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화상 3 (끝)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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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는 방학을 꽤 우울하게 보냈으나 가을에 있을 전국대회의 육상종목에 참가해야했기에 거기에 온 신경을 쏟아부으며 마음의 상처를 회복해갔다. 방과 후에는 체육교사와 부원들과 체력단련 및 달리기를 했고 개인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말에도 학교 운동장을 달리고 너무 더운날엔 실내 체육관에서 줄넘기 등을 하곤 했다. 여름 태양에 순무의 살갗은 보기좋게 타들어가서 한껏 육체미를 뽐냈다.

나누는 진학반을 위해 방학기간만 개설된 강의를 수강하러 학원에 다니고 오후에 집에 오면 자습을 했다. 주말에 눈을 뜨면 순무는 항상 없었다. 부모님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느지막이 기상한 자식몫의 밥을 챙겨주곤 했다. 부모님은 여름날이 다 가기 전에 둘을 데리고 바다에 놀러가고 싶다는 의견을 꺼냈다. 하지만 나누는 지금 둘 다 바쁘니까 내년에 가자며 의견을 다시 집어넣었다. 바다? 가본 지 얼마나 되었더라. 그와 동시에 바닷물에서 헤엄치는 순무가 보고싶어졌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동안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되었다. 순무는 전국대회에서 육상 종목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대회 일주일 전, 전지훈련을 겸한 합숙을 위해 다른 도시로 떠나게 되었다. 나누는 예전처럼 넘어뜨려서 떠나지 못하게 할까 싶었지만 열심히 준비해온데다 학교 이름을 걸고 나가는 거라 그렇게까진 할 수 없었다. 짐가방을 들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는 순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어미새의 둥지를 떠나는 새끼새를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새끼새는 이미 다 성장해서 새끼새라고 부를 수준도 아니었는데.

잘 마주치지 않았어도 순무가 집에 없다는 사실에 어쩐지 마음 속이 비어버린 것만 같다. 순무가 떠난 다음날 아침,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방문을 열면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오랜만에 가족 셋이서 아침밥을 먹는 풍경이 낯설기까지하다. 부모님은 순무가 걱정되는 쪽으로 말들을 꺼냈지만 나누는 걱정따윈 되지 않았다. 그저 돌아오면 가만 안 두겠어…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엔 너무 감성적인 때였다. 나누는 순무가 없는 방의 침대에 드러누워 옅어져가는 그의 냄새를 쫓았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순무의 달아오른 얼굴에 몰려오는 흥분감은 아무리 나누라고 해도 제 나이다운 면을 드러나게 했다. 나누는 어느순간부터 순무를 손에 넣고 싶어졌다. 선명한 기억과 자그마한 상상이 어우러지는 날에는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로 손을 넣곤 했다. 순무가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것이 멍청할정도로 순진한 아이가 아니라 자기자신이었다면... 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고는 집에 없는 순무에 대한 갈망이 커져만 갔다.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나누는 겨우 생각을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수음 후에 느껴지는 허무함이 이성을 되찾게 만든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 이층의 방에서 반쯤 벗은채 숨을 헐떡이며 천장을 보는 것은 썩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은근한 스릴을 맛보는 것은 중독성이 있었다. 몸을 단정히 한 뒤 창문을 열고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오랜만에 담배를 태워본다. 그러고보니 여태 어울렸던 아이들과는 멀어진 지 오래였다. 몇 개비 남은 건 아껴둬야겠다.

내게 있어서 순무라는 존재는 뭘까, 같은 사춘기 애들이나 해볼 법한 상념에 빠져든다. 처음엔 지독히도 싫었는데 이제는 주변에 없으니 신경이 쓰인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결국 자기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자의식 가득한 한마디를 되뇌어본다. 곁에 있는 건 오로지 자기자신이다. 누군가가 그 옆에 있으려 하면 쫓아낼 것이다.

순무를 향한 열은 나누의 마음에 화상을 입히고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만들어갔다.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 했으나 순무가 상위권의 성적을 따내고 돌아오면 나누는 평소와 똑같은 자세로 그를 대했다. 부모님은 고생 꽤나 했는지 살이 빠진 것 같다며 토요일 저녁에 상을 한가득 차려주었다. 순무는 다른 도시에서 겪었던 일들과 경기 때의 긴장감, 재밌었던 일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나누는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부모님은 몇달 후면 둘 다 성인이지, 하고 이 좋은 일을 기념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맥주병을 꺼내왔다. 나누는 부모님이 어지간히 기분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태어나서 처음 접해보는 것에 코를 킁킁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도수는 높지 않다는 말에 한입을 마셔본다. 목구멍에서부터 코를 타고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눈썹을 찡그렸다.

순무는 사실 부원들과 몰래몰래 마셔왔기에 별 거리낌없이 입맛을 다시며 잔을 받았다. 나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술맛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나누는 반만 비우고 나머지는 순무에게 주었다. 문득 보면 얼굴이 벌개져있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한 나누는 순무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부모님은 웃으며 아직 몸에 안 받는구나, 하고 거기까지만 마시라고 말했다.

부모님의 말대로 순무의 몸은 아직 알콜을 받아들이기엔 무리였다.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자 아버지와 나누는 취한 순무를 이끌고 힘겹게 이층으로 올라갔다. 방의 불을 켠 뒤에 침대에 눕히면 끙끙대는 소리를 내다가 웃는다. 그 바보같은 웃음에서 약간 귀염성을 느낀 나누는 풉 웃어버렸다. 아버지는 순무가 이대로 잠들게 놔두라며 방을 먼저 나갔다.

나누는 침대에 오른팔을 짚고 왼손을 순무의 붉어진 뺨에 갖다대보았다. 뜨겁다고 느끼는 순간, 순무는 눈을 뜨고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나누를 쳐다본다. 그 언젠가 꿈에 나왔을 때처럼 묘한 느낌을 주는 눈빛에 두근거림을 느낀 나누는 침대에 다리를 올렸다. 그대로 순무의 위에 올라타고는 그를 내려다본다. 순무는 느릿하게 나누? 뭐야아… 하고 발음했다.

그러자 참을 수 없어진 나누는 고개를 내리고 벌어진 입에 입을 맞춘 뒤 혀를 집어넣었다. 술맛이 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홀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머릿속에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입맞춤은 가속된다. 너무 가까운 탓에 초점이 맞지 않았으나 순무는 여전히 반만 눈을 뜬 채 숨을 헉헉댔다. 나누는 진정하기 위해 입을 떼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순무를 껴안았다. 그러면 순무의 숨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이렇게나마 가질 수 있는 것. 처음이었던 입맞춤을 내어준 것. 모든 충동에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억눌러온 욕망이 터져나오자 여태 가렵던 곳을 뒤늦게 긁은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순무는 약간 흐느끼는 소리를 내고 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하는 중인 걸까. 나누는 안고 있던 몸을 일으켜 두손으로 순무의 뺨을 감쌌다. 순무는 눈을 멍하게 뜨고서 눈썹을 찡그렸다.

"너무 늦었어."

넌 내게서 벗어나기엔 너무 늦었어.

난 네게서 벗어나기엔 너무 늦었어.

그 한 마디를 남긴 나누는 일어나서 방의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나갔다. 한참동안 밤늦도록 여러가지 생각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빗나간 눈빛, 발그레한 얼굴, 순수한 미소, 어눌한 말투, 맨들맨들한 입술의 감촉. 다시 맛 볼 수나 있을까.

일요일인 다음날은 언제나 그렇듯 나누는 자고 싶을 만큼 자고 있었다. 똑똑, 노크소리에 겨우 눈을 뜨면 순무가 서 있었다. 벽시계를 올려다보면 아직 열한시즈음. 혹시나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러 온 것이라면, 나누도 각오를 했다. 치사하게도 모든 것을 말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순무는 아저씨가 밥 먹게 내려오라고 하셨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웬일로 부모님이 일찍 깨우는 건가 싶었지만 그저 둘 다 머리 아프거나 하지 않냐며 뜨끈한 국물을 준비해준 것이 다였다.

순무는 나누에게 내일 대학 지원서 쓰는 날인데 어디로 쓸 건지 정했냐고 물었다. 나누는 그동안 생각해둔 곳들이 있었으나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너는?"

그렇게 물어보면 순무는 자기가 쓸 대학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누는 그럼 자기도 거기에 지원하겠다고 대답했다. 바쁘긴 해도 어느정도 관심은 가지고 있던 부모님과 순무는 깜짝 놀란다. 부모님은 너 예전에 다른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지 않냐며 물었고, 순무는 자긴 체육특기생으로 가는 거라고 말했다.

"거긴 성적 커트라인도 별로 안 높잖아. 너정도면 충분히 명문대에 갈 수 있지 않아?"

나누는 차마 순무를 따라간다고 말은 못 하고 손쉽게 장학금이나 받으며 다닐 거라고 둘러댔다.

월요일, 나누는 말한대로 순무와 같은 대학의 다른 과의 지원서를 써냈다. 담임교사는 나누를 따로 교무실로 불러내 현재 나누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누는 고개를 저으며 지원한 곳으로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담임교사는 혹시 떨어질 수 있으니 다른 곳에도 지원서를 넣어보라며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겠다고 대답했으나 속으로는 이미 합격하고도 남을 건데,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화요일, 어디서 들었는지 반 아이들이 나누가 지원한 대학에 관심을 보이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나누는 웃으면서 장학금 받으면서 다닐 거라고 변명했지만 아이들은 굳이? 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수요일, 그 소식은 삼학년 온 학급에 퍼졌다. 순무는 너때문에 자기가 다 부끄럽다고 킬킬거렸지만 나누는 입꼬리 하나 미동없이 합격해서 대학에서도 널 괴롭힐 거라고 대답했다. 순무는 농담인데 왜 그렇게 날이 서있냐며 어깨를 탁탁 쳤다.

목요일, 우산이 없는데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나누는 집에 들러 우산을 가지고 학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서 집에 가려했다. 교문을 벗어나 찰박이는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누를 불렀다. 돌아보면 아는 얼굴 셋이 손을 들고 나누에게 걸어오고 있다.

그들은 작년까지 나누가 어울려주며 어렵게 구한 담배갑에서 몇개비를 나눠가진 뒤 돈을 지불하는 그런 사이였던 아이들이다. 삼학년이 되자마자 그들을 무시하고 기억 속에서 잊어가고 있었는데 무슨 일로 불러세운 걸까. 한 명이 잠깐 따라오라며 나누의 교복을 거칠게 잡고서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갔다. 셋 다 껄렁한 자세로 나누를 훑어보고는 바닥에 침을 퉤 뱉는다.

"우릴 이용하고는 무시하면 될 줄 알았냐? 일학년 때부터 네가 어떻게 가식부렸는지 까발려지고 싶어?"

아, 일학년 때부터 아는 사이였었군.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덩치좋은 한 명이 코앞에 주먹을 들어보였지만 나누는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애들인 것이다. 나이먹고도 정신 못 차리고 선량하게 공부하러 가는 모범생의 귀가길이나 막는 그런 부류들이다.

"때리면 고발할 거니까 너네만 손해야."

나누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고는 대신 한대만 처맞아, 라고 소리치며 기습적으로 얼굴을 가격한다. 그러나 깡만 좋게 폼만 잡고 다녀서 싸움이라곤 해본 적도 없었는지 주먹은 좋은 각도를 빗겨나갔고 아슬아슬한 힘으로 얼굴을 때렸다. 맞은 충격에 나누는 바닥에 쓰러졌고 그들은 욕지거리를 내뱉고서 자리를 떠났다.

나누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와 함께 먼지묻은 교복을 털고는 무덤덤하게 가방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냈다. 얼굴을 맞은 탓에 코피가 났던 것이다. 줄줄 흐르는 피를 닦고 휴지를 뭉쳐 코를 막아보지만 금새 빗물에 젖어버린다.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이대로 서로를 잊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산이 없었고 비가 와서 부 활동을 못하게 된 바람에 집에 먼저 와있던 순무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순무는 비에 젖어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는 나누를 보고는 비오는데 연락하지 그랬어,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며 코피났는데 괜찮냐고 물었다. 나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양말이 비에 젖어 욕실까지 걷는동안 발에는 불쾌하게 끈적이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교복은 빨래바구니에 던져놓았다. 옷장에서 새옷을 꺼내입은 뒤 우산을 들고 학원에 가려했으나 가방도 젖어있었기에 할 수 없이 순무의 가방을 빌렸다. 순무는 나누가 걱정되는지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지만 나누는 고개를 저으며 자업자득이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학원에 가서 강의 내용에 집중하려 했지만 손끝이 차가워서 필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저녁식사 시간에는 학원 근처의 식당에서 따뜻한 메뉴를 먹었지만 그래도 몸 상태는 나빠져만 갔다.

금요일, 나누는 쌀쌀한 가을날씨에 비를 맞아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부모님은 오늘 학교에 가는 것을 말렸지만 나누는 멍한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머리도 아파오고 으슬으슬 추위를 느끼자 결국 아버지는 나누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비가 그쳤음에도 순무는 부 활동에 참가하지 않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여태 혼자 있던 나누를 찾았다. 오는 길에 약국에서 샀다며 감기약통을 보여준다. 나누는 감기 기운에 부어버린 눈으로 그것을 한 번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순무는 아픈 나누를 처음 봐서 어떻게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누는 미안해진 마음에 순무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했지만 순무는 죽을 끓여주고 따뜻한 물도 먹여주며 나누를 간호했다.

나누는 이렇게 아파본 적이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또, 부모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살핌을 받는 것도 처음인 것을 떠올렸다. 혼자인 것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혼자이기에 편하다고 생각해왔다. 언제나 모두의 관심을 받는 것에 우쭐대고 싶었지만 마음 속으로만 그렇게 해왔다. 그렇게 자라와서는 몸과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순무를 괴롭혔다. 지금은 그런 순무가 나누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한 나누는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누의 책상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아있던 순무는 나누의 말에 흠칫 놀라며 뭐가 미안하냐고 물었다.

"나때문에 시간 뺏기고 있는 거…."

그렇게 대답하면 순무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딱히 상관없긴 한데… 옛날 일은 안 미안한가봐…."

그 말에 가슴이 철렁해진 나누는 벌떡 일어났고 순무는 크게 놀란다. 나누는 미안, 미안해… 미안해… 라는 말만 반복했고 순무는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있었다.

"아파서 그러는 건지 정말 반성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누는 두 손으로 순무의 손을 잡고서 전부 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아픈 탓에 감정이 격해지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더는 순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순무는 나누의 모습에 당황하며 알았으니 진정하라며 타일렀다.

"실은 아직 사과를 받아줄 마음은 없어. 하지만 네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 너는 가식이라도 이렇게 매달리면서 사과같은 건 하지 않는 애니까."

순무는 나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뺀 뒤에 나누의 손을 잡아주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면 말 해줄 수 있겠지?"

나누는 순무의 물음에 눈썹을 올렸다. 순무는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만든 이유. 그리고 내게 키스했던 이유."

순무의 희미한 미소가 무섭게 보인 나누는 놀라서 손을 확 빼내려 했지만, 순무는 나누의 손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책상에서 펜만 굴리는 아이와 운동장을 누비는 아이는 힘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결국 나누는 손을 잡혀버린 채 모두 다 자기가 그런 게 맞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하는동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네가 너무 무서워서 더는 나랑 만날 수가 없다고 그러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더니……."

줄어드는 목소리에 나누는 겨우 고개를 들고 순무를 쳐다보았다.

"이유는 말 안 할 거야?"

부드럽게 어르는 말투와 순무가 주는 특유의 따뜻한 눈빛에 져버린 나누는 괴로운듯 눈을 질끈 감는다.

"너… 너를…."

뒷말을 내뱉는 것이 두렵고 부끄러워진 나누는 눈을 뜬 뒤에 가늘게 찡그린다. 뱃속에서 차오르는 감정들에 아무리 눈동자에 힘을 줘봐도 결국엔 참회와 고백의 눈물이 고여버린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았어……."

한심한 대답을 작은 목소리로 내뱉으면 그제서야 순무의 손에선 힘이 풀린다. 나누는 해방된 두손으로 얼굴을 가려 꼴사납게 우는 얼굴을 숨긴다. 순무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나누가 눈물을 닦을 수 있도록 일어나서 휴지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갈 곳에 지원서를 쓴 것도 그것때문이야?"

다시 의자에 앉은 순무가 묻자 나누는 코를 훌쩍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순무는 코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면 황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 순무의 얼굴이 보였다. 나누도 지금은 어떻게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날 그렇게 싫어하다가 갑자기 좋아하게 된 이유라도 있어?"

"모르겠어."

바로 나온 대답에 순무는 턱을 긁으며 이유를 생각하는 것처럼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나누도 모르는데 순무라고 알 리는 없었다.

"…난 대학에 붙으면 여길 떠날거야."

순무의 말에 나누는 울어도 티나지 않는 붉은 눈을 크게 떴다. 둘이 지원한 대학은 충분히 집에서도 대중교통으로 통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거든. 그리고 아저씨랑 아주머니께도 더는 민폐끼치고 싶지 않아. 내 앞가림은 이제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나누는 여기 남아달라고 말하는 듯,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파서 그런지 그 표정은 더욱 진정성을 내비친다. 순무는 그런 나누에게 피식 웃었다. 벗어나고 싶은 존재이지만 이제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나누를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네가 그러니까 좀 낯설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순무가 그렇게 말했다. 나누는 순무가 멀어질까봐 어떻게 하면 자길 용서해줄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말을 꺼내려는 순간, 아래층의 거실에서 전화가 울렸다. 둘은 깜짝 놀랐고 순무가 일어서서 전화를 받으러 내려갔다. 급히 내려가느라 방문은 열려 있었고 조용하고 넓은 집 안에선 순무의 목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왔다.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모르겠지만 나누가 걱정되어 집에 전화한 것이었다. 순무는 자기가 오는 길에 감기약도 사오고 죽도 끓여주고 따뜻한 물도 먹였으니 안심하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 침대에 앉아있던 나누는 순무의 마음을 잡기 위해 어떻게 할지 고민해본다. 이윽고 다시 방으로 올라온 순무는 의자에 앉고서 어디까지 얘기했지? 하고 물었다.

"내가 낯설다고 했어."

그렇게 대답하면 순무는 아아, 한 마디를 내뱉는다. 나누는 순무가 무슨말을 꺼내기 전에 손을 잡았다. 갑자기 손을 잡힌 순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가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래? 무릎 꿇으라면 그렇게 할 거고 맞으라면 맞을게."

나누가 필사적으로 불쌍한 표정을 짓자 순무는 당황해하며 손을 빼내려 한다.

"왜… 왜 그래, 나누…."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진심이야?"

반쯤 넘어온 것 같다. 나누는 고개를 두번이나 끄덕였다.

"네가 정말로 내게 했던 짓들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고 싶다면… 너도 이 집에서 나와. 나랑 같이 살면서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봐."

무슨 뜻이지? 나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무는 나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뺀 뒤 이번에는 나누의 어깨에 올렸다. 나누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투명할정도로 깊으면서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우리 둘이서 살면서 서로서로 의지하는 거야. 나는 네가, 너는 내가 필요한 존재가 되겠지."

좋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대답만으론 신뢰를 얻는 것이 약간 부족하게 느껴진 나누는 거짓눈물을 짜냈다.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본 순무는 여태 봐온 것 중에서 가장 유순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어깨에 올려두었던 손을 미끄러지게 하여 나누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뜻밖의 횡재에 목적을 달성한 나누는 몰입하기를 그쳤고 그와 동시에 나오려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순무는 나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었다.

눈물겨운 화해가 끝나고 순무는 나누에게 쉬라고 한 뒤 방을 나갔다. 나누는 순무의 일부분을 기억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안긴 느낌, 따뜻한 체온, 은은한 비누향, 괜찮다고 하던 목소리. 전부 인생에서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누가 감기에서 회복한 이후, 순무는 나누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들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나누와 주말을 보내려고 해주었다. 공부만 하지말고 가끔은 휴식도 중요하다며 번화가로 나가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본다거나, 나누가 책상에서 공부할동안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거나, 가끔씩 창문을 열고서 아껴둔 담배를 피우는 나누에게 잔소리를 하다가도 호기심을 보이거나 했다. 나누는 순무의 그 무던한 태도가 좋았다. 친해지기 위해 심할 정도로 나누에게 간섭하지 않았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 친한 친구처럼 굴었다. 이전에는 둘 사이에 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잘못은 바로 잡아야한다는 순무의 권유대로 나누는 교내에서 순무의 여자친구였던 아이를 찾아가 예전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아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끝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누는 그 아이에게 용서받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을은 순무의 부모님이 영면에 빠져든 계절이자 순무의 오른팔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게 된 계절이었다. 검은색 옷들은 입은 채 부모님의 차를 타고 도심에서 떨어진 봉안당으로 향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나누는 아주 어렸을 때는 순무와 친했었다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오열하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렸다.

순무의 아버지와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나누의 아버지는 이미 눈물을 흘리면서 손수건으로 그것을 닦고 있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곁눈질로 순무를 슬쩍 보면 약간 울상을 짓고 있지만 잘 참고 있다. 먼훗날 순무가 세상을 하직한다면 모든 것을 잃은 사람마냥 다 쏟아내며 울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순무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불을 끄고서 침대에 들어가 잠들기를 기다리던 나누의 방에 순무가 조심스레 찾아왔다. 나누는 자려던 눈꺼풀을 올리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밤빛에 비치는 순무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순무는 오늘만 함께 잘 수 있냐고 물었다. 정신이 퍼뜩 든 나누는 대답없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좁은 침대라서 딱 들러붙게 되자 곁에 체온이 있다는 것에 긴장되면서도 안정감이 들었다. 나누는 순무가 오늘밤 혼자 잠들 수 없는 것을 이해했다. 오른팔에 남은 화상 흉터는 처음으로 순무에게 외로움을 상기시킨 것이다.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에 돌아누운 순무의 어깨에 팔을 올리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순무는 천천히 방향을 틀어 나누와 마주보며 눕게 되었다. 호흡하는 콧바람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누는 지금 여기서 입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참았다. 대신 팔로 감싸 안아주었다. 네가 갈 집은 사라졌어도 네가 살 집은 여기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순무가 잘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품에 안고 잠들었을 터인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빈 자리만이 눈앞에 있었다.

두어달이 흐르고 또다시 겨울이 찾아왔지만 이번 겨울은 작년 겨울과 달랐다. 입시를 치르고, 나누는 지원한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순무는 특기생으로 추천받아 합격했다. 결국 나누가 바라던대로 같은 대학을 다니게 된 것이다. 입학식이 되기 전까지 딱히 할 게 없던 둘은 머리를 맞대고 슬슬 집을 나갈 계획을 짰다. 어느날 부모님에게 말해보면 사회 경험을 위해 둘이서 나가 사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집세는 보내주겠지만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 벌어야 했다.

완전한 봄이 오기 전, 둘은 학교 근처의 작은 방을 계약했다. 이층 침대의 위쪽은 나누가 쓰기로 결정했다. 고개를 쑥 내밀면 아래쪽 자리가 보이곤 했다. 엎드려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다가도 가끔씩 고개를 슥 내밀면 순무가 보였다. 마찬가지로 엎드려서 책을 읽거나 자거나 나누의 부모님에게서 입학 선물로 받은 전자기기를 만지작 거리거나 하고 있었다. 이렇게 훔쳐보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귀찮은 이층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가끔은 가까이 있는 천장을 바라보며 드러누운 채 순무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나누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다. 그 전엔 순무를 갖고 싶어서 지독한 짓도 했지만 막상 함께 지내게 되니 그런 마음은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대낮에 조심성 없이 방문도 걸어잠그지 않은채 헐떡이던 순무의 모습이 종종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걸 보면 아직은 순무를 손에 넣고 싶은 것 같다. 완전히 정리되지 않는 감정은 또다시 흘러나와 웅덩이를 만들어간다.

봄이 되자 나누는 동네 주민의 집을 방문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고 순무는 아직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나누가 수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순무는 저녁밥상을 차리고서 언제나 나누를 기다렸다. 어쩐지 나누에겐 그것이 기특하게 다가왔다. 겨우 두시간이지만 그동안에 오늘 뭘 차려먹을지, 나누가 몇시에 올지 가늠하는 모습들을 상상하면 귀여웠던 것이다.

좁은 공간에서 함께 보내자 그동안 각자의 방에서 지내느라 몰랐던 버릇들도 알게 되었다. 같은 지붕 아래 살았건만 처음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서로를 좀 더 배려하게 만들었고 신경쓰이도록 했다.

그렇게 부대끼며 지내게 되자 순무는 나누를 완전히 용서하기로 했다. 비록 몸에 남은 흉터처럼 나누가 순무에게 저지른 과거는 지울 수 없겠지만 때때로 다 나은 상처를 반추하며 나아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삶은 계속 되어야 하니까.

더욱이 나누네 집이라는 공간은 갈 곳 없는 순무가 벗어나지 못하고 나누가 순무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그 집을 나온다는 것은 곧 나누가 순무를 지배할 수 없게 됨 + 순무는 제한을 벗어남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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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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