 그래도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주인 맞을 준비를 끝낸 방은 주인을 기다렸지만 순무는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으나 아버지가 순무도 사고로 다쳐서 바로 올 수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많이 다쳤냐고 물어보면 몸에 불똥이 튀어 화상을 입었다고 하신다. 어느정도 나으면 올 것이라는 말에 나누는 차라리 그날 사고로 거기서 죽… 까지 생각하다 말았다.

토요일, 부모님은 차를 끌고 먼 지역까지 가서 순무를 데리고 왔다. 밤늦게 오는 바람에 나누는 이미 잠들어버린 뒤였다. 다음날 아침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부모님이 순무 이야기를 했다. 아직 화상이 낫지 않아 당분간은 통원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꽤나 성가시게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계단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장례식장에서 봤던 순무가 주방에 와서 자리에 앉아있는 나누를 보더니 한번 흠칫한다. 그런 뒤에 허리를 꾸벅 숙이고 부모님에게 인사를 올리자 아버지가 아침 먹게 어서 앉으라고 재촉한다.

나누의 대각선 자리에 앉은 순무는 나누에게 인사를 했고 나누는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뚝뚝하고 냉담한 나누만 보다가 쑥스럼많고 잘 웃는 순무를 보니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가 박아놓은 울타리 안을 침범당한 것이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웃음이 만개한 부모님 앞에선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나누는 아침밥을 다 먹고 방으로 올라갔다. 순무는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았다. 계단을 다 올라 방으로 들어가기 전, 나누는 몸을 돌려 순무에게 경고하기로 한다.

"부모님이 널 좋아한다고 해서 나도 널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 말을 들은 순무는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말을 마친 나누는 제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나서 너무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 나누는 밖에선 철저하게 모범생을 가장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어울리는 무리도 질이 좋지 않았다. 불량학생으로 찍힌 아이들과 어울린다고 교사들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자기에게 너무 친근하게 말걸지 말라고 해뒀을 정도였다. 나누네 집은 중산층이었고, 나누는 성적도 좋아 그 무리들은 아무도 나누에게 덤빌 수 없었다.

나누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느라 늘 밤늦게 집에 왔다. 그동안 나누는 학원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하며 경찰과 합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을 땐 가끔씩 창문을 열어놓고 학교 아이들에게서 얻은 담배를 태웠다. 집도 잘 살고 공부도 잘 하며 경찰관을 꿈꾸는 아이. 나누와 어울리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나누의 본성을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순무도 그 반열에 올랐다. 단지 나누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는 이유만으로, 욕심많은 나누가 받을 관심을 가로챘다는 이유만으로.

아침을 먹은 뒤 부모님은 순무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차를 끌고 번화가로 나갔다. 나누는 문득 순무의 화상이 떠올랐다. 일단 예의를 차리고 노크를 한 뒤 방으로 찾아갔다. 방바닥에 앉아 원래 살던 곳에서 가져온 짐을 정리하던 순무는 어색하게 웃었고 나누는 입꼬리 하나 씰룩이지 않았다. 흉터가 어디 생겼냐고 물어보면 순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긴팔의 소매를 걷어올렸다. 화상을 입은 흔적은 오른팔 쪽에 있었고 완전히 낫지 않아 거즈를 덧대고 있었다.

나누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어보이면 순무는 약간 눈썹을 찡그렸다. 아직도 무서워? 그렇게 물어보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누는 라이터를 켰다. 순무는 그 작은 불빛에도 숨을 집어삼켰다. 그런 반응을 본 나누는 라이터를 가까이 내밀었고, 순무는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재밌는 걸 발견한 느낌이 든 나누는 충격요법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순무를 괴롭혔다. 아직 불에 트라우마가 남아있던 순무는 무릎을 꿇고 제발 하지 말라며 나누에게 애원했다. 너무 놀리는 것 같아진 나누는 라이터를 끄고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쭈그려 앉아 덜덜 떠는 순무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빨리 낫길 바랄게."

그 말을 남긴 뒤 순무의 방에서 나왔다. 충분히 겁줬으니 앞으로 기어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나누가 학교를 다니는동안 순무는 방을 정돈하며 병원에 다녔다. 부모님은 보호자 자격으로 집을 처분하고 보험사와 이야기를 하며 남은 일들을 처리해주었다. 대체 친구가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길래 남의 새끼마저 품어주고 앞으로 나아갈 길까지 닦아주는 것일까? 가끔 아버지가 남몰래 친구 생각을 하며 우는 걸 느낄 때가 있었는데 그때문에 나누는 친구분에 대해 묻지 않기로 했다. 가족보다 끈끈한 관계가 있긴 있구나 싶다. 어차피 자기 인생에서도 별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었으니.

순무는 나누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 수속을 밟았다. 나누는 담임에게 사정을 말한 뒤 순무를 같은 반에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담임교사는 나누가 대신 전해준 서류들을 보며 집주소가 같은 것과 나누의 부모님의 싸인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는 그것을 허락해주었다. 딱히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순무가 눈앞에 있어야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순무는 나누네 반 학생이 되었다. 부모님은 그것을 기뻐하며 순무를 잘 챙겨주라고 말했다. 나누는 여전히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표정으로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당연히 남들이 보는 앞에선 그럴 생각이었다. 아직 흉터가 아물지 않은 순무를 도와주며 다른아이들에게도 그것을 당부했다. 나누가 어울리는 무리들은 나누가 유난히 친절한 것에 대해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 추측했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그런 재롱도 끝이었다. 상처가 아파서 교복도 잘 벗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두고 일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직 가재도구 위치를 몰라 헤매는 것 또한 알았지만 스스로 찾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며 순무가 물어보아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밥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먹였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님에게 의심을 살 것 같아서였다. 밖에선 챙기지만 집에선 챙기지 않고 밥은 먹이는 것이 우스운 일이다. 마치 자립하길 바라는 것처럼, 나누는 어쩐지 순무를 키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겨울이 왔으나 나누는 계절만큼 순무에게 쌀쌀맞았고 여전히 누구도 나누의 본성을 눈치채지 못했다. 가끔 나누는 라이터를 켜서 깜짝 놀라는 순무를 지켜보고 즐거워했다. 순무는 나누가 보통내기가 아닌 것을 느꼈는지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부당한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었다. 살아남으려면 그것이 최선임을 아는 것 같아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하교 후 어울리는 무리들과 후미진 골목에서 담배를 받아들고 일정 금액을 전달한 뒤 집으로 떠나려는 나누는 무리들에게 불려 걸음을 멈추었다.

"순무말야, 너랑 대체 무슨 관계야?"

한명이 묻자 나머지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누는 순무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애라고 대답한다. 그건 팔에 화상을 입어서 그런 거 아냐? 그 질문에 나누는 잠시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러자 누군가가 아픈 애 괴롭히는 건 그만두고 겨울방학 때 어디로 놀러갈지 생각이나 해보자고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들은 나누는 얼굴을 찡그렸다가 바로 몸을 돌려 자리에서 떠났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차라리 순무와 단 둘이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 아이들은 그저 편하게 나누에게 담배 몇개비를 가져다주며 깔볼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짜증이 솟구친 나누는 현관문을 열쇠로 열었고 순무의 신발이 없는 것을 보았다. 아직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씻고 교복을 갈아입은 뒤 창문을 연다. 겨울 바람이 들어오자 흡연도 할 짓이 못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인다.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내쉬면 머릿속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사라져서 맑아져간다. 손톱으로 툭툭 쳐서 재를 날린 뒤 바깥 벽면에 비벼서 담뱃불을 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꽁초는 변기에 떨구고서 물을 내린다.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이미 순무가 와있는 것을 알았다. 아까는 없던 그의 신발이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나누는 향기 좋은 분사형 탈취제를 뿌려 방에 남아있을 담배냄새를 제거한 뒤 순무의 방으로 향했다. 순무는 좀 전에 왔다고 말했다.

"왜 말 안 했어?"

그 말에 순무는 잠깐 곤란한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린다.

"그런 것까지 항상 말해야 돼?"

나누는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뭔데, 라는 생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침대에 앉아있던 순무의 눈앞에 라이터를 켜보였다. 아직 이런 쬐끄만 불도 무서워하는 주제에, 라고 내뱉으면 순무는 어깨를 들썩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 이제 불 안 무서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여유에 나누는 눈을 잠깐 크게 떴다가 다시 가늘게 뜨며 라이터를 껐다. 순무는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서 정신 치료도 겸하고 있었음을 밝혔지만 딱히 나누에겐 타격없는 이유였다. 잘 됐네, 라고 가식적인 한 마디를 던져본다. 순무는 옷 소매를 걷어 오른팔을 보여준다.

"흉터도 거의 다 나아가거든. 가끔 악몽은 꿀지도 모르겠다."

속편히 웃는 그 얼굴에 화가 난 나누는 평생 널 따라다닐 악몽이라 쏘아붙이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웃기게도 착실히 저녁밥을 차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순무는 나누의 심술을 잘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고 왜 그래야하는지 이유를 요구했으며 마침내 주먹다짐까지 일어났다. 둘은 맞아서 한쪽씩 뺨이 부은 상태로 등교했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물어볼 수 없었다. 순무가 나누네 집에 얹혀사는 건 이제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어제 둘이서 싸움이라도 했나보다, 하고 가벼이 넘겼다. 자잘한 다툼은 그 나잇대앤 조금 흔한 일이었다.

그런 순무는 차츰 자신감을 가지며 활발했던 본래의 성격을 되찾고 있었다. 체육 쪽에서 두드러진 순무의 재능은 특히 달리기에서 그것을 발휘했다. 그는 뒤늦게 들어간 부 활동에서 체육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내년 가을에 열리는 전국대회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나누네 부모님은 그 사실에 기뻐했다. 아버지는 네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할 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누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갱년기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였다.

나누는 순무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하진 못하고 그의 변화에 위화감을 느꼈다. 나누가 학원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부 활동에서 먼저 돌아온 순무가 저녁을 차리고 나누를 맞이했다. 가끔 나누에게 흡연은 건강에 나쁘다는 당연한 소리까지 해왔다. 그걸 알기에 끊을 수 없는 건데, 라고 맞받아쳐도 순무는 하루라도 빨리 금연을 하길 권했다.

안 그래도 관심을 독차지 하며 자기 영역을 침범한 순무가 싫었던 나누는 심술이 나서 일부러 발을 걸어 순무를 넘어뜨렸다. 그때문에 순무는 한동안 왼발에 깁스를 하고 다녔는데, 나누는 어리석게도 자기가 순무를 도와줘야함을 깜빡하고 순무를 넘어뜨린 것을 후회했다. 순무의 가방을 들어주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도와줘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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