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와일라이트(twilight) 1
개와 늑대의 시간
황혼(twilight)
프랑스어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이 시간에 저 멀리서 달려오는 동물이 자신이 키우는 개인지,
자신을 해치려는 늑대인지, 분간이 안 간다고 하여 이렇게 불렸다.
'... 이로써 한신 리테일의 몰락 원인은 방만한 경영과 오너 리스크 때문이라는 것이 보다 명확해 졌습니다... '
한신 계열사로서는 벌써 다섯 번째로, 한신 리테일이 결국 최종부도 처리되었다. 도윤의 부친인 안주익의 사진이 미디어를 통해 비치고 있다. 도윤이 태어나기도 전인 젊은 시절의 사진인 듯, 인자하게 웃고 있는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는 알파 남성의 매력을 드러냈다. 비록 '오너 리스크'라는 단어에서 예의 매력적인 사진이 등장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그런 안주익의 사진 위로 각종 포트폴리오로 보이는 cg 효과가 쌓여, 종래에는 그의 얼굴을 가려 버린다. 급격하게 기우는 그룹의 명운이 여기에 달린 것처럼.
그룹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의 만류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행운을 바라는 심정으로 내린 결정들. 그것도 차명으로 투자한 주식, 선물 옵션 등이 '안주익 한신 그룹 총수'의 소유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중이었다.
망해가는 한신가의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에겐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이 한신에게 불친절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일 테니 말이다. 언론이든 국가든 소위 기득권층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한신이 생긴 이래로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늘 기득권인 한신에게 친절했다. 단순히 배를 곯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이문을 남기던 한신의 선대 창시자인 안선형을, 교과서에 소개될 법한 위인으로 둔갑시켜준 것도 그들이었고, 뚜렷한 치적이 없는 안주익에게도 무궁훈장을 수여하자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입 안의 혀처럼 굴던 많은 이들 중 무저갱 속으로 끝을 모르고 까마득히 가라앉는 한신을 안타까워 하며 구하고자 나서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나락의 끝에 서 있는 한신을 마지막까지 뽑아먹으려 혈안이 된 매체들 덕분에, 가뜩이나 두문불출하며 할 일이 마뜩잖아 종일 미디어만 끼고 있는 한신 오너의 심기만 자극할 뿐이다. 덕분에 도윤은 최근 그가 한신 전자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때보다도 더 자주 본가의 호출을 받고 있었다.
'.... 독한 것, 꼭 제 어미처럼 그 끝을 다 보여 줬어야만 했니?...'
없는 시간을 쪼개어 기껏 갔더니 집 안에는 발 조차도 못 붙였다. 대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벼락 한 동이만이 도윤을 반겼는데, 약이 잔뜩 오른 새어머니 김란의 물벼락 선물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일방적인 덕담이 내렸다. 한신의 안주인이자 한신의 여제라고 불리는 사람에게서 나올만한 수준의 문장은 아니었지만. 도윤은 반항하는 것이 귀찮아 그저 감내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스케일이 생각하는 수준 이상의 것일 테니 그 대가라고, 그저 좋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물벼락을 맞고도 기분이 좋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신은 그렇게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움직임은 확실했고, 그 과정에서 도윤은 나름의 전리품도 얻었다. 끝도 없이 추락하는 한신과는 달리 명한은 재계 순위가 크게 올라 소위 '재벌'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본부장으로 취임한 도하의 활약이 그만큼 대단했다. 애초에 왜 그이를 별 볼 일 없는 한직으로 돌렸는지 '명한' 회장의 총기가 의심스러울 만큼.
강도하가 취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과감하게 버린다.
도윤이 제 손으로 한신을 도륙 내고자 결심했을 때 정한 대원칙이었다. 명한을 키우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신을 무너트리는 것만큼은 강도하가 자신의 손으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다. 지금 도하는 도윤의 의도대로, 그가 그어놓은 투명한 유도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한신 건설'의 특허 기술을 손쉽게 얻은 산업 스파이가 그 이득을 목적으로 제3 국과 부적절한 계약을 맺었지만, 핵심 기술은 왜인지 '명한 공영'의 손에 들어가 있다. 이제 웬만큼 멍청이가 아니라면 알게 된다. 한신 원톱 체제라고 지칭해도 과하지 않았던 국내 경제에 지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차근차근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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