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네가 내리고

잠 못 드는 밤 네가 내리고 中

채형원 × 유기현

감정 조각 by 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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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 내 등장하는 인물 및 배경 등은 모두 실제와 무관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대충 어림잡아 보름은 됐던가. 기현이라고 그리 멀쩡한 꼴은 아니었던지라, 피곤으로 얼룩진 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야, 채형원. 곧이어 세상 무해한 듯 순한 눈이 제게로 돌아왔다. 너 나 좋아하는 거 맞냐? 기현의 말에 느리게 끔뻑거리던 눈이 살풋 접히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형원을 불렀던 시점부터 유순한 분위기는 아니었던 기현의 얼굴이 점차 굳어지더니 이내 한숨으로 이어졌다. 형원아. 응? 그만하자, 우리.

 

자리를 박차고 나온 후로 지금까지 돌아오는 연락은 없었다. 잡아주길 바랐던 건지, 그저 그런 이별로 치부하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제 상태를 보면 아마 전자에 가까울 거라는 결론을 내린 기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그 만남의 시작은 약 2년 전 봄으로 돌아간다. 기현과 친하게 지내던 남자 동기는 자퇴를, 혹은 그보다 늦게 입대해 여전히 부대 안에 갇혀 있었다. 여자 동기들은 이미 윗 학년으로 올라가 버려 기현은 말 그대로 ‘이번에 전역하고 복학한 선배’가 되어 있었다.

 

아주 아웃사이더처럼 다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아주 친한 사람도 없던 기현은 대학 생활을 이리 무료하게 보내긴 아깝다고 생각해 동아리 홍보 게시판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게시판을 들여다보기를 며칠, 이제 내려갈 것도 내려가고, 올라올 것도 거진 올라온 것 같은데 썩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계속 보고 있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고. 결국 입술만 비쭉 내민 기현이 습관적으로 다음 강의를 확인하려다 수강 신청에 실패하는 바람에 애매하게 붕 뜬 시간표를 떠올렸다.

 

…되는 게 없어, 되는 게. 밀려오는 짜증을 애써 꾹꾹 눌러내며 밖으로 걸음을 옮긴 기현이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알차게 보냈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했다.

 

바쁘게 굴러가는 머리와 대비되는 느린 발걸음이 갈 곳 없이 떠돌았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정문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다. 집에 갈까…. 속으로 그리 질문을 던지며 잠시 고민하던 기현이 그에 따르는 결과가 너무 뻔해 고개를 내저었다. 자취방과의 거리는 기껏해야 10분 내외를 웃돌았지만 이 답 없는 오르막길을 다시 오르기도 싫거니와 집에 들어가는 순간 그대로 자체 휴강을 선언할 것 같아서였다.

 

허송세월만 하는 것 같아서 동아리도 들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자체 휴강을 때려버리면 시작도 전에 다 말아먹는 기분이랄까. 어차피 갈 곳도 없으니 차라리 다음 강의랑 가까운 곳에서 시간이나 때우자 생각한 기현의 발이 다시 학생회관 쪽으로 돌려졌다.

 

먹구름 낀 기현의 마음과 달리 하늘은 구름마저 그린 듯 예쁘게 펼쳐져 있었고 문득 길가에 떨어진 연분홍빛 꽃잎이 보이자 휴대폰에서 시선을 뗀 기현의 시야에 길목을 따라 길게 이어진 벚꽃이 들어왔다.

 

…예쁘긴 하네. 그렇게 얼마간을 멍하니 있었을까. 꽃의 향연에 취해 멈춰있던 기현의 신발 앞코에 무언가가 채여 바닥에 나뒹굴었다.

 

덕분에 정신이 든 기현이 허리를 숙여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뭐야, 이건? 이게 무얼까 고민하던 기현이 카메라 렌즈 캡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제 앞에 우뚝 선 검은 인영에 주인인가 보다 싶어 엉거주춤 서 있던 몸을 일으켰다.

 

몸을 세우는 도중에 들린 목소리는 코감기라도 걸렸는지 맹맹한 것이 말하던 중에 코까지 한 번 삼켰다. 근데 막힌 것치고는 톤이 되게 중저음이다.

 

저어, 그거, 킁. 제 거라서요. 주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키가 상당히 큰지 기현이 몸을 바로 세우고도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봐야 했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캡의 주인은 딱 봐도 ‘잘생겼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비주얼의 남자였다.

 

뭐랄까. 머리도, 코도, 입술도 다 동글동글한데 저 조막만 한 얼굴에 저 이목구비가 어떻게 다 들어갔을까 싶고, 온통 검은 것으로 둘둘 감쌌는데 키는 또 전봇대처럼 길쭉하고, 또…. 하여튼 뭔가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 없이 다 갖고 태어났다는 게 맞는 말 같았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주운 물건을 넘겨주던 기현의 눈에 남자의 손에 들린 동아리 홍보 포스터가 들어왔다. 포스터를 빤히 쳐다보니 막 붙이러 가던 길에 벚꽃이 너무 예뻐서 잠시 찍으려다가 캡을 떨어뜨렸다는 정보를 알아낸 기현이 휴대폰 밖에 없는데 카메라 없어도 동아리에 들어가도 되냐 질문했다. 당연하다는 답변 뒤에 덧붙은 문장에 기현의 마음이 동했다.

 

사진은 그 순간에 느낀 감정을 담는 거니까요. 장비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실 물건을 건넴과 동시에 흩날리기 시작한 벚꽃과 함께 눈에 담은 해사한 미소도 한몫했었다는 걸 기현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동그란데 차갑게 보이고, 건네는 말과 미소는 봄볕 같았다. 그게 형원에 대한 기현의 첫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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