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네가 내리고

잠 못 드는 밤 네가 내리고 下

채형원 × 유기현

감정 조각 by 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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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 내 등장하는 인물 및 배경 등은 모두 실제와 무관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최근 들어 통 잠을 못 잤던 기현은 풋풋한 과거가 선사하는 안정감에 첫 만남의 회상이 끝나자마자 잠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잠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그간의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순식간이어서, 나중에 잠에서 깨어난다면 깊은 한숨이 이어질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사실, 그 단잠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 했지만 말이다.

 

Rrrrr― 당장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듯 세차게 울리는 소리에 늦잠이라도 잔 줄 알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기현이 소리의 근원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햇빛은 고사하고 여명도, 새벽 어스름의 눅눅한 검푸른 빛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오직 휴대폰만이 홀로 빛을 내뿜으며 시끄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놀랐던 감정도 잠시, 깊은 빡침이 끓어오르는 걸 느낀 기현이 어떤 새낀지 내용이나 들어보고 조져야겠다고 생각하며 발신자를 확인하다가 눈에 들어온 익숙한 번호에 빠르게 표정을 굳혔다.

 

애써 연락처에서 지워봤지만 지웠어도 기억에서 지워질 리는 없는 열한 자리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풋풋한 추억으로 오랜만의 단잠에 취했던 기현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들이닥친 폭풍우에 괜스레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끽해봐야 1분이 고작인 전화벨의 텀에서 1초가 1시간인 듯 한참을 고민하던 기현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왜. 그래봤자 잠겼던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지만 말이다.

 

 

…기, 현아.

“……너 우냐?”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아주 심각하게 맹맹해서 누가 들어도 물기 가득 어린 축축함을 담고 있었다. 단순한 코막힘이 아니라 한바탕 쏟아낸 목소리가 들리자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만 깜빡거리던 기현이 이내 이 어색한 통화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질질 짜지 말고 용건이나 얘기해. 오밤중에 잠도 안 자고 왜 울면서 전화질이야.”

잠깐만, 잠깐… 잠깐이면 되니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방금 오밤중이라 한 거 까먹었냐? 왜 네 맘대로야? 난 할 얘기 없,”

맘대로인 건 너잖아.

“…….”

맘대로 나가고 맘대로 연락 안 하고 맘대로 끝내버린 건 너가 먼저였잖아.

“…야,”

그러니까. 이번엔, 내 맘대로 좀, 보게 해 주라. …제발, 기현아.

 

 

 

 

 


 

 

 

 

  

결국 기현은 오밤중에 잠도 안 자고 형원과 제 자취방 중간쯤의 놀이터 그네에 제 발로 가 앉아 있었다. 맘대로, 아니, 제멋대로 끝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형원이 싫어져서 헤어지자 한 건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원을 향한 마음은 여전히 애정을 담고 있었으나 그와 별개로 의중을 알 수 없는 형원의 행동이 기현의 머릿속에서 너무 많은 가설을 동반한 탓에 지쳤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분명 연애를 하고 있는 건 맞는데, 얘가 나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분명 응당한 것의 부류인데, 뭐랄까. 표면적인 느낌이었다. 형원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연인이더라도 이럴 것만 같았다. 유기현, 이라서 담긴 애정이라기보다는 연인이라는 단어에서 생성된 것 같았달까.

 

…뭐, 형원의 마음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현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 결론을 내렸기에 이별을 고했다. 제가 느낀 바를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이미 끝을 말한 마당에 너무 구질구질해지는 기분이라 그냥 그렇게 끝냈다.

 

사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도 불편했다. 얼굴 보면 제 마음이 흔들릴까 봐,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얘가 왜 그렇게 이별을 고했냐고 질문하면 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가뜩이나 제가 특별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는 것도 저만 얘를 좋아하는 것 같고 안달나는 것 같아서 짜증 났는데 그걸 털어놓기는 죽어도 싫었다. 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 알량한 이유일지라도 기현은 그랬다.

 

이 놀이터는 굳이 따지면 형원보다는 기현에게 좀 더 가까운 거리였고, 수도 없이 다녔던 길이기에 도착시간은 얼추 맞출 수 있었지만 기현은 부러 전화를 끊자마자 나와서 형원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 일교차가 생긴 덕에 살짝 서늘해진 밤공기를 맡으면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애꿎은 입술만 짓이기며 한숨을 쉬고 있을 무렵,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기현은 순간 이게 맞나, 싶은 눈을 했다.

 

작은 머리 덕분에 더 커 보이는 안경테와 두꺼운 렌즈가 앞은 보이나 싶을 정도로 퉁퉁 부은 눈 위를 겨우 덮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부터 튀어나오려 한 기현이 속으로 온갖 슬픈 생각을 하며 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왜 불렀냐며 말을 꺼내려 했는데 형원이 더 빨랐다.

 

 

“나 너 안 좋아한 적 없어.”

“…어?”

“화나서 그랬다고 생각했어. 괜히 연락했다가 가라앉히던 거 더 들쑤시기만 할까 봐 기다렸어. 왜 화가 났을까, 왜 좋아하는 게 맞냐고 물어봤을까, 내 대답은 왜,”

 

 

왜, 너한테 닿지 못 했을까……. 왜, 라는 단어가 반복될 때마다 잔뜩 메여오던 목에 물기가 차오르자 겨우 문장을 끝맺은 형원이 차마 시선은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만 쳐다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너가 정말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만하자고 했던 거면, 나 그만할 수 있어. 그만하기 싫은데 안 된다고 매달려서 너가 날 더 싫어하게 되면 난 그게 더 싫어. 근데, 그래도, 이건 전하고 싶었어.”

“……안 좋아한 적 없다고?”

“난 너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널 좋아하지 않은 날이 없어. 내가 느려서 답답해하면서도 맞춰주려고 하는 너가 좋았고, 허전하던 내 공간에 하나하나 들어오는 네 흔적이 좋았고, 유기현이라는 피사체를 내 사진에 담을 수 있게 됐을 때 난 너무 행복했어.”

“…….”

“내 표현이 서투르고 미미해서 널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했으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기현아. 계속 같은 말이긴 한데, 난, 정말… 정말 네가 너무 좋아.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하고, 나중에 내 마음이 너를 향하지 않더라도 난 너를 좋아할 거야. 너는, 유기현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길게 이어지던 말이 마침표를 찍자 꾹꾹 눌러 막아내던 둑이 터지듯 감정이 북받쳐 오른 형원이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만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 고백을 듣고 있던 기현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띵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따지고 보면 말마따나 표현이 서투르고 미미한 쟤 잘못이 맞긴 한 데. 그렇긴 한데…. 어떻게 보면 풀어볼 생각도 없이 선부터 그어버린 제 잘못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눈에 들어온 형원의 행색에 말문이 막혔다. 퉁퉁 부은 눈이 너무 강렬해서 알아채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급히 뛰어온 건지 머리카락이 죄다 날려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밑으로 내리면 그래도 신발은 제대로 신고 왔…지 않았다. 나름 노력은 한 것 같은데 올블랙의 왼쪽 슬리퍼와 밑창만 화이트가 섞인 오른쪽 슬리퍼가 각각 반대편 발에 신겨져 있었다.

 

이건 근본적으로 사람마다 성향이 다 다른 건 당연한 건데 그 생각을 안 하고 성에 안 차니 쟤는 나 안 좋아하나 보다. 하고 단정 지은 제 잘못이 분명했다. 지고 싶지 않아서 예고 없이 마침표를 찍어버렸던 기현은 결국 이 관계에 이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자 허. 짧게 탄식하며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잔뜩 굳은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계속 뒤로 돌리고 있던 탓에 뒷목이 뻐근하다는 걸 깨달은 기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바로 했다. 그 몸짓을 이젠 쳐다보기도 싫다는 의미로 해석한 형원이 정말 끝났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며 돌아가려던 형원이 아. 하고 들리는 작은 비명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잔뜩 긴장했던 탓에 아예 뻣뻣하게 굳은 목에 담이 걸린 기현이 아이씨…. 작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구기는데 목에 닿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면 줄곧 담이 걸리는 탓에 시험 기간마다 기현의 담을 풀어주는 게 습관이었던 형원이 으레 그러했듯 기현의 뒷목을 살살 주무르기 시작했다. 사실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인 거라 형원도 당황했지만 기현도 마찬가지였다. 아씨. 쪽팔려.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데 또 그 익숙한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서서히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기현은 제 목을 주무르고 있는 형원의 표정이 궁금했다. 뭐라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이던 기현이 담이 완전히 풀리자 제 목에 올려져 있는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형원아.”

“응.”

“나도 너 안 좋아한 적 없어.”

“응, 알아. 그래서 더 미안,”

“지금도 너 안 좋아하지 않아.”

“……어?”

“좋아해.”

“어, 어?”

“내가 뭘 말하든 다 괜찮다 하고, 뭐든 다 나한테 맞추고, 자기한테는 둔하면서 내 일에는 하나하나 다 반응하면서 나 챙겨주는 게 좋았어. 그래서 고백했어. 네가 받아줘서 더 좋았는데 사귀고 나서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거 같았어. 좀 더 자주 만나는 거 빼고는 바뀐 게 없는 거 같았어. 그냥 이름만 애인으로 바뀐 거 같았어. 나만 너 좋아하는 거 같고 나만 안달나는 거 같은데 그걸 확인받기 싫었어. 그냥 그게 지는 거 같았어. 지기 싫어서 맘대로, 아니, 멋대로 굴었어.”

“기현, 어, 기현아. 그러니까.”

“제대로 말해보지도 않고 멋대로 단정 지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아직도 너 좋아해. 너 오자마자 바닥만 봐서 모르는 거 같은데 나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제대로 잔 날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살도 좀 빠졌어. 그냥 일상에서 너 하나 빠진 건데 내 얼이 빠지더라.”

 

 

그제야 상체를 숙여 기현의 몰골을 확인한 형원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뭘 놀라고 있어. 야, 너 지금 눈 부어서 개구리야. 머리는 산발이고 신발은 짝짝이에 그걸 또 반대로 신고 왔어.”

“어어? 어… 그러네.”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 뒤늦게 자각한 형원을 보던 기현이 그제야 꾹 눌러뒀던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누가 봐도 잔뜩 운 얼굴이지만 또 울상을 짓던 형원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작게 말했다.

 

기현아, 그러면 우리…. 말이 길게 이어지지 못한 채 끊겼다. 촉. 소리를 내며 짧게 맞닿았다 떨어지는 감촉 때문이었다.

 

 

“너 신발 짝짝이니까 너네 집으로 가자.”

“어, 어…. 나 지금 방에 불 안 들어오는데. 고장 났어.”

“…네가 어둠의 자식이냐? 고쳐줄 테니까 가자. 어차피 내일 둘 다 공강이잖아.”

 

 

그리고 제 손 위에 겹쳐 있던 손이 머리로 올라와 잔뜩 날린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자 찡해져 오는 마음에 코까지 한 번 삼킨 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 제대로 바꿔 신고. 재차 고개를 끄덕이며 방향에 맞게 바꿔 신자 흡족한 듯 한 번 더 입을 맞춘 기현이 몸을 일으켜 제 자취방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원래 사랑엔 이기고 지는 게 없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삐걱거리니, 서로 맞춰가는 게 중요하고. 흔들리던 저울이 다시 평화를 되찾자 올 때와는 다르게 가벼워진 발걸음이 기분 좋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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