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lling Down 1
* 나누 x 젊은 순무
어김없이 비가 우산을 치고 내리떨어져가는 소리를 들으며, 찰박이는 길을 따라 걸은 뒤 파출소 문을 열면 청년은 화들짝 이쪽을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돌린 얼굴은 세워진 무릎에 맞닿아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나누는 파출소의 출입구에서 우산을 접은 뒤에 빗물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그것을 우산꽂이에 퉁, 꽂아놓고서 파출소 문을 닫는다. 관리 하난 끝내주게 해서 비가 오는 습한 기후에도 늙은이와 나옹들이라는 구린내는 나지 않는다. 진흙이 묻어버린 싸구려 외출용 신발을 벗고 늘 신는 낡은 슬리퍼로 갈아신은 후에 외출용 신발을 손에 들었다. 터덜터덜 걸어서 파출소 제일 안쪽에 위치한 파티션을 밀어내고 그 너머의 좁은 다용도실에 휙 던진다. 나중에 마음 내키면-비가 그치면 씻을 생각이다.
장난꾸러기 나옹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재빨리 다용도실에서 나와 파티션을 원위치로 돌린다. 그리고는 여태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업무용 책상 위에 올려둔다. 한 번 곁눈질로 보면 청년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는 거기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것을 무시한 나누는 봉투를 뒤적이며 내용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온 것들은 파티션 너머에 딸린 비좁은 취사실의 냉장고로, 찬장으로, 다시 나와 업무용 책상 위로 향한다. 간식거리를 컴퓨터 옆에 쌓아올려 정리하고는 하나를 뜯어먹으며 아직도 고개숙이고 있는 청년을 바라본다. 그의 까만 머리칼이 수북한 정수리만이 보인다.
잠깐동안 서서 그러고 있다가 비오는 날 멀리 식료품을 사러 다녀와서 조금 서늘해짐을 느낀 나누는 취사실로 향한다. 매번 파티션을 옮기는 일은 아주 귀찮지만 나옹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요 호기심많은 녀석들이 파티션 너머의 다용도실, 취사실, 욕실, 침실을 놀이터삼아 엉망으로 만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전자에 물을 채운 뒤 군데군데 때가 낀 2구짜리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작은 벽붙이 찬장에서 촌스러운 누런색 머그잔을 두 개 꺼내고 한쪽에는 그랑블루마운틴 가루를 넣고, 한쪽에는 고민하다가 에나코코아 가루를 넣었다. 언제나 이곳을 찾아오던 그 녀석 생각이 나서 피식 웃어본다.
그러나 그 녀석, 구즈마는 새로이 섬기게 된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멜레멜레섬의 본가로 돌아간 지 꽤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현재는 우두머리가 없어지자 따르던 녀석들도 뿔뿔이 흩어져 포 마을은 텅텅 비었고 이 낡은 파출소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도 없는 상태였다. 가끔 밤에 포켓몬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그마저도 반가울 정도다.
마을도 비었고 찾아오는 이들도 없고 주변은 온통 어둠인 이곳에서 혼자 느긋하게 지내던 나누는 청년을 만났다. 일주일 전즈음, 산책삼아 아무도 없는 화원을 거닐던 그는 자신의 눈동자와 같은 붉은색 꽃들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서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소리의 정체는 사람이었고 땅바닥에 쓰러져있었기에 활짝 핀 꽃들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흐느끼던 누군가는 그 사이를 헤집고 나타난 나누를 보자마자 도움을 요청하듯 자신의 가녀린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손을 붙잡고서 손의 주인인 앳된 청년을 겨우 일으켜세운 나누는 그를 끌고 우선은 파출소에 돌아가서 소파에 앉혔다.
이야기는 뒷전이고 응급처치가 먼저였다. 나누는 청년이 아직 의식이 있고 사물 구분도 할 줄 알고 더듬거리지만 말을 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을 보고는 따뜻하게 데운 물을 먹였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청년은 반팔을 입고 있었기에 팔은 흙과 피가 묻어서 꽤 쓰라리게 보였다. 얼굴도 흙이 묻어있었고 살짝 까인 채로 부어올라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과 찢어진 눈매, 갸름한 얼굴형은 틀림없이 알로라 사람들과 다른 것이었다.
나누는 따뜻한 물을 다 마신 청년에게 공용어로 배가 고픈지를 물었으나 그는 말귀를 알아듣고 고개를 저었다. 조심스레 청년을 소파에 눕힌 뒤 수건을 뜨끈한 물에 적셔왔다. 그것으로 청년의 지저분해진 얼굴과 목, 흙 묻은 까만 머리칼, 팔을 닦아주었다. 청년은 편안해진 것인지 그대로 눈을 감고 있다가 잠들어버렸다. 죽은 건 아닐까? 나누는 청년의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심장박동에 안심했다. 이 어린 친구는 어쩌다 이런 상태가 된 걸까.
한동안 자고 일어난 청년은 부스스한 상태로 눈을 뜨고는 벌떡 일어났다. 업무 책상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나옹의 털을 빗겨주던 나누는 털뭉치를 손에 들고 일어나서 청년에게 다가가 몸 상태가 괜찮은지를 물었는데, 도리어 청년은 혼란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꺼낸 말은 나누가 잘 아는 고향 지방의 언어였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뭔가가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다고도 했다.
당황한 나누가 외모로 보나 모국어로 보나 동향사람같아서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면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도 출신도 잊어버려 뭘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게 되자 나누는 한숨을 쉬고 여긴 파출소니 안심하라고, 연락망을 통해 실종신고가 들어와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누가 자기가 뭐하는 사람인지, 이 지방은 어딘지 설명해주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왔다.
우선은 청년이 기운을 차려야했기에 취사실로 가서 속에 부담없는 것으로 간단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청년이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서 천천히 먹는 동안에 나누는 그 옆에 앉아 컴퓨터를 이용해 지방 경찰들끼리만 자료나 소식을 공유하는 인트라넷에 접속하여 전 지방의 실종자 명단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청년과 비슷한 나이와 인상착의를 한 사람들을 추려냈다.
청년이 차려준 밥을 다 먹자 그의 팔을 살펴보고 약을 발라준 뒤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청년을 데리고 욕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청년은 즉시 옷을 벗었다. 요즘 젊은이치곤 몸선이 늘씬하지만 튼튼해보인다고 생각한다. 화원의 흙이 묻어 더러웠기에 자신의 옷을 꺼내놓고서 청년의 옷은 다용도실에 있는 세탁기에 넣었다.
문득 나누는 세탁기 아래로 떨어지는 옷가지들을 보자 무언가가 떠올라 그 자리에 서있었다.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는 도중, 옆의 욕실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용도실에서 고개를 내밀고 그쪽을 보면 청년은 욕실에서 막 나와 알몸인 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다.
잠시 후, 목부분이 늘어진 나누의 옷을 입은 청년의 깨끗해진 피부를 보니 팔과 다리에는 이미 멍이 생겨있었다. 나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것이 떨어졌을 때 생긴 것이라면, 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휴대전화로 아직 멜레멜레에 머무르는 동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남자애를 하나 주웠는데 기억을 잃었고 팔다리에 멍자국이 있어. 당시의 상황 설명과 함께 폴일 가능성을 물어보면 동료들은 정황상 그럴 확률이 높으니 조만간 파출소를 찾아가겠다고 답장해왔다. 나누는 청년이 기운을 완전히 차릴 때까지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청년은 불안에서 벗어나오지 못했다. 나누가 눈앞에 없으면 그를 찾아 파출소 주변을 돌아다니다 아직 익숙치 않은 길을 잃거나 야생포켓몬을 만나 도망치거나 했다. 나누는 청년에게 자긴 어디 멀리 갈 일도 없으니 얌전히 파출소에 있으라고 꾸중을 했고, 나누에게 혼이 난 청년은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나누는 당황해서 청년을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는데 너무나 낯선 이 행위가 한동안 끝나지 않으리란 걸 예감했다.
예감대로 청년은 며칠 후에 나누의 동료들이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자 나누를 찾았고 결국 뭐 하나 제대로 알아낸 것은 없었다. 리라도 폴이었기에 청년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 나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를 보자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누는 리라의 그 표정을 보고 옛날에 여기 알로라에서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의 리라도 지금의 청년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고서 불안에 떨곤 했었다.
그들은 청년을 집에 보내주고 싶어도 쓸 만한 정보가 없었기에 당분간 청년이 제대로 안정을 취할 때까지 놔두기로 했다. 알아내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연락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동료들은 중단했던 업무를 위해 다시 멜레멜레섬으로 돌아갔다.
이후, 청년은 딱히 말썽같은 건 피우진 않았다. 나이 먹을대로 먹은 나누대신 가사를 도와주어 나누는 한결 수월히 지낼 수 있었다. 포 마을이 비어버린 후 이렇게 사람냄새를 가까이서 맡은 게 얼마만인지도 모른다. 청년은 배우는 것도 빨랐다. 열악한 파출소에서의 생활 방식과 더불어 까다로운 나옹들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터득해갔다. 나누는 청년에게서 리라와 같은 가능성을 느꼈다. 지금 그를 괴롭히는 불안과 걱정이 사라진다면 굳건하게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청년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며 자기가 호연지방 출신이라고 말해왔다. 그 말을 들은 나누는 즉시 메모를 했고 다른 건 기억나지 않냐고 물었다. 끙끙대며 머릿속을 헤집는 청년에겐 형제가 없었다. 이름은 순무였다. 이름과 출신을 알면 일이 수월했다. 나누는 연락망에 호연지방에서 순무라는 청년의 실종신고가 있었는지 알아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하고 재차 청년에게서 확인을 받은 나누는 다시 요청을 넣었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신고는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무는 여기에 상처를 받았고 비가 오는 날씨에 맞춰 우울하게 있었다. 위로에 서툰 나누가 순무의 기분이 풀리도록 내버려둔 채 혼자 거리의 식료품점에 다녀온 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순무는 얼마 전과 같이 자리에 없는 나누를 찾아다니지 않게 되어서 돌아오면 얌전하게 파출소에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슬픔에 잠겨있는 모습에 따끈한 머그잔을 내밀면 위로받을 것이 필요했는지 일단은 무릎에 묻었던 고개를 들고는 받아둔다. 별로 생각이 없는 것인지 마시지는 않는다.
"소년. 차근차근 기억날 때까지 여기 있어도 되니까 너무 상심해하진 마."
나누는 어린티가 나지만 확실히 청년의 얼굴을 한 순무를 '소년'이라 부르고 있었다. 일주일동안 그렇게 부르다보니 이제와서 알게 된 이름으로 부르기엔 영 어색했다. 순무도 나누를 '아저씨'라고만 불렀다. 엄연히 파출소의 소장이지만 예를 갖추고 부르면 거리가 먼 것 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순무의 옆에 앉아 그렇게 말해보면 순무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순무는 나누가 준 에나코코아를 한입 머금어본다.
"좀 달아요."
잘 먹지도 않는 것이기에 맛 조절에 실패한 나누는 웃으면서 우유를 더 갖다주겠다고 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누는 우유병을 내려두었고 휴대전화를 보며 휴식을 취한다. 그러자 순무가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손에 든 게 뭐냐고 물었다. 나누는 커피잔을 책상에 올려두고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주었다.
"요즘은 안 가진 사람이 없던데. 나같은 늙은 사람도 잘 쓰더라고."
"전화기 맞아요? 이렇게 얇은데 전화가 된다구요?"
어린 녀석답게 전자기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자 기운을 차린 것 같아 약간 안심이 된 나누는 그가 알고 있는 기능들을 소개해주었다. 순무는 꽤 해맑은 표정을 보이며 거기에 흥미를 가졌다. 조카나 다 큰 손자가 있으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아 즐겁다고 느낀 순간, 나누는 위화감을 감지하고 순무를 쳐다보았다. 순무에게 몇살이냐고 정확한 나이를 물으면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나이였다. 혹시나 싶어 태어난 해도 기억하냐 물으면, 청년이 태어난 해는 나누와 비슷했다. 나누는 아 역시, 라고 생각했다. 눈 앞에서 방긋거리고 있는 순무는 울트라홀을 통해 과거의 호연에서 미래의 알로라로 온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누는 머리가 아파와서 천장을 올려다본다. 거뭇거뭇 먼지 낀 천장처럼 머릿속에서도 골칫거리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 실종신고가 있을 리가 없지. 나누는 순무에게 조심스레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설명을 듣는 순무는 점점 표정이 구겨졌다. 마침내 울상으로 변한 표정을 본 나누는 순무의 손에서 머그잔을 뺏어 책상에 올려둔다. 현실이 주는 두려움에 겁먹은 어깨를 감싸안고서 열심히 위로해준다.
바로 코앞에서 나누를 올려다보는 순무의 눈동자는 이미 촉촉히 젖어있었다. 나누는 행여나 자기가 내쉬는 콧바람때문에 순무가 불편함을 느낄까봐 신경쓰면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순무는 돌아가고 싶다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손바닥을 펴서 순무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는 것뿐이었다.
동료들은 가끔 나누에게 전화를 해서 순무의 상태에 대해 묻거나 했다.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기록해두며 도움이 될 것 같은 짓을 해주는 건 고마웠다. 정작 순무는 본인이 미래로 넘어왔다는 사실때문에 여전히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지만. 나누에게 의지하는 것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파티션 너머의 좁은 방에서도 둘은 들러붙어서 자야만 했다. 나누는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보니 처음엔 누가 옆에서 자는 것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가끔씩 아세로라가 지금보다 몇살 더 어렸을 때 어떻게 돌봐주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 아이는 어려도 이미 다 컸었다. 구즈마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아이는 이미 다 컸어도 어렸다. 하지만 순무는 그 두 아이와 달리 다루기가 힘들었다.
일주일이 지났으니 파출소에서 지내는 고립된 생활 방식이 스며들어도 순무는 여전히 나누의 걱정거리였다. 식료품이나 다른 걸 사러 번화가로 다녀오는 것은 괜찮았으나 업무차 파출소를 오래 비우면 집에 세살짜리 아이를 혼자 둔 것마냥 나누도 신경이 쓰였다. 순무에게도 휴대전화를 하나 장만해줄까, 하고 생각할 정도다. 적어도 연락이 되면 그렇게 굴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무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기억을 잃고 있었고 낯선 곳에서 만신창이 상태인데다 때마침 포 마을도 비어서 화원에는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하고 으스스한 그곳에 포켓몬도 없이 혼자 있으면 누구나 무서울 것이다.
나누는 이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순무를 발견한 것이 자기자신이라 다행이었고 순무가 아무런 탈이 없는 건강한 청년인 것도 다행이었다. 어서 빨리 순무가 불안을 떨쳐버리고 돌아갈 길을 탐색하길 바란다. 설령 그러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누가 살아있는 한 알로라는 그를 품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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