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네가 내리고

1월의 사계

채형원 × 유기현

감정 조각 by 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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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현아, 나 이번에 졸전에 올리고 싶은 사진 중에 너 찍은 거 있는데 올려도 돼?

허락을 해줬으면, 적어도 뭔지는 보여줘야 할 거 아냐. 어떤 사진인지 궁금해서 보여달라고 말하기를 여러 번. 그때마다 멋쩍은 듯 머리만 긁적이던 형원은 와서 직접 보라는 말만 반복했다. 졸전이니까 엽사 같은 걸 올릴 리는 없을 테고 애초에 그런 공사 구분도 못 하는 바보도 아니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찍었는데 안 보여준 게 있었다고? 형원은 정말 조그맣더라도 사진에 기현이 찍혔으면 무조건 찍혔다고 보고하는 게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매섭게 부라리며 이상하게 나왔으면 넌 죽은 목숨이라는 으름장에는 또 너가 제일 좋아할걸. 하고 웃은 형원이 인상 풀라는 듯 기현의 눈가에 촉. 촉. 입을 맞춰댔다. 그래서 전시회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기현의 궁금증은 더 커져만 갔고, 이윽고 당일이 되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 기현이 형 오랜만이에요. 요즘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요?”

“이따가 형원이랑 약속도 있고. 겸사겸사? 그나저나 너 눈이 좀 퀭하다?”

“아, 형. 말도 마요. 사진 셀렉하는 것부터가 고난이더라고요. 진짜 눈알 빠지는 줄. 형원이 형 어디 잠깐 불려 갔는데. 찾아올까요?”

“괜찮아. 내가 뭐 애도 아니고. 돌아다니다 보면 보이겠지. 나도 좀 둘러봐야겠다. 그럼 며칠만 더 고생해라. 수고하고.”

첫 만남부터 카메라를 들고 있던 형원은 아니나 다를까 사진학과였고 동아리엔 형원과 같은 과인 사람들이 꽤 많았었다. 형원보다 한 학번 아래지만 어쩌다 보니 같은 학기에 졸업하게 된 후배와 인사를 마친 기현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시회장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학생들도 눈에 들어왔는데, 피곤한 기색을 비치다가도 한순간에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을 목도한 기현은 학생에서 작가로 변하는 순간이 이런 건가 싶었다.

채형원 거는 어딨으려나. 다른 작품들을 더 감상하고 싶은데 어딘가에 걸려 있을 제 모습이 너무 궁금했다. 벽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발을 옮기는데 문득 한쪽 구석에 우뚝 솟아있는 동그란 뒤통수를 본 기현이 단번에 어. 채형원이다.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이미 누군가와 같이 있는 형원을 확인한 기현이 발을 멈췄다.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분인 거로 보아 교수님이지 않을까, 짐작한 기현이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리며 제가 멈춘 자리 바로 옆 벽에 걸린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놀이터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장면이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누가 앉았다 갔는지 그네에만 얕게 눈이 쌓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만 있는 것 같은데 새하얀 눈이 반사판 역할을 했는지 밤인데도 무척 밝아 보여서 확실히 찍는 사람 기술이 중요하구나. 생각한 기현이 발을 살짝 옆으로 옮겨 다음 사진을 눈에 담았다.

다음 장면은 다람쥐를 손으로 톡 건드리고 있는 게 담겨있었다. 와, 저걸 어떻게 찍었지? 사실 따지고 보면 다람쥐가 사람 손을 타고 있다는 게 더 중요한 건데 기현은 본인부터가 동물들이 잘 따르는 편이라 그런 건 별로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그 장면을 포착했다는 게 더 중요했다. 진짜 능력자네. 감탄하며 고개까지 끄덕거린 기현이 홀린 듯이 또 옆으로 넘어갔다.

세 번째까지 보고 나서야 기현은 이 작가의 주제가 사계절이라는 걸 눈치챘다. 바다를 담은 저 장면은 일반적으로 많이 담는 바다와는 사뭇 다른 결이었다. 보통은 윤슬이라든가, 파도치는 거라든가, 지평선 같은 자연적인 모습이거나… 아니면 신나게 놀고 있는 사람이 담기지 않던가? 이 여름은, 그보다는 아주… 평화롭달까. 성격이 느긋한 사람인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던 기현은 문득 이 장면의 초점이 바다가 아닌 파라솔 아래 펼쳐진 돗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맞춰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장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것도.

……? 기현이 고개를 돌려 겨울을 다시 눈에 담았다. 눈이 쌓여있어서 몰랐는데 그 겨울의 놀이터는 얼마 전 퀭한 몰골로 재회의 순간을 맞이했던 그곳이었다.

시선이 다시 옆으로 이동해 가을을 눈에 담으면, 다람쥐에 맞춰진 초점 뒤로 흐릿하게 익숙한 하늘색의 물체가 보였다. 기현이 제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뒤집으니 사진 속과 흡사한 하늘색 케이스가 보였다.

다시금 이동한 시선에 여름이 들어오면, 돗자리에 앉은 사람은 기현의 눈에 익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저거 채형원이 사이즈 잘못 왔는데 교환하기 귀찮다 해서 뺏어온 건데. 이런 건 또 언제 찍었대. 근데 이거 가지고 허락까지 받을 일인가? 심각하게 초상권 침해당한 것도 아니라 별 감흥이 없었다.

봄이면 보통 벚꽃 아닌가. 피크닉이라든지. 화사한 느낌이 연상됨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기현의 눈에 들어온 봄은 아니나 다를까 벚꽃 아래 서 있는 인영이었다. 조금 다른 건 이번엔 모델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온다는 점? 손도 찍고, 뒷모습도 찍고, 옆모습도 찍고. 몰래 많이도 찍어놨네. 오늘 저녁은 꼭 모델료를 청구하리라 다짐한 기현의 발에 무언가가 채여 바닥에 나뒹굴었다. 비싼 메뉴가 뭐가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머리를 가득 채운 기현이 허리를 숙여 발치에서 멈춘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렌즈 캡이었다. ……?

기현아, 언제 왔어? 자연스럽게 귓가에 내려앉는 맹맹한 목소리가 제가 찾던 사람이 다가왔음을 알렸지만 기현의 머릿속에는 떠오를 듯 말 듯 흐릿한 기억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뭐지? 물음표가 가득한 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기현의 시야에 형원이 들어왔다.

왔으면 부르지. 킁. 많이 기다렸어? 짧은 문장 사이에 코까지 삼키는 소리가 들리자 가려진 기억이 떠오를락, 말락, 애매하게 선명해졌다. 윤곽이 얼추 잡힌 장면에 기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제 앞에 있던 사진을 눈에 담았다.

…어? 사진 속 제 모습을 다시 확인하자 머릿속에 그려지는 형원과의 첫 만남에 그제야 아까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은 기현이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왜? 이상한 거 있어?”

“너… 이거. 우리 처음 본 날 아니야?”

“어. 기억하네? 응. 그래서 올려도 되냐고 물어본 건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말을 정리하느라 입술만 달싹이던 기현의 머릿속에 얼마 전 형원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난 너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널 좋아하지 않은 날이 없어.

그게 진짜 그런 거였냐고. 얼이 빠져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면 입술을 앙다물며 눈동자를 도륵, 굴리던 형원이 곧 예와 같이 해사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기현아. 난 내 렌즈에 너를 담을 때 너무 행복해. 채형원의 사진은, 유기현이라는 피사체가 선물한 감정이 담길 때가 제일 예뻐.”

“…아부 떨면 누가 봐줄 줄 알아?”

“어, 사실 진짜 헤어지게 되면 전부 지우려고 했었는데… 음. 너가 허락도 해줬고. 반응도 되게 좋은 편인데. 그러니까 화 풀면 안 되나아.”

뾰로통한 낯이 영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입술을 우물거리던 형원이 카메라를 톡톡 두드리더니 사진 한 장을 띄워 기현에게 가져갔다. 너 진짜 예쁜데. 애처로운 눈빛은 덤이었다.

액정 속에는 꽃다발을 든 채로 형원의 사진을 감상하고 있는 기현이 보였다. 형원이 좋아하는 계란꽃이 기현의 품 안에 소담스럽게 담겨있었다. 덕분에 눈빛은 조금 누그러졌는데 여전히 비죽거리는 입술을 본 형원이 꽃다발을 들고 있던 기현의 손목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나 사진 찍어주라.”

“갑자기 웬 사진이야. 나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라고?”

“아니이, 그런 의미 아닌 거 알잖아. 그냥 사진 말고. 너가 담은 나. 유기현이 채형원에게 느낀 감정.”

그리 말하며 꽃다발을 가져가고 카메라를 안겨준 형원이 제 사계의 옆에 자리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형원이 덧붙이는 문장은 언제나 기현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결국 형원의 카메라를 소중히 안아 든 기현이 렌즈 안에 담긴 제 피사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카메라 뒤로 가려진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것을 본 형원이 렌즈 너머로 자신을 담은 눈을 마주 보며 기현이 좋아하는 미소를 지었다. 봄볕을 닮아 따스함이 담긴 미소.

찍는다. 하나, 둘, 셋.

채형원, <1월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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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담은 나만의 사계.

내 사계에 당신을 담았으니,

당신의 사계에도 내가 담겼으면.


이거 쓰다가 웰라쥬 까먹고 놓칠 뻔 했어요............ 모바일 가독성 체크 좀 하려고 중간에 임시저장하고 폰으로 보다가 탐라에 웰라쥬 보고 깜짝 놀라서 부랴부랴 결제한 게 12시 38분..... 후기도 아니고 주저리부터 해서 죄송합니다...😂


하편으로 쓰던 건데 분량도 있고 시점 문제로 외전으로 올리려고 끊었어요. 그 말인즉슨..... 거의 26일부터 손에 안 잡혔단 말이네요. 너무 안 써져서 중간에 다른 것도 좀 써봤었는데 그것도 막혀서 다시 이리로 돌아왔습니다. 🥲 박수 칠 때 떠나라지만..... 이 뒤에 뭘 더 써볼지 이대로 끝낼지 좀 고민 중입니다 🤔 쓰면 형원이 시점의 과거 회상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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