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화상 2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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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발을 걸어 넘어뜨린 걸 알았지만 순무는 그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나누가 물건을 들어주거나 그에게서 부축받은 뒤에는 언제나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누는 조금씩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끼긴 했으나 심하게 다친 건 아니잖아, 라는 엉뚱한 이유를 붙여 순무의 성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순무의 발목은 서서히 회복해갔다.

어느샌가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나누는 매일 학원을 다니며 공부에 몰두했고 순무는 일주일에 네번 학교에 나가 체육교사의 지도 아래 부원들과 체력 단련을 했다. 아침식사 시간과 저녁식사 시간 외에 둘은 잘 마주칠 일이 없었다. 주말에도 나누는 방에서 나오지 않아 순무가 뭘하고 지내는지 몰랐다. 아침식사는 부모님이 함께 준비했고 저녁식사는 둘 중에 먼저 집에 오는 사람이 하고 있었다.

바빠지는데다 집 안에서도 마주치는 순간이 줄어들자 나누는 점점 순무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싫어하는 티를 내고 있긴 하지만, 이제 순무도 요령껏 대처하는데다 더이상 나누를 두려워하지 않아서인지 둘은 식사시간에 평범한 대화를 하기도 했다. 나누는 순무에게 쉽게 정을 줄 수 없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의 일원으로는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 겨울방학이 끝나고 삼학년이 되었을 때는 소속하는 반이 달라졌다. 나란히 붙어있는 옆반 사이이긴 했다. 그래도 나누는 어쩐지 순무와 같은 반이 되지 않은 것이 떨떠름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대해서 이유같은 건 생각나지 않았고 생각해볼 생각도 없었다.

체육시간에 눈에 띄고 발이 빠르기로 소문난 순무는 아이들 사이에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복도를 지나갈 때 문득 보이는 순무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반면에 똑똑하고 친절하게 구는 척 해서 주변에 사람이 많은 나누에겐 저렇게 진정한 친구라고 부를 아이들이 없었다.

나누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필요성이 없었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순무의 친구들에겐 관심이 갔다. 질이 나쁜 아이들이 순무에게 악영향을 끼쳐 자기처럼 될까봐, 순진하고 멍청한 순무를 등쳐먹거나 이용할까봐, 친하게 지내는 척 하다 괴롭힐까봐 등등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쓸 데 없는 것은 잘 잊어버리곤 했으나 순무와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만큼은 기억 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가끔 주말에 순무의 친구들이 집에 찾아오곤 했다. 여태 나누가 친구들을 데리고 온 적이 없었기에 부모님은 이 드문 상황에 축복을 받은 것처럼 극진하게 아이들을 대했다. 그렇게 영리하고 착하고 늘 칭찬만 받아오는 나누가 친구를 집에 들인 적이라곤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가지 않은 부분이긴 했으나, 바쁜 자기들이 챙겨주지 못해도 잘 자란 것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순무는 납득도 할 수 있었고 비슷한 자부심도 가질 수 있는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순무가 친구들이 내일 집에 올 거라고 하면 부모님은 비상이었다. 거실과 주방의 정리정돈을 하고 늦은 시간에 장을 보러 다녀올 정도였다.

어느날은 부모님이 외출했을 때 순무의 친구들이 함께 숙제를 하자며 집에 찾아왔다. 마음에 들진 않아도 손님으로 온 것이었기에 나누는 주방으로 내려가 마실 것이라도 줘야하나, 하고 고민을 했다. 그 때 순무가 나타나 뭐 하냐고 물으며 냉장고에서 간단히 먹을 것을 꺼내어 쟁반에 올렸다. 그동안 나누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고 순무는 피식 웃은 뒤에 방으로 떠났다.

왜 웃었을까? 나누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져 어릴 때 이후 느껴본 적 없던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휩싸인 채, 발걸음을 죽이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책상에 앉아 공부에 집중하려 해도 아까 그 일이 계속 떠올라 나누를 괴롭혔다. 순무에 대한 여러 감정들이 한방울씩 똑똑 떨어지다 마침내 고이며 한곳에 웅덩이를 만든다.

그런 마음의 웅덩이와 다르게 깊이 생각해볼 여유없이 봄이 서서히 절정을 맞을 때, 순무는 나누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한다. 쑥스러워 하며 말을 꺼내는 순무때문에 나누는 자기가 만든 밥이 맛없게 느껴져 식탁에서 손을 내리고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활발해지고 자주 웃게 된 순무를 좋아해온 그 아이는 같은 학년이지만 나누의 반도, 순무의 반도 아닌 다른 반의 아이였다. 나누는 그 아이가 둘에게서 거리가 먼 아이였기에 어떤 아이인지 알지 못해 조금 초조함을 느꼈다. 혹시나 순무에게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봐 어떤 아이인지에 대해 물었으나 아직 잘 모른다는 대답에 맥이 빠졌다.

"무작정 좋다고 받아들였어?"

어이없다는 말투로 그렇게 말해보면 순무는 약간 곤란한 듯, 당황한 듯 그런 표정을 지었다.

"이제라도 알아가는 거지. 처음부터 다 아는 사람이 어딨냐?"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나누는 약간 꺼림칙했다.

완벽할 것 같은 나누도 아침잠이 많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기에 자명종이 울리면 한번에 벌떡 일어나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 여파로 주말 아침에는 자고 싶을 만큼 자고 일어났다. 특히나 삼학년이 되자 잠드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고 그때문에 주말에는 거의 한낮에 일어나기 일쑤였다.

때는 아직 꽃향기를 실은 바람들이 머무는 봄의 끄트머리를 지날 때였다. 어느 토요일날, 눈을 뜬 나누는 제일 먼저 창문을 열기 위해 느릿하게 침대에서 나왔다. 약간 굽은 새우등을 곧게 펴고 기지개를 켠 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차린다. 벽시계를 보면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있다. 나누는 하품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집이 넓었기에 이층의 방 사이도 큰 간격을 두고 있어서 평소엔 서로의 방에서 나는 작은 잡음은 잘 들리지 않는다. 순무가 방에 있는지, 있으면 점심은 먹었는지, 아직이라면 같이 뭘 먹을지 단순히 확인할 마음으로 그의 방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발소리를 죽인 채 복도에서 한걸음, 두걸음 나아갔다.

때마침 순무의 방문은 아주 살짝 열려있어 훔쳐보기 좋아보였다. 가끔 다리를 벽에 딱 붙이며 스트레칭을 하는 순무의 침대 머리맡은 방문 쪽을 향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큰 책장이 있는 그런 구조의 방이었다. 그래서 순무가 자리에 누우면 왼쪽 머리통을 비롯해 몸도 왼쪽만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순무는 침대에 팔을 짚고 있는 상태였기에 오른쪽 얼굴이 보였다. 뭐지? 밑에는 또 다른 머리통이 있다.

나누는 순무의 시선을 따라가다 아래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는 한달 전쯤 생겼다는 순무의 여자친구. 둘은 대낮부터 겁도 없이 한 침대에서 일을 치르고 있었고 그걸 인지한 나누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안을 주시했다. 순무의 괴로운 듯한 작은 신음소리와 본 적도 없는 야릇한 표정, 탄탄한 어깨뼈를 감싼 매끈한 피부결, 튼실한 팔뚝, 그 아래의 큼지막한 화상 흉터. 참으려는 탄성이 삐져나올 때마다 대답처럼 침대도 삐걱이는 소리를 내고 있다.

잠깐 그것을 훔쳐보다 움직임을 잊어버린 다리는 감각이 돌아왔고, 나누는 모든 소리를 죽이고 그 자리에서 떠나 자기방으로 돌아갔다. 곧바로 침대 안에 쏙 들어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명백하게 느껴지자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몇번해본다. 그래도 순무의 달아오른 얼굴과 띄엄띄엄 나오던 그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혹시 순무가 방에 찾아올까봐 한동안 자는 척을 하던 나누는 저도 모르게 다시 잠들어버렸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짧게 자고 일어났지만 기분은 개운하지 않았다. 방금 꿨던 꿈에 아까 본 순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무얼 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쨌든 그런 꿈을 꾼 것은 순무의 영향이 컸다.

건장한 청년은 생소한 그 감각에 약했다. 좋지 못한 느낌이 들어 일어나서 앉아보면 꿈의 영향이 몸에 나타나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여지껏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게 되자 원망의 말들이 떠올랐다. 나누는 눈을 감고 이 열이 가라앉길 바라며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에 대해 떠올리려 노력했다. 집중력을 다른 곳에 쏟아붓고 있으면 몸상태는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나서 방을 살짝 나가보면 순무는 이미 없었다. 나누는 아까보다 더 문이 열려있는 순무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를 살펴보았다. 흐트러짐없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자기가 본 것이 환각인가 싶었으나 쓰레기통을 뒤져보면 예상대로 휴지뭉치가 나왔고 콘돔포장도 보였다. 나누는 영문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비밀스러운 사생활마저 어째서 신경쓰이는 건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누는 거기서 생각해보길 멈췄다.

둘은 함께 등교하곤 했으나 가끔씩 순무는 여자친구와 등교하기 위해 먼저 집을 나섰다. 그러는 횟수가 늘어 이제는 순무가 나누보다 앞서서 준비를 마치고 나가는 것이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나누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이런 자기자신이 유치하고 한심하게 느껴져 말도 못하고 적절히 짜증을 부릴 수 있는 이유를 찾고 있다.

여름이 완전히 찾아오기 전, 아직 아침은 버틸만한 정도로 더운 어느날 아침 나누는 식탁에서 아침을 먹으며 불쑥 아직도 그 애랑 사귀냐는 말을 꺼냈다. 순무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은 몰랐던 소식에 호들갑을 떨면서 순무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결국 순무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은 늦어져서 같이 못갈 거라고 말해두고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둘은 같이 등교길에 올랐다. 몸에 열이 많은 탓에 나누보다 더욱 더위에 힘겨워하는 순무는 아까 왜 그런 말을 꺼냈냐고 물었다. 나누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그냥 궁금했다고 대답했다. 부모님은 알고 계시는 줄 알았어. 정말 그런 줄 알았다는 투로 덧붙이면 순무는 아직 학생이니까 말하기 어려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건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순무의 말에 나누는 왜인지를 물었다. 그러면 순무는 손부채질을 하며 말한다.

"어차피 넌 나 싫어하잖아? 내가 눈에 안 보이면 잘 된 거 아냐?"

나누는 살짝 흠칫했지만 순무가 못 봤길 바라며 다시 그 말을 곱씹어본다. 신경쓰면 안 되는 건가?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이미 선을 그어버린 순무에게 다가가는 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져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같았으면 가시돋친 반응을 보였을 나누가 얌전하게 아무말도 하지 않자 순무는 헛기침을 한두번 하고는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니 괜히 너까지 신경쓰지 말라면서 장난스레 나누의 등을 한대 쳤다.

그 충격에 무언가가 나누의 머릿속에 팍 떠올랐다.

직접 헤어지라고 말하면 소문이 나겠지? 차라리 먼저 질리게 만들면 어떨까. 어김없이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온 나누는 그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둘을 갈라놓을 궁리만 하고 있다. 이 혼란 속에서 벗어나려면 예전으로 돌아가야했다.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때로말이다.

우선은 잘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래봤자 아침밥 먹을 때나 주말밖에 마주치지 못했지만, 순무의 친구들이 가끔 놀러올 때는 시원한 음료를 준비해주곤 했다. 처음에 순무는 변해버린 나누가 적응되지 않았다. 독약이라도 탔나 싶을 정도로 의심을 하곤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차츰 나누의 선의에 익숙해져 갔다. 그런 나누의 뒤틀린 친절은 순무의 여자친구가 집에 왔을 때도 계속 되었다. 부모님은 두팔 벌려 환영해주며 마치 진짜 순무의 부모님인 것마냥 그 아이를 좋아해주었다.

어느정도 친해지자 나누는 순무의 방에 불려가기도 했다. 같은 학년이다보니 숙제가 똑같았기에 어려운 부분은 나누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풀어나갔다. 좀처럼 보기 힘든 나누의 거짓된 웃음은 잘 통했다. 순무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나누가 어느정도 변했을 거라 믿을 것이다. 하지만 나누는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같이 대화를 하거나 순무를 통해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순무의 여자친구가 어떤 아이인지 파악한 나누는 때를 기다렸다. 마치 천천히 중심을 잡아가며 한 층씩 올리는 카드쌓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제일 마지막엔 한 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교내에서 스쳐지나가면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해주거나 순무가 특훈때문에 학교에 가있을 때 집에 찾아오면 더운데 물이라도 마시고 가라며 권유하거나 하면서 친절하게 굴었다.

그 어느 여름날은 순무도 학교에 가있었고 부모님도 장을 보러 외출한 상태였다. 나누는 정오께까지 잠을 자다가 초인종 소리에 깨어났다. 내려가보면 순무의 여자친구가 서있었다. 현관문을 열어주며 어제 순무가 말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여름에도 이렇게 일찍 나가는줄 몰랐다며 놀란다. 열두시를 넘어가고 있었기에 여름날 활동하기엔 더운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누는 계단을 오르며 그리 늦게 오진 않으니 순무가 올 때까지 기다려달라며 그 아이를 순무의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는 시원한 물을 갖다주고 자긴 다시 자겠다고 한 뒤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얇은 여름이불이 거치적거려 옆으로 치운 뒤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나누는 잘 생각이 없었다. 그와 더불어 방문도 끝까지 닫지 않았다. 마치 들어와보란듯이 적당하게 열려있었다.

이윽고 나누는 인기척을 느꼈다. 예상대로 그 아이는 슬그머니 발소리를 죽이고서 나누의 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한 번도 내부를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등 뒤로 느껴지는 움직임과 소리에 꽤 가까이 와있음을 감지한다. 타이밍을 가늠한 나누는 벌떡 일어나 돌아보았다. 그 아이는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반면에 나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뭐야?"

그렇게 물으면 그 아이는 우물쭈물하며 당황해했다. 그러는동안 나누는 느릿한 몸짓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새우등을 곧게 펴고서 그 아이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항상 웃으며 좋은 모습만 보여주었기에 지금의 나누가 왜 이러는지 파악하려는듯 눈동자가 여기저기 헤엄치고 있다.

"지금 이 꼴을 순무가 보면… 뭐라 생각할까?"

그렇게 말하고는 검지손가락으로 그 아이의 턱을 치켜올리면 입술이 살짝 떨렸다. 나누는 조금이라도 빈틈을 내어주지 않고 말로 그 아이가 위축되도록 만들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야? 것도 남자 혼자 있는 방인데. 네가 용기있다는 게 아니라 예의가 없단 소리야. 당황함, 놀람, 실례를 범했다는 배덕이 어우러지자 그 아이는 자기가 잘못했으니 순무에겐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온다. 순무에겐 상처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정 떨어지네. 당장 나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렇게 내뱉으면 그 아이는 울 듯한 표정으로 서둘러서 방에서 나갔다. 계단이 쿵쿵거리는 소리와 뒤이어서 들리는 문 닫히는 소리에 나누는 마치 고민거리가 해결된 것처럼 가슴 속 어딘가가 개운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여리고 순진한 건 그만큼 죄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비웃어보였다.

이후 며칠이 지남과 함께 순무의 얼굴에선 점점 웃음기가 옅어져갔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자주 내쉬고 가끔 입맛이 없다며 밥도 먹다 말고 제 방으로 올라가기 일쑤였다. 부모님은 그런 순무가 걱정되어 나누에게 무슨일이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요청했다. 나누는 순무의 상태를 좀 더 보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일주일정도 지나고 나누는 자러가기 전에 순무의 방문에 노크했다. 대답과 동시에 방문을 열면, 순무는 침대에 누워있었기에 몸의 왼쪽부분만 보였다. 방문을 닫은 나누는 침대에 걸터 앉았고 순무도 영향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누의 옆에 앉았다.

"뭐하러 왔어?"

"엄마랑 아빠가 걱정 많이 하고 있어."

그렇게 대답하면 순무는 쓴웃음을 지으며 여자친구에게 차였다는 말을 꺼냈다. 그 아이가 저지른 한 순간의 실수에 나누가 압박을 넣은 건 모르는 모양이다. 다시 예전처럼 서로에게 신경쓰지 않는 나날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 나누는 내심 기뻤으나 그 속내를 감추고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나였어도 너같은 애는 바로 찼을 거야."

"농담이야 아님 진심이야……."

나누의 무뚝뚝한 말에 순무는 피식 웃으며 그래도 고맙다고 말했다. 문득 나누는 곁눈질로 순무의 오른팔에 자리잡은 화상 흉터를 쳐다보았다. 모든 일은 이 흉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문에 모두의 삶이 뒤바뀌었다. 그래도 흉터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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